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장전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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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전운 본문의 첫 장.

규장전운》(奎章全韻) 또는 《어정규장전운》(御定奎章全韻)은 정조의 명으로 조선 후기의 학자 이덕무가 짓고 윤행임, 서영보, 남공철, 이서구, 이가환, 성대중, 유득공, 박제가 등이 교정한 운서[A]이다. 1796년에 처음 간행되었고, 그 뒤로도 방각본으로 간행되어 많은 이본[B]이 전한다.

이전의 운서는 대개 사성 중 평성, 상성, 거성을 3단 체재(體裁)로 나열한 뒤 책 끝에 입성을 일괄하여 다루는 방식이었는데, 규장전운은 사성을 한꺼번에 다루는 4단 체재로 짜였다. 13,345개의 한자가 실렸다. 중국의 한자음과 조선의 한자음을 모두 적었으나, 조선의 한자음은 속음(俗音)을 버리고 규범음만을 취하여 적었다. 이 때문에 규장전운을 개고하여 속음을 함께 적은 《전운옥편》이 편찬되게 되었다.

편찬 과정[편집]

규장전운의 편찬은 정조의 불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정조는 당시 조선에서 널리 쓰이던 운서에 대한 불만이 있었다. 《홍재전서》의 기록에 따르면, 정조는 세종 때 지어진 운서가 정조 당대에 현전하지 않고 있음을 아쉽게 여겼다.[1] 또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면서 널리 사용되던 운서인 《삼운통고》(三韻通考)는 수록된 글자 수가 적고, 주석도 간단하며, 사성을 3단 체재로 실은 것을 지적하였다.[2] 최세진의 《사성통해》나 박성원의 《화동정음통석운고》 역시 당시에 널리 쓰였으나, 정조는 이들이 삼운통고의 영향을 받아 삼운통고의 세 가지 단점을 그대로 답습하였다고 보았다.[2] 또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에 따르면, 과거 시험에서 한시를 지을 때 사람들이 증운(增韻)과 입성을 압운에 쓰지 않는 경향이 있어, 정조는 사람들이 잘못된 관행을 타파하고 규범으로 삼을 만한 운서를 지을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3]

이에 따라 정조 3년(1779년)에 서명응 등에 의하여 《규장운서》(奎章韻瑞)가 편찬되나, 운서라기보다는 자전에 가까워 한시를 지을 때 참고하기에는 어려웠기 때문에 간행되지는 않았다.[4] 또 정조 11년(1787년)에 간행된 《화동정음통석운고》의 재판(再版)에 정조는 중국의 한자음이 잘못 전해져 와음(訛音)이 된 현실을 박성원이 옳게 고쳤다는 내용의 서문을 실었으나, 이 역시 만족스럽게 여기지는 않았다.[5][6] 결국 정조는 이덕무에게 규장전운의 편찬을 명하여 정조 16년(1792년)에 편찬이 모두 끝났으며, 윤행임 등 여덟 명이 두 차례에 걸쳐 이를 검토하였고, 도중인 1793년에 이덕무가 죽자 1795년에 오백 냥을 내려 편찬을 지원하였다.[7]

규장전운이 완성된 뒤, 정조는 1796년에 규장전운을 서울과 각 지방에 반포하였다.[8] 이때 규장전운은 1795년에 《원행을묘정리의궤》를 인쇄하기 위하여 주조한 정리자(整理字)로 인쇄되었다.[9] 이후 정조는 전라도 제주목에서 열린 승보시(陞補試)에서 상위 여섯 명에게 규장전운을 내리게 하였고[10], 같은 해 경기도 수원에서 유생들이 쓴 시문을 시상할 때에도 규장전운을 직접 하사하는 등[11] 규장전운의 보급에 노력하였다.[12]

특징[편집]

본문을 4단으로 나누어 위에서부터 평성, 상성, 거성, 입성을 차례로 적었다.[13] 또 화동정음통석운고는 화음[C]과 동음[D] 모두 일상에서 쓰이는 속음으로 적어 실용적으로 만들어진 반면, 규장전운은 화음과 동음 모두 이상적인 규범음으로 표기하여 한시를 지을 때 모범이 되도록 하였다.[14] 화음은 흰 원(○) 안에, 동음은 흰 사각형(□) 안에 기록하였다.[15] 동음의 이음(異音)은 팔각형 안에 적었다.[16] 한 한자가 다른 성조에도 속하는 경우 한자의 오른쪽 위에서부터 다음의 기호를 달았다.[16] 평성은 흰 원(○), 상성은 검은 원(●), 거성은 흰 반원, 입성은 검은 반원(◗)으로 나타냈다.[15]

음운 체계[편집]

초성[편집]

화음의 초성은 사성통해를 그대로 따랐기 때문에, 정조 연간의 화음과도 차이를 보이는 이상적인 음이다.[17] 가령, 18세기에는 이미 의모(疑母)와 미모(微母)가 사라지고, 견모(見母)와 정모(精母) 계통의 구개음화가 일어난 뒤인데, 이러한 변화가 규장전운에는 반영되지 않았다.[18]

규장전운 화음의 초성 분류[18]
전청 차청 전탁 불청불탁
아음(牙音) 見 k 溪 k' 君 g' 疑 ŋ
설음(舌音) 端 t 透 t' 定 d 泥 n
순음(脣音) 幇 p 滂 p' 竝 b 明 m
非 f 奉 v 微 ɱ
치음(齒音) 心 s 精 ts 淸 ts' 邪 z 縱 dz
審 ʃ 照 tʃ 穿 tʃ' 禪 ʒ 床 dʒ
후음(喉音) 影 ʔ 曉 x 匣 ɣ 喩 ∅
반설음(半舌音) 來 l
반치음(半齒音) 日 ʑ

동음의 초성은 정조 연간의 현실 한자음과 거의 같다.[17] 다만 쌍(雙)과 끽(喫) 등의 초성에 쓰인 경음을 평음으로 적은 것이 다르다.[19]

규장전운 동음의 초성 분류[20]
전청 차청 불청불탁
아음(牙音)
설음(舌音)
순음(脣音)
치음(齒音)
후음(喉音)
반설음(半舌音)

중성[편집]

화음의 중성은 대체로 다음의 18개가 쓰였는데, 정조 연간의 화음과 정확히 같지는 않다.[19]

[21]

동음의 중성은 다음의 23개가 쓰였는데, (아래아)의 소실 등이 반영되지 않았다.[22]

[22]

종성[편집]

화음의 종성으로는 ㄴ, ㅁ, ㅇ의 세 가지가 쓰였다.[23] 16세기 이전에 이미 중국에서는 侵, 覃, 鹽, 咸 등 네 운의 운미가 /-m/에서 /-n/으로 바뀌었음에도, 규장전운은 이를 반영하지 않고 여전히 ㅁ을 종성으로 표기하였다.[24][25]

동음의 종성으로는 ㄱ, ㄴ, ㄹ, ㅁ, ㅂ, ㅇ의 여섯 가지가 쓰였다. 한자음에 6종성만 쓰인 것은 15세기부터 현재까지 동일하다.[26]

같이 보기[편집]

참고 문헌[편집]

각주[편집]

내용주
  1. 운서(韻書): 한자의 운(韻)을 분류, 규칙에 맞추어 열거한 서적을 통틀어서 이르는 말
  2. 이본(異本): 기본적인 내용은 같지만, 다소 차이가 있는 책
  3. 화음(華音): 중국에서 쓰이는 한자음
  4. 동음(東音): 한국에서 쓰이는 한자음
참조주
  1. 정경일 2002, 289쪽.
  2. 정경일 2002, 290쪽.
  3. 강신항 2000, 246쪽.
  4. 정경일 2002, 286-287쪽.
  5. 강신항 2000, 241-242쪽.
  6. 정경일 2002, 288-289쪽.
  7. 정경일 2002, 282-283쪽.
  8. 《정조실록》 45권 20년 8월 11일, 《어정규장전운》을 서울과 지방에 반포해 내리다. 국사편찬위원회
  9. 《정조실록》 45권 ​20년 12월 15일, 각종 경적 인쇄처의 명칭을 국초와 같이 주자소로 부를 것을 명하다. 국사편찬위원회
  10. 《정조실록》 46권 ​21년 1월 6일, 제주에 시험관의 미비로 승보시가 여의치 않자 그 대책을 지시하다. 국사편찬위원회
  11. 《정조실록》 47권 ​21년 9월 12일, 수원 등의 유생이 응제한 시문을 보고 시상하고 군졸의 활쏘기 시험을 보다. 국사편찬위원회
  12. 정경일 2002, 284쪽.
  13. 강신항 2000, 245-246쪽.
  14. 강신항 2000, 249쪽.
  15. 강신항 2000, 252쪽.
  16. 구현아 2008, 36쪽.
  17. 정경일 2002, 305쪽.
  18. 구현아 2008, 37쪽.
  19. 정경일 2002, 306쪽.
  20. 구현아 2008, 41쪽.
  21. 정경일 2002, 307쪽.
  22. 정경일 2002, 309쪽.
  23. 구현아 2008, 39쪽.
  24. 정경일 2002, 303-304쪽.
  25. 구현아 2008, 40쪽.
  26. 정경일 2002, 310-311쪽.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