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2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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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大韓民國

1960년1961년
국가 애국가
South Korea (orthographic projection).svg
수도 서울특별시
정치
공용어 한국어
정부 형태 내각책임제
과도 정부 수반
대통령
국무총리
허정
윤보선
장면
역사
 • 4·19 혁명
 • 6·15 개헌
 • 5·16 군사정변
1960년 4월 19일
1960년 6월 15일
1961년 5월 16일
지리
면적 100,210km² (108위)
내수면 비율 0.3%
인구
1961년 어림 2640만명
기타
통화 대한민국 환
제2공화국을 이끌었던 장면 총리

제2공화국(第二共和國)은 1960년 6월 15일부터 1961년 5월 16일까지 불과 11개월간 존속했던 대한민국의 두 번째 공화 헌정체제이다. 제2공화국 체제는 1960년 4·19 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된 후, 허정 과도정부(1960년 4월 27일 ~ 6월 14일)를 거쳐 6·15 개헌에 의해 설립된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한 의원내각제 기반의 헌정체제이다. 국무총리는 장면,[1] 대통령은 윤보선이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한 후, 민주당이 주도한 국회는 의원내각제양원제를 권력 구조의 핵(核)으로 헌법을 개정하였다. 이 헌법에 따라 총선거가 실시되어 민주당장면 내각이 들어섰다. 민주당 정권은 자유주의 정치이념을 기반으로 경제개발계획을 통한 산업입국을 꾀했으나, 장면의 민주당 신파와 윤보선의 민주당 구파 사이의 정치적 갈등으로 이러한 계획을 구체화할 정치적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고 4·19 혁명을 계기로 분출된 각계 각층의 요구에도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였다. 장면 정권은 군사반란의 조짐을 보고받고도 미국에 기댄 안이한 판단으로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사반란세력에 속수무책으로 정권을 탈취당하였고, 결국 제2공화국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에 의해 붕괴되었다.

역사[편집]

과도정부 수반과 제2공화국의 초대 총리를 지낸 허정

4·19 혁명 이후 국회는 민주당의 주도로 1960년 6월 15일 내각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6·15 개헌) 이 개헌안이 통과된 직후 제2공화국 헌법에 따른 민의원, 참의원 선거를 통해 새로운 정부를 구성할 때까지 임시 국무총리에는 4월 27일 이후 내각수반을 맡았던 허정이 선출되었고, 허정8월 12일 대통령이 선출 때까지 대통령 권한대행을 계속 겸임하였다. 1960년 8월 12일, 국회 양원합동회의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이 당선되었다.

제1공화국의 이승만 1인 독재체제에 대한 거부감이 컸던 민주당은 대통령중심제가 아닌 의원내각제4·19 혁명 이후의 새로운 헌법체제로 채택하였다. 의원내각제를 채택한 제2공화국의 정무(政務)적 실권은 국무총리에게 있었고, 대통령은 형식적인 국가원수였다.[2] 그 밖에 국민의 기본권 보장 강화, 국회 양원제, 지방자치제 실시 등을 제2공화국 헌법의 특징으로 들 수 있다.

민주당정부는 4·19 혁명에 따른 다양한 개혁 요구에 소극적으로 대응한데다 장면의 민주당 신파와 윤보선의 민주당 구파 간 파벌 갈등까지 벌여 정치적 기반이 약화되어 정책적 실행이 원활하지 못했고, 이승만 자유당 정권 청산 문제에도 과감하지 못했다.

1961년 5월 16일, 제2공화국은 소장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사반란세력이 벌인 5·16 군사쿠데타로 붕괴되었다. 5·16 군사쿠데타로 제2공화국 헌법은 효력이 정지되었고, 대한민국 헌정(憲政)은 이후 1963년 12월 27일 제3공화국이 출범하기 전까지 국가재건최고회의군정(軍政) 체제로 들어간다.

정치[편집]

1960년 8월 19일 장면 총리 인준 직후, 장면 총리와 윤보선 대통령

제2공화국 정부는 '자유화'의 원칙에서 다양한 분야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4·19 혁명 이후 이승만 정권 아래에서 억압되었던 각계 각층의 열망이 활발한 정치활동과 노동조합의 결성을 통한 노동운동 등의 방식으로 표출되었다. 또한, 정치활동의 규제가 풀리면서 혁신세력을 중심으로 각종 단체가 만들어졌다. 4·19 혁명 주체가 아닌 장면 정권은 4·19 혁명을 주도했던 학생·시민들의 이러한 다양한 활동은 최대한 보장하였으나, 그들의 요구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특히, 3·15 부정선거의 주모자와 4·19 혁명의 전후에 있었던 일련의 시위에서 군중들을 살상한 관련자를 처벌하라는 요구가 점점 강해져 1960년 10월 11일에는 4.19부상자 50여명 등이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민주반역자를 처벌하는 특별법의 제정을 호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10월 17일, 민의원에 특별처벌법의 제정 근거를 마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헌법 부칙 개헌안이 제출되어 11월 29일에 반민주행위 처벌을 목적으로 하는 소급입법의 근거가 되는 제4차 헌법개정이 이루어졌고, 이를 근거로 12월 31일에는 '부정선거관련자 처벌법'과 '반민주행위자 공민권 제한법'이 제정되었다.

윤보선 대통령

'자유화'의 바람은 남북관계에 대한 변화의 열망으로도 나타났다. 북진통일론이 국시(國是)나 다름없던 이승만 정권 하에서 이야기할 수 없었던 '평화통일론', '중립화 통일론', '남북협상론' 등 남북교류와 통일에 관한 여러 주장들이 대두되었다. 1961년 1월, 참의원에서 여운홍 의원은 남북협상을 공개적으로 제기했으며, 특히 학생운동세력과 혁신세력은 독재 타도의 여세를 몰아 직접 접촉을 통한 남북협상을 전개하려 시도하였다. 1961년 5월 13일, '민주자유통일'이라는 학생단체가 정부의 개입을 배제하고 판문점에서 '남북학생회담'을 가질 것을 제안하였는데, 사회 일각에서는 평화통일이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여기는 분위기마저 팽배했다.

불과 9개월 존속한 당시의 장면정권은 이러한 다양한 사회적 요구와 들뜬 분위기에 적절히 대응하고 관리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구파의 윤보선 대통령은 제2공화국 정부가 각계에서 분출된 자유화 요구로 정권 초기현상을 겪고 있는 와중에 명목상의 국가원수임에도 공공연한 간섭과 비난성명으로 장면정권에 부담을 주는 등 제2공화국 정부의 정치기반은 취약했다. 또한, 연이어 벌어지는 시위를 정부가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자 사회혼란에 대한 우려도 커졌다.

제2공화국의 대통령 윤보선(오른쪽에서 두 번째)과 총리 장면

윤보선장면공무원 인사국군통수권을 두고 극심하게 대립했다. 정권 인수의 3개월만인 1960년 12월까지 장면자유당정권에 적극 부역한 경찰관 4천500명 등 다수의 공무원을 해임하였다. 그런데, 그 빈자리의 상당수는 민주당 당원출신으로 채워졌다. 윤보선은 공무원 인사가 있을 때마다 민주당 구파를 안배할 것을 압박하며 인사문제에 개입하는 한편으로 민주당 구파는 장면의 인사를 '정실인사', '부정부패'라고 비난했다.

특히, 국군통수권을 두고 벌인 두 사람의 권력다툼은 군사반란의 빌미로 작용했다. 제2공화국 헌법 제61조제1항은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군을 통수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었으나, 제72조에서는 '선전(宣戰), 강화(講和), 계엄안(戒嚴案), 계엄해제, 군사(軍事)에 관한 중요사항 및 각군 참모총장의 임면(任免)'은 국무총리를 의장으로 하는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치도록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군통수권의 실질적 행사자가 누구인지가 명확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정으로 군(軍)통수권에 관한 구체적인 하위법률의 제정과 정비가 필요했음에도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대립으로 5·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할 때까지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그 해 2월 17일 장면이 임명한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쿠데타 발생 후 이틀만에 군사반란세력과 한패가 되었다. 결국,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국무총리 장면은 수녀원으로 숨고, 대통령 윤보선은 자기에게는 '군통수권이 없다'며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와 주한 미국 대리대사가 요청한 쿠데타 저지 목적의 병력동원 허가를 거부함으로써 군사반란을 사실상 방조하는 무책임하고 무능력한 모습을 보여 헌정질서 중단을 초래케 했다.

경제[편집]

제2공화국은 경제분야에 있어서 4·19 혁명 직후의 사회불안 요인과 노동운동, 시위의 증가 등 경제 불안요소 때문에 경제성장이 정체되었다.[3] 실업률과 물가가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1960년 가을부터 1961년 봄까지 미국 달러화에 대한 대한민국 환(圜)화의 가치는 절반으로 폭락했다.

한편, 제2공화국 정부는 경공업과 농업의 생산력 증가, 실업자 해소, 국토개발 등을 목표로 한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입안하였으나, 5.16 군사쿠데타로 이를 집행할 수 없었다.

외교[편집]

장면 정권은 이승만 정권 하에서 진전이 없었던 한일국교정상화 교섭을 재개하여 일본 자민당 대표단의 방한을 실현시켰다.

1960년 7월, 손원일(당시 주서독 대사) 특사 일행은 콩고 공화국 독립식전에 참석 후 카메룬, 토고, 기니, 말리, 나이지리아, 모로코 6개국을 친선 방문하고, 상호간의 이해증진과 외교관계 수립에 관하여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4]

연혁[편집]

내각 구성[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장면이 국무총리로 선출되기 전인 1960년 6월 15일부터 8월 18일까지, 과도정부 수반이었던 허정이 임시로 국무총리직을 계속 수행하였다.
  2. 제2공화국의 정치(精緻)하지 못한 헌법규정과 민주당 신·구파간의 알력은 공무원 인사권과 군(軍)통수권에 권한 권력다툼을 촉발시켜 군사반란으로 헌정질서를 내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3. Nahm, Andrew C. (1996). Korea: A history of the Korean people (2nd ed.). Seoul: Hollym. ISBN 1-56591-070-2.
  4. “阿洲六國과修交...孫親善特使合意報告”. 동아일보. 1960년 7월 22일. 석간 1면.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