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오파트라 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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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 7세
Cleopatra and Caesar by Jean-Leon-Gerome.jpg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재위 기원전 51년 ~ 기원전 30년
이전 황제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클레오파트라 7세 필로파토르(그리스어: Κλεοπάτρα Φιλοπάτωρ, 영어: Cleopatra VII Philopator, 기원전 69년 - 기원전 30년)는 이집트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여성 파라오이다.

생애[편집]

기원전 69년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12세의 셋째딸로 태어났다. 부왕이 죽은 뒤(기원전 51년) 18살에 15세가 된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재위: 기원전 51~47년)와 결혼하여, 공동 파라오가 되었다. 하지만 또 다른 남동생인 프톨레마이오스 14세(재위: 기원전 47~44년)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권력 기반인 그리스계의 외면으로 자리에서 일시 물러났다.

기원전 48년 10월, 클레오파트라 7세는 폼페이우스와 권력투쟁을 벌이다가 이집트에 온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협상하였다. 다시 파라오 자리에 복귀한 클레오파트라는 정치적 반대자들을 물리친 후 정치에 몰두하였다.

기원전 47년 3월 27일 승리를 거둔 카이사르는 이후 2주일 동안 클레오파트라와 지낸 뒤 이집트를 떠났다. 클레오파트라의 아들 카이사리온이 실제로 카이사르의 아들이었는지는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기원전 44년에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후에는 기원전 42년에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협동하였으며 3년 후 결혼하였다. 결혼 후 그녀는 남편 안토니우스의 권력투쟁을 경제적으로 도운 대가로 페니키아, 유다 등의 쓸모 있는 영토를 할양받아 확장하였다.

권력구조의 변화로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레피두스와의 삼두정치가 깨지자 클레오파트라 7세는 BC 31년 9월 2일 명분상 자신에게 선전포고한 옥타비아누스에 대항하여 안토니우스와 함께 악티움 해전을 결행했다.

하지만 전쟁은 실패하였고 자신을 일개 이집트 여인으로 취급하는 옥타비아누스와 연합할 수 없음을 직감한 클레오파트라는 자살했다. 에 물려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독가스를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자살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옥타비아누스가 죽여놓고 뱀에 물려 자살했다고 발표해 클레오파트라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려고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클레오파트라의 죽음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뱀에 의한 자살, 독가스에 의한 자살, 타살, 에이즈(AIDS) 감염에 의한 병사(病死) 등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평가[편집]

클레오파트라는 지식인인 블레즈 파스칼조차도 그녀의 코가 조금만 낮았어도 역사가 바뀌었다고 할 정도로 남성들에게 성적인 관점에서 평가받았다. 그리고 살아 있을 때에도 옥타비아누스로부터 로마를 짓밟는 이집트 여인 취급을 받은 일이 있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가 강대국 로마 제국을 이용하여 나라를 보전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그녀의 진짜 모습은 미모로 남성들을 유혹하는 요녀가 아니라, 궁전 밖의 세계를 다스리고자 한 여걸(女傑)이었다는 관점이 있다.

가계[편집]

주석[편집]

  1. 베르너 후스(Werner Huß) Ägypten in hellenistischer Zeit (Egypt in Hellenistic times). C. H. Beck, Munich 2001에 의하면, 어머니가 클레오파트라 5세 트뤼파이나가 아닌 맴피스의 귀족 여성이라고 한다.
  2. 남편이기도 함
  3. Strabo, Geographica 17.1.11, p. 796.
  4. 정식 배우자는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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