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투아니아 6월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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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6월 25일, 카우나스의 리투아니아 활동가.

6월 봉기 (리투아니아어: birželio sukilimas, 영어: June Uprising in Lithuania) 또는 리투아니아 6월 봉기리투아니아의 역사에서 1941년 6월 소비에트 연방의 점령 기간나치 독일의 점령 기간 사이의 짧은 민족 국가의 독립 기간이었다. 약 1년 전인 1940년 6월 15일, 붉은 군대는 리투아니아를 침공했고[1]리투아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설립했다. 정치적 억압 및 공포는 비판을 없애고 저항을 억제하는 데 사용하였다.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소련을 침공할 때, 리투아니아의 많은 부분 시민은 소련 정부에 반대했고 새롭게 독립을 선포했으며 단명한 임시 정부를 세웠다. 리투아니아의 가장 큰 두 대도시인 빌뉴스카우나스는 시민군이 도착하기 전에 독일군이 점령했다. 일주일 이내에 독일 육군은 리투아니아 전체를 점령했다. 리투아니아는 독일을 소련의 억압적인 통치에 대한 해방자로 여기고 독일이 다시 독립을 해주거나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처럼 어느 정도의 자치를 보장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치로부터 전혀 지원이 오지 않았고 독일로부터 리투아니아 기관 및 정부를 대체했다. 1941년 7월 말에는 오스트란트 제국위원회가 설립되었다. 모든 권력이 박탈되면서, 임시 정부는 8월 5일 자가 해체했다.

배경 및 준비[편집]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의 여파와 러시아 혁명으로 리투아니아가 독립했다. 그러나, 1940년 8월 말 소비에트 연방이 침공하여 강제로 연방 산하의 리투아니아 SSR로 병합했다. 리투아니아는 국유화를 포함한 소비에트화에 저항하지 못했으며 정치운동가 및 인민의 적 체포도 막지 못했다. 또한 이들은 모든 문화, 종교, 정치 단체를 해체했다. 경제 상황은 지속적으로 악화되었으며 표준 생활 정도가 감소하였다. 1년 후, 봉기 7일 전 주로 지식인으로 구성된 리투아니아인 17,000명이 그들의 가족과 함께 모두 시베리아로 추방되었으며 비인간적인 생활 조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사망했다(6월 추방). 이 사건은 대중들이 반란을 지지하게 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 비극은 처음에 독일의 침공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추방이나 체포에서 탈출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무장 단체를 만들고 숲에 숨으면서 대형 봉기를 기다렸다.[2]

1940년 가을에 만들어진 리투아니아 운동 전선(LAF)의 궁극적인 목표는 리투아니아의 독립이었다. 베를린카쟈스 스키르파(Kazys Škirpa)가 지휘하는 LAF는 통합적인 리투아니아 저항을 모색했고 소련에 대한 반란 계획을 보존하였다.[3] 통솔 기구[4] 많은 그룹들은 베를린의 LAF와 연결되지 않았더라도 LAF의 이름으로 활동했다.[5] LAF는 빌뉴스카우나스에 주요 정치, 군사적 본부를 설립했다.[3] 베를린, 빌뉴스, 카우나스 사이 통신 및 조정은 오히려 매우 약했다. 빌뉴스의 본부는 소련의 체포로 탄압받았고 특히 1941년 6월 초에는 대부분이 말살당했다.[6] 이들 활동가의 대부분은 1941년 12월 러시아에서 처형당했다.

1941년 3월, 베를린 LAF는 "친애하는 노예 형제"(Brangūs vergaujantieji broliai)라는 제목의 각서를 발표하며 나치 독일과 소련 사이의 전쟁 준비를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지시가 있었다.[7] 반란군은 전략적 목표(교도소, 철도, 교량, 통신 시설, 공장 등)을 보호하여 붉은 군대의 후퇴로 인한 파괴로부터 지키고, 그 동안 중앙 본부가 임시 정부를 수립하고 독립을 선언하는 계획이었다.[8] 4월에는 리투아니아 임시 정부의 임원들이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선언하였다.[9] 국무 총리는 스키르파로 정해졌고, 4명의 장관이 빌뉴스에, 카우나스에 6명이, 베를린에 한 명이 있었다. 이 구성원들은 전쟁 전 다양한 넓은 정치 스펙트럼에 위치했지만 리투아니아인을 대표하고 표현하기 위해 모이게 되었다고 주장했다.[10] 이 지정된 장관들은 모두 임시 정부에서 추천하겠다는 약속을 받지 않았다.[11] 6월 14일, 베를린의 나치 정부는 스키르파와 그의 임시 정부를 인정하거나 사전 승인 없이 공개적 선언을 하지 않겠다고 주장했다.[11] 스키르파는 이에 동의했지만, 그는 리투아니아 내 운동가들에 대한 통치력이 거의 없었다.

6월 봉기[편집]

나치의 진군과 소련의 후퇴[편집]

1941년 6~7월 리투아니아 빌뉴스에서 독일군이 끌고가는 소련군 포로.

6월 22일 오전 3시 15분, 리투아니아 SSR의 국경은 두 개의 독일 집단군의 공격을 받았다. 북부 집단군은 리투아니아 서부와 북부를 침공했고 중부 집단군빌뉴스 지역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독일군은 리투아니아로 70만명의 40개 사단, 전차 1,500대, 항공기 1,200기를 전진시켰다.[12] 소련군은 발트 군사 지구가 40만명 25개 사단, 전차 1,500대, 항공기 1,344기가 있었다.[13] 8 군11 군의 7 소총 사단과 6 기계화 사단이 리투아니아 영토 내에 있었다.[12]

루프트바페케다이네이, 라세이니, 카르멜라바, 파네베지스, 유르바르카스, 우크메르게, 샤울랴이 등 리투아니아 주요 도시에 대한 공항, 비행장 폭격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러한 공격으로 민간인 약 4천명이 사상을 입었다.[13] 소비에트 연방은 322기가 공중에서 파괴되고 1,489기가 지상에서 파괴되는 등 항공기 대부분이 파괴되었다.[13] 독일군은 칼티네나이, 라세이니, 샤울랴이 등에서 산발적인 저항만 받고 리투아니아의 지원으로 급속히 전진했다. 소련은 전차로 무장하고 라세이니 전투에서 반격을 시도했지만 큰 손실을 입었다.[14] 독일군은 이 때 약 3,362명의 사상자가 생겼지만, 결국에는 리투아니아 전체를 점령했다.[15] 소련군의 손실은 매우 크고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 약 12~15개 사단이 파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15] 또한, 수많은 항공기, 전차, 대포, 기타 장비들도 잃었다.[16]

보통 친절한 리투아니아인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몇 가지 징벌적 집행을 자행했다. 예를 들어, 아브린가 마을에서는 42명의 민간인이 독일군 사망의 복수로 학살당했다.[17] 알리투스에서 2명의 독일군 방위병이 알수 없는 사람의 총에 맞아 사망한 이후, 그 지역에서 42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18] 알리투스의 공포는 다음날까지 계속되어, 독일인은 10세부터 50세까지의 20~25명의 그룹을 지어 학살했다.[7] 더 많은 잔학 행위는 후퇴하는 붉은 군대가 저질렀다. 소비에트 연방의 점령 기간 동안 체포된 정치범 및 전쟁 포로 4천명은 러시아로 이송되었다.[19] 라이니아이, 프라비에니스케스, 파네베지스에서 NKVD의 조직적 학살이 이루어졌다. 총 리투아니아 40개 지역에서 대량 학살이 자행되었다.[20] 많은 사람들은 소련 내의 감옥으로 이송되는 도중 사망했다. 이 중 가장 거대한 학살은 현재의 벨라루스 체르볜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나치 점령 기간 동안 공식화된 NKVD로 인한 사망자에는 봉기에 참여하지 않은 769명도 속해 있었다.[21]

리투아니아 봉기[편집]

카우나스[편집]

카우나스에는 전쟁 첫 날인 1941년 6월 22일 이른 아침에 시작되었다. LAF의 주군은 카우나스에 집중되었다. 오전 10시 LAF는 자리아칼니스에 모여 담당 구역을 나누었다. 주요 목표는 러시아와 함께 싸우지 않는 것 뿐 아니라 도시 내부(보안기관, 정부 조직, 기업) 등에서 독립을 선언하면서 도시를 확보하기로 했다.[22] 6월 22일 저녁까지 리투아니아인은 대통령궁, 우체국, 전화전신국, 라디오 방송국, 무선전화국을 점령했다.[22] 전화국을 점령하면서 리투아니아는 모든 공산주의자의 전화와 암호 또는 코드로 이야기할 수 있는 회선을 끊었다.[23] 라디오 방송국은 러시아가 사보타주를 하였고, 22일부터 23일 밤까지 복구 작업을 하였다. 예비 푸품은 구급차를 운전하는 의대생이 운송하였다.[24] 리투아니아군이 라디오 방송국을 지키기에 불충분하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6월 23일 아침 레오나스 프라풀로레니스(Leonas Prapuolenis)는 리투아니아의 독립 선언과 임시 정부의 구성원을 발표했다. 이 방송은 리투아니아어, 독일어, 프랑스어로 몇 차례 반복되었다.[24]

6월 23일 아침, 반란군이 샨치아이, 파네무네, 빌얌폴레[25]의 소련군 병참 기지를 점령했다.[26] 이제, 도시 전역에 리투아니아군이 무장했다. 페트라스 빌레시니스 다리를 통해 네리스 강을 건설 수 있는 점에 대해 반란군이 주목했고, 예상대로 독일군이 이 다리를 통해 도시를 점령하고자 했다.[23] 리투아니아군이 다리에 도착했을 때, 다리는 이미 폭발물이 설치되었다. 40개의 소련군 및 기계화군이 다리가 폭발할 때 까지 보호하였다.[27] 소련이 리투아니아군을 만나고 후퇴할 때, 유오자스 새불리오니스(Juozas Savulionis)는 다리 중간까지 뛰어가 전선을 절단하고 파괴를 막았다. 돌아오는 길에 새불리오니스는 소련군의 총에 맞아 사망함으로 반란군의 첫 사망자가 되었다.[27]

네만 강의 다리는 미리 후퇴한 소련군이 폭파시켰다. 스바르키야로 진군하며 카우나스를 우회하는 소련군이 도시의 반군을 구했다. 메틀라스 공장은 샨치아이 반군의 거점이 되었으며, 보트 또는 부교로 네만 강을 건널려는 소련군을 저지했다. 이 전투 동안 반군 약 100명이 사망했으며, 소련군 100명(장교급 포함)이 포로가 되고[26] 중장비(전차 3대 포함, 그러나 반군 중 누구도 전차 운용법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를 노획했다.[28] 다른 그룹은 도시의 경찰서, 상점, 창고를 재구축하여 탈환하고자 했다. 반란은 급하게 치안 조직을 조직하고 일부 2천명의 정치범을 석방한다.[28] 또한 이들은 일간신문 "Į laisvę"(자유를 향하여)를 출간하기 시작했다.

6월 24일, 요나바의 소련군 전차부대가 카우나스 탈환을 명령받았다. 반란군은 독일군의 지원을 라디오로 방송하였다. 루프트바페는 소련군이 도시에 도달하기 전에 폭격했다. 이것이 첫 번째 리투아니아-독일 협력 사례이다.[29] 첫 번째 독일 정찰병인 중위 플로레트와 이등병 4명은 6월 24일 카우나스에 도착하고 협력군을 발견했다.[30] 하루 후 독일의 주군은 거의 저항 없이 도시 내로 들어가며 퍼레이드를 열었다.[31] 6월 26일, 독일군은 반군을 해산하고 무장 해제를 명령했다.[32] 이틀 후 리투아니아 경비병 및 경찰은 모두 제대하였다.

7월달 자치 정부에 따르면, 카우나스에는 약 6천명[33] 26개의 자원군 사단이 있었다.[34] 가장 큰 그룹은 약 200-250명이 있었다. 카우나스의 총 리투아니아인 사상자는 200명 사망, 150명 부상으로 추측된다.[33]

빌뉴스[편집]

빌뉴스에서, LAF는 전쟁 전 소련군이 체포하였고 도시에는 리투아니아인이 소수 민족으로만 이루어졌다.[35] 따라서, 봉기는 6월 23일 소규모로 일어났다. 반군이 우체국, 라디오 방송국, 기타 공공 기관을 점령했고 게디미나스 탑리투아니아의 국기가 계양되었다. 소련군 대부분은 도시 밖으로 빠르게 후퇴했기 때문에 빌뉴스를 상대적으로 쉽게 점령했다.[30] 6월 24일에는 첫 독일군이 도시를 점령했다. 한스 프라이헤어 폰 풍크 하의 7 기갑 사단은 소련군이 빌뉴스에서 저항할 것이라 예상하고 도시 폭격 계획을 세웠다.[15]

1940년 리투아니아 육군 해체 이후 창설한 29 소총병 군단 내에는 리투아니아인 7,000~8,000명이 있었다.[36] 이들 중 대부분은 탈영하고 6월 24일 빌뉴스로 모였다. 바레나 근처에서 혼란에 빠진 184 소총병 사단은 전진하는 독일군과 만난 첫 사단이었다.[37] 러시아 장교들의 혼란을 이용하여 리투아니아인들은 주요 군단에서 빠져나와 몇 명의 사상자만 입고 빌뉴스로 모였다. 184 소총병 사단은 오직 745명의 러시아인만 있었다.[17] 179 소총병 사단파브라데-스벤치오네리아이에서 프스코프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37] 6월 27일, 사단들은 리투아니아 국경을 넘었고 리투아니아 병사들은 항명했다. 탈영을 시도하는 동안 적어도 리투아니아인 120명 이상이 사살되었다. 179 소총병 사단은 1,500-2,000명(6,000명 탈영)만 네벨에 도착했다.[17] 리투아니아는 이 탈영병들이 새로운 리투아니아 육군의 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군대는 오직 경찰 대대로만 편성되었으며 독일인들이 고용한 홀로코스트 범죄에만 이용되었다.[17]

기타 지역과 요약[편집]

그외 다른 도시, 마을에서도 반란이 퍼졌다. 반란 활동 수준은 리투아니아 내에서 커졌으며 반란은 잘 조직되지 않은 채 자연스럽고 혼란스럽게 진행되었다.[35] 남성들은 LAF에 대해 들어보지 않았지만 카우나스에서 반군에 합류했다. 대부분의 반란군 패턴은 빌뉴스나 카우나스로 집결했다. 가장 중요한 경찰서를 포함한 지역 기관 장악 및 기타 전략적 목표 장악이 이어졌다. 또한, 반군은 소련 운동가들을 체포하고 정치범을 석방했으며, 리투아니아 국기를 계양했다.[36] 거의 모든 곳에서 총과 탄약의 부족이 성행했다. 총을 얻는 주요한 방법은 항복한 소련군을 무장 해제하여 얻는 것이었다.[38] 대부분의 반군 활동은 슈벤치오니스, 마제이카이아이, 파네베지스, 우테나에서 이루어졌다.[39] 샤울랴이 같은 몇몇 지역에서는 뚜렷한 반군 활동이 없었다.[39] 일단 독일군은 반군 무장해제 타협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부 지역의 경찰 등 각종 위원회는 "사실상" 반란군이 설립한 이후 "법률상 합법"화되었다.[40]

소련 점령기 동안 반군의 박해와 봉기는 역사책에서 검열되었다. 주로 리투아니아계 미국인이 출판한 회고록과 연구에서는 리투아니아 운동가 90,000-113,000명에서 2,000-6,000명의 사상자가 나왔다고 증언했다.[39] 1990년 리투아니아가 독립하고 새로운 문서 작성이 허가된 이후, 역사학자들은 16,000-20,000명의 리투아니아 운동가들 중 600명이 사상했다고 추정하고 있다.[39] 반군의 대부분은 18~25세의 어린 나이였다.[30] 소련의 사상자는 약 5,000명으로 추정한다.[35]

독립과 임시 정부[편집]

6월 23일 오전 9시 28분, 리투아니아의 카우나스 라디오 방송국에서 리투아니아의 국가타우티슈카 기에스메가 방송되었다. LAF 구성원인 레오나스 프라푸오레니스는 리투아니아의 독립 선언서를 읽었다.

"열정을 가진 젊은 리투아니아는 새 기반의 유럽 조직으로 늘릴 것을 약속한다. 리투아니아는 끔찍한 볼셰베키의 고문을 받았고 민족 단결과 사회 정의가 있는 미래를 만들었다."[41]

프라푸오레니스는 임시 정부 구성원을 발표하고 공공 및 사유 재산을 보존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공장, 공공 기관, 기타 중요 시설을 보호하고 공공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경찰 조직 구성을 요구했다. 이 메시지는 리투아니아어, 독일어, 프랑스어로 여러 번 반복되었다.

임시 정부의 초대 회의는 6월 24일 열렸다. 베를린에서 가택 연금된 LAF 운동가 요나스 암브라제비치우스 대신 카쟈스 스키르파가 총리가 되었다. 새 정부는 국가 전체를 장악하려 시도했고 독립을 선언했으며, 탈소비에트화 캠패인을 시작했다. 6주 동안 일부는 사전에 준비한 100여 개의 법률이 존재했고, 토지, 기업, 부동산, 지역 행정구 복원, 경찰 조직, 기타 국유화 등에 관한 처리를 했다. 정부는 다른 육군 통제하에 있는 빌뉴스를 통제하지 못했다.[42] 정부는 나치 정부와 협력하여 살아가길 희망했다.[31]

독일은 새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우크라이나의 스테판 반데라 정부와 달리 강제로 해산할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첫 번째 독일 군정은 정부의 활동을 용납했으며 민간 기관 통제 시도를 하지 않았다.[40] 독일 민간 행정부인 오스트란트 제국위원회가 7월 17일 수립되었다.[43] 무력을 사용하는 대신, 민간 행정부는 라디오 공지 사항을 신문 등으로 인쇄하거나 방송하는 것을 금지하는 등 천천히 정부의 통제력을 상실시켰고, 이를 대신하여 임시 행정부를 해산시키거나 괴뢰 기관으로 바꿨다.[31] 만약 승인한다는 의미와 약간의 자율성을 주었으면 협력할 의사가 있었지만, 정부는 독일 점령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았다.[31] 임시 정부는 8월 5일 스스로 해체했다.

여파와 논쟁[편집]

공공 시설의 강탈은 임시 정부 붕괴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리투아니아 운동 전선은 1941년 9월 금지되었고 이들 지도자 일부는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다. 12월 말에는 마지막 합법 정당인 친나치의 리투아니아 국가당도 금지되었다.[43] 임시 정부가 선언한 법률 대부분은 서류상으로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몇 가지 법률들은 독일인의 관심을 끌지 못해 지방 행정 및 교육 관련 법은 다소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44] 정부는 리투아니아인으로 구성된 지방 개발 행정부를 떠났다. 독일 행정부에서 올라온 명령이 아래에서 차단되는 등 몇가지 소극적 저항이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리투아니아는 무장 친위대 사단 모집, 독일의 강제 노동, 리투아니아 학교의 독일인화 등에 대해 저항했다.[45]

독립과 장기적인 추세의 결과가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봉기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카쟈스 스키르파의 회고록 등에 나타난 바에 따르면, 이 봉기는 독립적인 정부를 얻을여는 리투아니아인의 의지를 보여주었고 1940년 6월 소련이 자발적으로 리투아니아와 합병했다는 신화를 무너뜨렸다.[46] 또한, 이 반란은 러시아 영토 내의 빠른 독일군 진군에 도움을 주었다. 프스코프는 17일만에 도달했다.[10] 1941년 6월의 사건은 몇 가지 논쟁 또한 일으켰다. 당시 전직 대통령 안타나스 스메토나스태시스 로조라이티스를 포함한 해외의 리투아니아 외교관은 봉기가 "나치에 고무되었다고" 설명했다.[46] 이 문장은 아마도 미국, 영국, 기타 서구 열강에게 리투아니아는 나치의 동맹이 아니라고 설득하기 위해 나온 말로 추측된다.[47] 임시 정부는 반유대주의 구호와 법령을 비판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리투아니아의 홀로코스트를 항의하거나 중지하려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40] 타우티니오 다르보 아프사우고스 부대아인자츠코만도 하의 병력이었으며 세븐 포트카우나스 요새에서 하만 돌격대리투아니아계 유대인 학살에 참여했다.[48] 유대인 생존자 및 저자들은 LAF를 비난하며 특히 카우나스 뿐 아닌 다른 마을에서도 무차별적인 유대인 학살 뿐 아니라 종종 나치가 점령하기도 전에 계획된 학살인 카우나스 학살 등에 대해 언급했다.[49]

더 보기[편집]

주석[편집]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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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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