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독교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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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독교운동(反基督敎運動) 또는 안티 기독교 운동은 시민운동의 하나로, 기독교에 반대하는 시민사회운동이다. 반기독교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신론자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여 활동한다.

참여

반기독교운동의 참여대상에 제한은 없었으며 대체적으로 반기독교운동에는 반기독교주의자, 인본주의자, 자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신론자[출처 필요] 다양한 사상과 계층에서 참여하여 반기독교운동을 반드시 반기독교주의와 동일시하기는 어렵다.[출처 필요] 하지만 현재 2010년에 비교해보면 개신교에 대한 공격이 역사적 고찰에 대해 국내개신교의 반성의 여지에 있어 고찰의 여지는 있어 보인다.

초기의 한국 반기독교 운동

한국의 반 기독교 운동은 1920년사회주의자들이 한국교회를 비판하면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1920년 초 종교의 존재의의를 부정하며 반기독교주의적 성격의 강연에서 비롯되었다.[1] 기독교의 신사참배와 일제, 조선총독부 등에 대한 타협적인 기독교의 태도 등에 반발하여 반기독교주의가 확산, 반기독교운동이 열렸으며 박헌영, 김단야 등에 의해 반기독교주의 강연이 개최되었다.

1923년 3월 전조선청년당대회, 1924년 1월 경성신흥청년동맹회 등 사회주의계 청년단체로부터 본격적인 반기독교운동이 시작되었다.[2] 1925년 10월 25일 기독교계가 준비한 제2회 전조선주일학교대회에 대한 조직적인 저항의 방편으로 한양청년동맹 등의 주최로 '반기독교대강연회'가 개최되었다.[3][4] 강연에는 박헌영(朴憲永)의 '과학과 종교', 김장현의 '지배계급과 기독교', 김단야는 '기독교의 기원', 홍순준(洪淳俊)은 '기독교는 미신이다', 김평주(金平主)는 '대중아 속지 말아라', 박래원(朴來源) '양면양심의 기독교', 허정숙(許貞淑)의 '현하 조선과 기독교의 해독(害毒)', 등의 주제로 강연이 열렸으나[5][3], 기독교 계열의 밀고로 일제 경찰당국에 의해 해산되었다.

이후 일본 경찰의 탄압과 기독교측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이를 두고 사회주의 계열에서는 일제와 기독교가 유착되어 있는 증거라고 강도높게 비판하여, 기독교계와 사회주의계와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6]

당시 한국교회는 기독교인들조차도 비판할만큼 심각한 문제점들을 갖고 있었다. 월남 이상재 선생은 1923년 "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는 것이지, 민족적인 차이로 우월감을 갖거나 갈등을 겪는 것이 아니다."라며 선교사들의 백인우월주의로 인한 선교사들과 한국인 성직자들간의 내분을 비판하였으며, 춘원 이광수1920년 발표한 《금일 조선교회의 문제점》에서 조선교회의 문제점을 크게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1. 조선 교회는 너무 권위적이고 계층적이다.
  2. 조선 교회는 세상과 교회를 너무 이분화해서 교회에만 치중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인 세상일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는 외면한다.[7]
  3. 상당수 개신교 목사들의 학문수준이 형편없다. 비합리적이고 미신적인 신앙들이 너무 많다. 기도가 만병통치약인 줄 안다. 한민족을 계몽하자면서 미신적 신앙을 전수하니 이게 웬 말이냐?
  4. 조선교회는 개신교천주교 모두 합쳐서 100년이 넘는 선교역사를 가졌는데, 어째 조선에는 제 소리 하나 없이 다 가져온 것이냐? 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은 정체성(자주성)이 없다.
  5. 선교사들과 그들이 인정하는 몇몇 개신교 목사들이 성서 해석의 독점권을 가졌다. 다양하고, 자발적으로 성서를 연구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인정하지 않는다.
  6. 조선의 기독교는 감정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신비적인 체험만을 강조한다.

이렇듯 심각한 조선교회의 문제점들은 당시 조선에 유입된 사회주의 지식인들에 의해 거센 비판을 받게 되었다. 박헌영, 허정숙, 김단야등의 사회주의자들은 기독교정치와 결탁하여 봉건주의, 자본주의제국주의를 옹호하며, 그러니까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현재질서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정당화함으로써 보수하는 역할을 해 왔으며, 미신적 믿음을 갖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 실례로 병고침으로 유명한 장로교김익두 목사는 사회주의자들로부터 "고등무당"이라는 비판을 받았다.[8] 그런데 한국교회가 이들의 비판을 귀담아 듣기보다는 반(反)사회주의운동으로 사회주의자들을 배척하면서, 한국교회와 사회주의자들과의 관계는 나빠졌다.[9]

현대의 한국 반기독교 운동

천주교가 전래되던 18세기 부터 한국에서는 반기독교 운동이 출현하였다. 이때의 반기독교 운동은 유교 성리학이나 실학과 결합한 형태였다. 1930년대 이후 기독교 계열의 탄압으로 주춤하던 반기독교운동은 1980년대 후반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1920년대의 반기독교운동은 사회주의자, 무신론자 위주였으나 1980년대 후반의 한국 반기독교운동은 반기독교주의자, 무신론자, 자연주의자, 인본주의자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였다.

안정복, 신후담의 기독교 비판

안정복성리학이나 실학 외에도 도교노장 사상까지도 두루 수용하였다. 그러나 천주교만큼은 이단사상(異端思想)으로 간주하여 배척에 앞장섰다. 양반과 상민의 존재를 부정하고, 천당과 지옥이라고 하는 것을 들먹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거짓으로 사람들을 속인다는 것이 그가 천주교를 비난하는 이유였다. 천주교의 전파가 평민과 노비 외에도 사대부가의 여성들에게까지 전파되는 등 사회문제가 되자 그는 1785년(정조 9) 《천학고 天學考》와 《천학문답 天學問答》 을 저술하여 정조에게 바쳤다. 《천학고》와 《천학문답》에서 안정복은 천주교의 내세관(來世觀)이 지닌 현실부정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 비판하였다.

안정복은 제자이면서 사돈인 권철신과 사위이자 권철신의 동생인 권일신(權日身)이 천주교에 호의를 보이자 이들에게 수많은 서찰을 보내 천주교에 빠지지 말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그에게 천국과 지옥의 존재와 양반 상민의 계급을 부정하는 것은 곧 일체의 반질서적인 사상으로 간주되었다. 실학사상은 인정되지 않았으나 천주교에 대해 적대적이었던 것만큼은 정주학으로 재무장한 노론 벽파 정권에서도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신후담정도전불씨잡변을 본받아 천주교하느님관에 대한 반박론인 서학변을 썼다. 서학변에 의하면 현실의 삶도 알지 못하면서 사후세계를 어떻게 재단하느냐는 것과 인간에게 죄를 짓고도 하느님만 믿으면 모든 죄가 사라지느냐는 등의 반론을 담고 있다.

반 기독교 감정의 원인

기독교가 기형적인 현상인 대형 개신교 교회(메가처치)들의 등장[10]과 세습, 미군정, 이승만 독재정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부독재정권, 이명박 정권에 이르는 지배질서와의 결탁[11], 그리스도 신앙을 예수 믿고 천당가자는 개인주의적인 신앙생활에 한정함으로써 생기는 사회정치에 대한 무관심(예언자적인 신앙의 부재), 교회하느님 나라의 모델이 되기보다는 교인이라는 고객의 니즈에 맞춘 종교서비스 기관으로 변질된 현상인 기독교상업[12], 기복적이고 미신적인 신앙[13], 교회법에 따른 엄격한 처벌부재와 무인가 신학교(이를테면 00신학연구원)난립으로 인한 저질 신학생 양산이 원인인 일부 개신교 목사들의 비윤리적이고 반지성적인 모습, 물량공세와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흑백논리가 특징인 저돌적인 전도, 이웃 종교기독교 근본주의적인 개신교 이외의 기독교 전통(진보적인 신학, 로마 가톨릭, 성공회, 정교회 등)들에 대한 적대등의 문제들을 보이고 있다.반 기독교 운동은 한국 기독교의 문제들에 대한 반감이라고 할 수 있다.

온라인 반 기독교 운동

1990년대 이후 한국의 PC통신에서 안티기독교 클럽과 카페가 결성되었으며, 1995년 인터넷의 보급으로 안티 기독교 웹사이트가 처음으로 결성되었다. 아울러 개독이라는 단어도 여기서 처음 유행하였다.[출처 필요]

안티 기독교는 2000년에 다음에 '클럽 안티 기독교(줄여서 클안기)' 까페를 개설하여 새로운 전환을 맞이 하였다. 이미 다음에는 먼저 개설한 '안티데이' 까페가 있었으나 활동이 저조 하였다. 본격적인 반기독교 활동은 '클안기'로 인해 시작되었고, '십자 불꺼', '검은 십자가', '안티 예수', '기독교 비평' 등의 사이트가 클안기에서 분가하여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클안기'는 명실공히 반기독교 운동의 모체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클안기'에서 분가한 사이트 외에도 자체적으로 생겨난 반기독교 성향의 사이트가 많았으나, 기독교인의 끝없는 분탕질과 관리소홀로 현재 많은 사이트가 사라지고 없다. '클안기'는 까페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후에 생겨난 '개독교박멸을위한시민연대(줄여서 개박연)'과 합쳐서 지금의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줄여서 반기련)'을 만들었다.

2004년 1차 내홍을 겪어 '종교비판시민연대(줄여서 종비련)'란 이름의 새로운 사이트가 분가하였으며, 반기련과 척을 지고 온라인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2007년 2차 내홍으로 반기련의 전신인 '클안기'가 반기련과 결별을 선언하고 지금까지 별개로 활동 중이다.

기독교계의 대응

1920년대 반 기독교 운동에 대한 대응

기독교계 일부[주: 개신교]에서는 반기독교운동에 대응으로 자기비판의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다. YMCA의 진보적 이론가 중에는 반기독교운동의 비판을 수용하기도 하여 기독교계가 현실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을 가질것을 주장하기도 했다.[14] 신흥우, 이대위, 조병옥(趙炳玉) 등은 기존의 기독교계가 복음만을 강조해온 것을 비판, 사회와 경제 등의 분야의 여러 문제점을 신학과 관련지은 분석을 시도했다. 이대위는 기독교와 사회주의의 연원 및 근본사상을 비교 분석하여 양자의 접목을 시도하여 기독교 사회주의를 발표하기도 했다.[14] 하지만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주장에 대해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반감을 갖게 되어 기독교계에는 반 사회주의, 반공주의가 싹트게 되었다.

1990년대이후

1990년대 이후 다시 반기독교운동과 대치하게 되었다. 1990년대 후반 대형교회 목사의 세습, 성직자(주로 개신교)의 비리와 불륜사건 등 사회적문제가 불거지면서 반기독교운동은 확산되었다. 2000년대 이후 기독교계의 대응으로는 기독교계의 내부 반성[15][16]과 건전한 인터넷 문화 운동[16][17]을 하자는 견해와 안티기독교적 활동을 분석하는 활동[18], 악의적이라는 비판과 함께 사탄의 도구라는 견해[19] 등이 있다. 일부 반기독교가 좌파이거나 다른 종교와 연계했다는 견해도 있으며[20], 일각에서는 반기독교운동을 사상적인 문제로도 결부시키나 반기독교운동에 참여하는 대상을 전부 좌파나 좌파 세력의 동조자로 보기는 어렵다.

관련 고리

주석

  1. http://100.naver.com/100.nhn?docid=328799
  2. http://100.naver.com/100.nhn?docid=328799
  3. 반기독교운동
  4.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18395&pt=nv
  5.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6&artid=18395&pt=nv
  6. http://100.naver.com/100.nhn?docid=328799
  7.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소명인 세상일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는 종교개혁자들의 직업에 대한 교훈을 말한다. 종교개혁자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제사장이므로 (베드로전서 2:9), 하느님의 일은 목회자가 하는 일만 뜻하는 게 아니라, 모든 직업이 하느님의 부르심에 따른 성직임을 인식하여, 자신의 일터에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이해하였다. 하지만 한국교회에서는 교회에서 하는 일만 하느님의 일이고, 일반 직업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잘못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 이광수가 《금일 조선교회의 문제점》에서 하고 싶어하는 말이다.《생활신앙으로 살아가기》/정종훈 지음/대한기독교 서회 p.115-116
  8. 주기철 (인물로 보는 한국사 54권)/이지원 지음/파랑새
  9. 《기독교사상》2006년 4월호-한국교회와 과거사고백:민주화시대 이후의 한국교회,조이제.p.199
  10. 침례교 신학자인 신광은은 《메가처치 논박》에서 사람이 지나치게 자라서 거인증 증세를 보인다면 정상적인 성장이 아닌 것처럼, 교회도 지나치게 자란 메가처치의 등장은 정상적인 성장이 아니라고 말한다.
  11. 미군정 시대에는 영어에 능통한 엘리트 기독교인들이 관리로 진출함으로써 미군정과 기독교가 결탁하였으며, 이승만 독재정권시대에는 이승만을 비롯한 관리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자유당 독재정권을 지지했다. 심지어는 3.15 부정선거에 대한 민중들의 항의에서 시작된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자유당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전두환, 박정희,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독재정권시대에는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은 정치신학(기독교인은 올바른 정치참여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야 한다는 신학.나치군국주의적인 독재홀로코스트에 대해 독일교회가 침묵하거나 굴종한 잘못에 대한 유럽 기독교인들의 반성에서 나왔다.), 해방신학등의 사회참여적인 신학들을 비민주적, 반인권적인 한국의 정치상황에 맞게 해석함으로써 군사독재정권에 저항했지만, 한국 기독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은 말로는 정치와 종교의 분리, 중립을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조찬기도회를 열어 독재자들을 축복함으로써 굴종하고,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을 정치 기독교인이라며 단죄하는 잘못을 보였다.물론 군사독재정권의 개발독재로 인한 민중들의 고통에도 도시산업선교회가 들어오면 도산한다는 자본가들의 노골적인 비방과 경찰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노동자들의 인권옹호에 힘쓴 도시산업선교회등의 진보적인 기독교계를 제외한 대다수의 기독교계에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명박 정권의 경우 보수적인 개신교 목사들의 장로대통령 만들기 운동의 산물이다. 그 근거로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는 이명박 장로가 대통령이 되자 이를 축하하는 '국민대화합과 경제발전을 위한 특별기도회'(2008년 1월 9일)를 열었고, 정부요직의 대부분이 개신교 신자들이어서 기독교계에서조차 촌스러운 정실인사라는 논박이 있었다. 촛불시위에 대해 개신교 목사들이 설교시간에 노골적으로 '빨갱이', '사탄', '무식한 대중'이라는 근거없고 인격을 무시한 막말을 해가며 반감을 보였던 것도 개신교와 이명박 정권의 친밀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즉, 한국 기독교의 역사는 일부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을 빼면, 현재질서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옹호하는 보수적인 모습을 보여온 역사였다.《믿음 그리고 행함》/김영재 지음/합동신학대학원 대학교 p.281-282,《복음과 상황》촛불 2.0시대, 교회에 말을 걸다 p.59,57
  12. 메가처치 논박》/신광은 지음/정연
  13. 《왜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믿지 않을까》/김진 지음/위즈덤로드
  14. 네이버 백과사전
  15. Daum 미디어다음 - 뉴스
  16. 올댓뉴스
  17. 경향닷컴 | Kyunghyang.com
  18. [안희환 칼럼] 안티기독교의 활동 분석 :: 1등 기독교신문 크리스천투데이 Christian Today
  19. 올댓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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