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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조선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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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30일 (토) 14:13 판

조선 정조
파일:Jeongjo of Joseon.jpg
조선의 제22대 국왕
재위 1776년 ~ 1800년
전임 영조
후임 순조
신상정보
부친 장조
모친 헌경왕후
배우자 효의왕후

정조(正祖, 1752년 음력 9월 22일 ~ 1800년 음력 6월 28일)는 조선의 제22대 임금이다. 는 산(祘)[1], 는 형운(亨運), 는 홍재(弘齋)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요절한 백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통을 계승했다. 재위기간 중 중앙집권화를 위한 노력에 치중하였으며, 친위부대인 장용영의 창설과 자신의 저서 홍재전서를 비롯한 문집과 법전의 재간행, 수원 화성 축성 등을 추진하였다. 무예와 함께 유학의 각 경전에도 두루 통달하여 경연장에서 신하들을 강의하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의 중흥군주로 평가된다.

즉위 후 권력에서 배제된 소론남인계 인사들을 등용하여 정계로 다시 발탁하였으며, 생부 사도세자의 죽음과 연계된 노론벽파와의 정치적 갈등이 후일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으나, 노론벽파의 일원인 김종수, 심환지 등을 총애하여 측근으로 두는 등 복잡한 측면이 있다.

본래의 묘호는 정종(正宗)으로, 사후 시호는 정종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며 존호는 장휘(莊徽), 이후 묘호가 정종에서 정조로 바뀌고 대한제국 때 선황제(宣皇帝)로 추존하고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정조경천명도홍덕현모문성무열성인장효선황제(正祖敬天明道洪德顯謨文成武烈聖仁莊孝宣皇帝)이다.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공선왕(恭宣王)이며 능은 수원(水原)의 건릉(健陵)이다.

생애

생애 초기

세손 시절

정조어서, 정조가 세손 시절인 8세때 직접 쓴 한글 편지

정조는 1752년(영조 28년) 음력 9월 22일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혜빈 홍씨(혜경궁 홍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창경궁의 경춘전(景春殿)에서 태어났다. 형인 의소세손이 3살의 어린 나이로 먼저 요절한 뒤 태어났기 때문에 탄생 당일 영조에 의해 원손(元孫)으로 호가 정해졌다.[2] 그의 형인 의소세손이 3세의 나이로 요절하였으므로 그는 바로 세손으로 책봉되었다.

어려서부터 기억력이 좋아 사서삼경을 암기하니 할아버지 영조가 그를 각별히 총애하였다. 1759년(영조 35년) 음력 윤 6월 22일 명정전(明政殿)에서 왕세손에 책봉되었다.

1761년(영조 37년) 음력 3월 10일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음력 3월 18일 경현당(景賢堂)에서 관례(冠禮)를 행하였으며, 이듬해인 1762년(영조 38년) 음력 2월 2일 어의궁(於義宮)에서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의 딸인 청풍 김씨(淸風 金氏)와 가례(嘉禮)를 올렸다.

동궁 시절

할아버지 영조

아버지 사도세자소론에 동정적이었지만 그의 외가는 노론으로 외할아버지 홍봉한, 외종조부 홍인한노론의 지도급 인사였다. 어머니 혜경궁은 친정 쪽을 지지하고 남편 사도세자를 외면하였다. 노론의 지지를 받던 영조는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아들 사도세자를 못마땅히 여겼고, 정신이상이라는 핑계로 뒤주에 가두어 죽인다. 8세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살려줄 것을 청하다가 병사들에 의해 끌려나가고 부친의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

아버지 사도세자가 부왕과 다른 정견을 피력하다가 죽임당한 것을 안 그는 일체의 정치적 발언을 삼가하고 개유와라는 독서실을 짓고 독서와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한 것을 불안하게 여긴 홍봉한 가문과 또다른 외척인 정순왕후 가문, 고모 화완옹주와 그녀의 양자인 정후겸 등은 세손을 제거하려 한다. 그러나 세손궁의 막료로 배치된 홍국영이 기민한 재주로 그들의 음모를 차단한다. 한번은 세손이 읽던 강목에서 서자에 대한 내용이 있었는데, 할아버지 영조는 서자에다가 천한 무수리 출신의 아들이라는 것에 오랫동안 컴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영조가 세손이 공부하는 책을 불시에 검사하려 하자 노론측에서는 그가 강목을 읽었다고 보고했고, 노론의 무고를 예상한 홍국영은 서자 라는 부분을 모두 종이로 가려버렸다. 세손은 서자 라고 쓴 부분은 가리고 읽지 않았다고 했고, 강목의 해당 부분은 흰 백지로 가려져 있었다.

25세가 된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려 하자 좌의정 홍인한이 극구 반대했다. 그러나 할아버지 영조는 세손의 손을 들어주어 대리청정을 하게 된다. 대리청정을 시작한 지 얼마 뒤, 1776년 음력 3월 5일 영조가 경희궁(慶熙宮) 집경당(集慶堂)에서 83세로 승하하자, 음력 3월 10일 숭정문(崇政門)에서 25살의 나이로 조선의 제22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즉위 후

즉위 직후

정조는 즉위 당일 조회에서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라하여, 종통은 비록 영조의 명에 의해 효장세자를 잇게 되었으나, 사도세자 또한 국왕의 생부로서 존숭해야 할 것임을 천명했다. 이에 사도세자에게는 태묘(太廟)보다 조금 낮은 지위, 생모 혜빈에게는 역시 대비보다 조금 낮은 지위를 올린다. 그러나 이 자리에 동시에 사도세자의 추존 논의는 용납하지 않을 것임을 밝히기도 했다. 사도세자에게는 장헌이라는 존호를 더하여 사도 장헌세자로 일컫었고, 생모를 지칭하던 호칭을 혜빈궁惠嬪宮에서 빈嬪자를 가려 혜경궁惠慶宮으로 고쳤으며, 혜경궁의 조정문안 순위 역시 왕대비 다음이나 중궁보다는 앞서게 했다. 경기도 양주군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무덤 수은묘(垂恩墓)의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으로 올리고, 그의 사당인 수은묘(垂恩廟)는 경모궁(景慕宮)으로 올렸다.

이어 영조의 유지를 받들어[3] 양아버지 효장세자를 진종 효장대왕으로 추숭하고, 양어머니 효순현빈을 효순왕후로 추상하였으나, 이어 청나라로부터 양아버지 효장세자에게 내려진 각민왕이라는 시호를 친히맞이하였다. 그러나 정조에 대한 사후기록에서 정조는 이 당시의 진종 추숭을 그다지 마득지 않게 여겼다고 전하고 있다.

경상도 안동의 유생 이도현(李道顯)이 사도세자를 추숭하자는 상소를 올렸으나 정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도현 부자를 사형을 처함으로서 즉위 초기 노론 벽파의 의구심에서 벗어나려 했다.

노론 벽파 숙정작업

그후 영조 말년 이래 집권하여 오던 외척당 일당을 숙청하고 노론 청명당 계열을 등용한다. 이에 모역하다 발각된 홍상간(洪相簡)·정후겸(鄭厚謙)·윤양로(尹養老) 등을 주살하거나 유배하는 한편, 즉위 이듬해 그를 시해하고 은전군 찬을 추대하려다 발각된 홍상범(洪相範) 일당을 주살하였다.

정조는 즉위 초기 대리청정을 방해하고 세손의 오른날개(홍국영)을 제거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고모 화완옹주는 신분을 강등시키고 홍인한, 정후겸 등에게 사사를 명하였다. 숙의 문씨의 오라비 문성국 일가를 참수하고 그 어미는 제주도의 여종으로 보내고 숙의 문씨 역시 사사시켰다.

한편 영조 외척당의 실세이자 세손의 외조부인 홍봉한도 탄핵을 받았으나 정조는 끝내 그를 보호해 주었다. 정조의 외숙인 홍낙임은 1777년 홍상간 등의 궁궐자객침투 사건에 연루자로 이름이 올랐으나, 혜경궁의 요청으로 직접 국문 끝에 정조는 홍낙임을 석방한다. 이 사건에 정조의 이복동생 은전군 이찬의 이름이 추대 대상자로 올라 있었기 때문에 정조는 그에게 자결을 명하였다. 이찬은 처음에는 자결을 거부하다가 끝내 사사당했다.

그 와중에 능력과 학식 있는 인물을 위주로 대거 등용하여 국왕 친위 세력을 키워 나갔다. 특히 왕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경호해 온 홍국영을 절대적으로 신임하여 궁궐을 호위하는 숙위소 대장과 도승지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1780년에는 홍국영을 지방으로 방출시켰으며 이후부터 노론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정조는 영조가 왕실 척족들을 중용해 외척당이 득세하게 한 것과는 반대로, 12년에 이르는 동안 외척 세력을 비롯한 기득권 세력을 제거하거나 약화시켜 친정 체제를 구축하는 데 주력하였다.

창덕궁 후원 부용지 주변에 세워진 규장각(2층 건물의 1층)과 서향각

다른 한편으로 정조는 규장각 제도를 정비하여 자신을 지지하는 정예 문신들로 친위 세력을 형성시켜 “우문지치(右文之治)”와 “작인지화(作人之化)”를 규장각의 2대 명분으로 내세우고 문화 정치를 표방하였다.[4] '우문지치'는 문치주의와 문화국가를 추구하는 정책으로, 정조는 많은 책을 출판하도록 하였다.[4] '작인지화'는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의지 표명으로, 규장각에서 정조가 유생들을 모아 그 중에서 젊은 문신(文臣)을 뽑고, 뽑힌 신하들을 자신이 직접 가르치고 시험을 보게해서 평가하였다.[4]

한편으로는 각 당의 원칙론자들을 등용하면서 노론의 원칙주의자도 포섭, 송시열에 대한 경의를 표하였고 노론의 강경파 중 청렴한 인물인 김종수 등을 신임하기도 했고, 그와 홍국영의 건의를 받아들여 재야의 산림학자인 송덕상, 송능상, 김종수의 형 김종후 등을 중용하기도 했다.

학문적 치적

정조어서, 정조가 직접 쓴 글씨

그는 또한 영조 때부터 시작된 문물 제도의 보완 및 정비 작업을 계승, 완결하였다. 아울러 스스로 초월적인 통치자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려 하였다. 정조는 우수한 인재를 뽑아 초계문신이라 칭하고 매월 2차례씩 시험을 치렀으며 상과 벌을 직접 내리기도 했는데, 소외받던 남인과 영남계 인사들도 과거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또한 서북인(西北人)을 채용하였으며, 서인(庶人)도 기용했다. 특히 남인학자를 우대하여 주자학의 공리 공론적인 학풍을 배격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이용후생(利用厚生)을 목표로 하는 실학(實學)이 크게 발전하였다.[5]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삽화, 각 무예 과정마다 그림을 덧붙여 이해를 도우려 했다. 정조의 명으로 간행된 책의 그림이므로, 정조가 그림에 관한 일을 맡겼던 김홍도가 그렸을 가능성이 높다.[6]

왕세손 때부터 활자에 관심이 깊어 임진자(壬辰字)·정유자(丁酉字)·한구자(韓構字)·생생자(生生字)·정리자(整理字)·춘추관자(春秋館字) 등을 새로 만들어 인쇄술의 발달을 기하는 한편으로 서적 편찬에도 힘을 기울여 《증보동국문헌비고》, 《국조보감》, 《대전통편》, 《문원보불(文苑黼黻)》, 《동문휘고(同文彙考)》, 《규장전운(奎章全韻)》, 《오륜행실(五輪行實)》 등을 간행하게 했고, 정조 자신의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도 완성했다. 또한 그는 이덕무박제가를 시켜 실제 전투 기술을 다룬 훈련서인 《무예도보통지》를 펴내기도 하였다.[6]

제도 개편에도 힘써 형정(刑政)을 개혁, 악형을 금지시켰고, 백성의 부담을 덜기 위해 궁차 징세법(宮差徵稅法)을 폐지, 한편 빈민의 구제를 위해 자율전칙(字恤典則)을 반포했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는 중인 이하 평민에게까지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정조 시대는 양반은 물론, 중인, 서얼, 평민층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져 문화를 크게 꽃피운 조선 후기의 문화적 황금시대를 이룩했다.

정치 문제와 천주교

김조순의 초상

안동 김씨들이 정치 일각에 집권하면서, 나중에 세도 정치를 할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당시 사회 문제로 대두된 천주교에 대해서는 정학(正學), 즉 성리학의 진흥만이 서학의 만연을 막는 길이라는 원칙 아래 유연하게 대처하였다. 그러나 충돌이 전혀 없지는 않아 1791년에는 신해교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즉, 정조는 천주교를 성리학의 진흥으로 막을 수 있는 일시적인 종교현상으로 보아 온건하게 대하였으나, 권상연윤지충이 조상의 신주를 소각하고 천주교 예식으로 모친의 장례를 치른 진산사건에 대해 사형으로 강경하게 처벌함으로써 외래종교인 천주교가 유교전통을 부정하는 것만은 용납하지 않는 강온정책을 실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게다가 정조 사망 이후 정치적으로 정조와 대립하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면서, 조선 천주교회는 대부분 천주교 신도인 남인들이 제거된 신유박해(1801년), 오가작통법 실시 등의 조직적 탄압이라는 수난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주로 시파였던 안동 김씨 일파가 벽파에게 박해를 많이 받았다. 말년의 정조는 안동 김씨김조순에게 신임이 두터웠고 아들인 순조의 세자빈 후보로 김조순의 딸을 골랐으니 바로 순원왕후이다.

왕권 강화책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매우 그리워하여 아버지의 묘소인 수은묘를 처음에는 영우원으로 격상켰다가, 다시 양주에서 수원으로 천장하여 현륭원이라 이름짓고 정기적으로 참배하였다. 또한, 현륭원 주변인 수원에 과학적인 성채인 화성을 건립하고 그 안에는 행궁을 만들었다.

정조는 암행어사를 비밀리에 자주 파견하여 지방 사회의 문제점을 직접 파악하고 해결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로써 지방 사족의 향촌 지배력을 억제하고 백성들에 대한 정부의 통치력이 강화되었다. 또한 왕실 직속 친위대인 장용위를 신설하였는데, 초반에는 5위와 비슷한 위로 출발하였으나 곧 장용영으로 격상시켰다. 장용영의 설치를 통해 친위대 설치는 물론 각 군영의 독립적 성격을 약화시키고 군사권을 장악함으로써 임금의 최고 통수권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장용영 설치는 군대를 장악한 노론을 견제하려는 정책이었다.[출처 필요]

1782년 정조는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박팽년을 추모하여 노량진에 조선육신 이라는 신도비를 세워주었다.[7]

1791년에는 신해통공을 실시해 상인들의 상업 활동의 자유를 크게 넓히고, 수령 등의 가혹한 형벌을 제한하였다. 한편 노론의 거점인 한성에서 벗어나고자 수원으로의 천도를 계획하여 정약용 등을 통해 수원 화성 축성을 단행하였으나 천도계획은 성공하지 못하였다.[출처 필요]

기타 정책

노론 중에서도 정파에 속하지 않은 김종수노론 벽파 계열 인물인 심환지 역시 중용하여 균형을 맞추었다. 또한 우암 송시열을 송자(宋子)로 존숭하고, 남인소론 계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송시열의 문집을 국비를 들여 송자대전이라는 이름으로 간행하게 한다.

소론남인 중에는 사도세자의 원한을 갚아야 된다는 건의를 계속해서 올렸지만, 그는 이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지는 않고 시파 중 강경파인 조재한 등은 역적의 예로서 단죄하기도 한다.

만년

파일:정조.jpg
고종 때 그려진 정조 어진

1793년 정조는 특명을 내려 임진왜란 때의 장수 이순신의정부영의정으로 추증하고, 1794년 직접 이순신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다.[8] 1795년에는 충무공 이순신의 유고 전집을 간행할 것을 명했다.[8] 또한 정조 때인 1797년 영국 군함 프로비던스 호가 부산 용당포에 표착하여 동래 부사와 교섭하였다. 의술에 상당한 조예가 있던 정조는 재위 24년인 1800년 음력 6월 14일 직접 처방을 내리기도 했다. 소요산에 황금, 황련을 추가해 사용하고, 음력 6월 16일에는 사순청량음, 금련차, 웅담고를 투약했으며 다시 가감소요산 세 첩과 금련차를 쓴다.[9] 음력 6월 20일에는 유분탁리산(乳粉托裏散)과 삼인전라고(三仁田螺膏)를 사용한다. 정조 스스로 가미소요산 처방을 내리기도 했다.[9]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개혁에 착수하였으나, 1800년 음력 6월 49살의 나이에 병이 악화되어 예기치 못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그가 추진해 온 정책과 남인, 소론 등의 등용 등은 대부분 무산되고 말았다. 그 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거쳐 조선에는 외척 가문이 주도하는 세도 정치가 전개된다. 한편, 정조의 죽음에는 독살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사료는 아직 없다.

사후

그가 죽자 경상북도남인계 선비 장현경 등은 그가 독살당했다고 주장하여 거병을 시도하다가 실패하기도 한다.

묘호는 정종(正宗)으로, 사후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으로 정해졌으며 그의 실록은 본래 정종실록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 선포 후 황제인 고종이 가계상 그의 증손자뻘[10]이 되므로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 선황제(宣皇帝)로 추존되면서 묘호를 종(宗)에서 조(祖)로 바꾸어 정조 선황제(正祖 宣皇帝)가 되었다.

능묘

정조는 생전에 부친 곁에 묻히고 싶어하였는데, 능은 건릉(健陵)으로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혀 있는 융릉의 옆에 안장되었다. 본래는 사도세자의 묘 아래에 위치해 있다가, 뒤에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저서 및 작품

저서

  • 《증보동국문헌비고》
  • 《국조보감》
  • 《대전통편》
  • 《문원보불(文苑黼黻)》
  • 《동문휘고(同文彙考)》
  • 《규장전운(奎章全韻)》
  • 《오륜행실(五輪行實)》
  •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
  • 《무예도보통지》

작품

연표

가족 관계

평가

정조기는 문화적으로나 토지생산성으로나, 그 이후의 시기인 19세기에 비해 더 번영한 시기였다. 때문인지 19세기 세도정치로 왕권이 약화된 시점에서 이미 과거에 존재했던 이상적인 군주상으로 여겨졌다. 후대 임금인 헌종이나 고종이 친정을 선포할 때 정조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내보인 것도 이와 연관이 컸을 것으로 여겨진다. 1990년대 이후 왕권 강화를 통해 노론 벽파를 견제하고 중앙집권화를 꾀한 점에서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이는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 등의 소설의 모티브가 되었고 이는 영화화 되기도 하였다.박시백 화백은 역사만화 조선왕조실록(휴머니스트)에서 정조를 빈틈없는 행정가,유학무술 모두 완벽한 인물로 이해한다.

조갑제충무공을 역사속에서 살려낸 두 권력자가 정조와 박정희라 하였다.[12] 조갑제는 정조를 김유신-세종대왕-정조-이승만-박정희로 이어지는 실용-자주론자로 평가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정조와 다른 실용-자주론자들은 외래사상을 원산지보다도 더 극단화하고 신격화해왔던 명분론자들의 위선을 경멸하고 국가와 국민들을 위해서 스스로 악당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이라 평가하였다.[13] 또한 정조는 세종대왕, 광해군, 이승만, 박정희 등과 함께 권력을 잡고도 국민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과 약자의 편에 대한 동정심과 강한 자에 대한 정의감을 보존했던 이들이라며 높이 평가하였다. 그에 의하면 권력자의 부패하지 않은 이런 정신과 혼은 실용과 자주로 표현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14]

기타

호칭

조선에서 내린 묘호는 정종(正宗)으로 그는 조선의 기준으로 보면 정종이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 황제로 추존되면서 묘호가 정종에서 정조(正祖)로 바뀐 것이므로 정조 는 대한제국에서 본 시각이다.

이름

정조는 아들을 많이 낳기 위해서 발음을 이산에서 이성으로 바꾸었다.[15]

독살설

정조 사후 독살설이 제기되었다. 8월 18일 경상도 안동남인 출신 거족 여현 장현광의 후손 장현경과 그의 친족인 장시경 3형제 등은 정조의 독살을 주장하며 원수를 갚겠다고 거병하였다가 실패하고 일족이 처형당하였다. 전라남도 강진으로 유배된 정약용은 솔피시에서 고래(정조)가 해달(노론)에게 죽임당하였다고 하여 정조의 독살설을 암시하였다.[16] 그러나 당시 젊은 관료였던 정약용은 궁중의 내부 사정에 통달할만한 지위에 있지 못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는 정조 사후 정약용과 그의 당파인 남인이 몰락한 것과 관계 깊은 것으로 보인다.

1990년대 이후 소설가 이인화는 그의 저서 영원한 제국에서 정조 독살설을 주장하였고, 김성진의 저서 박정희 시대, 이덕일의 저서 등에서도 노론에 의한 정조 독살의혹이 제기되어 왔다. 반론으로는 수은중독설, 약물중독설 등이 전한다. 정조 독살설의 원인으로 제기되는 것은 정조 사망 당시 정순왕후가 정조의 침전을 지키고 있었다는 점과 정조의 어의 중에 심환지의 일족이 있었다는 것 등이 제기되고 있다.

유봉학의 저서 정조대왕의 꿈에서는 독살설을 부정하고 있는데, 급서한 것이 아니라 거의 한 달에 가까운 투병이 있었고, 처방에 정조 자신이 관여한 것, 간병을 지휘한 사람이 소론 시파의 우의정 이시수[17]였다는 것을 들어 독살설을 부정하였다. 수은 연기를 쐬는 연훈방을 처방한 의관 심연도 심환지와 성은 같은 심씨이나 일가친척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한 정조의 사돈인 시파 김조순 등에 의해 벽파가 일망타진되었던 1806년 이른바 병인경화(丙寅更化)의 시기에도, 이후에도 정조의 독살설에 대해 이와 관련된 문제제기가 나온 적이 없었다라고 주장한다.[18] 이덕일이 누가 왕을 죽였는가라는 저서에서 인조 반정 이후의 상황을 들어 선조 독살설을 부인했듯이[19] 유봉학도 시파의 집권 과정의 상황을 들어서 독살설을 부정하는 것이다.

2009년 2월 정조가 심환지 등에게 보낸 어찰이 발견되면서 정조 독살설에 이의가 제기되기도 하였다.

휘(諱)에 대한 논란

정조의 휘(이름)를 '성'이라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20][21][22]

정조를 연기한 배우들

드라마

영화

연극

같이 보기

참조

  • 이인화 《영원한 제국》(1993)
  • 이덕일 《누가 왕을 죽였는가》(1998)
  • 이덕일 《조선왕 독살사건》(2005)
  • 박광용 《영조와 정조의 나라》(1998)
  • 이덕일 《사도세자의 고백》(1998)
  • 정은궐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2007),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2009)

주석

  1. 전운옥편에서 성으로 읽음, 순조 때 이성보가 정조의 휘를 범한다는 이유로 이직보로 개명하였다. 조선왕조실록 순조 1권, 즉위년(1800 경신 / 청 가경(嘉慶) 5년) 8월 29일(기묘) 7번째기사
  2. 이 날 원손정호(元孫定號)를 정식으로 하기 전에 조정에서 먼저 문안하였는데, 이에 대해 영조는 원손정호를 정식으로 하기 전의 왕손(王孫)에 대한 조정 문안은 절차에 맞지 않다고 하교했다.
  3. 이는 죄인의 아들이라는 홍계희, 홍인한, 홍봉한 등의 비판을 듣고 후일을 염려한 영조의 배려에 의한 조치였다.
  4. 오주석. 《단원 김홍도》. 열화당. 37쪽. 
  5. 인물검색시스템, 4. 중인문화의 장려와 문예부흥-클릭해서 확인
  6. 오주석. 《단원 김홍도》. 열화당. 175 그림72쪽. 
  7.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노량진 사육신 묘역내 소재
  8. (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 ⑭기록화로 전해진 임진왜란 세계일보 2008.06.04일자
  9. “정조 사망은 인삼 오용 인한 의료사고”, 《주간동아》, 2008년 6월 11일 작성.
  10. 그의 손자인 익종의 양자 자격으로 조선의 왕통을 계승하였다.
  11. 박정희와 정조 주요 연표, 《조선닷컴》, 1997년 10월 30일 작성.
  12.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12853&C_CC=BB
  13. 조갑제 기자의 하버드 연수보고(1)-한국사의 실용과 자주(1), 조갑제 닷컴
  14.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6944&C_CC=AZ
  15. 김태식 기자. "정조, 아들 많이 낳으려 이름 바꿨다". 연합뉴스. 2010년 11월 14일에 확인함. 
  16. 정약용 문집 제4권
  17. 이덕일은 이시수가 벽파라고 주장한다.이덕일. 《누가 왕을 죽였는가》. 푸른 역사. 244쪽. ISBN 89-8778-709-5.  하지만 이시수는 1804년(순조 4년)에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반대하였다.
  18. 유봉학. 《정조대왕의 꿈》. 신구문화사. 18 ~ 21쪽. ISBN 89-7668-095-2. 
  19. 이덕일, 누가 왕을 죽였는가, 63 ~ 68쪽
  20. '이산-정조'인가 '이성-정조'인가? - 오마이뉴스
  21. 남현희 편역, 『일득록(日得錄)』, 문자향, 2008, 5면.
  22. 다산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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