신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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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론(神正論, 신의론(神義論), 변신론(辯神論), 호신론(護神論), 독일어: Theodizee, 프랑스어: théodicée, 영어: theodicy, 고대 그리스어: θεός theós‚ 신‘과 δίκη díke ‚ 의로움‘)은 „ 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이론“을 가리킨다. 이 이론은 신이 전능하면서도 선하다고 한다면 어째서 이 세상에 고통이 존재하는가를 묻는 물음에 대한 다양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신에게 고통을 막을 수 있는 능력("전능")과 의지("선함")가 있다고 해야할텐데 그럼에도 왜 신이 고통을 허용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신정론이라는 개념은 초기 계몽주의자인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 (Gottfried Wilhelm Leibniz)의 저서 '신정론 Theodizee'(원제: Essais de théodicée (1710))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러나 종교적 혹은 종교철학적 질문으로서의 고통에 대한 물음은 이미 고대 문화, 예를 들면 고대 중국, 인도, 수메르, 바빌로니아, 이집트와 이스라엘 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 유명한 예로는 구약성경에 있는 의 이야기가 있다. 고대 그리스의 회의주의 철학에서도 신이 (만약 존재한다면) 실제로 악을 막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주장이 있었고, 이 주장은 일부 더 나아가 불가지론이나 무신론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신의 정당화에 대한 물음은 현대에 특히 홀로코스트라는 끔찍한 사건 이후(소위 아우슈비츠 이후의 신학) 다시금 등장하게 되었다.

목차

문제의식[편집]

이 문제에 관하여 자주 인용되는 함축적인 표현은 다음과 같다:

  신은 악을 극복하고 싶어하는데 그에게 그럴 능력이 없다고 하면,            Entweder will Gott die Übel beseitigen und kann es nicht:
  신이 약하다는 뜻이 되는데 이것은 신에게 맞지 않는 일이다.                Dann ist Gott schwach, was auf ihn nicht zutrifft,
  신이 능력은 있는데 악을 극복하길 원하지 않는다고 하면,                   Oder er kann es und will es nicht:
  신이 악의적이라는 뜻인데 이것도 신과는 거리가 먼 일이다.                 Dann ist Gott missgünstig, was ihm fremd ist,
  신이 악을 극복하길 원하지도 않고 할 능력도 없다고 하면,                  Oder er will es nicht und kann es nicht:
  그렇다면 신은 약할 뿐더러 악의적이기까지 하다, 따라서 신이 아니다.       Dann ist er schwach und missgünstig zugleich, also nicht Gott,
  신에게 합당한대로 그가 악을 극복하고 싶어하며 할 수도 있다고 하면,       Oder er will es und kann es, was allein für Gott ziemt:
  그렇다면 어디에서 악이 오는 것이며 왜 신은 그것을 없애지 않을까?         Woher kommen dann die Übel und warum nimmt er sie nicht hinweg?

이 논증은 라틴어권 아프리카의 수사학자이자 기독교 학자였던 락탄티우스(Lactantius, 약 250년에서 317년)로부터 전승된 것인데, 그는 이 논증이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주장이었다고 적고 있다.[1] 에피쿠로스적인 주장이 아니며 알려지지 않은 회의주의 철학자 - 아마도 아르케실라오스카르네아데스 - 에 의해 쓰여진 표현이라는 설이 있다.[2] 키케로포세이도니오스의 말을 증거로 에피쿠로스가 신들이 무능하다는 이유로 거부했다고 보고한 바 있다고 한다.[3] 회의론자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2세기 경에 이와 유사한, 좀 더 자세한 생각을 전개시켰다. 그는 신이 모든 것을 돌볼 수 있어야 하기에 어떤 악도 존재해서는 안되는데, 그러나 악은 실제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신이 존재하지 않다는 생각을 명시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이런 생각을 내포하고 있었다.[4] 이런 문제의식들에선 유신론적인 신의 관념은 흔들리게 된다.[5]

문제 해결의 단초들과 비판[편집]

신정론의 문제를 몇 가지 가정으로 구성되는 모순으로 재구성해볼 수 있다. 즉,

  • 신은 존재한다.
  • 악은 존재한다.
  •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전능하고 모든 이에게 자비로우며 모든 것을 알고 있다.
  • 신이 전능하고 모든 이에게 자비롭고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그는 악을 막을 것이다.

중요한 악의 영역이 특정하게 지정된다고 해도 이 문제가 본질적으로 변경되지는 않는다. 이렇게 논리를 재구성해보면 통상적으로 적어도 위의 문장 중 하나가 변경되거나 부정되어야만 한다.

다음과 같은 반박이 시도된다.

  • 첫 번째 명제의 경우 존재론적 논증에 나오는 괴델의 증명 이후로는 의미있는 학술적인 논의가 거의 없는 상태이다.
  • 두 번째 명제인 "악은 존재한다." 의 경우, 사람마다 인지하는 '악'이 상충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때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무찌른 사건이 조선군에게는 선이지만, 일본군에게는 악이 일어난 것이다. 결국,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지적된 것 처럼, 절대적인 '정의'나 '악'이 존재한다고 하기 힘든 현대사회에서 2번의 명제는 모호해진다. 누군가가 제시한 '악'이 정말 '악'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면, "악은 존재한다" 라는 명제의 근거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 현존하는 대다수의 종교들은 '상대적 선'인 '보편적 윤리'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 선'을 추구한다. 오히려, 이 '절대적 선'을 추구할수록, 보편적 윤리도 상당부분 증진되며, 자신이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채로 당장 눈에 보이는 윤리문제에 집착하는 것은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 불교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 핵심적인 가르침인 3법인 4성제 등을 보면, 결국 '모든 것이 무상하고, 자신 조차도 지나가는 존재임을 깨닫는 것' 이 목표이며, 이는 속세의 보편적 윤리를 충족시키는 경우가 많으나, 그것을 충족시키는지의 여부가 깨달음의 핵심으로서 추구되는 것은 아니다.
    • 유일신적 신관을 가진 종교들에서도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절대적 선' 인 '신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 '신의 계명'이 항상 세속의 '보편적 윤리'를 충족시키는 것만은 아닌데, 이 차이는 세속인들은 신의 계명을 모르거나 거부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이들의 관점에서는 항상 그 범주가 변해온 '보편적 윤리' 보다는 고대로부터 보존해온 '신의 계명' 을 기초로 한 '절대적 윤리체계'가 더 신뢰할만하다.
    • 이들 종교가 '깨달음' 이나 '신의 계명' 등을 절대시 하며, '보편적 윤리'보다 우선시 한다고 해서, 그들이 법 질서를 부정한다는 것은 아니다. 법과 윤리는 다른 차원의 문제이며, ‘사상’이나 '윤리'의 경우, 같은 법 체계의 구성원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현재 지구상의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인구만 합해도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데, 이런 가치관을 단순히 ‘보편적이지도 않고, 철학적 깊이도 없는 사상’으로 매도하기는 어렵다.
  • 네 번째 명제는 '세 번째 명제가 참이라면 신은 악을 막을 것이다.' 라는 구조로 되어있다. 이 명제는 대부분 종교가 인정하는 다음 주장에 의한 반박이 시도된다.
    • 자유를 빼앗는 것은 악이다. (a)
    • 자유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은 악이다. (b)
    • a 에 의해서, 인간이 어떤 악을 실행하려고 한다고 해서, 그것을 실행하려는 자유의지를 강제적으로 제거하는 일은 악이다. (c)
    • a,b,c 에 의해서, '신이 선하다면, 신은 자유를 빼앗지 않을 것이며, 악에 대한 책임을 물을것이다.' (d)
    • a,b,c 에 의해서, 4번째 명제인 "신이 전능하고 모든 이에게 자비롭고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그는 악을 막을 것이다." 는 성립하지 않는다. 실제로, 대부분의 유신론적 신관을 가진 종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과 '자유'와 '심판'에 대한 명제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정론적 문제를 제기한 철학자들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신정론 문제 제기들도 위의 명제 a, b 의 경우처럼, 각 철학이나 신념의 세부적인 명제에 차이가 나는 데에서 기인한다.
      • 이에 대하여 “자유를 빼앗는 것이 악이라는 주장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 종교는 없다. 그렇게 따지면 경찰이 범죄 시도를 미리 알아내서 막는 것도, 넓게는 타인의 행위에 개입하는 모든 행위를 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유를 뺏음으로서의 악보다 그것의 실행으로 발생하는 악이 크다면 막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 행위의 책임을 문다고 해도 악을 행한 이들이 모두 현세에서 정당한 대가를 치르지도 않으며, 사후에 처벌하는 것은 현세를 바르게 이끄는 것과는 무관하다. 또한 악을 막는 방법에 무조건 자유의지를 제거하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능한 존재라면 악을 행하는 과정에서 지혜롭게 개입하는 방식으로 스스로가 잘못되었음을 인식하고 포기하게 만들 수 있다. 애초에 처음의 반박은 인간의 입장에서 본 것인데, 어떤 인간이든 행위 후에 처벌하는 것보다 그 전에 계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긴다.” 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대부분의 종교의 교리는 상술한 (a)~(d)를 지지한다.
        • 불교에서는 ‘인과응보’, ‘자업자득’ 이라는 가르침으로 이를 설명하는데, 인간의 업은 선업과 악업으로 나뉘며, 각각 그에 따르는 결과를 결국에는 받게 되어있다는 의미이다.
        • 가톨릭의 4대 교리 중 하나가 ‘상선벌악’이다.
        • 명심보감에는 첫 글에 ‘자왈(子曰) 위선자(爲善者) 천보지이복(天報之以福) 위부선자(爲不善者) 천보지이화(天報之以禍)’라는 글이 있다. ‘착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을 주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재앙을 준다.’는 孔子(공자)의 말로 상선벌악(賞善罰惡)과 그 뜻을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사후에 처벌하는 것은 현세를 바르게 이끄는 것과는 무관하다” 라는 주장은 증명할 방법이 없다. 반대로, 현재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의 영향으로, 불교와 기독교, 이슬람교 를 비롯한 수많은 종교인들이 현세에서 선행이나 수행을 하고 있으므로 실제적으로는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론적으로도, 이들 종교에서 현세는 잠깐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서, 영원한 깨달음의 세계(혹은 천국)에 가기 위한 과정이므로, ‘신이 존재한다’는 명제와 ‘잠깐 스쳐 지나가는 세계에 위기나 고통도 존재한다’는 명제가 상충되지 않는다.

악이 "선의 부족"으로 해석되는 경우[편집]

악이 원래 있는 실재가 아니라 선이 없는 상태가 악이 된다, 악이라고 얘기한다는 것이다.
이 해석에는 문제가 존재한다 "주는것의 부족은 뺏는것인가"
선을 행하는 방법을 돈으로 가정하고 100만원이 필요한 사람에게 100만원을 주는것 이 선이라 가정할때 액수의 부족은 악인가 예를 들어 50만원을 준다던가 아니면 주지 않았을때 악이 되는가.
보통 선과 악을 빛과 어둠으로 비유해 빛의 부제가 어둠이듯 선의 부제가 악이라 생각하지만 어둠의 정의는 빛이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악은 선의 반대되는 개념이다

  • 물론, 이 의문 제기에도 불구하고, 악이 ‘선의 부족’으로 해석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제시되지 않았다. 현재, 1~4번째 명제 사이에 모순이 있다는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모순이 되지 않는 해석 방식’이 제기된 상황에서, 그 방식의 오류를 제기하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도 해석 가능하다는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은, ‘모순이 되지 않는 해석 방식’을 없애지 못한다.
  • 또한 “주는 것이 선” 이라고 가정할 때, “주는 것의 부족”은 “빼앗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의 부족은 악” 이라고 논리를 전개해야 ‘선의 부족은 악’이라는 본 단락의 논의에 포함될 수 있다. ‘주는것의 부족은 빼앗는 것인가’ 라는 의문 제기는 본 단락의 논의에는 영향을 줄 수 없다.
  • 그리고 “100만원을 주는 것이 선” 이라는 것이 명백한 상황이라면, “50만원만 주는 것”은 “악”이 된다. 따라서 여전히 “악은 선의 부족이다” 라는 해석은 가능하다.
  • “악” 의 사전적 정의는 “도덕률이나 양심을 어기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 이다. 즉, 어떤 사람의 양심이 “100만원을 줘야 한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50만원만 준다면, 양심을 어긴 것이 된다. 이는 “악”에 대한 사전적 정의에 부합하는 설명이다.

이 단락에 대하여, 문제 해결의 단초들 에서 제시된 2번째 명제를 이용한 설명이 존재한다. "악은 선과 반대되는 개념"이라는 정의는 이원론적 세계관 내에서만 성립하는 개념이며, 이는 유일신적 신관을 가진 종교들을 포함한 일원론적 세계관과는 정면으로 충돌한다.[6] '절대적인 신'을 전제하는 순간, '일원론'은 당연한 귀결이며[7], '악'의 정의는 '선의 부재' 혹은 '선에서 벗어남' 이 된다.

  • 이에 대하여, “그러나, 유일신적 종교의 일원론은 존재론적 관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애초에 악이 없다는 주장이 아니다. 유일신적 존재론에서는 신 밖의 존재를 생각 할 수 없다. 그러나 여전히 윤리적 관점에서 악은 생각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다. 윤리적 일원론이라는 것도 선악 판별의 기준이 하나라는 뜻이지 아예 선악 구분이 없다는 주장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애초에 종교의 경전에 등장하는 악에 대한 언급은 모두 무의미한 것이다.“ 라는 반박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애초에 위의 문단은 악이 없다고 한 것이 아니라, ‘악’의 정의는 ‘선의 부족’ 이라는 내용이다. “선=양심 & 부족=어김“ 으로 대입이 가능하므로, ‘악은 선의 부족’이라는 정의는 ‘악’의 사전적 정의인 ‘악은 양심을 어김’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1의 반박은 ‘문제 해결의 단초들’ 에서 제시된 명제에 대한 반박으로는 부적절하며, 논리적인 연관성을 갖지 못한다.

악이 더 커다란 선의 맥락 안에 들어있는 것이라고 설명되는 경우[편집]

"세월호 참사를 생각해보자.
언제있을지 모르는 최후의 심판을 위해 200명이 넘는 사람을 죽여도 되는가?
대를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논리인데 언뜻보면 정당해 보일수도 있다.
60억명이 넘는 인간에게 충고하기 위해 비교적 소수인 세월호 승객들을 희생시킨 것이다
하지만 대를위해 소를 희생시켰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막장인 시대가 많았다.
국가가 막장일때 하층민의 희생이 강요된다.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전지전능한 신의 권능으로 최후의 심판을 고치면 될 일이다"

대부분의 재난에서 제기되는 이와 같은 질문에도 역시 문제 해결의 단초들 에서 제시된 '자유'로 반박하려는 시도가 있다.

  • '문제 해결의 단초들'의 a 에 의해서, 인간이 어떤 악을 실행하려고 한다고 해서, 그것을 실행하려는 자유의지를 강제적으로 제거하는 일은 악이다. (c)
  • '문제 해결의 단초들'의 a,b,c 에 의해서, '신이 선하다면, 신은 자유를 빼앗지 않을 것이며, 악에 대한 책임을 물을것이다.' (d)

그러나 이 역시 어떤 상황이든 자유를 빼앗는 것 자체가 절대악이라는 근거가 없다. 만일 사고 이전 정부나 경찰이 사고 가능성을 파악했을 경우, 그것을 알고도 당사자들의 자유의지만 믿고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비판의 여지가 있다. 물론 근본적인 책임은 사고를 일으킨 당사자들에게 있다. 이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제 3자라고 해도 그 가능성을 미리 파악하고 당사자들의 자유만 전적으로 존중하는 것은 인간이라면 하지 않을 행위이고 방관에 따른 간접적 책임은 존재한다. 또한 이러한 대부분의 사고는 자기 행위가 재난을 가져올 것인지 확실히 알지 못하는 인간의 불완전성에서 기인한다. 다시말해 자유의지로 악을 택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자기 행위가 악을 가져올지 조차 확실히 알지 못한 경우다. 이 경우 완전한 존재인 신이 개입하지 않는 것은 처음부터 악이 발생하는 것을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적어도 인간에게 지금 행위가 악을 가져온다는 확실한 경고가 있어야 그에 따른 심판도 유효한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철저하게 인간 중심적 ‘선’의 관점에서 나오는 의문이다. 인간이 ‘악’이라고 판단한 것 조차도 ‘신’의 관점에서의 ‘선’의 일부라는 이 단락의 의미는, 시작부터가 ‘인간과 신의 선의 기준이 다르다.’ 를 논하는 것인데, 이 논지를 벗어나 ‘인간의 관점에서는 악이다.’ 라는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은 이 단락과는 연관성이 없다. 관점의 차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같은 인간 사이에서도 ‘인과응보’,’자업자득’이 우주의 이치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인간 위주로 선악을 따지는 것 자체가 어리석음으로 보인다. 인간과 신의 차이가 극명한 만큼, 선에 대한 기준의 차이도 극명한 것은 당연하며, 설령 신이 지구를 오염시키는 인류를 자연재해를 통해 절반 이하로 줄이는 것이 ‘장기적으로 지구를 위한 선’이라고 판단한다고 해도 틀렸다고 증명할 수는 없다. 즉, ‘신’이라는 극단적인 존재를 이미 가정했으면서, 그 존재의 관점이 극단적으로 인간과 다를 가능성을 배제하려는 것 자체에 모순이 있기 때문에 이런 의미 없는 의문제기가 반복되는 것이다.

문제의식 단락에서는 모순이 되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신의 ‘전지전능하다’와 ‘선하다’라는 속성과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한다’를 상정했다. 하지만, ‘전지전능’ 이라는 속성을 상정하는 순간, 인간이 신에 대해서 가지는 모든 판단은 ‘불완전한’ 것이 되어버리고, ‘악이 존재한다’ 는 인간적인 판단 역시 마찬가지이다. 모든 경우의 수를 아는 신이 그리는 큰 그림과, 인간이 생각하기에 좋아보이는 그림이 다르다 할지라도, ‘신이 틀렸다’ 혹은 ‘선하지 않다’ 라고 증명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제의식 단락에서와 같이 ‘신이 전지전능하다’ 라는 명제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신의 모순을 증명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차라리, ‘신의 지능이나 능력이 인간과 비슷하거나, 열등하다’ 라고 가정하는 것이 모순을 도출해내기에 적절한 접근방식이므로, ‘신관의 차이, 신의 정의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 제기’ 라는 방향으로 문제의식을 전개하는 것이 논리적 우위를 점하기에 더 유리하다고 볼 수 있다. 각 종교의 교리가 고도화된 현대에서 ‘전지전능하다’ 라는 극단적인 속성을 인정해주고 논지를 전개하는 것은 오히려 너무나 불리하게 토론을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가능한 최상의 세상에 살고 있다(라이프니츠)(Leibniz)[편집]

여기서 사용할 ‘신’이라는 단어를 ‘전지전능하고 선한 존재’로 정의한다.

  1.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할 때,
    1. 문제가 일어났는데, 있지도 않은 신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행위는 오히려 문제의 원인을 찾는 것과 문제의 해결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어리석은 행위이다.
  2. 신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
    1. 신이 현재보다 더 선한 길이 있는데도 그 길로 인도하지 않는 경우는 ‘신은 선한 존재다’ 라는 전제와 모순이 되므로 존재할 수 없다.
    2. 신이 현재보다 더 선한 길을 모르거나, 알고도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도, ‘신은 전지전능한 존재다’ 라는 전제와 모순이 되므로 존재할 수 없다.
    3. 2.1, 2.2에 의해서, 신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 가능한 논리적 경우의 수는 ‘신이 허락한 이 길이 최선의 길이다.’ 이다.
  3. 그러므로, 2 에 의하여, ‘전지전능하고 선한 존재’ 를 ‘신’ 이라고 가정할 때, 논리적으로 가능한 경우의 수는 ‘신이 허락한 이 세계가 최선이다.’ 뿐이다.
  4. 그러므로 1,2 의 모든 경우에 신에게 책임을 돌리는 행위는 비논리적이다. 즉, 신에게 책임을 돌리고 싶어하는 인간의 원초적인 습성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있지도 않은 신에게 책임전가를 하느라 시간 낭비를 하고 있는 것이며, 존재한다고 해도 ‘신이 허락한 이 길이 최선’ 이라고 믿고 자신의 상황을 수용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 유일한 논리적인 귀결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불평과 남 탓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에 불과하다. 라이프니츠의 이 논증은 신의 존재 유무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존재 하든지 하지 않든지 논리적으로 인간은 신을 탓할 수 없음에 그 초점이 있다.

대비들과 그 효용성[편집]

이레네우스의 신정론(영혼-생성론)[편집]

인간의 변화라는 신의 목적[편집]

인간의 영혼의 변화는 지상에서의 여러 세대가 지나도록 오래 걸릴 수 있다[편집]

악이 발전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는 경우[편집]

악은 역사의 통과 단계이다(헤겔)[편집]

악은 신이 창조하다 완전치 못한 실험에서 생긴 나머지다(카발라 Kabbala)[편집]

창조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가정[편집]

전능하고 선한 신에 대한 믿음에 대한 변호를 위한 그 밖의 해결의 단초들[편집]

해답이란 없다[편집]

형이상학을 마주하면 이성은 그 한계에 부딪친다(칸트)[편집]

성서상의 신의 알수 없는 의지로서 악이 존재한다[편집]

성서 욥기: 행위-보답이라는 맥락에 반하는 일들[편집]

판단을 위한 근거자료와 그로부터 전개되는 신학적/철학적 사고 모델이 충분치 않다[편집]

이성적인 해답을 찾기보다는 신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보내기[편집]

신의 조력에 대한 지적[편집]

신정론에 대한 의문은 불손한 행위라는 거부[편집]

신의 본성들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편집]

신이 전적으로 선하다는 것은 상대적이다[편집]

신의 정의는 그의 선함과 대치된다[편집]

신이 전적으로 선하다는 개념이 인간의 선의 개념에 따라 달라진다[편집]

신의 전능함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상대적이다[편집]

인간의 자유를 허용할 여지[편집]
인간이 신을 거부했기 때문에 인간으로부터 신이 물러났다는 가정[편집]
신은 선하나 전능하지는 않다는 가정[편집]
십자가에 달린 예수에 대한 지적[편집]
이원적 세계관[편집]

신이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은 상대적이다[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락탄티우스: De ira dei 13, 19 = Us. 374
  2. Reinhold F. Glei: Et invidus et inbecillus. Das angebliche Epikurfragment bei Laktanz, De ira dei 13, 20–21, in: Vigiliae Christianae 42 (1988), S. 47–58, letztere Konjektur S. 58 n. 38; Arthur Stanley Pease (Hrsg.): M. Tulli Ciceronis De natura deorum. Libri secundus et tertius, Cambridge (Mass.) 1958, S. 1232 f.
  3. 참조. Cicero: De natura deorum 1, 123 und Laktanz: De ira dei 4, 7; nach Glei, 57 n. 24
  4. Pyrrhoneische Hypotyposen 3.3.9–12; vgl. zur Stelle etwa Glei, 53
  5. Peter Knauer: Der Glaube kommt vom Hören. Ökumenische Fundamentaltheologie, Graz – Wien – Köln 1978, S. 55 f.
  6. 두산백과-일원론 ①
  7. 두산백과-일원론 하단부

외부 링크[편집]

  • 네이버 지식백과(사회학 사전) '신정론'
  • 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변신론'
  • 네이버 지식백과(종교학대사전) '신의론'
  • 네이버 지식백과(철학사전) '변신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