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어청
수어청(守御廳)은 조선시대 오군영 중 하나로 1626년(인조 4년)에 설치되었으며 도성 남부와 남한산성을 수비하는 업무를 맡았었다.이 군사 부대의 군량미 창고로는 남창(南倉)이 있었다. 요즈음의 수도방위사령부, 제2작전사령부의 역할을 겸했다.
역사[편집]
1626년(인조 4년) 한양 도성 동남쪽의 중요 방어선인 남한산성을 개축하고 이 일대의 방어를 위해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경기도 병마절도사 겸 총융사(摠戎使)가 관할하였으나 정묘호란 이후 광주목사(廣州牧使)가 남한산성 방어사(防禦使)를 겸하게 했다가 병자호란 이후 중앙군영으로 독립하여 수어사(守禦使)를 두었다. 처음에는 수어청의 본청을 한성부 북부 진장방(鎭長坊)에 설치하고 한성부윤이 수어사(守禦使)를 겸직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광주부윤이 수어부사(守禦副使)를 겸직하게 하여 남한산성을 관할하게 하였다. 이후 훈척중신이 겸직하는 군사책임자인 수어사와 관할 행정책임자인 광주부윤 사이에 마찰이 자주 일어났다. 그래서 1683년(숙종 9년) 광주부윤(廣州府尹)을 광주유수(廣州留守)로 승격시켜 수어사를 겸직하게 함으로써 수어청은 단일체계를 갖춘 독립군영이 되었다. 1690년(숙종 16년) 다시 이원화되었다가 1750년(영조 26년) 광주유수(廣州留守)가 다시 수어사를 겸하게 하였고, 1795년(정조 19년) 왕권 강화를 위해 장용영(壯勇營)이 설치되면서 운영의 효율화를 위해 한양에 있던 수어청의 본청을 완전히 남한산성으로 옮겼다. 그리고 한양 본청의 청사는 호조로 이속시켰다. 정조 이후 수어청군이 점차 수포군(收布軍)으로 바뀌면서 유명무실해져 사실상 명목만 유지하다가 1894년(고종 31년) 폐지되었다.[1][2][3][4][5][6][7][8]
청사[편집]
관제[편집]
- 종2품 수어사(守禦使) 1명 : 수어청(守禦廳)의 으뜸 벼슬
- 정2품 상사(上使:수어사) 1명
- 종2품 부사(副使:수어부사) 1명
- 종2품 중군(中軍) 1명
- 정3품 진영장(鎭營將) 3명 : 전영장(前營將)은 본부 판관(判官), 중영장은 양주목사, 후영장은 죽산부사 겸임
- 정3품 별장(別將) 2명 : 여주목사, 이천부사 겸임
- 정3품 천총(千摠) 2명 : 후기에는 1명으로 정원 축소
- 종4품 파총(把摠) 3명
- 종6품 종사관(從事官) 1명
- 종9품 초관(哨官) 12명 : 3명은 선전관청 후보자, 2명은 평안도 출신, 1명은 금군 출신, 1명은 남한산성 군대 출신.
- 기타
- 수성장(守城將) 1명
- 유영(留營) 별장 1명
- 성기(城機) 별장 1명
- 교련관(敎鍊官) 17명
- 기패관(旗牌官) 19명
- 별군관(別軍官) 19명
병력[편집]
- 수첩군관(水堞軍官) 1,953명
- 이속군관(移屬軍官) 250명
- 친아병(親牙兵) 15초(哨)[10]
- 훈어군(訓禦軍) 5초
- 파하군(把下軍) 106명
- 난후마병(欄後馬兵) 1초
- 복로군(伏路軍) 150명
- 별파군(別破軍) 385명
- 국별파군(局別破軍) 1,870명
- 표하군 1,320명
- 도총섭(都摠攝) 1명
- 승군(僧軍) 356명
각주[편집]
같이 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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