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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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청(捕盜廳)은 조선 시대에, 범죄자를 잡거나 다스리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이다. 초기에는 임시직이었으나 이후 상설기구가 되었다. 한성부경기도를 좌우로 나누어 좌포도청(당시 중부 정선방 파자교. 동북쪽, 현 서울 종로구 수은동 단성사 일대)과 우포도청(서부 서린방 혜정교 남쪽, 현 종로구 종로 1가 광화문 우체국 자리)을 두었다. 지금의 경찰격이나, 경찰청에 해당하면서도 수도권만이 관할구역이므로 서울지방경찰청경기남부지방경찰청, 경기북부지방경찰청에 더 가깝다. 포도청은 원래 강도나 살인범을 취조하고 가두던 곳이었지만 서울의 포도청을 비롯하여 지방의 진영(일명 토포청)이나 수영, 병영등에서 조선후기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하여 처벌하기도 하였다. 지방에서 이송된 신자들은 좌.우 포도청에서 심문을 받은 뒤 사안의 경중에 따라 상급기관인 형조나 의금부로 이송되었다. 문헌에는 1830년대부터 1880년대까지 천주교에 연루되어 체포된 500여 명의 심문 기록이 실려있다.[1]

1469년(성종즉위년)에 박중선을 포도주장(捕盜主將)으로 삼아 전라도에 보낸 기록이 있다.[2] 이후 각지에 일어나는 도둑들을 잡기 위해 포도장을 임영하여 각지에 보낸 기록이 성종조에만 29번 나타난다. 초기의 포도대장들은 중앙에서 지방으로 파견되는 임시직 형식이었다. 그리고 성종 5년에는 이양생이 포도장으로 권력을 남용하므로 포도장을 상설화가 폐지되었다가. 같은해 3월 포도장을 다시 신설한다.[3] 이후 1481년(성종12년)에 좌변(左邊)·우변(右邊)으로 나누어, 서울의 동부·남부·중부와 경기좌도는 좌변이 맡고, 서울의 서부·북부와 경기우도는 우변이 맡았다.[4] 중종 35년(경찰청고시계)인 1540년, 중종실록에 포도청(捕盜廳)이란 단어가 처음 등장한다.[5]

직제[편집]

《속대전》에 따른 좌포도청의 직제는 다음과 같으며, 우포도청의 직제 또한 "좌"를 "우"로만 바꾸면 동일했다. 포도대장은 현재의 경찰청장에 해당한다.

  • 종2품 좌포도대장(左捕盜大將) 1인 - 경찰서장 총경급.
  • 종6품 좌포도종사관(左捕盜從事官) 3인 - 서장 보좌 및 죄인 심문을 맡은 행정직. 경찰간부 경정급.
  • 포도군관(捕盜軍官) 42인 - 현장 수사나 순라를 맡았다. 경사 ~ 경감급.
    • 종6품 좌포도부장(左捕盜部將) 4인 - 형사반장급. 포두(捕頭), 삼부리라고도 한다.
      • 기찰군관(譏察軍官) - 탐정 수사를 맡은 포도군관. 기찰포교, 기교(譏校)라고도 한다.
    • 무료부장(無料部將) 26인 - 품계가 없다. 일반 형사급. 무료군관, 포교(捕校)라고도 한다.
    • 가설부장(加設部將) 12인 - 정원 외에 더 둔 부장. 가설군관이라고도 한다.
  • 서원(書員) 4인 - 중인들로, 사무기록을 담당한 서기들이다.
  • 포도군사(捕盜軍士) 다수 - 소위 포졸(捕卒).

각주[편집]

  1. [가족이 함께 가는 성지순례|지은이=오영환.박정자|출판사=가톨릭출판사|초판=2011년]
  2. 성종실록 즉위년(1469년) 11월 29일 3번째기사
  3. 성종실록 5년 1월 25일 3번째기사, 5년 3월11일 3번째기사
  4. 성종실록 12년 3월24일 4번째기사.
  5. 중종 94권 35년 10월 7일 (을축) 1번째기사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