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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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가승(在家僧)은 함경북도두만강변의 여러 마을들에서 살던 족속 집단들을 부르는 말이다. 그들은 외모상으로는 한국인들과 구분되지 않았으나 일반적인 한민족과는 다른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1960년대에 한민족에 완전히 동화되었다.[1]

유래[편집]

유래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은데 고려시대 여진 정벌 후 원주민들이 모여 살게 하던 부락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병자호란에 대한 조공을 위해 여진족들을 뽑아 한 마을에 살게 했다는 설이 있다.

풍습 및 생활상[편집]

재가승들은 주로 농업 생활을 하였으며 산간에 은둔하며 화전농업을 하며 주로 귀리를 생산했다. 생산된 귀리를 이용하여 다른 세금이 면제된 대신에 초신과 귀리로 만든 황지(黃紙)를 생산하여 바쳤다.[2]

장래 풍습은 원래는 화장이었으나 이후 현지 풍습을 받아들여 매장을 하였다. 마을의 절에는 따로 승려는 없지만 주민들은 불교를 바탕으로 한 생활을 하였으며 불교에 능숙한 사람을 촌장으로 뽑았다. 마을에는 엄격한 규율이 있어 방장을 뽑아 행정 업무를 맡고 도방장을 뽑아 군사 관련 업무를 맡겼다.

여러가지 이질적인 풍습이 존재했는데 그 중에는 연중 2번 올리는 산치성(부군치성)과 연중 4번 올리는 산제가 있었다. 결혼은 마을 사람들끼리 하였으며 외지인들이 그들과 혼인할 때에는 그들 마을에 와서 살아야 했다. 또한 특이하게 제사를 지낼 때에는 성인남자는 참여하지 않고 여자와 아이들이 지냈으며 지낼 때에는 붉은 옷을 입었다. 그들은 폐쇄적인 생활을 영위했고 외부 세계와 별다른 거래를 하지 않았으나 차츰 한민족에 동화되어 갔다.

1935년의 조사에 의하면 인구는 약 4천명 가량이었는데 가장 많이 분포했던 곳은 함경북도 회령군 창두면 종암동 그리고 함경북도 온성군 미포면 월파동이었다. 이들이 사는 마을은 '재가승마을' 혹은 '중골'이라 불리었으며 이들은 모두 하천인으로 대우되었다.

대산귀(大山鬼)[편집]

대산귀라는 풍습이 있어 마을에 병자가 생겼을 때 행하는 풍습으로 하천 가까운 곳에 높은 다락을 세우고 장대를 세운 후 그곳에 '신명'이라고 쓰인 긴 천을 매달고 밤새도록 굿을 하였다.

언어[편집]

언어는 한국어의 하위 방언이라고 할 수 있는 동북 방언육진 방언이 쓰였으나 특이한 어휘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나물을 '나마리', 떡고물을 '영에', 지각없다는 말을 '덕새(양소래)없다'고 하는 것 등이 있었으며 호환 때문에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 '범이야범이야'라는 욕설이 존재했다.

문학 작품[편집]

각주[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