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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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위영은 5군영 중 가장 마지막으로 설치된 것으로서, 숙종 때 설치되었다. 주 임무는 국왕 호위와 수도인 한양을 방어하는 것이다. 금위영은 오늘날 대한민국 대통령경호실과 대한민국 육군 수도방위사령부, 군사안보지원사령부의 역할을 하였다.
내력[편집]
금위영은 인조(仁祖) 때 기병(騎兵) 중에서 정병(精兵)을 선발하여 병조 산하에 두었던 정초군(精抄軍)과 훈련도감의 별대(別隊)를 통합하여 1682년(숙종 8)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금위영은 처음부터 5군영의 일부로 독립된 채 생겨난 것이 아니고, 병조 판서가 금위영의 대장직을 겸함으로써 실질적으로 6조 중에서 병조의 수중에 있었다. 이후 1754년(영조 30년)에 독립된 군영으로 생겨나게 되었다.
청사[편집]
- 본영(本營) : 금위영 청사는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 98번지에 있었다. 창덕궁의 금호문 밖에 있던 이 청사를 신영(新營)이라고도 불렀다. 362칸[間] 규모이며, 일제강점기 때에 일종의 직업 훈련원이던 은사수산장(恩賜授産場), 구황실 아악부인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 건물로 활용되었다.
- 남영(南營) : 창덕궁 개양문(開陽門) 인근에 있었다. 12칸 규모.
- 서영(西營) : 창덕궁 경추문(景秋門) 서쪽 건너에 있었다. 11칸 반 규모.
- 남별영(南別營) : 남부 낙선방(樂善坊) 묵동(墨洞)에 있었다. 139칸 규모.
- 남창(南倉) : 남별영 남쪽에 있었다. 101칸 규모.
- 하남창(下南倉) : 남별영 북쪽에 있었다. 104칸 규모.
- 화약고(火藥庫) : 남창 서쪽 건너에 있었다. 17칸 규모.
- 직방(直房) : 경희궁 인근에 있었다. 8칸 규모.
군영 편제[편집]
초기의 편제는 1영-5부-20사-105초(哨)로 구성되었으나 1704년 군제를 개혁할 때 1영-5부-25사-125초로 편제되어 규모가 증가하였다. 금위영의 관직 체계는 아래와 같다.
- 정1품 도제조(都提調) 1명 : 다른 관원이 겸직
- 정2품 제조(提調) 1명 : 병조판서가 겸직
- 종2품 대장(大將) 1명 : 등단 장신(將臣)
- 종2품 중군(中軍) 1명 : 금위영 아장(亞將)
- 정3품 별장(別將) 1명
- 정3품 천총(千摠) 4명
- 정3품 기사장(騎士將) 3명
- 종4품 파총(把摠) 5명
- 종3품 외방겸파총(外方兼把摠) 12명
- 종6품 종사관(從事官) 2명 : 문관 1명, 무관 1명
- 종9품 초관(哨官) 41명
- 기타 군관(軍官) 5명, 별무사(別武士) 30명, 기사(騎士) 150명, 별기위(別騎衛) 32명, 표하군(標下軍) 1,177명, 별파진(別破陣) 160명, 보군(步軍) 등
운영상의 특징[편집]
금위영의 운영은 보(保)에 의해 이루어져 많을 때는 9만명에 이르렀다. 주축을 이루는 6도의 향군은 5초씩 번상하여 2개월간 복무하였고, 마병으로 이루어진 기사는 장번(長番)으로 복무했으며, 별파진은 16교대로 복무하였다. 이러한 금위영은 1881년(고종 18) 장어영으로 통합되었다가 1895년(고종 32)에 혁파(革罷)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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