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Paranocean/월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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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미도(月尾島)
별명: 어을미도(魚乙未島)[1], 어을미도(於乙味島)[2], 어미도(於味島),
얼미도(突尾島), 얼도(突島), 월성(月星), 제물도(濟物島)
지도

지리

위치 서해
좌표 북위 37° 28′ 31.5″ 동경 126° 35′ 52.1″ / 북위 37.475417° 동경 126.597806°  / 37.475417; 126.597806

면적 0.7㎢[3]

해안선 1㎞
최고점 월미산(月尾山) 108m
행정 구역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
1가

인구 통계
인구 약 4천[4]

1947년에 월미도를 찍은 항공사진.
월미도. 1947년.

월미도(月尾島, 영어: Wolmido, Wolmi Island, Wolmido Island, Roze Island)는 월미산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긴 삼각형 모양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간척되어 육지가 된 인천 앞바다의 섬으로,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갖은 수난을 겪었다. '달의 꼬리를 닮아서 월미(月尾)도'라는 속설과 달리, '얼다(어르다)'의 '얼'과 물(水)을 뜻하는 '미'가 합쳐져 '물이 섞이는(어르는, 휘감아 도는) 섬'이라는 '얼미도'라는 이름이 붙었고, 한자로 음차하면서 '월미도'가 되었다.[5][6][7] '달뫼'를 음차하다가 월미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8]:274-275

월미도는 면적이 0.7㎢밖에 되지 않는 작은 섬이었지만 제물포(지금의 인천항)가 항구 역할을 제대로 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월미도가 제물포 앞에 딱 버티고 서서, 파도와 바람으로부터 제물포에 정박한 배들을 지켜주었기 때문이다. 병자호란몽골 기마병이 바람처럼 달려와 강화도로 피난하는 길을 막아버려 남한산성으로 피신해야만 했던 뼈저린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이 1656년(효종 7)에 제 2의 피난길을 개척할 때 기착지로서 월미도에 월미행궁이 지어지기도 했다.[9]:14-20

그 누구도 인천항 정면에 딱 버티고 선 월미도를 지나지 않고서는 인천항을 통해 서울로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월미도는 개화기부터 한국전쟁 때까지, 외국 군대에게 점령되어 군사 요충지로 쓰이는 기구한 운명을 맞아야만 했다.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 사건 때는 한양으로 들어가는 뱃길을 찾으러 인천에 접근한 이양선들이 입항 전 한 차례 머무르는 섬이었으며,[9]:30 ··가 조차 경쟁을 벌일 때는 조정의 허락도 없이 일제 해군의 석탄 창고가 설치되는 수모를 겪었다.[9]:126 러일 전쟁의 첫 포성이 울린 제물포 해전은 월미도 앞바다(월미해협)에서 벌어졌고, 일제가 승리하고 나서는 병참기지화되었다.[9]:152 1920년대 후반-1930년대 일제 강점기에는 일제가 소위 조선 제일의 유원지라는 명목으로 월미조탕을 비롯한 유원지, 숙박시설을 지어 부유한 자들에게만 호화로운 인공낙원을 제공하였다.[9]:163-174[10]

한국전쟁의 판도를 뒤바꾼 인천상륙작전 당시에는 미군에게 네이팜탄 폭격을 당하고 인천으로 가는 길을 터 주었다. 이 폭격으로 약 120가구 600여 명이 살던 마을이 불바다가 되고 월미도민 100여 명과 월미도에 파견된 육지의 노무자 상당수가 죽었다.[9]:220-245 전쟁이 끝나고 피란에서 돌아온 월미도민들은 월미도로 귀향하여 사라진 마을을 재건하려 하였으나, 휴전 후에 미군부대가 계속 주둔해서, 미군 부대가 물러가자마자 바로 한국군이 들어와 해군 기지를 세워서, 국방부와 인천시가 도민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월미도를 사고팔아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도민들은 '귀향대책위원회'를 꾸려 배상과 귀향을 요구하였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국가가 월미도민들에게 배상을 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1989년 7월 문화의 거리가 조성된 이래, '월미축제', 월미랜드, 문화예술의 장, 만남과 교환의 장 그리고 공연놀이 마당 등으로도 알려지기 시작한 월미도는 인천 하면 떠올릴 만큼 유명한 곳으로 자리잡고 있다. 휴일엔 각지에서 수십만 명의 인파가 몰리는 이곳에는 카페, 회센터 등 조화를 이루며 늘어서 있어 시원한 바다를 바라보며 구미에 맞는 음식을 골라 즐길 수도 있다. 인천 앞바다 1km 거리에 떠있는 둘레 4km의 월미도는 섬 아닌 섬으로 변모하고 인천시민과 그 주변의 시민의 휴식 공간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썰물 때도 갯벌이 드러나지 않아 언제나 바닷물을 볼 수 있으며, 주변에는 횟집이 자리하고 있어 서해안의 별미를 맛볼 수 있다. 월미산에 걷기 좋은 둘레길이 조성되고, 한국전통정원, 전통문화체험관, 한국이민사박물관 등이 설립된 데다가, 월미랜드를 비롯하여 다양한 놀이동산까지 들어서면서, 월미도는 인천 명소의 위상을 되찾고 있다.[11][12]

ㅁㄴㅇㄹ[편집]

전쟁이 끝난 후 피난에서 돌아온 30여 가구 남짓한 월미도민들은 월미도로 돌아와 사라진 마을을 재건하려 하였으나, 다른 폭격지와는 다르게 월미도는 폭격 후에도 미군부대가 그대로 주둔한 탓에 도민들은 월미도를 코앞에 두고도 들어갈 수 없었다. 시간이 좀 지나서 닉슨 대통령이 주한미군을 대폭 철수시킨다고 발표하자 주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그런데 1971년 미군이 물러가자마자 한국군이 들어와 해군 기지를 지어버려서 주민들은 여전히 고향에 돌아갈 수 없었다. 주민들은 언젠가 월미도로 다시 돌아갈 날을 꿈꾸면서, 월미도 주변에 정착하여 맨손으로 다시 삶을 개척해나갔다. 그러나 이들이 지은 판자촌마저 80년대에 개발로 강제 철거되고 만다.

국방부와 인천시 등에 계속 진상규명, 배상, 귀향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넣던 도민들은 1997년 '귀향대책위원회'를 꾸리고 조직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2001년 해군이 철수한다는 소식이 들렸고, 도민들은 다시 귀향할 기대에 들떴다. 그러나 국방부가 주민과는 의논 한 번 없이 마을 부지까지 모두 인천시에 팔았고, 인천시가 거기에 공원을 조성하겠다고 계획을 발표하여 도민들은 또다시 국민의 피해를 외면하는 정부와 힘겨운 투쟁을 벌여야 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이들은 2004년 10월 17일부터 지금까지 매일 월미공원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다.[9]:268-282

2005년 한인덕 씨가 위원장으로 취임한 뒤 귀향대책위원회는 고령의 도민들이 세상을 뜨기 전에 하루빨리 사과, 배상, 귀향을 쟁취하기 위하여 인천시청 앞 1인시위를 하는 등 적극적인 요구에 나섰고, 인천의 시민단체, 언론, 지자체, 일부 국회의원들이 차츰 월미도민 배상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2006년과 2012년 두 차례 발의된 특별법이 '한국전쟁 때 폭격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어떻게 월미도 주민들에게만 배상을 하느냐'라는 주장에 막혀 입법이 무산되었고, 2017년 3월에 발의된 법률안도 국회에 계류된 상태이다. 2006년 4월 귀향대책위원회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에 진실 규명 신청서를 제출하였고,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월미도 미군 폭격 사건'에 '진실 규명 결정', 즉 월미도민이 입은 피해에 대해서 국가가 책임을 지고 배상을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국방부에서는 매년 9월 '인천상륙작전 승전 기념식'을 주최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월미도의 유가족들과 주민들이 매년 9월에 '월미도 미군 폭격 희생자 위령제'를 지내오고 있다.[9]:278-286 국방부는 여전히 배상 불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역사[편집]

월미도의 역사는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조선 말까지는 효종 때 월미행궁이 지어졌다는 승정원일기 외에는 역사에 등장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1][10] 지도를 보아도 세종실록지리지동국여지승람에도 월미도는 전혀 기록되지 않았고, 대동여지도에 와서야 '월미'라는 표기에 '행궁'이라는 부기가 붙어 나온다.[8] 그러나 서해안과 남해안에서 서울로 오는 배는 반드시 월미도 서쪽 바다, 월미해협을 거쳐가야 했기 때문에 월미도는 백제 때부터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무역, 군사 요충지로 역할했을 것이다. 조선 때는 인천도호부 소속이었는데, 1653년(효종 4)에 용종진이 설치되면서 그에 편입되었다.[5]

월미행궁이 지어지다[편집]

기록을 토대로 그린 월미행궁 배치도.
기록을 토대로 그린 월미행궁 배치도. 여 지도서에 나타난 월미 행궁은 전체가 28칸으로 이루어진 목조 기와 건물이다. 즉 정전 8칸‚ 동월랑 4칸‚ 서월랑 4칸‚ 남월랑 7칸‚ 수직간 3칸‚ 내중문 1칸‚ 외중문 1칸이다. 외전과 내전의 구분 없이 단지 외전인 정전만 있는 격이 낮은 행궁으로 볼 수 있다. 보통의 관아나 객사처럼 단순하게 꾸민 소박한 건물로 추정된다.[13]
월미행궁이 그려진 지도의 일부.
대옹여지도에 그려진 월미행궁.

병자호란 때 미처 강화도로 피난할 틈도 없이 몽골 기마병이 쏜살같이 달려와 길목을 막아버려 남한산성으로 피신해야만 했던 뼈아픈 경험을 겪은 조정은 강화도로 가는 제 2의 피난길을 개척했다. 경로는 다음과 같았다.

서울-영등포-인천도호부-월미도-영종도-강화도

이때 월미도에도 임시 거처로서 1656년(효종 7) 홍명하의 건의[14]로 인천부사 윤부가 비밀리에 월미행궁을 세웠다. 인천에서 영종도로 바로 가지 않고 월미도에 들러 머물렀다 가는 것은 물때를 맞추기 위해서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다행히도 병자호란 이후 200년 간 평화가 지속되면서, 임금이 월미행궁으로 올 일은 한 번도 없었다. 1695년(숙종 21)년 행궁이 중건되었고, 북벌론이 수그러들면서 그 기능이 상실되어 조선 말 고종 때 헐어버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행궁에는 수직군(守直軍)이 배치되어 관리를 담당했다고 하는데, 이는 근처 월미도 주민들로 추측된다. 비슷한 시기에 축조된 다른 행궁에 비해 규모가 상당히 작았다.[15] 영조 대에는 방치가 되어 달랑 승려 한 명이 관리를 했다.[16]이후 정조 때 두 번 언급된다.[17][18]

월미행궁의 터가 어디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를 확증할 만한 유물이나 유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문헌에서 보이는 행궁의 위치는 '영종진의 남쪽 수로 7리', '일본 해군 석탄고'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15] 영종도를 거쳐 강화도로 가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영종도로 바로 갈 수 있는 서북쪽 해안가 영종 나루터에 지어졌다는 설도 있다.

세월이 흘러 19세기 무렵, 이 행궁이 퇴락하여 터만 남았을 때, 정체모를 이양선이 월미도에 나타나면서부터 월미도의 수난시대는 시작된다.

로즈 제독.

병인양요 때 '로즈 섬'으로 소개되다[편집]

1866년 이양선 한 무리가 월미도와 작약도 사이 월미해협에 들어와 닻을 내렸다. 바로 병인박해를 핑계로 조선을 침략하러 온 프랑스 극동함대였다. 함대의 소형 전투함 데룰레르호에는 박해를 피해 조선을 탈출한 프랑스 신부 리델과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이 타고 있었다. 이들을 길잡이로 삼아 극동함대는 9월 23일 월미해협에 정박을 했다. 9월 24일에는 기함 프리모게호만 월미해협에 남고 나머지 함선들이 염하를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는데, 이때 사방에서 몰려온 조선인들이 산등성이에 올라 물살을 거슬러 오르는 배들을 구경했다고 한다. 거대한 배가 돛도 없이 해류를 역행해 올라가는 광경은 조선인들에게 놀라움과 두려움 그 자체였다. 한강 하구를 찾은 군함들은 25일 양화진까지 들어갔고, 27일에는 서강나루에 이르렀다. 서강나루는 삼남 지방에서 거둔 세곡이 서해안을 타고 올라와 화물을 내리는 종착지로, 조선의 목구멍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조정은 급하게 의논을 했으나 마땅히 뾰족한 수가 없었고, 적당히 물러가라는 편지만 보낼 수밖에 없었다. 정찰을 마친 프랑스 함대는 복귀하였다. 이후 10월 14일 로즈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강화성을 점령하였다. 관청이란 관청에는 죄다 불을 지르고 외규장각 의궤를 비롯해 갖가지 도서를 약탈한 프랑스군은 정족산성에서 양헌수 장군이 승리하자 놀라 철수하였다.[9]:24-39

이때 프랑스 해군은 정찰을 하면서 크고 작은 섬들에 사령관과 장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붙였다.[주 1] 물론 가장 중요한 섬에는 최고 사령관 로즈 제독의 이름을 붙였는데, 그 섬이 바로 월미도이다. 이후 조선에 찾아오는 모든 서양 제국주의 세력은 월미도를 로즈 섬이라 부르게 된다. 그리고 이 지도는 5년 뒤 미국 함대가 월미도를 찾아올 때 로저스 제독의 손에도 들려 있었다.[9]:42

신미양요 때 다시 정박지가 되다[편집]

이양선은 1871년 월미해협에 다시 나타난다. 바로 1866년 일어난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1871년 미국의 로저스 제독이 전함 5척, 병사 1,230 명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한 것이었다. 이들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가 만든 항해용 지도를 바탕으로 조선에 접근했지만 그리 정확한 지도는 아니어서 제독은 5월 23일 입파도에 정박을 하고 휘하의 블레이크 함장에게 탐측대를 꾸려 인천과 강화해협 근해에 안전하게 정박할 곳이 어딘지 찾아보게 했다. 블레이크는 닷새 뒤 5월 28일 돌아와서 월미해협이 정박하기에 최적의 장소라고 보고했다. 이튿날 29일 오전에 출발한 함대는 하루종일 서해를 거슬러 월미도와 작약도 사이 월미해협에 정박했다. 로저스 제독은 철수할 때까지 모든 지휘를 여기에서 내렸다. 강화도에 상륙하여 손돌목 돈대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어재연 장군의 부대를 학살한 미군은 6월 12일 정박지로 귀환하고, 20일 간 우물쭈물대다가 7월 3일 철수한다. 이후 79년 뒤 미군은 인천상륙작전 때 월미도에 다시 한 번 찾아온다.[9]:44-78

운요호 사건 때 또다시 정박지가 되다[편집]

해가 네 번 지나고 1875년 9월 19일, 이양선이 월미도 연안에 또다시 나타난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달랐다. 이전에 온 배보다 크기가 눈에 띄게 작았고, 딱 한 척밖에 없었다. 바로 이노우에 요시카 함장이 탄 운요호였다. 이노우에는 20일 월미도 앞바다에 운요호를 정박시키고, 무력 충돌을 유도하기 위해 작은 보트 하나에 직접 타서 강화해협, 초지진 바로 앞으로 갔다. 강화해협에서 적을 막지 못하면 한양까지 그대로 길을 터주게 되므로, 조선군은 이노우에가 탄 보트에 포탄 세례를 퍼부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이노우에 함장은 월미도로 복귀하고, 이튿날 초지진에 상륙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목적을 달성한 운요호는 28일 당당히 나가사키로 돌아간다. 이 사건으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된다.[9]:80-96

임오군란 때 일제 외교관의 피난처가 되다[9]:98-119[편집]

1877년 11월 20일, 일제의 외교관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가 월미도 서쪽 바다에 상륙한다. 목적은 일본 외교관이 조선에 상주할 수 있게 하는 것과 부산 외에 또 개항할 항구 두 곳을 고르는 것이었다. 조선은 한양에서 가장 먼 곳을 개항하기를 바랐고, 일본은 가장 가까운 곳을 개항하기를 바랐다. 따라서 하나부사는 인천을 개항시키려고 갖은 애를 썼다. 네 번 시도한 끝에 하나부사는 1881년 김홍집과 협상을 타결하여, 쌀을 수출하지 않는 조건으로 20개월 뒤인 1882년 9월에 인천을 개항하기로 하였다. 개항이 결정되고 하나부사는 민비의 친척 오빠이자 조정의 실권을 쥔 민겸호에게 별기군을 창설하라는 편지를 보낸다. 민겸호는 그 말을 그대로 따라서 별기군을 창설하였고, 이것이 구식 군인들의 해묵은 불만을 폭발시켜서 임오군란이 일어난다. 민겸호와 별기군 교관들을 살해한 분노한 부대와 민중들은 경기감영에 있는 일본 공사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부사가 있었다.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하나부사와 공사관 장교들은 조정이 병사를 보내 그들을 진압할 때까지 공사관에서 버티기로 한다. 그러나 기다려도 기다려도 관군은 오지 않았고, 결국 하나부사는 비가 내리던 밤 공사관을 탈출하여 이튿날 오후 3시에 인천에 도착한다. 밤새도록 걸어 피곤에 쩔은 하나부사 일행 인천부 청사에 들어가고, 서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전해듣지 못한 인천부사 정지용은 그들을 따뜻하게 맞아준다. 그리고, 밥을 먹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총소리가 들리더니 청사 벽에 총알이 박힌다. 관민들이 여기까지 추격한 것이었다.

하나부사는 정면돌파를 택했다. 관원들이 하나부사를 둘러싸고 청사 문을 나서니, 손님이 아니라 적임을 깨달은 인천부 병사 수십 명이 그들에게 창을 겨누고 있었다. 이에 일제 장교가 권총을 두어 발 쏘자 병사들이 놀라 달아났다. 하나부사 일행은 그 틈을 타 바닷가를 향해 죽기 살기로 뛰었다. 관교동, 숭의동, 도원동을 거쳐 제물포에 다다른 공사들은 어부들의 배를 뺏어서 월미도로 나아가, 간신히 상륙했다.

그러나 여전히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하나부사는 공교롭게도 인천부에서 쉬고 있을 때 외국 증기선이 남양만에 정박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참이라, 먼저 바다로 나가서 기선을 기다리기로 했다. 월미도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 닻을 내린 그들은 하룻밤을 꼬박 새서 기다렸지만 기선을 전혀 보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이튿날에는 안개가 짙게 끼어서, 기선이 나와도 잘 보이지가 않았다. 그런데 때마침 안개 속에서 작은 배 하나가 나타났다. 장교들은 어부에게 총을 들이밀며 협박을 했고, 어부는 겁에 질려 30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서양 배를 봤다고 털어놓았다. 해가 높이 뜨자 안개가 걷혔다. 안개 속에서 기선의 윤곽이 보이자 일행은 허겁지겁 일장기를 높이 달았다. 기선은 일장기를 보고 일행을 태웠다. 이 배는 영국의 측량선 플라잉피시호였다. 초췌한 몰골에 놀란 선원들에게 공사들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환대를 받았다. 이들은 7월 29일 공사관을 탈출한 지 엿새 만에 나가사키에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하나부사는 8월 12일, 이번에는 군함 4척에 육해군 1천 명을 이끌고 다시 제물포항에 발을 디뎠다. 며칠 뒤 하나부사는 조정을 찾아가 주모자를 처벌하든지 전쟁을 하든지 선택하라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였다. 인천 개항은 20개월에 임오군란까지 더해져서 한참이 연기되어, 1883년 1월에 개항되게 된다. 현 북성동 일대가 그의 이름을 따서 '화방정(花房町)'으로 불리기도 했다.[19][9]:98-119

열강의 창고로 전락하다[편집]

일제가 석탄 창고 부지 차입을 신청할 때 첨부한 지도.
일제가 석탄 창고 부지 차입을 신청할 때 첨부한 지도.

월미도 행궁 터로 추정되는 북사면 일대가 일본 해군 석탄고로 무단으로 사용된 것은 18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1885년, 일본은 이 부지를 사들이려다 월미행궁 터이기에 매매가 불가함을 알았다. 그러자 1888년 2월 22일, 인천항의 일제 영사가 본국 외무차관에게 서신을 한 통 보낸다.

인천항 월미도에 있는 우리 해군 석탄창고 자리가 원래 조·일 양국 간에 확실한 조약을 맺어 마련한 것이 아니기에, 그 구역이 확정되어 있지 않아 주변에 돌담을 두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조선인들이 마음대로 들어와서 물건을 훔치거나 파괴해 피해가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경비병을 한 명 두기로 했으니 조금 나아질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 충분하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석탄창고는 위에 월미산이 높게 자리하고 있어 인천항의 각국 거류지나 기선이 지나가는 통로에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청국인을 비롯해 다른 외국인들은 아직 그곳에 우리 창고가 있다는 것을 모를 정도입니다. 현재 석탄고의 위치는 석탄을 부리고 싣기에도 무척 편합니다. 지금 조선과 확실한 조약을 맺어 우리 것으로 해놓고 석탄고 주변 땅까지 빌려 둔다면 나중에 우리 해군을 위해 굉장히 도움이 되고, 한편으로는 외국이 그 땅에 석탄고를 짓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천항에 와 있는 함대의 함장들 및 서울의 공사와 상의해 보니 모두 저와 같은 의견이었습니다. 이 제안에 대해 처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월미도 지도를 같이 보내드립니다.

이 서신에서 중요한 내용은 밑줄 친, '조약을 맺지 않았다'는 부분이다. 이 해 1888년 일제 정부는 월미도 부지 4,900평을 조차하는 대신 매년 은화 80원을 납부하겠다고 조정에 반강제로 제안을 했는데, 조정이 사정을 조사하니 애초에 땅을 일제에 빌려줬다는 기록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즉 일제는 일단 허락도 안 받고 석탄 창고를 지어놓은 뒤, 나중에 그 땅을 빌려달라고 뻔뻔하게 요구를 한 것이다. 조정은 처음에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월미도에 (이미 들어왔지만) 다른 나라의 군사 시설을 들일 수 없다고 거절하였으나, 일제의 강압에 결국 양력으로 1891년 1월 12일, 조선의 독판교섭통상사무를 맡은 민종묵은 일본의 근둥 대리공사와 '월미도 부지조차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20]

그런데 이런 짓을 하려는 나라가 일제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청나라러시아 제국도 월미도에 석탄 창고를 지으려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월미도가 당시 군함의 동력원인 석탄을 조달하기에 딱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을 지배하는 나라만이 월미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임오군란으로 하나부사가 쫓겨나고 조선을 장악한 청나라는, 처음에는 산둥 반도에서 인천까지 거리가 짧아 석탄고를 요구하지 않았으나, 일제가 급격히 성장하자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1889년 12월 월미도 서북 지역에 석탄고를 설치하고 싶다고 조정에 요청을 한다. 그런데 여기는 이미 위 편지대로 일제가 석탄고를 지은 자리였다. 이에 청은 하는 수 없이 월미도 동쪽, 일제 석탄고 건너편에 부지를 마련했는데, 정작 창고를 못 지었다. 그러다가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났고 청이 패배하면서 일제가 그 부지에 군수물자 창고를 지었다. 이때 일제는 랴오둥반도까지 차지하자 삼국 간섭을 당한다. 삼국간섭으로 러시아의 위력을 실감한 조정은 러시아를 이용해 일제를 견제하려고, 월미도 남쪽 지역 4만㎢ 부지를 러시아에게 내준다. 러시아는 마음 놓고, 석탄고, 병원, 연병장, 사격장까지 건설할 수 있었다. 한편 미국의 석유 제품 회사 타운센드는 조선의 석유 제품 시장을 독점하기 위해 1894년부터 부산 절영도와 월미도 등에서 부지를 물색하였고, 그 해 월미도에 5백만 갤런 규모 석유저장고를 건설하였다.[9]:122-130[21]

러시아를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통째로 팔아넘겨지다[편집]

1899년 봄 조선인 김준희와 임원상은 조정의 관리에게 뇌물을 주고, 외국 석탄고와 민가 53호(월미도 주민들의 마을)를 제외한 월미도 전체를 개간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이들과 친일파 송정섭은 월미도 섬 그 자체를 요시카와 시타로라는 일본 상인에게 15만 원을 주고 팔아넘겼다. 일본 상인은 월미도 땅에 다음과 같은 팻말을 설치했다.

일본, 미국, 러시아의 석탄고와 민가 53호를 제외하고 모든 땅은 대일본인 요시카와 시타로의 소유이다.

그런데 조선인들이 판 권리는 개간권이었지, 소유권이 아니었다. 따라서 개간권으로 토지를, 그것도 외국인에게 판 행위는 엄연한 불법이었다. 이 일이 알려지자 조정은 송정섭과 연루된 조선인들을 즉시 체포하고, 다시 사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일본 상인은 쉽게 되팔려 하지 않았다. 이 사건의 배후로는 일제가 지목되는데, 당시 삼국 간섭으로 반환한 랴오둥 반도에 러시아가 냉큼 해군 기지를 지어 러시아에 대한 반감과 견제의식이 격화되었기 때문이다.[9]:130-133

러일 전쟁에서 제물포 해전의 현장이 되다[편집]

따라서 월미도에서 일제와 러시아의 긴장도는 최고조에 달할 수밖에 없었고, 월미도 어딘가에서 전쟁이 벌어질 것임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1903년 8월 전쟁을 예감한 각국 열강은 자국 공사관 호위와 정찰을 목적으로 군함을 파견하였다. 영국이 가장 먼저 시리어스 함을 보냈고, 미국이 빅스버그 함, 프랑스는 파스칼 함, 이탈리아는 엘바 함, 독일은 한사 함, 일제는 치오다 함을 파견했다. 1904년 1월에는 러시아의 최신 순양함 바략이, 6일 뒤에는 소형 포함 카레이츠 호가 제물포에 입항했다. 이들은 모두 월미도 서쪽 앞바다에 정박했는데, 그 모습이 국제 함선 박람회와도 같았다.

일제의 군사 기지가 되다[편집]

그리하여 1904년 5월 말, 러시아 발틱 함대가 대한해협에서 일제 함대에 궤멸되면서 러일 전쟁은 일제의 승리로 끝났다. 같은 해 8월 월미도에 주둔한 일본군은 월미도를 통째로 군사 지역으로 지정하고, 작전상 필요하다며 포대를 지은 뒤, 월미도 북쪽에 있던 가옥 21채를 전부 사들여서 타운센드 사의 석유창고 옆으로 강제 이주시킨다. 1905년 5월에는 모든 민가를 강제로 철거한다고 대한제국에 일방적으로 통보하였다. 이에 대한제국의 인천항 감리는 일본에게 계획을 철회해달라고 요청했는데, 대답은 이러했다.

이 일은 오로지 대한제국을 보존하고 동양의 평화를 지키는 일로, 군대 수십만을 출병하여 생명을 돌보지 않고 수억만 군사비를 지출하여 하는 일이니 주민들이 다소 불안해지는 일 따위를 한가롭게 논하고 있을 수 없다. 또 군사상 필요한 땅을 사용하는 문제는 양 정부가 협약한 것인즉 주민들이 각자 비용을 마련하여 제 집을 철거하더라도 이치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데, 실로 주민들의 사정을 살펴 가옥 철거 비용 및 땅값을 적절히 모상하니 원망할 것 없다.

이를 시작으로 월미도 주민들은 큰 일이 일어날 때마다 매번 대대로 살던 곳을 떠나야만 하게 된다.[22][9]:152-155

조선 제일의 유원지가 들어서다[편집]

근대 항구 시설이 건설되다[편집]

일제는 포츠머스 조약으로 러일전쟁을 완전히 마무리짓고 을사조약에 연이은 한일 병합 조약으로 1910년 8월 22일 조선의 국권을 피탈하였다. 경술국치를 전후하여 일제는 인천에서 쌀을 더욱 효과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월미도에 근대 항구 시설이 속속 지었다. 러일전쟁 직후인 1906년에는 월미도 북단과 인천역으로 이어지는 철길을 놓았다. 처음으로 월미도가 육지와 연결된 것이다. 그때 소월미도에 작은 부두도 같이 지었다. 만주에서 콜레라가 창궐하자 1907년에는 월미도 남서쪽 끝에 해양검역소(밑 관광지도)를 설치했다. 경술국치 1910년에는 월미산 정상에 무선 전신소도 세웠다.

이때 일제가 건설한 시설 가운데 눈여겨볼 만한 것은 1903년 일제의 강압으로 대한제국이 일본인 기술자를 초빙하여 세운 소월미도 등대(밑 관광지도)로, 팔미도 등대와 같은 시기에 설치되어 인천항의 눈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러나 인천항의 수심이 너무 낮아 만조 때가 아니면 배가 진입할 수 없는 문제는 여전했는데, 이는 1918년 갑문식 선거(도크, 밑 관광지도)가 설치되면서 해결된다. 이렇게 되자 더 이상 배들은 만조가 아닐 때마다 월미도에 정박하지 않아도 되었다. 갑문을 설치하면서 1917년 일제는 월미도와 육지를 잇던 철로 자리에 돌을 쌓아 방파제를 지었다. 철로는 경부선과 경인선이 개통되어 열차로 수송할 화물의 양이 줄어드면서 1911년 철거되었다. 새로 쌓은 방파제는 파도와 북쪽에서 흘러오는 모래펄이 항구와 선거에 쌓이는 것을 막아주었다. 몇 년 후에는 시멘트를 바르고 철제 난간을 달아 1㎞ 남짓한 왕복 2차선 도로를 닦았다. 월미도는 이제 나룻배를 잡아 타야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아무 때나 걸어서든 차를 타서든 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유원지로 개발되다[23][편집]

이 무렵 인천의 경기는 예전만 못했다. 조선에 경부선경원선 등 철도가 놓이면서 항구로 무역을 할 필요가 옅어졌기 때문이었다. 이에 1918년 인천부는 월미도를 '풍치지구'로 지정, 유원지로 개발하였다. 가까운 경성에서 관광객을 끌어모음으로써 인천의 경기를 활성화하고 나아가 인천의 인구까지 늘어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제방을 쌓고 월마도를 개축한 것도 이 관광 사업의 일환이었다. 이즈음 일제가 강제로 세운 석탄고도 철거되었다.[24]

실제로 월미도는 유원지로서 손색이 없었다. 일단 경치가 빼어났다. 서쪽으로는 서해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지고, 동쪽으로는 인천항과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또 원래부터 살구나무가 많은 데다가 청일전쟁, 러일전쟁 때 일본에서 벚나무를 많이 들여와 심었기에 봄이면 벚꽃이 만발하여, 섬 전체가 하얗게 물들어 아름답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921년 일본의 공원학자 다무라 박사가 공원 설비를 위해 월미도를 둘러보고는 '동양 제일의 절경'이라며 감탄을 할 정도였다. 거기에 교통도 편리했다. 서울에서 인천역까지 1시간 40분, 인천역에서 월미도까지 가는 데 걸어서 20분이었다. 서울에서 오전에 출발에 월미도에서 해수욕을 즐기다가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는 당일치기 여행지로 딱이었다.

각 시설의 이름을 표기한 월미도 관광지도
월미도 관광지도. 각 시설의 이름을 임의로 표기하였다.요시다 요츠사부 作.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소장.

인천부에서 시작한 월미도 개발은 1923년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월미도유원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된다. 이 회사는 월미도 다리가 놓이자 북쪽 산기슭에 각종 시설을 지었다. 이때부터 해수욕장, 호텔, 별장, 고급 유흥주점, 상가 등 위락시설이 하나둘씩 들어선다. 월미산 둘레를 한 바퀴 빙 도는 일주도로는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닦았고, 그 주위에 벚나무를 심었다.

월미조탕[편집]
월미조탕 물놀이장 풍경 채색사진.
월미조탕 물놀이장 풍경 채색사진.

월미도! 하면 바로 월미조탕이 떠오를 만큼 조탕은 큰 인기를 끌었다. 조탕(潮湯)은 목욕탕이나 온천과 비슷한데, 바닷물을 끓여서 목욕물로 썼다. 조선인에게 '수영장'이란 그야말로 문화 충격이었다. 1923년 7월 10일 개장한 첫날 하루에만 이용객이 500명이 넘었다고 한다. 비누 한 장에 2전, 수건 한 장에 1전이었다.

임해학교[편집]
임해학교 교사 사진
임해학교 교사. 2층 건물에 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25]

임해(臨海)학교는 '바닷가 학교'라는 뜻으로, 정식 학교는 아니고 경성과 인천의 학생들이 여름방학 동안 심신을 단련하러 오는, 말하자면 수련원이었다. 애국부인회 인천지부와 간호부인회 인천지부, 그리고 일부 독지가들의 후원으로 1923년부터 하계 방학기간을 이용하여 40일간 개교하였다.[25] 물론 이런 좋은 시설이 대개 그렇듯이 조선인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9]:169

인천항 월미도 산록에 재한 임해학교는 아동으로 하야금 광할웅대한 대자연에 접케하야써 심신의 전환을 도한다는 목적으로 금반불소한 자금을 투하야 신설하고 내 이십칠팔일 경에 개교되리라는대 이에 인천공립보통학교에서도 참가코저 누차교섭하얏스나 조선인학교라는 구실 하에 퇴각을 당하고 조선인 학생은 다만 그 부근 해수욕장에서 수영만 하기로 되얏다더라. -《동아일보》, 1923년 7월 23일.[26]

하나부사 우물[편집]

지도에 나온 '하나부사 우물(화방우물)'은 위에 적은 일본 공사 탈출 사건에서 하나부사가 월미도로 튈 때 목을 축였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우물이다. 북성동이 화방정으로 불린 것처럼 이 우물도 그의 이름을 땄다.[19][9]:170

아고타 신사[편집]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1908년 월미산 정상에 있던 서낭당을 허물고, 그 자리에 아고타 신사를 지었다. 여기에는 전쟁의 수호신을 모셔서, 앞으로 벌일 무수히 많은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였다. 이렇듯 월미도는 일본인에게 특별한 역사적 명소였다. 1915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철도여행안내》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용궁각[편집]
월미도 용궁각을 간조 때 찍은 사진.
간조 때 용궁각. 만조 때는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여 운치를 더했다.

1937년에 바다에 기둥을 박고 그 위에 세운 '바다 위 요정' 용궁각은 월미조탕과 더불어 월미도의 또다른 명소로 자리잡았다. 술과 음식을 팔면서 사방으로 난 창문을 통해 낚시까지 할 수 있는 고급 음식점이었다. 물 위에 자리잡은 탓에 바다가 들고남에 따라 약간씩 흔들렸다는 믿기 어려운 풍문까지 돌았던 용궁각은 광복 후 전소되었다.

입장 인원과 입장료[편집]

당시 월미도유원지 입장 인원은 다음과 같다.[27]:107

연도 인원(명)
1927 69,800
1928 72,390
1929 86,640
1930 103,900
1931 81,200
1936 125,000
1937 123,000

당시 월미도유원지 입장료는 다음과 같다.[27]:107

내역 요금
입장료 대인 20전, 소인 10전

(물놀이장 사용료 포함, 단체 20인 이상 체감할인 회수권 발행)

가족탕료 80전-1원
대실료 1원 50전 - 3원
홀 사용료 30-35원
해수탕 호텔 3원 50전 - 6원 50전
별장 요금 60-230원

1987년 7월 '월미도 문화의 거리'가 조성된 이래 문화예술 공연과 월미축제 등 각종 다양한 행사가 펼쳐지고 있다.

인천상륙작전[편집]

1950년 9월 10일 미군 항공모함에서 출격한 항공기들이 95개의 네이팜탄을 월미도 동쪽 지역에 투하하고 기총소사를 하는 방식으로 폭격하여 많은 민간인이 사망했다.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10 명이고, 실종자와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사람을 포함하면 실제 희생자가 10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진실화해위원회는 추산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미군이 민간인 희생을 줄이기 위한 기본적인 조치 없이 월미도 전체를 무차별 집중 폭격한 것은 국제법 등에 위반된 작전이라며, 한국과 미국 정부가 협의해 희생자와 쫓겨난 피해 주민들에 합당한 피해 보상과 귀향 대책을 취하도록 권고했다.[28]

시설[편집]

월미공원[편집]

A small city across a gray waterway under lowering gray clouds. A road leads to the city across a causeway. Mountains with snow and a low treeline form the backdrop. A few boats are in the water.
월미도 월미공원 전통정원지구

한국이민사박물관[편집]

놀이동산[편집]

월미테마파크(월미랜드)[편집]

비취랜드[편집]

마이랜드[편집]

바이킹 놀이동산[편집]

슬링샷[편집]

시설[편집]

  • 월미도에는 마이랜드라는 월미도 테마파크가 있으며 몇가지 놀이기구가 있다.[29] 입장료는 없으며 365일 연중 무휴이다.

같이 보기[편집]

주해[편집]

  1. 단, 한강 하구로 들어가는 길을 탐색하기 전 임시로 정박한 입파도에는 외제니(프랑스어: Eugénie)라는 프랑스 황후의 이름을 붙였다.

각주[편집]

  1. 〈李端相 등이 입시하여 죽은 趙錫胤에 대해 賻儀하는 문제, 推刷都監의 呈訴와 관련하여 變通하는 문제, 湖南 지방의 移秧하지 않은 문제, 太僕寺의 木花를 島中으로 運送하는 문제 등에 대해 논의함〉. 《승정원일기》 136책. 1655년(효종 6) 8월 3일. 上曰, 此意, 亦詳言於御使[御史], 可矣。許積曰, 仁川浦內不缺紫燕島, 其他魚乙未島, 則當以小船用之, 尹檄頃日上來時, 言於臣等矣。 
  2. 〈永宗鎭 應行節目에 대해 아뢰는 備邊司의 啓目/後錄〉. 《국역비변사등록 44책》. 1690년(숙종 16) 음력 10월 12일. 2018년 12월 9일에 확인함. . 인천부의 포진(鋪陳)·그릇·염장(鹽醬)·젓갈류는 조정에서 이미 준비하였는데 영종진에도 유사시에 대비할 각종 물품이 있어야 하겠고, 인천에서 영종도에 이르는 중간에 어을미도(於乙未島)가 있는데 거기에 기와집을 지어 유사시에 어가가 쉬시는 곳으로 삼기로 한 것은 모두 뜻이 있는 일이니 그중에서 갖추어야 할 물건은 일일이 준비하고 준비한 뒤에 혹 오래 묵어 쓰지 못할 것이 있으면 해마다 개비(改備)한다. 
  3. “월미공원: 인천 근대사의 지표”. 2018년 12월 6일에 확인함. 
  4. “동별세대 및 인구”. 《국가통계포털》. 2018년 12월 7일에 확인함. 
  5. “월미도(月尾島)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18년 12월 7일에 확인함. 
  6. 최재용. 《월미도가 달꼬리라구?》. 다인아트. ISBN 8989014204. 
  7. 기호일보 (2018년 11월 5일). “월미행궁 터”. 2018년 12월 8일에 확인함. 
  8. “인천역사 7호-인천 지리의 재발견”. 2018년 12월 8일에 확인함. 
  9. 강변구. 《그 섬이 들려준 평화 이야기》. 서해문집. 
  10. “월미도-대한민국 구석구석 행복여행”. 2018년 12월 7일에 확인함. 
  11. “월미도-대한민국 구석구석 행복여행”. 2018년 12월 7일에 확인함. 
  12. “월미도에서 배만 타면 아깝지”. 2014년 9월 17일. 2018년 12월 7일에 확인함. 
  13. 방혜미. “월미공원-월미행궁 배치도”. 《인천의 공원》. 2018년 12월 8일에 확인함. 
  14. 〈1708년(숙종 34) 4월 21일 정묘 1번째 기사:〉.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 46권. 2018년 12월 9일에 확인함. 그러나 고(故) 상신(相臣) 홍명하(洪命夏)는 행궁(行宮)214) 을 인천(仁川)과 월미도(月尾島)에 설치하기를 건백(建白)하였습니다. 
  15. “월미공원-월미행궁”. 《인천의 공원》. 2018년 12월 8일에 확인함. 
  16. 〈京畿御史 李周鎭이 입시하여 永宗의 行宮을 보살피고 보호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함〉. 《국역비변사등록》 91책. 1732년(영조 8) 음력 5월 15일(윤달). 2018년 12월 9일에 확인함. '영종(永宗)의 행궁(行宮)이 월미도(月尾島)에 있는데 돌보며 지키는 사람이 없이 무너지도록 버려 두었으니 애당초 설치한 뜻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지금은 단지 한 명의 중이 보살피며 보호하고 있어 일의 성격이 더욱 간단히 일시적으로 미봉하는데 관계되니 영종첨사(永宗僉使)로 하여금 보살피며 지키는 사람을 각별히 가려 뽑도록 하고, 무너진 곳 또한 해진(該鎭)으로 하여금 그때그때 보수하게 하는 것이 아마 적합할 듯하니 묘당으로 하여금 아뢰어 처리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아뢴대로 하라고 하였다.
     
  17. 〈戶曹判書 金華鎭이 입시하여 仁川府와 月尾島의 行宮 修改하는 일에 대해 논의함〉. 《국역비변사등록》 160책. 1779년(정조 3) 음력 4월 26일. 2018년 12월 9일에 확인함. '인천부(仁川府)의 행궁과 영종진(永宗鎭) 월미도(月尾島)의 행궁에 본조(本曹)의 낭청을 보내 적간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지방관이 전례에 따라 거행할 일이라서 본조에서 고침으로써 전에 없는 폐단을 만드는 것은 부당합니다. 고칠 때가 되어 각읍(各邑) 공해(公廨)를 다시 짓는 일을 비국(備局)에 보고하면 물력(物力)을 보태주는 예가 있습니다. 이번에도 이 예를 따라 거행하도록 해읍과 해진에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리 하라 하였다.
     
  18. 〈趙熤이 上疏에서 論列한 17가지 조목 중 植木에 관한 조목은 채택할 것을 청하는 備邊司의 啓目〉. 《국역비변사등록》 160책. 1789년(정조 13) 음력 4월 29일. 2018년 12월 9일에 확인함. 그 하나는 영종진(永宗鎭)에 방어영(防禦營)을 설치함은 지나친 일이니 인천부(仁川府)를 옛 제물진(濟物鎭)의 터로 옮기고 방어영을 설치해서 안산(安山) 부평(富平) 금천(衿川) 양천(陽川)의 육군을 관할, 영솔하게 하여 한로(旱路 : 육로)를 방어하도록 하고 또 영종과 화량(花梁)의 주사(舟師 : 수군)를 관할하여 월미도(月尾島)에 중영(中營 : 중군(中軍)의 진영)을 설치하고 전선(戰船)을 배치하여 또 수로(水路)의 방어를 겸하기를 파주(坡州) 교동(喬桐)의 예처럼 하는 일입니다. 
  19. “잉글랜드 리그 실력의 강화학당 축구팀”. 인천시 인터넷신문 i-view. 2017년 4월 13일. 2018년 12월 8일에 확인함. 
  20. 〈1890년(고종 27) 12월 12일 정미 4번째 기사: 월미도 부지 조차 약정서가 체결되다〉.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27권. 2018년 12월 9일에 확인함. 월미도(月尾島) 부지 조차 약정서가 체결되었다.

    〈조차월미도지기약단(租借月尾島地基約單)〉

    이에 일본 정부는 해군을 위한 창고를 건조하고 석탄을 저장하기 위해 조선 경기도(京畿道) 월미도(月尾島) 중의 부지 총 4,900평(坪)을 【한 평은 사방 2미터이다.】 조차한다.
    이 부지의 조차액(租借額)은 매년 은화 80원(圓)을 조선 정부에 완납하는 것으로 정하며, 바로 약정을 교환한 날로부터 계산하여 일본 공사관에서는 매 양력 12월 15일에 이듬해의 조차액을 미리 통리아문(統理衙門)에 교부하여 사수(査收)한다.

    이에 약정서를 체결하고 아울러 지도를 첨부하여 신용을 밝힌다.

    대조선 개국 499년 12월 12일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민종묵(閔種默)

    대일본 명치 24년 1월 21일

    대리공사(代理公使) 곤도 모토스케〔近藤眞鋤〕
     
  21. “미국 타운센드 상회, 일상을 바꾼 석유”. 《우리역사넷》. 2018년 12월 7일에 확인함. 
  22. 한국통사, 박은식
  23. 유연태. 《서울근교여행》 초판. 서울: 넥서스BOOKS. 88쪽. 
  24. 방혜미. “월미공원-일본해군 석탄고”. 《인천의 공원》. 2018년 12월 8일에 확인함. 
  25. 방혜미. “월미공원-인천임해학교”. 《인천의 공원》. 2018년 12월 8일에 확인함. 
  26. “思想界(사상계)의不穩(불온) 生活不安(생활불안)의反映(반영)”.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동아일보》. 1923년 7월 23일. 2018년 12월 8일에 확인함. 4면, 위에서 세 번째, 맨 왼쪽 
  27. 김정은. “유원지의 수용과 공간문화적 변화 과정
    - 창경원, 월미도, 뚝섬을 중심으로 -”
    (PDF).
     
  28. 인천상륙작전 피해 월미도 주민들 손해배상청구소송 한겨레 신문, 2011.3.1.
  29. http://www.my-lan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