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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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응부 兪應孚 | |
|---|---|
| 이름 | |
| 자 | 신지(信之) |
| 호 | 벽량(碧梁) |
| 시호 | 충목(忠穆) |
| 신상정보 | |
| 출생일 | 미상 |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포천현 남면 무봉리 (현, 포천시 소흘읍 무봉리) |
| 사망일 | 1456년 6월 |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의금부 경내 |
| 국적 | 조선 |
| 성별 | 남성 |
| 본관 | 기계 |
| 묘소 | 서울특별시 노량진 사육신묘 |
| 서훈 | 증 병조판서 추증 |
유응부(兪應孚, ?~1456년 6월)는 조선 전기의 무신, 군인으로 사육신 중 한 사람이다. 자는 신지(信之), 호는 벽량(碧梁), 시호 충목(忠穆), 경기도 포천 출신이며 본관은 기계이다.
1448년(세종 30) 첨지중추원사, 경원부사, 1452년 의주목사, 이듬해 평안좌도 도절제사를 지냈다. 세조의 단종 폐위로 사육신 성삼문, 하위지, 박팽년 등과 함께 거사를 도모하였으나 사전에 누설되면서, 1456년 6월 의금부에 체포, 투옥된 뒤 고문을 당하다가 죽었다. 시조 3수를 남겼다 한다. 뒤에 증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생애
[편집]경기도 포천현 남면 무봉리(현, 포천시 소흘읍 무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키가 컸다 한다. 일찍이 무과(武科) 급제, 1448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경원도호부사(慶源都護府使)를 지냈다. 1449년 상을 당했으나 그해 세종대왕의 명으로 함길도 도절제사 김윤수(金允壽)에게 기복행공을 지시하여, 다시 임지로 돌아갔다. 1452년(단종 즉위) 단종 즉위 직후 그해 10월 의주목사(義州牧使)로 전근되었다가, 이듬해 7월 평안좌도 도절제사(平安左道都節制使)로 발령되었다. 1455년 4월에 판강계도호부사가 되었다가, 그해 윤달 음력 6월 세조가 즉위하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임명되었다.
은대선생안(銀臺先生案)에 의하면 그는 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를 역임한 적도 있는데, 승정원승지 재직 일자는 세종실록, 문종실록, 단종실록, 세조실록에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효성이 지극해 집이 가난했으나 어머니를 봉양하는 준비는 부족함이 없었다고 한다. 사 생활은 지극히 청렴해 벼슬이 재상급(宰相級)의 2품 관직에 있으면서도 거적자리로 방문을 가리웠고 고기 반찬 없는 밥을 먹었다. 또 때로는 양식이 떨어지기도 하니 처자가 이를 원망했는데, 그가 죽던 날 그 아내가 울면서 길가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살아서도 남에게 의지함이 없었는데 죽을 때는 큰 화를 입었구나.”고 하였다. 키가 컸으며, 씩씩하고 용감했다 한다. 활을 잘 쏘아 세종과 문종에게 인정받았다.
기골이 장대하고 효성이 지극했으며 재상급인 종2품에 이르러서도 끼니를 거를 정도로 청렴결백하였다. 키가 남보다 크고 얼굴 모양은 엄숙했으며, 씩씩하고 용감해 활을 잘 쏘아 세종과 문종이 아꼈다. 또한 학문에 뛰어나 절의파 학자로 알려졌다.[1] 1456년 6월 2일 체포되어 의금부에서 고문을 당했다.
세조의 국문을 받을 때, “너는 무슨 일을 하려고 하였는가?”라는 세조의 국문에 그는 “명나라 사신을 초청 연회하는 날 한 자루 칼로 족하(足下)를 죽여 폐위시키고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고 했으나, 불행히 김질에게 고발당했으니 다시 무슨 일을 하겠는가. 빨리 나를 죽여라.” 라고 답했다. 그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고문을 당하면서 성삼문 등을 돌아보고는 “사람들이 서생과는 함께 일을 모의할 수 없다고 하더니 과연 그렇다. 지난번 사신을 초청 연회하던 날 내가 칼을 사용하려고 했는데, 그대들이 굳이 말리면서 ‘만전의 계책이 아니오’ 하더니, 오늘의 화를 초래하고야 말았구나. 그대들처럼 꾀와 수단이 없으면 무엇에 쓰겠는가!” 하고 자신이 사람 보는 눈이 없다고 한탄하였다.
그리고 다시 세조에게 “만약 이 사실 밖의 일을 묻고자 한다면 저 쓸모없는 선비에게 물어보라” 하고는 입을 닫고 대답하지 않았다. 세조가 더욱 성이 나서 달군 쇠를 가져와서 배 밑을 지지게 하니 기름과 불이 함께 이글이글 타올랐으나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고, 천천히 달군 쇠가 식기를 기다려 그 쇠를 집어 땅에 던지면서 “이 쇠가 식었으니 다시 달구어 오라.” 하고는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사후
[편집]시조 3수가 전한다. 1691년(숙종 17) 관직이 복직되었다. 뒤에 숙종 때 증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과천(果川)의 민절서원(愍節書院), 홍주(洪州)의 노운서원(魯雲書院) 등에 배향되고[1], 남양주 충목사에 제향되었다. 1791년(정조 15)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수록되었다.
각주
[편집]- 1 2 유응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같이 보기
[편집]참고 자료
[편집]외부 링크
[편집]- 〈유응부〉. 《두산세계대백과사전》. (주)두산.
- 유응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유응부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다음백과 미러)
- 유응부 -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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