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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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선
(李載先)
생애 1842년/1841년 8월 1일 ~ 1881년 음력 10월 28일
출생지 조선 조선한성부 안국동 운현궁
사망지 조선 조선제주도 제주목
(일설에는 처형 직전 제주도에서 한성부 서대문으로 압송)
복무 조선 육군
복무 기간 1864년 ~ 1881년 9월
최종 계급 부호군
근무 훈련원, 오위, 중추부

완은군 이재선(完恩君 李載先, 1842년/1841년 8월 1일 ~ 1881년 음력 10월 28일)은 조선후기의 문신정치가이자, 대한제국의 황족으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서자이자, 흥친왕 이재면고종의 서형이다. 이준용의 서숙부가 된다. 1881년 이재선 추대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다른 이름은 재선(載璿)이며, 자와 호는 미상이다.

무과에 급제해 1864년 훈련원첨정, 1865년 오위장, 1872년 중추부첨지사 등을 지냈다. 1874년 별군직, 부호군 등을 거쳐 양주목사로 부임했다가 이조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후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별군직, 부호군, 1879년 중추부동지사 등을 역임했다. 1881년 흥선대원군의 측근 안기영(安驥永), 권정호(權鼎鎬) 등이 고종을 폐위하고 그를 추대하려던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 제주목에 유배, 사사되었다.

1899년(광무 2) 고조부 사도세자장종으로 추존되었을 때에도 아무 봉작을 받지 못했다. 순종 때 완은군(完恩君)으로 추봉(追封)되었다. 경기도 양주군에 안장되었다가, 1909년 다시 동대문왕십리, 경기도 시흥군(현, 서울시 시흥동) 등로 이장되었으나 후일 그의 묘소는 실전되었다.

생애[편집]

초기 생애[편집]

1842년(헌종 8년) 혹은 1841년(헌종 7) 8월 1일 흥선대원군의 소실이었던 계성월의 아들로 흥선군의 사저인 한성부 안국방 운현궁에서 출생하였다. 흥선군의 첫 아들이었지만 그는 서자였다. 그밖에 같은 서출인 누이 이씨는 우봉이씨 이호준의 아들 이윤용과 결혼하였다. 황현에 의하면 서출 누이는 그와 동복이라 한다.[1]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정실 부인이었던 여흥부대부인 민씨에게서는 적제인 이재면이명복(뒷날의 고종)이 태어났다. 한때 그의 정확한 출생년대가 알려지지 않아, 일각에서는 그가 1847년경쯤 출생한 것으로 보고, 이재면보다 늦게 태어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의 유년시절이나 초기의 행적은 미상이다. 황현은 그의 성격이 다소 어리석었다고 한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의하면 이재선은 본성이 용렬하다, 숙맥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었다고 하였다. 황현은 그를 '우둔하여 콩과 보리도 분간하지 못하므로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2]'고도 하였다. 그러나 황현이 이재선과 어떤 은원관계에 있었다는 기록은 나타나지 않고 있고, 황현이 고종이나 명성황후에게 호의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한편 고종시대사에 의하면 그는 '서출(庶出)이기 때문에 청선(淸選)의 직책에 나아갈 수 없어서 늘 적가(嫡家)를 미워하고 앙심을 품고 있었다.[3]' 한다.

그의 과거 급제기록은 나타나지 않으나, 왕실의 족보를 기록한 선원보략 중 1908년(순종 2)에 발간한 선원보략에 의하면 그는 무과(武科)에 급제했다 한다.[4] 판관을 지낸 신석완의 딸이었던 평산 신씨 부인과 혼인하였다. 몇 명의 딸이 있었는데 신형균에게 출가한 딸과, 그의 여동생 1명 외에는 존재와 이름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그는 안국동 운현궁이나 가회동에서 가까운 한성 재동(齋洞, 잿골)에 집을 마련하였다.

관료 생활[편집]

1863년(철종 14) 12월 조대비의 명으로 별군직(別軍職)에 임명되고, 12월 15일 병조의 추천으로 특별히 부장(部將)에 임명되었다. 1864년(고종 1) 4월 12일 왕실 종친을 대상으로 한 특별 과거 시험에 3등으로 급제하였다.

1864년(고종 1) 5월 12일 훈련원 주부에 임명되었으며, 6월 21일 훈련원 첨정이 되었다. 12월 남양감목관(南陽監牧官)이 되었다. 1865년(고종 2)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오위장, 1866년 별군직을 역임했다. 그해 3월 22일 가례도감에 참여한 관원들을 포상할 때 그는 별군직으로 상현궁(上弦弓) 1정을 하사받았다. 1870년 3월 4일 남양부사로 부임했다가 4월 2일 근심으로 인한 담벽증(痰癖症)을 이조에 보고하여 4월 3일 면직되었다. 1872년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연령군파보, 은신군 파보(1900년),한국학중앙연구소 소장)에 따르면, 그는 훈련원 주부, 남양감목관, 훈련원첨정 등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품계는 종2품 참판에 이르렀다.

1873년 3월 27일 종정경(宗正卿)에 임명되었다. 1874년 여름 원자 이 갑자기 수두증에 걸렸다가 쾌차하자 그해 6월 22일 내의원 도제조 이하 관원을 시상할 때 상현궁 1장을 하사받았다.[5]

1874년(고종 11) 11월 섭정으로 있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친정 선언 이후 권좌에서 축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대원군 축출과 상관없이, 무관직(武官職)에 계속 임명되었다. 1874년(고종 11) 11월 별군직을 지냈다가 부호군을 거쳐 그해 12월 28일 경기도 양주목사로 부임하였으나, 1875년 1월 신병으로 업무를 보기 힘들다는 이조의 탄핵을 받고 삭출되었다. 그해 2월 15일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2월 20일 별군직으로 전임되었다. 1879년 12월 21일 부호군으로 재직 중 가선대부로 승진하고, 같은 날 동지중추부사로 임명되었다.

이재선 추대 미수 사건[편집]

1881년(고종 18) 9월 3일 별군직으로 전직되었다. 1881년 흥선대원군의 측근 안기영(安驥永), 권정호(權鼎鎬) 등이 고종을 폐위시키고 이재선을 왕으로 추대하려다 미수에 그친 '이재선 역모 사건'이 발생하였다. 1881년의 어느 시점 혹은 그 이전부터 흥선대원군 퇴진에 불만을 품은 흥선대원군의 측근 안기영, 권정호 등은 군사 정변을 준비했고, 9월 13일 사람을 모아 거사를 준비할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거사 목적을 토왜(討倭)로 정하였다.[6] 이들은 영남의 유림인 강달선(姜達善) 등과도 연락, 접선했고 개화, 개방에 반대하는 위정척사 운동가들과도 교류하였다.

지방의 비경기권 노론 유림들도 개항에 반대하여 반란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한성지역의 노론은 거의 협조하지 않았는데, 황현에 의하면 노론으로 참여한 사람은 북촌의 서얼 수명뿐이었다 한다.

그러나 9월 3일 거사에 참여하기로 한 광주산성(廣州山城)의 장교 이풍래(李豐來[7])가 포도청에 모의를 고변하였고, 광주산성 장교들이 대부분 의금부에 자수했다. 9월 6일 관련자들이 체포되었다. 체포된 인물은 안기영, 권정호, 이철구와 그외 30여명의 관련자들이었다.[8] 그밖에도 광주의 하급 서리들이 의금부에 자수하였다.

이재선의 역모 사건을 고변한 이들 중에는 그의 친매부 이윤용도 있었다 한다. 이윤용은 '운현궁이 안기영·권정호 의 모의 에 통하여 일 이 이루어 지면 대권이 다시 올 것이지만, 이루어지지 못하면 천하고 어리석은 내 자식을 죽게 만드는데 불과하다고 하여 드디어 우물쭈물 모호하게 자식 을 사지로 밀어 넣은 셈이 될수 있으니, 이는 크게 인륜을 저 버리고 도리에 어긋난 행위 이다.'라고 생각하여 이때부터 운현궁을 배반하고 마음을 털어 양전(고종, 민비)에 고해 바쳤다.[1] 9월 3일 그는 자수 형식으로 의금부에 출두하였다.

추대 미수 사건과 최후[편집]

또한 다른 고변자를 통해 누군가 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을 추대하려 한다는 정보가 명성황후의 귀에도 들어갔다.[9] 체포된 안기영, 권정호 외 30여명은 국문당하거나 처형당했다.[8] 그를 추대하기로 한 사건에 그가 직접 개입했는가, 혹은 적극적으로 참여했는가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이 일로 이재선은 1881년 9월 3일 체포되어 의금부에 투옥되었으며, 9월 12일까지 명창록(明昌祿), 안기영 등과 대질심문을 받았다. 이철구 등은 끝까지 부인했지만 일부는 그를 추대하려 했다고 발설하였다. 한편 이때 체포를 피해 달아난 허욱 등은 나중에 흥선대원군이 고종을 폐하고 이준용을 옹립하려는 쿠데타를 일으킬 때 가담한다.

다만, 거사를 일으키는데 가담했던 인물 중 유도석은 그의 조부가 고종이 등극하던 당초에 도움을 준 사람이라 하여 사형을 감해 섬으로 유배를 갔다.[1] 이재선 추대 관련 옥사는 그해 겨울까지도 계속되었다.[2]

9월 3일 이후 양사와 홍문관 등으로부터 계속 탄핵을 받았으며, 그의 백부 흥인군 이최응 역시 그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곧 제주도 제주목에 유배되었다. 9월 12일에는 시임, 원임 대신들이 그를 처벌할 것을 주청하였다. 곧 위리안치되었으며 이후 의금부, 삼사에서 계속 그를 처형할 것을 청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10월 26일부터는 승정원에서도 그를 처형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881년(고종 18) 음력 10월 28일 사약을 받고 사사된다. 제주도 제주목이 아닌 한성으로 압송되어 서대문 밖의 민가에서 사사 되었다는 설도 있다.[1] 황현에 의하면 이재선은 사형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어리둥절하여 무슨 죄에 연좌되었는지 조차 몰랐다 한다.[1] 정확한 생년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형집행 당시 그의 나이 만 41세, 42세 전후였다.

사후[편집]

묘는 처음에 경기도 양주군에 안장되었지만 첫 무덤자리 위치는 실전되었다. 1907년 당시 연령군파 족보에 의하면 그의 묘소는 양주에 있다고만 기록되었으나 정확한 위치는 누락되었으며, 뒤에 여러 번 이장되었다. 그러나 그의 묘소는 실전되었다.

1899년(광무 2) 9월 1일 그의 고조부 사도세자가 왕으로 추존되어 장종(莊宗)이 되고 법전에 따라 4대 후손에게 9월 1일부터 9월 29일 사이에 군의 작위를 내렸지만, 이재선은 이때 아무 작위를 받지 못했다. 후에 1907년(광무 10) 7월 4일 일진회이용구(李容九)와 일진회에서 이재선, 이연응, 안기영 등의 신원을 청하는 공함(公函)을 내각에 올렸고[10], 이는 고종에게 전달되었다. 1907년(광무 10) 7월 15일 고종에 의해 특별 사면되어 죄안을 삭제, 죄명을 취소하고 사건은 불문율에 부치라는 명을 내렸으며, 그에게는 임명장을 돌려주었다.[11][12] 이유를 알 수 없으나 한동안 그의 묘소는 그의 조카 이준용이 성묘하고 돌보았다.

순종 즉위 후 1907년(융희 1) 8월 17일 완은군(完恩君)에 추봉되었다.[13] 이재선의 완은군 추봉 기사는 황성신문제국신문 기사에 짤막하게 언급되기도 하였다. 그의 부인 신씨는 한일 합방 이후에도 살아 있었다고 한다. 이재선의 사진은 두 장이 전하는데, 한 장은 관복 차림으로 탁자에 한 팔을 기대고 앉은 사진이고, 다른 사진 한장은 그의 두 아들로 추정되는 소년이 함께 찍힌 사진이며 한 소년은 이재선이 직접 안고 있고, 다른 소년은 서 있다. 그러나 친왕(親王)으로 추봉되지는 못하였다.

그의 묘소는 서울 동대문왕십리에 이장되었다가 묘지 관리가 되지 않아 1909년(융희 3) 12월 7일 다시 흥친왕이준용에 의해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시흥리로 이장되었다.[14] 이를 두고 황성신문은 어찌 풍수배(풍수지리를 보는 사람)의 말에 현혹되었느냐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14] 그의 묘소가 시흥군 동면 시흥리(현.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로 이장되면서 부인 평산신씨도 시흥군 동면 시흥리 2통 3호 근처로 이주하였다.

군부인 평산신씨는 1922년 무렵까지도 생존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 이왕직 자료와 순종실록 부록에 의하면 군부인 평산신씨의 팔순을 기념하여 일금 150원을 하사했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가족 관계[편집]

본부인 평산신씨에게서 딸을 몇 명 두었으나, 장녀 이창화와 차녀 1명 외에는 존재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부인 신씨는 1922년 무렵에도 생존해 있었다.

조선 왕실과 운현궁 가계도

계보 :       조선 왕실       흥선대원군의 4대조       운현궁


이종
제16대 인조
이왕
소현세자
이호
제17대 효종
이요
인평대군
이연
제18대 현종
이욱
복녕군
이순
제19대 숙종
이혁
의원군
이윤
제20대 경종
이금
제21대 영조
이훤
연령군
이숙
안흥군
이행
진종
이선
장조
이온
낙천군
이진익
이산
제22대 정조
이인
은언군
이진
은신군
이병원
이공
제23대 순조
이광
전계대원군
이구
남연군
이영
문조
이변
제25대 철종
이창응
흥녕군
이재원
완림군
이기용
자작
이광
의친왕의 7남
이환
제24대 헌종
이정응
흥완군
이재완
완순군·후작
이달용
후작
이해선이철주
이최응
흥인군
이재긍
완영군
이지용
백작
이해충이영주
백작
이하응
흥선대원군
이재면
흥친왕
이준용
영선군
이우
의친왕의 2남
이청
장남
여흥 민씨
여흥부대부인
풍산 홍씨
정실
남양 홍씨
정실
박찬주
박영효의 손녀
이종
차남
여주 이씨
계실
광산 김씨
계실
전순혁
소실
이진완
서녀
윤원선
윤치소의 3남
이문용
차남
전주 이씨
장녀
김인규
전주 이씨
차녀
김두한
주씨
소실
전주 이씨
삼녀
김규정
이희
제26대 고종
이척
제27대 순종
여흥 민씨
명성황후
여흥 민씨
순명효황후
해평 윤씨
순정효황후
영월 엄씨
순헌황귀비
이은
의민태자
이진
장남
마사코
의민태자비
이구
차남
이원
의친왕 9남의 장남
줄리아 멀록
1982년 이혼
경주 이씨
귀인
이선
완친왕
덕수 장씨
귀인
이강
의친왕
연안 김씨
의친왕비
수관당 정씨
측실
이건
장남
이충
장남
요시코
1951년 이혼
이옥자
장녀
이기
차남
함개봉
측실
이갑
9남
청주 양씨
귀인
이덕혜
덕혜옹주
소 마사에
소 다케유키
백작
전주 이씨
장녀
조경호
전주 이씨
삼녀
조정구
계성월
소실
이재선
완은군
이관용
전주 이씨
차녀
이윤용
남작


누명 논란[편집]

황현에 의하면 이재선의 옥사는 왕후가 뒤에서 얽어서 꾸민 일이라는 말도 있었다 한다.[1]

김기전(金起田)은 명성황후가 그를 역모로 몰아서 죽였다고 주장했다.[15]

기타[편집]

1881년이재선 추대 사건에 그가 직접 개입했는지, 적극적으로 개입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완은군 이재선을 연기한 배우들[편집]

관련 항목[편집]

각주[편집]

  1. 황현, 《역주 매천야록 (상) (임형택 외 역, 문학과지성사, 2005) 176"페이지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kong176"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2. 황현, 《역주 매천야록 (상) (임형택 외 역, 문학과지성사, 2005) 175페이지
  3.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2집》 (국사편찬위원회, 1968)
  4. 선원보략 연령군파보(1908년) 참조
  5. 일성록 1874년 6월 21일자
  6. 황현, 《역주 매천야록 (상) (임형택 외 역, 문학과지성사, 2005) 80페이지
  7. 다른 설에는 이선풍이라고도 한다.
  8. ‘군수비리’를 보면서 임오군란이 떠오르는 까닭 The Asiaen 2015.03.31.
  9. "續 朝鮮最近世史 (二十二) 壬午軍亂前後 <四>", 동아일보 1934년 01월 26일자 3면, 생활/문화면
  10. "一進公函公閣", 황성신문 1907년 07월 04일자, 01면 05단
  11. "宮廷錄事", 황성신문 1907년 07월 18일자, 01면 01단
  12. "李氏伸寃", 황성신문 1907년 07월 17일자, 02면 02단
  13. "敍任及辭令", 皇城新聞 1907년 08월 22일자 官報, 01면 01단
  14. "永宣遷墓", 황성신문 1909년 12월 10일자, 02면 05단
  15. 별건곤 제27호(1930년 03월호), 春季特輯附錄, 朝鮮最近十三史講座, 第四講 閔妃의 專政과 壬午軍變

관련 자료[편집]

  • 신봉승,《실록대하소설24:왕조의 비극》 (금성출판사, 2007)
  • 신명호,《황후삼국지》 (다산초당, 2010)

참고 문헌[편집]

  • 고종실록
  • 고종시대사
  • 순종실록
  • 매천야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