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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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18일 (수) 00:10 판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

← 1987년
1992년 12월 18일
1997년 →

투표율 81.9%(감소 7.3%)
 
후보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
정당 민주자유당 민주당 통일국민당
득표수 9,977,332 8,041,284 3,880,067
득표율 19.0% 23.8% 34.3%

 
후보 박찬종
정당 신정치개혁당
득표수 1,516,047
득표율 6.4%

시도별 후보 우세지역

선거전 대통령

노태우
민주자유당

대통령 당선자

김영삼
민주자유당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실시한 선거이다. 1992년 12월 18일 금요일에 실시되어 민주자유당김영삼 후보가 당선되었다.

배경

기존의 선거는 서로 다른 사람이 대통령으로 당선될 때 마다 서로 다른 선거 방식에 의해 실시되었으나, 이번 선거는 연속 선상의 선거였다. 또 다른 기존 선거와의 차이는 야권의 표를 쟁패하던 김영삼·김대중이 여야의 위치에서 경쟁하였다는 점이다. 특히 1960년대 이후 여권의 축을 이루던 군 출신 후보가 사라지고 순수 민간인 후보끼리 벌인 대결이었다. 특히 제14대 대선은 여당과 제2·제3야당이 통합한 새로운 여당과 제1야당과의 대결이었다.

제13대 총선 결과 국회는 제13대 총선주자였던 ‘1노 3김(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4당 체제 속에 여당의 다수당 위치가 무너지고 ‘여소야대’상황에서 여당과 제2야당의 김영삼을 대표하는 통일민주당과 제3야당의 김종필을 대표하는 신민주공화당이 집권 민주정의당과 통합하여 민주자유당을 탄생시켰다. 그 밖에 정주영이 갑작스럽게 정치권에 뛰어들었고 현대그룹의 재력을 배경으로 여당과 야당의 낙천자들을 대상으로 영입해 국민당을 만들어 14대 총선에서 31석을 획득, 제3당으로 부상했다. 총선은 정주영에게는 단지 대통령 선거를 위한 기초 다지기일 뿐이었다.

각 당의 후보 선출

민주자유당

민자당은 1992년 5월 19일 전당대회에서 김영삼 대표최고위원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민주당

민주당은 1992년 5월 26일 전당대회에서 김대중 공동대표를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통일국민당

국민당은 1992년 5월 15일 전당대회에서 정주영 대표최고위원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새한국당

새한국당은 1992년 11월 17일 창당대회에서 이종찬 대표최고위원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신정치개혁당

신정당은 1992년 6월 9일 전당대회에서 박찬종 대표최고위원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군소 후보

민중후보 선출 운동

민중대통령후보 선거대책본부는 11월 1일 민중대통령후보 선출대회에서 백기완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

무소속 김옥선 후보

김옥선신한민주당 부총재는 1992년 8월 26일 무소속 대선 출마를 선언하였으며, 유권자 6,490명의 추천을 받아 11월 24일 후보로 등록하였다.[1]

대한정의당

대한정의당은 1992년 11월 18일 창당대회를 개최하고 이병호 창당준비위원장을 총재와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2]

진리평화당

진리평화당은 1992년 10월 24일 창당대회를 개최하고 대선 준비에 나섰으나, 허경영 전 당 총재를 대통령 후보로 내정했다가 후보 등록 마감일인 11월 25일 오후 임시 중앙위원회를 열고 현홍균 당 고문을 후보로 선출하는 등 혼란을 겪었고, 결국 후보 등록 마감 시간 전까지 선거 기탁금을 마련하지 못해 후보 등록을 포기하였다.[3]

친민당

친민당은 1992년 11월 15일 창당대회를 개최하고 한학자인 권정수 창당준비위원장을 총재와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으나, 선거 기탁금을 마련하지 못해 후보 등록을 포기하였다.[4]

기독성민당

진복기 기독성민당 총재는 1992년 9월 26일 대선 출마를 선언하였으나, 후보 등록 마감일인 11월 25일 오후 기탁금을 마련할 능력은 있지만 각 당이 금권조직을 이용한 불법 사전 선거 운동을 해 불공정 선거가 됐으므로 후보 등록을 포기한다고 선언하였다.[4]

선거 운동 기간

14대 선거도 역시 지역 대결의 구도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1노 3김’(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 4분할된 구도였다면, 제14대 대선은 크게 영남호남의 대결 구도였다. 김영삼 후보는 과거에는 영남의 한 쪽인 부산직할시·경상남도에서 대구직할시·경상북도로 연고 범위가 넓어졌다. 김대중은 연고지는 그대로이지만 제13대 대선에서 김영삼을 지지했던 야당 세력을 넘겨 받는 입장이 되었다. 한편 정주영은 이 틈바구니에서 자신의 연고지인 강원도를 집중 공략하여 새로운 지역주의를 개척하면서 무주공산의 충청도를 파고들었다.

정주영은 또한 재벌 해체, 반값 아파트 등 파격적인 공약으로 이목을 끌었다.[5]

1992년 대선에서 민주당김대중 후보는 농촌 유권자의 친(親)민자당, 친(親)노태우 성향을 비판하며 유권자의 책임을 지적했다. 이로 인해 그의 발언에 수긍하지 않는 청중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미 30년 전인 1960년대부터 계급배반투표의 논리가 공식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던 것이다.[6][7]

선거

김영삼은 총득표율에서 42.0%의 최다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며 이는 지역별 유권자 규모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는데 김영삼의 지역구 부산직할시와 경상남도의 인구가 많았다. 김대중은 지역구 광주직할시전라남도에서 절대적 지지 속에 2차 연고지인 전라북도에서도 압도적 우세를 나타냈으나 서울특별시 외의 다른 지역에서는 우세를 확보하지 못했고, 김영삼은 연고 지역의 결속력이 압도적이지는 않았지만, 호남 이외의 모든 지역에서 고른 득표율을 보였기 때문에 제13대 노태우의 승리보다 훨씬 더 높은 득표율로 승리했다.

선거 이후

이 선거는 한국 정치사에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데 김영삼의 당선으로 이른바 3김 가운데 1김은 대통령으로 공식적인 현역 정치를 마감한다. 다른 두 김은 선거 후 다른 길을 들어섰다. 김대중은 이후에 야당 총재로 복귀하지만 정계 은퇴 발표로 다시 국민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동교동계,호남계 중심으로 민주당에서 탈당하여 새정치국민회의을 결성했다. 한편 민자당 공화계 김종필은 김영삼 정부의 2인자 역할을 수행하다 출당되었고 이후 자력으로 자유민주연합을 결성하여 충청도를 발판으로 다시 3김에 진입하였다.

한편 김영삼은 김종필의 출당 이후 민주자유당을 자신의 체제로 재편한 뒤 신한국당으로 개명하였다.

선거 결과

득표순위 기호 이름 정당 득표수 득표율 비고
1 1 김영삼 민주자유당 9,977,332 41.96% 대한민국 제 14대 대통령 당선 당선
2 2 김대중 민주당 8,041,284 33.82%
3 3 정주영 통일국민당 3,880,067 16.32%
4 5 박찬종 신정치개혁당 1,516,047 6.38%
5 8 백기완 무소속 238,648 1.00%
6 7 김옥선 무소속 86,292 0.36%
7 6 이병호 대한정의당 35,739 0.15%
- 4 이종찬 새한국당 - - 사퇴
총투표수 24,095,170
선거인 수 28,676,547
투표율 81.9%
  • 득표율은 총투표수 대비 백분율을 가리킨다.

지역별 득표수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 박찬종 이병호 김옥선 백기완 합계
서울 2,167,298 36.4% 2,246,636 37.7% 1,070,629 18.0% 381,535 6.4% 4,797 13,098 67,684 5,951,777
인천 397,361 37.3% 338,538 31.7% 228,505 21.4% 84,211 7.9% 1,351 3,867 12,455 1,066,288
경기 1,254,025 36.3% 1,103,498 32.0% 798,356 23.1% 239,140 6.9% 6,299 13,685 36,392 3,451,395
강원 340,528 41.5% 127,265 15.5% 279,610 34.1% 56,199 6.9% 3,047 4,007 9,599 820,255
대전 202,137 35.2% 165,067 28.7% 133,646 23.3% 64,526 11.2% 961 2,294 5,772 574,403
충남 351,789 36.9% 271,921 28.5% 240,400 25.2% 64,117 6.7% 4,143 9,899 10,185 952,454
충북 281,678 38.3% 191,743 26.0% 175,767 23.9% 68,900 9.4% 4,844 4,568 8,671 736,171
광주 14,504 2.1% 652,337 95.8% 8,085 1.2% 2,827 0.4% 133 1,149 1,565 680,600
전남 53,360 4.2% 1,170,398 92.2% 26,686 2.1% 7,210 0.6% 1,048 8,010 3,311 1,270,023
전북 63,175 5.7% 991,483 89.1% 35,923 3.2% 9,320 0.8% 1,087 7,130 4,232 1,112,350
부산 1,551,473 73.3% 265,055 12.5% 133,907 6.3% 139,004 6.6% 978 3,236 21,736 2,115,389
경남 1,514,043 72.3% 193,373 9.2% 241,135 11.5% 115,086 5.5% 2,020 5,070 22,863 2,093,590
대구 690,245 59.6% 90,641 7.8% 224,642 19.4% 136,037 11.7% 1,103 2,753 12,772 1,158,193
경북 991,424 64.7% 147,440 9.6% 240,646 15.7% 124,858 8.2% 3,365 6,240 17,664 1,531,637
제주 104,292 40.0% 85,889 32.9% 42,130 16.1% 23,077 8.8% 563 1,286 3,647 260,884
  • 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서울,호남 지역에서 우세했고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는 경기,인천,충청,영남,강원,제주 지역에서 우세했다.
  • 하지만 민주당 김대중 후보가 1위를 차지한 서울도 같은 보수성향 후보인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와 신정당 박찬종 후보의 표차를 합치면 서울에서도 보수진영이 우세했다.
  • 김영삼,정주영,박찬종 등의 보수진영 후보들은 수도권, 충청, 영남, 강원, 제주 지역에서 과반수 이상 득표를 했고 김대중 후보가 있는 민주진보진영 후보는 호남 지역에서만 과반수 이상 득표를 했다.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는 대구, 경북 등 TK 지역에서는 2위를 하면서 선전했고 울산 동구에서는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가 1위를 차지, 울산과 경남에서는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가 2위를 한다. 또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는 강원도에서도 2위를 했으며 경기, 인천과 충청권에서는 20% 내외의 득표율을 보였으며 서울에서도 15% 이상의 득표를 하면서 선전했다. 민자당 김영삼 후보는 서울에서 동남권과 용산구는 물론, 당시 노원구, 강서구, 양천구도 석권했다. 인천에서는 원도심 지역을 석권, 경기도에서는 최전방지역, 외곽지역, 근접지역, 안보의 영향력이 강한 지역, 대도시권 부촌지역, 보수적인 대도시권 위성도시들을 석권했고 강원도, 충청권, 영남권, 제주도의 전 지역을 석권했다. 그리고 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서울 대부분 지역과 인천 부평권, 경기도 서남부권, 호남권 전 지역을 휩쓸었다. 그런데 김영삼, 박찬종, 정주영의 표차를 더하면 보수진영이 서울 전 지역, 인천 전 지역, 경기 전 지역 등 수도권 전역을 휩쓸었다. 보수진영은 그 외에도 강원도, 충청권, 영남권, 제주도를 모두 석권했다. 특히 보수진영은 경기도 일부 근접지역, 외곽지역, 최전방지역과 인천 구도심에서는 70~80%가 넘는 득표를 올렸고 강원도 전 지역과 대전 구도심인 중구, 충남 몇몇 지역, 충북 몇몇 지역, 영남권 전 지역에서도 70~90%가 넘는 득표율을 올렸다.

각주

  1. “김옥선 씨 대통령 후보 등록”. 2019년 6월 18일에 확인함. 
  2.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대한민국 정당사 제4집"
  3. “후보 등록 마감 창구 "해프닝" 속출”. 2019년 6월 18일에 확인함. 
  4. “군소 후보 3명 대선후보 등록 못해”. 1992년 11월 26일. 2019년 6월 18일에 확인함. 
  5. “정주영 대표 재벌해체론 파문”. 2019년 3월 27일에 확인함. 
  6. 후보가 유세장서 유권자 비판 1992년 대선 김대중후보 1992.12.5 동아일보
  7. 표 잘못찍어 제 발등도 찍었다, 민주당 유권자 책임강조 1992.12.5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