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너모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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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선박에게 구조된 프랑스 병사
다이나모 작전
(프랑스 공방전의 일부)
Dunkirk2.gif
날짜 1940년
장소 프랑스 북부 됭케르크
결과 영·프 연합군 34만 명의 철수 성공
교전국
영국 영국

프랑스 프랑스

나치 독일 나치 독일
지휘관
영국 해롤드 알렉산더

영국 버트람 렘지
영국 존 베레커
영국 윌리엄 테넌트
프랑스 막심 베강

나치 독일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다이나모 작전(Operation Dynamo, 1940년 5월 26일 - 6월 4일)은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행해진 작전 중 하나로서, 덩케르크 전투에서 벨기에군과 영국 원정군(BEF) 및 3개 프랑스군 등 총 34만여 명을 구출할 목적으로 실행된 작전이다. 영국 해군 중장 버트람 렘지가 작전을 계획하여,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에게 다이나모 룸(다이나모발전기가 있던 도버 성 지하의 해군지휘소의 방 이름)에서 이 작전에 대한 개요를 설명한 것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1]

9일 동안 860척에 달하는 선박이 급히 모여, 총 338,226명의 병사(영국군 192,226명, 프랑스군 139,000명)을 프랑스의 덩케르크에서 구출하였다. 이 유명한 "덩케르크의 작은 배들"(Little Ships of Dunkirk)에는 여러가지 화물선, 어선, 유람선 및 왕립 구명정협회의 구명정등 민간선박이 긴급히 징발되어 병사들을 해안에서 바다에서 대기중인 대형 선박(주로 대형의 구축함)으로 운반했다. 이 "작은 배들의 기적"은 영국 국민의 마음에 깊히 각인되어 사기를 복돋아 주었으나, 실제로는 병사들의 80% 이상이 항구의 방파제에서 42척의 구축함 등 기타 대형 선박에 탑승해 철수하였다.

철수 경과[편집]

구명정으로 탈출한 영국 병사
병사들의 구조를 엄호하는 영국 해군 기관총수(1940년)

처음 계획에서는 영국 원정군(BEF) 45,000명을 2일 만에 철수시키는 것이었으나, 이것은 독일군이 철수을 저지하는 행동을 개시할 때까지의 시간을 예측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기간에 첫날 7,000명을 포함한 25,000명밖에 탈출할 수 없었다.[2] 5월 27일 이른 아침, 10척의 구축함이 증원되어 구출을 시도하여 해안 가까이에 다가와 수천 명이 구조되었다. 그러는 동안 좁혀진 덩케르크 포위망에서의 철수 스피드는 착실히 올라갔다.

5월 29일 저녁쯤 독일공군의 최초 중폭격이 있기까지 약 47,000명의 영국군 병사가 구출되었다.[3] 다음날 최초의 프랑스군 병사를 포함한 54,000명[4]이 승선했다.[5] 5월 31일 68,000명 및 BEF 지휘관이 구출되었다.[6] 6월 1일 그날 철수을 저지하기 위한 폭격이 격렬해지기 전[2]에 거의 64,000명의 연합군 병사가 출발했다.[7] 6월 2일밤 영국군 후위부대가 60,000명의 프랑스 병사들과 함께 출발했다.[7] 그리고 26,000명의 프랑스 병사가 다음날 밤 작전종료 전에 철수할 수 있었다.[2]

프랑스군 2개 사단은 철수을 엄호하기 위해 남겨졌다. 그들은 독일군 진격을 저지하고, 얼마안가 포로가 되었다. 1940년 6월 3일 후위부대의 잔여 프랑스군 대부분은 투항했다.

다음날 BBC는 [(후위부대 지휘관)해롤드 알렉산더 소장은 이날 아침, 모터보트로 텅케르크 해안을 시찰하여 영국으로 돌아가는 최후의 선박이 출발하기 전에 오르지 못하는 이가 없는지 확인했다.]라고 전했다.

손실[편집]

영국군 및 프랑스군 포로(1940년 6월, 덩케르크에서)

이번 작전은 성공했지만, 영국군이 프랑스에 갖고 들어간 화포등 중장비품 및 차량은 모두 버리고, 수천의 프랑스 병사는 덩케르크 포위망 안에서 포로가 되었다. 6척의 영국 구축함 및 3척의 프랑스 구축함은 9척의 대형 선박과 함께 격침되었고, 19척의 구축함이 손상되었다.[7]200척 이상의 연합국 선박이 침몰했고, 같은 숫자의 선박이 손상을 입었다.[1]

처칠은 자신의 제2차 세계대전에 관련된 저서 속에서 영국 공군(RAF)이 독일공군에게서 철수하는 병사를 지키기 위해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을 밝혔고, RAF의 지원이 없었다면 연합군은 이 철수를 성공리에 끝마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처칠은 또한 해안의 모래가 폭격의 충격을 흡수했다고 이야기 했다.

독일공군기가 132대의 항공기를 잃은것에 비해 RAF의 손실은 474대였다.[7] 그러나 철수하는 병사들은 이 커다란 지원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왜냐하면 안개가 짙어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많은 공군병은 어떠한 지원도 없이 임무를 수행했다.

프랑스도 또한 많은 선박을 철수시에 잃어버렸다. 대부분의 프랑스 해군선박은 항구에서 대기중이었고, 영국군은 독일군이 이들 선박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폭격하고 침몰시켰다.

를==여파== 작전완료 전, 처칠은 작전의 전망에 비관적이어서 하원에서 [무겁고, 엄숙한 이야기를 전할지도 모른다]라고 경고했다. 그 후 처칠은 작전의 성과를 "기적"이라고 말하고, 영국의 언론은 이 철수를 [대실패가 대성공이 되었다]라고 소개했다. 처칠은 6월 4일 하원에서 말하길 [나는 이 구출이 승리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에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철수는 했지만 전쟁은 아직 이기지 않았다]라고 국내에 알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도 "덩케르크 정신"(영국 국민이 단결하여 역경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때 사용된 브렌즈)의 단어는 지금도 영국인에게서 아직 들을 수 있다.

덩케르크에서 영국 병사의 구출은 영국 국민의 사기를 정신적으로 성장시켜, 그들은 아직 독일의 침략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이 남게 되어, 독일과의 화평을 모색하려던 움직임도 종지부를 찍었다.

구출된 영국 병사의 대부분은 영국 본토의 수비를 맡았다. 침략의 징후가 보이지 않게 되자, 그들은 중동 및 기타 지역으로 파견되어 1944년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육군의 중심이 되었다. 칼 되니츠를 비롯한 에리히 폰 만슈타인하인츠 구데리안등 여러명의 독일 고급장교도 독일군 최고사령부가 공격명령을 내리는 시기를 늦췄기 때문에 영국원정군을 괴멸시키는 것에 실패한것을 인정했다. 이것은 독일이 서부전선에서 벌인 커다란 실수 중 하나였고, 기타 다른 예로는 몰타 섬지브롤터의 점령 실패를 들 수 있다.

100,000명 이상 구출된 프랑스군은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영국 남서부의 여러 캠프에 보내져, 본국으로 송환할 때까지 일시적으로 대기했다. 후에 영국 선박은 프랑스군을 브레스트, 쉘부르 기타 노르망디 및 브르타뉴 반도의 항구로 운반하였고, 귀환한 병사의 절반정도가 휴전할때까지 독일전선에 배치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영국 해군이 영국군의 철수를 우선하여 그 댓가를 프랑스가 짊어진 것에 대해 격렬한 원한을 갖게 되었다. 프랑스군 사령관 프랑수와 다를랑 장군은 처음 영국군이 우선해야 한다고 명령했으나, 5월 31일 처칠과 파리에서 회담을 벌여 철수는 평등하게 이루어져 영국군이 후위부대를 맡을것을 명령했다. 최종적으로 수천 명의 프랑스군이 투항했으나, 6월 4일 26,175명의 프랑스인을 데려가기 위해 철수는 하루 정도 연장되었다.

영국 정부는 덩케르크에서의 군수품의 대량 손실을 보충하기 위해 재정부담을 미국에 의존하였다.

성 게오르기우스 십자의 선박기는 "덩케르크쟈크"라고 알려져, 1940년의 덩케르크 구출 작전에 참가한 크고 작은 모든 민간선박에 사용되었다. 기타 선박에서 사용이 허가된 것은 해군 원수가 탑승한 함뿐이었다.

주석[편집]

  1. Holmes (2001); p. 267
  2. Liddell Hart (1999)
  3. Keegan (1989)
  4. Liddell Hart (1999); p. 79
  5. Murray and Millett (2000); p. 80
  6. Keegan (1989); p. 81
  7. Murray and Millett (2000)

참조문헌[편집]

영문위키 참조문헌입니다.

외부연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