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인도교 폭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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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뉴욕 타임스 소속 종군기자 버튼 크레인이 작성한 [[뉴욕 타임스]] 기사(제목: South Koreans Kill Own Troops By Dynamiting a Bridge Too Soon;~ ")와 'The Charlotte Observer' 기사(제목: "Newsmen are caught in Bridge Blast")를 살펴보면 자신들의 [[지프]] 주위의 트럭들이 다리와 같이 폭파되면서 탑승해있던 수백명의 한국군들이 사망했다고만 보도하고 있으며 민간인 사망자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먼저 뉴욕 타임스 소속 종군기자 버튼 크레인이 작성한 [[뉴욕 타임스]] 기사(제목: South Koreans Kill Own Troops By Dynamiting a Bridge Too Soon;~ ")와 'The Charlotte Observer' 기사(제목: "Newsmen are caught in Bridge Blast")를 살펴보면 자신들의 [[지프]] 주위의 트럭들이 다리와 같이 폭파되면서 탑승해있던 수백명의 한국군들이 사망했다고만 보도하고 있으며 민간인 사망자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 ''''뉴욕 타임스', 'The Charlotte Observer' (1950년 6월 29일자) - 버튼 크레인 작성 기사의 인명피해자 관련 기술'''<ref>
* ''''뉴욕 타임스', 'The Charlotte Observer' (1950년 6월 29일자) - 버튼 크레인 작성 기사의 인명피해자 관련 기술'''<ref>{{뉴스 인용|제목 = South Koreans Kill Own Troops By Dynamiting a Bridge Too Soon ​Hundreds of retreating Soldiers in Trucks Blasted at Span South of Seoul-Two Reporters Hurt-U.S. Planes Cheered | URL = https://www.nytimes.com/1950/06/29/archives/south-koreans-kill-own-troops-by-dynamiting-a-bridge-too-soon.html|출판사 = [[뉴욕 타임스]] - |날짜 = 1950-06-29}}</ref><ref>{{뉴스 인용|제목 = Newsmen are caught in Bridge Blast | URL = https://www.newspapers.com/image/618237189|출판사 = The Charlotte Observer - |날짜 = 1950-06-29}}</ref>
<ref>{{뉴스 인용|제목 = South Koreans Kill Own Troops By Dynamiting a Bridge Too Soon ​Hundreds of retreating Soldiers in Trucks Blasted at Span South of Seoul-Two Reporters Hurt-U.S. Planes Cheered | URL = https://www.nytimes.com/1950/06/29/archives/south-koreans-kill-own-troops-by-dynamiting-a-bridge-too-soon.html|출판사 = [[뉴욕 타임스]] - |날짜 = 1950-06-29}}</ref>
<ref>{{뉴스 인용|제목 = Newsmen are caught in Bridge Blast | URL = https://www.newspapers.com/image/618237189|출판사 = The Charlotte Observer - |날짜 = 1950-06-29}}</ref>
'''~ they blew up the bridge, killing several hundred of their own soldiers.'''
'''~ they blew up the bridge, killing several hundred of their own soldiers.'''
'''Our correspondents' jeep, only twenty-five yards from the blast, was protected by a large truckful of soldiers, all of whom died.'''
'''Our correspondents' jeep, only twenty-five yards from the blast, was protected by a large truckful of soldiers, all of whom died.'''

2024년 3월 5일 (화) 01:21 판

한강대교.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漢江人道橋爆破事件)은 6.25 전쟁 당시인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대한민국 국군한강 인도교를 폭파한 사건이다.

인명피해자 수치는 미 군사고문단 장교가 군인, 경찰, 민간인 등을 포함하여 500~800명으로 추정한 적이 있는데[1] 현재까지도 정확한 인명피해자 수치와 신원에 대해서는 신원이 확인된 종로경찰서 소속 77명 이외에는 밝혀지지 않았다.

폭파

1950년 6월 27일 밤까지 서울 북부에서 완강하게 인민군의 돌파를 저지하던 국군. 28일 새벽 은밀히 홍릉 방면으로 진출한 탱크 2대로 인하여 미아리 방어선은 공황 상태에 빠지고 만다. 돈암동에 나타난 탱크를 목격한 강문봉 대령은 채병덕 총참모장에게 달려가 "적의 전차가 서울 시내에 침입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하여도 인민군의 주력 부대는 미아리 고개에 포진해있었다.

채병덕 총참모장은 정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최창식 공병감에게 전화해 "즉시 한강 다리를 폭파하라!"라고 지시했다. 채병덕을 비롯한 육군본부 참모들에 이어 이시영 부통령이 한강 인도교를 넘자마자 새벽 2시 30분 경 폭음과 함께 한강 다리가 폭파 되었다.

하지만 5개의 교량 중 3개의 교량만이 폭파됐고 임진강 철교, 춘천 모진교, 서울 한강 교량이 인민군의 수중에 넘어가게 됐다. 다리 폭파 소식을 접해들은 6개 사단, 4만 4천명 가량의 병력들은 중장비는 물론 소총까지 모두 버리고 후퇴를 해야 했다. 교량을 폭파하며 서울은 인민군에게 완전히 점령당했다.

폭파 이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폭파 이후 북한군 전차가 28일 오전 8시경에 용산 삼각지에 진입했으며 주력부대는 이날 11시 30분에 진입하였으므로 국군 주력부대와 서울 시민들이 강남으로 철수 있는 여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기 폭파로 인명 살상은 물론 병력과 물자 수송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는 비판이 대두되었다.

최창식 대령은 항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처음에 체포된 직접적인 원인은 한강교 폭파의 책임을 묻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경북 군위에서 국군 공병대가 제5연대와 제2연대의 후방도로에 지뢰를 매설했는데 지뢰 표지가 불분명하여 제5연대장 이영규 중령을 비롯한 50여명의 아군 피해자가 나와 이때 최창식 대령이 체포되었고 차제에 한강 폭파의 책임을 밝혀 국민의 여론을 무마할려고 하였다.

결국 군당군은 당시 폭파 책임을 맡았던 최창식 대령을 '적전비행죄'로 체포(8월 28일)해 9월 21일 사형을 집행했다.

한강대교(인도교)는 폭파됐지만 화물을 수송하던 한강철교는 제대로 폭파되지 않아 조선인민군은 약간의 보수공사 후 빠르게 서울을 넘어 부산, 포항과 경상도 동해안, 대구, 울산, 경주, 영천과 그 이남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책임 소재

지금까지도 정확한 책임 소재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한강 인도교 등 한강교 폭파는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이 지시한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참모부장 김백일, 장경근 국방차관. 이범석 총리[2] 등 관련된 사람들이 많다.

최창식 공병감의 고문이었던 미군 크로포드 소령은 "당시 폭파명령을 내린 것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의 고문으로 있던 미군 장교"라고 증언했다. 당시 지휘계통상 채병덕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던 사람은 제임스 하우스만 대위이다.[3]

최창식 공병감은 1962년부터 재심 과정을 거쳐 1964년 최종적으로 무죄 판결을 받아 사후 복권되었다.[4]

오해의 소지

미 군사고문단 장교의 사망자 추정 500~800명은 군인과 민간인 포함 추정 수치

주한미군 군사고문단(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KMAG) 소속 장교의 한강 인도교 폭파 사망자 500~800명 추정 수치는 완전히 민간인 사망자만의 추정 수치가 아니며 군인, 경찰, 민간인 등 다리 폭파로 사망했을 모든 사람들을 추정한 수치이다.[5]

미 육군 군사연구소의 공간사 'South to the Nakdong, North to the Yaul(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에 나오는 내용이기 때문에 미 군사고문단 장교가 실제로 했던 발언으로 군인과 민간인 있는 다리에서 폭파가 일어났다고 기술이기 때문에 문맥상 'people'은 군인과 민간인을 총칭한 표현이며 'Korea: The Untold Story of the War'에는 더욱더 명확하게 군인과 민간인 합쳐서 500에서 800명이 폭사하거나 익사했을 것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 'South to the Nakdong, North to the Yaul' p. 33 (미 육군 군사연구소, 1961년) - 미 군사고문단 장교의 인명피해자 관련 발언 원문 발췌
 The gigantic explosions, which dropped two spans of the Han highway bridge into the water on the south side, were set off about 0215 with no warning to the military personnel and the civilian population crowding the bridges. Two KMAG officers, Col. Robert T.Hazlett and Captain Hausman, on their way to Suwon to establish communication with Tokyo, had just crossed the bridge when it blew up—Hausman said seven minutes after they crossed, Hazlett said five minutes. Hausman places the time of the explosion at 0215 Several other sources fix it approximately at the same time.

Pedestrian and solid vehicular traffic, bumper to bumper, crowded all three lanes of the highway bridge, In Seoul the broad avenue leading up to the bridge was packed in all eight lanes with vehicles of all kinds, including army trucks and artillery pieces,as well as with marching soldiers and civilian pedestrians. 
The best informed American officers in Seoul at the time estimate that between 500 and 800 people were killed or drowned in the blowing of this bridge.
'Korea: The Untold Story of the War' p. 82 (Joseph C. Goulden, 1982년)  - 미 군사고문단 장교의 인명피해자 관련 발언 원문 발췌

>Recontructing the disaster later, KMAG officers estimated that from 500 to 800 soldiers and civilians were killed by the blast or drowned when they fell into the river.

참고로 국방부의 전사편찬위원회 발간한 한국전쟁사 1권에도 목격자에 의한 인명피해자 500~800명 추정 수치가 들어가 있지만 인명피해자를 민간인이라고 특정하지 않고 인원이라는 표현하여다.

당시 헌병과 공병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용산쪽에서 이곳까지 밀어닥친 차량과 인파가 폭발현장(중지도에서 세번째 교각)으로 밀리는 바 되어 인명피해가 가중된 것으로 보였는데 그 손실은 차량 50대, 인원 500~800명에 이른 것으로 목격자에 의해 추산되기도 하였다.

덧붙여 미 군사고문단이 미국인 종군기자 4명 - 뉴욕 타임스 소속 버튼 크레인(Burton Crane), 시카고 데일리 뉴스 소속 키즈 비치(Keyes Beech), 타임 매거진 소속 프랭크 기브니(Frank Gibney), 뉴욕 헤럴드 트리뷴 소속 마거리트 히긴스(Marguerite Higgins)과 함께 한강 인도교로 탈출을 시도했을 때, 미 군사고문단장 직무대리 스털링 라이트 대령(W. H. Sterling Wright)은 한강 인도교 근처에서 폭파되는 광경을 목격하고 다시 강북으로 돌아와서 마거리트 히긴스 종군기자에게 인명피해에 관해서는 오직 군인 사망자에 대해서만 언급하였고 민간인 사망자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마거리트 히긴스의 비망록 'War in Korea'에 기록되어 있다.

  • 'War in Korea' p. 26 (마거리트 히긴스, 1951년) - 미 군사고문단장 직무대리 스털링 라이트 대령의 인명피해자 관련 발언 원문 발췌
They blew that bridge with truckloads of their own troops on the main span. They've killed hundreds of their own men.

다리 폭파는 전체 폭파가 아닌 부분 폭파

한강 인도교 전체를 폭파시켜서 완전히 날려버린 것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6월 28일 폭파된 부분은 북측 상판이다.

북한군의 다리를 이용한 한강 도하를 저지 내지 늦추는 목적만 달성하면 되는 것이고 또한 수복 후 다시 한강 인도교를 사용도 염두해 두어야 하기 때문에 다리 전체를 폭파해서 날려버릴 필요는 전혀 없는 것으로 부분 폭파는 올바른 결정이었지만 폭파 지점에 대한 비판이 존재한다.

즉 강북에 가까운 상판이 아닌 강남에 가까운 상판을 폭파해야 한강 이남 방어선에 다리를 보수하기 위해 내려오는 북한군 공격이 용이한데 한강 이남 방어선에서 멀리 떨어진 북측 상판을 폭파했다는 점이다.

한강 인도교 폭파 사진

한강 인도교 폭파 관련 기사 등에 삽입되어 흔히 한강 인도교 폭파 전 상황을 촬영한 사진으로 알려졌던 위의 사진은 사실 1950년 12월 4일 평양의 피란민들이 대동강 철교를 통해 대동강을 건너는 사진이다.

논란

폭파 당시 인명피해자 수치 및 신원

당시 급박한 전황으로 폭파 당시 인명피해자 수치 및 신원과 관련하여 현재와 같은 시신 수습 등을 통한 이론의 여지없이 누구나 신뢰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통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통계가 없기 때문에 논란이 시작되었고 앞으로도 완벽하게 해결될 수 없다.

증언 등을 토대로 군인과 경찰 민간인 총합 대략 500~800명 사이의 사망자 혹은 민간인만 500~800명 사이의 사망자 추정 수치가 전해져 내려왔고 이 추청 수치가 지속적으로 책, 언론 등에 인용되었는데 인명피해자 수치 및 신원과 관련된 새로운 연구로 인해 당시 사료들이 발견되고 있다.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의 연구 결과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활동하며 6.25 전쟁에서 국군과 경찰 등 국가 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 사건들을 전문적으로 조사하였던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 역시 2014년 이전 한강 인도교 폭파 당시 수많은 민간인들이 사망하였다고 주장하였지만 2014년 발간 6.25 전쟁 민간인 학살 조사서 '국민은 적이 아니다'(pp. 71–74) 그리고 2016년 발표 소논문 '기록과 기억, 그리고 진실'(pp. 6–7)에서 재조사를 통한 정확한 인명피해자 수치는 밝혀내지 못했지만 사망자 중에서 민간인 사망자는 없거나 경미했을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고 요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현재 알려진 500~800명 사이의 사망자 기록은 미 군사고문단 장교의 증언 형태로 전해진 자료만 존재할 뿐 어떻게 500~800명의 추정 수치가 산출되었는지에 관한 실체적 근거자료가 존재하지 않으며, 당시 대한민국 정부에서 사고 조사를 통해 산출한 사망자 수치 등과 교차 검증이 이루어진 수치가 아니다. 그리고 500-800명의 사망자를 전부 피난 민간인이라고 특정하지 않았으며 군인관 민간인을 모두 합한 추정 수치인데 어느 순간 500~800명의 민간인 사망 확정 수치처럼 확대·재생산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즉 단순히 한강 인도교 폭파에서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500~800명 사이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했다는 미 군사고문단 장교 등의 증언이 어느 순간 실제로 조사를 해서 발표된 이론의 여지없는 신뢰할 만한 사망자 확정 수치처럼 그리고 이 사망자들의 신원이 전부 피난 민간인으로 둔갑했다는 것이다.

(2) 고든 L. 로트먼(Gordon L. Rottman)의 2006년 저서 '인천 1950(Inch'on 1950)'에 수록된 사진과 설명을 보면 당시 한강 인도교는 피란민으로 위장한 북한군 파괴공작원의 활동을 우려하여 피란민의 한강 인도교 사용을 원천적으로 금지시키고 인도교 옆의 부교를 통해 이동시켰다. 한강 인도교의 부교 존재는 임인식 국방부 정훈국 사진대 대장의 사진으로도 증명이 되며 관련 증언도 남겼다.[6]

한강 인도교의 부교 존재는 임인식 사진작가의 사진으로도 증명이 되는데 이렇게 피난 민간인의 한강 인도교 통행은 엄격하게 통제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통제 활동으로 폭파 중지 명령을 하달하려던 육군본부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과 작전과장 정래혁 중령조차 다리에 진입하지 못할 지경이었는데 수많은 민간인들이 마음대로 진입하여 건너다가 폭사했다는 사실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의 저서와 소논문에는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1964년 최창식 공병감 재심에서 당시 폭파 작전을 수행했던 이창복 대령(당시 중위)는 폭파 직전 다리 양쪽에 교통 정리 임무를 맡은 병사들을 배치하여 인명피해가 크지 않았다고 증언하였고[7]목격자 이창녹 소위는 폭파 10분 전 다리 위의 차량과 인파를 빼내고 더 이상 진입하지 못 하게 강력한 통제 때문에 차량 대열이 멈추고 공백이 잠깐 생겼는데 이때 폭파 지점이 완전히 비워진 줄 오판하고 통제를 뚫고 들어온 차량 등을 보지 못 한채 폭파가 실행되면서 인명피해자가 발생하였다고 증언[8]한 것으로 보아 통제 활동은 확실히 존재하였다.

(3) 시민단체 중심으로 한강교 부근 민간인 희생자 추모제를 지내고 있는데 이는 민간인 사망자에 대한 실체적 근거자료가 없는데도 이승만 정부의 잔인성을 드러내기 위해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군중심리로 보이며 최종적으로 한강 인도교 폭파 당시 500~800명 사이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기록은 사실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최종적으로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의 연구 결과를 정리하면 한강 인도교 폭파 당시 민간인 사망자는 거의 없었으며 만약 500~800명 사이 사망자가 발생한 것이 진실이더라도 대부분 군인과 경찰 사망자로서 민간인 사망자는 없거나 경미했을 것으로 결론지었다.

다리를 건너다 폭파를 직접 목격한 외신 기자들의 기사 및 증언

당시 지프로 다리를 건너던 중 눈 앞에서(기사에서는 in our faces 혹은 only 25 yards away로 표현) 폭파가 발생하여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고 나룻배를 이용해 한강을 도강했던 뉴욕 타임스 소속 버튼 크레인(Burton Crane), 시카고 데일리 뉴스 소속 키즈 비치(Keyes Beech), 타임 매거진 소속 프랭크 기브니(Frank Gibney) 이렇게 3명의 미국인 종군기자들이 있었다.

이들 모두 한강 인도교 폭파 이후 기사를 작성했고 이 기사들은 당시 미국 여러 신문과 잡지사에 특별기고 형식으로 전재(轉載) 및 재배포되어 거의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미국의 여러 신문사와 잡지사에 게제되었다.

먼저 뉴욕 타임스 소속 종군기자 버튼 크레인이 작성한 뉴욕 타임스 기사(제목: South Koreans Kill Own Troops By Dynamiting a Bridge Too Soon;~ ")와 'The Charlotte Observer' 기사(제목: "Newsmen are caught in Bridge Blast")를 살펴보면 자신들의 지프 주위의 트럭들이 다리와 같이 폭파되면서 탑승해있던 수백명의 한국군들이 사망했다고만 보도하고 있으며 민간인 사망자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 '뉴욕 타임스', 'The Charlotte Observer' (1950년 6월 29일자) - 버튼 크레인 작성 기사의 인명피해자 관련 기술[9][10]
~ they blew up the bridge, killing several hundred of their own soldiers.
Our correspondents' jeep, only twenty-five yards from the blast, was protected by a large truckful of soldiers, all of whom died.

시카고 데일리 뉴스 소속 종군기자 키스 비치가 작성한 'St. Louis Post-Dispatch' 기사(제목: "Reporter in Korea Has Feeling He saw Start of 3rd World War") 역시 자신들의 지프 주위의 한국군이 탑승한 트럭들이 다리와 같이 폭파되었다고만 보도하고 있으며 민간인 사망자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 'St. Louis Post-Dispatch' (1950년 6월 28일자) - 'Keyes Beech' 비치 작성 기사의 인명피해자 관련 부분 원문 발췌[11]
A truckload of South Korean soldiers just ahead of us was blown to bits
  • 'Korea: The Untold Story of the War', p 82 (Joseph C. Goulden, 1982년) - 'Frank Gibney'가 증언한 인명피해자 관련 부분 원문 발췌
The ROK soldiers in the truck ahead all looked dead. Scores, hundreds of bodies of the dead and the gravley wounded lay scattered over the brigde. Other screaming refugees raced pell-mell for the north shore. 

조셉 C. 굴든(Joseph C. Goulden)의 1982년 저서 'Korea: The Untold Story of the War'에 실려있는 프랭크 기브니의 증언을 살펴보면 프랭크 기브니 역시 직접적인 인명피해자는 군인만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폭파 지점 아래의 피난 민간인들의 경우 폭파되는 것을 보고 황급히 강북쪽으로 피신했다는 증언에 비추어 피난 민간인들이 어느 정도 다리에 진입하여 통행 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2012년 코리아 타임스 기사에도 프랭크 기브니의 증언이 실려있는데 여기에서는 처음으로 민간인 인명피해자도 보았다고 증언하였다.[12]

  • '코리아 타임스' 기사 (2012년 6월 22일자) - 'Frank Gibney'가 증언한 인명피해자 관련 부분 원문 발췌
All of the soldiers in the truck ahead of us had been killed. Bodies of dead and dying were strewn over the bridge, civilians as well as soldiers. Confusion was complete. With the cries of the wounded and the dying forming the background, scores of refugees were running pell-mell off the bridge and disappearing into the night beyond. 

정리하자면 다리가 폭파되는 광경을 직접 눈 앞에서 목격한 미국인 종군 기자와 주변에서 목격한 미 군사고문단장 직무대리 스털링 라이트 대령의 한강 인도교 폭파 직후 증언을 분석해보면 트럭과 군인이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고 즉 일관되게 군인들이 탑승한 트럭들이 다리와 함께 폭파되었다고 증언하였다.

덧붙여 현재까지 사료를 통해 소속과 신원이 명확하게 밝혀진 인명피해는 8대의 트럭에 분승하여 한강 인도교를 통해 철수하던 종로경찰서 경력 중 4번째 트럭까지는 무사히 통과하였으나 5번째 트럭부터 다리와 함께 폭파하여 순직한 이상훈 경위 외 경위 2명, 경사 10명, 순경 64명 등 총 77명의 경찰관들이며,[13] 6.25 전쟁 참전 경찰관들의 증언에 의하면 군으로부터 다리 폭파 작전에 대한 정보를 아예 받지 못했다고 하였다.[14]

같이 보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