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용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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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용
李灌鎔
오얏꽃(이화문)[1]
오얏꽃(이화문)[1]
조선의 왕족, 대한제국의 황족
신상정보
출생일 1891년 2월 23일(1891-02-23)(133세)
부친 고조부: 이병원
양아버지: 이재선

이관용(李灌[2]鎔, 1891년 2월 23일(음력 1월 15일) ~ 몰년 미상))은 대한제국황족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손이자 완은군 이재선의 양자로, 인평대군파보에 의하면,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이명응(李明應)의 손자이며 군수(郡守)를 지낸 이재택(李載宅)의 둘째 아들이었는데, 군부인 신씨에 의해 입양되었다. 그러나 그는 대한제국이 멸망하는 시점까지는 왕족으로서의 작위도, 예우도 받지 못했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한편 같은 시대에 선조의 아홉번째 서자(庶子)인 경창군 이주의 후손인 동명이인의 독립운동가 이관용(李灌鎔)도 존재한다.

생애[편집]

이관용은 인평대군의 후손인 이명응(李明應)의 손자이며 군수(郡守)를 지낸 이재택(李載宅)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1881년 이재선이 사형당할 당시 딸들만 있었고, 부인 평산 신씨는 일찌기 아들이 실종되고 미망인이 되자 상소를 올려 호소하고 양자 입양을 청하였다. 결국 먼 친척인 군수 이재택의 차남인 그를 이재선의 사후양자로 정하여 신씨부인에게 보내졌다.

양아버지 이재선은 왕족이었으나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서자로 계성월의 소생이었다. 이재선은 흥선대원군의 서장자로 고종흥친왕의 서형이었으나 1881년 대원군이 그의 측근 안기영, 권정호 등을 사주하여 일으킨 이재선의 난이 실패하면서 처형당했다. 이후 그는 양어머니 군부인 신씨에게 입양되어 양육되었지만, 왕족에게 부여되는 작위도 받지 못하고 어렵게 생활하였다.

그가 성년이 되기 전까지 이준용, 이재면 등이 이재선의 묘소를 대신 돌보았고, 이준용 등이 대신 성묘를 하였다. 1900년대 말까지도 이준용이 대신 성묘했다는 기사가 황성신문 등에 나타난다.

1907년에는 양아버지 이재선은 복권되고 완은군에 추증된다. 조선의 왕족들이 왕궁에 출입할 때 함께 출입, 문안하는 등의 예우는 지속되었다. 1912년 양궁에 이희, 이강, 이준용 등과 출입하였으며, 1921년말에 부상을 당하여, 그해 12월 8일에는 부상 치료차 순종으로부터 60원(현재300만원)을 하사받는다.

그는 한때 주식투자 등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서울로 올라갔다가, 양어머니 신씨가 파양을 청하는 소송을 올렸다. 그러나 경성지방법원은 조선사회의 통념상 안되며, 그가 양자로 오래 있었다는 이유를 들어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1922년 12월의 순종실록 부록에도 50원의 그에게 순종이 생계 구조비 지급 기사가 나타난다. 이듬해 4월 그는 5천원의 특별 생계 구조비를 지급받는다. 5월 18일 순종은 그에게 50원의 생계구조비를 하사하고, 같은 날, 매달 1일에 생계 구조비를 지급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24년 2월 4일에 순종으로부터 150원, 12월 26일 300원의 가계 보조비를 받았다.

1926년 4월 26일 순종이 사망하자, 장례식을 집행하는 종척 집사(宗戚執事)의 한사람으로 임명되었다. 5월 10일 순종의 능을 천릉[3]할 때에도 그는 종척집사로 임명된다. 자녀는 2남 4녀를 두었다고 나와있다.

사후[편집]

양아버지 이재선의 묘소는 경기도 화도읍 흥원묘역인데, 이관용의 묘소는 경기도 포천 회암사에 있다.

가족 관계[편집]

조선 왕실과 운현궁 가계도

계보 :   조선 왕실   흥선대원군의 4대조   운현궁


이종
제16대 인조
이왕
소현세자
이호
제17대 효종
이요
인평대군
이연
제18대 현종
이욱
복녕군
이순
제19대 숙종
이혁
의원군
이윤
제20대 경종
이금
제21대 영조
이훤
연령군
이숙
안흥군
이행
진종
이선
장조
이온
낙천군
이진익
이산
제22대 정조
이인
은언군
이진
은신군
이병원
이공
제23대 순조
이광
전계대원군
이구
남연군
이영
문조
이변
제25대 철종
이창응
흥녕군
이재원
완림군
이기용
자작
이광
의친왕의 7남
이환
제24대 헌종
이정응
흥완군
이재완
완순군·후작
이달용
후작
이해선이철주
이최응
흥인군
이재긍
완영군
이지용
백작
이해충이영주
백작
이하응
흥선대원군
이재면
흥친왕
이준용
영선군
이우
의친왕의 2남
이청
장남
여흥 민씨
여흥부대부인
풍산 홍씨
정실
남양 홍씨
정실
박찬주
박영효의 손녀
이종
차남
여주 이씨
계실
광산 김씨
계실
전순혁
소실
이진완
서녀
윤원선
윤치소의 3남
이문용
차남
전주 이씨
장녀
김인규
전주 이씨
차녀
김두한
주씨
소실
전주 이씨
삼녀
김규정
이희
제26대 고종
이척
제27대 순종
여흥 민씨
명성황후
여흥 민씨
순명효황후
해평 윤씨
순정효황후
영월 엄씨
순헌황귀비
이은
의민태자
이진
장남
마사코
의민태자비
이구
차남
이원
의친왕 9남의 장남
줄리아 멀록
1982년 이혼
경주 이씨
귀인
이선
완친왕
덕수 장씨
귀인
이강
의친왕
연안 김씨
의친왕비
수관당 정씨
측실
이건
장남
이충
장남
요시코
1951년 이혼
이옥자
장녀
이기
차남
함개봉
측실
이갑
9남
청주 양씨
귀인
이덕혜
덕혜옹주
소 마사에
소 다케유키
백작
전주 이씨
장녀
조경호
전주 이씨
삼녀
조정구
계성월
소실
이재선
완은군
이주용
전주 이씨
차녀
이윤용
남작

참고 문헌[편집]

  • 《순종실록》부록
  • 《선원보》

각주[편집]

  1. 오얏은 '자두'의 순우리말로 오얏꽃은 토종 자두꽃을 말한다. 조선시대 왕의 성씨였던 오얏 리(李)와 연관되 대한제국 왕실을 상징하는 꽃이기도 하다. 오얏꽃은 대한제국 시기에 황실을 상징하는 문장으로 공식 채택되 이를 이화문(李化紋)이라고 한다.
  2. 관은 이관용 이름의 관자로 土가 양자 입적 후에 붙여진 한자가 만들어졌지만 이 한자의 의미가 알려져 있지 않고 유니코드에 등록되지 않았다. 항렬 규칙 때문에 남연군의 증손자 항렬 대에서는 이름에 土가 들어간 글자를 사용했다. 한편 이관용이 완은군의 양자가 되기 전인 1900년에 제시된 '선원속보 - 원종대왕자손록 권1'에는 灌으로 나와있다.《선원속보 - 원종대왕자손록 권1》- 광무 4년 발행. 2022년 2월 17일 확인
  3. 능을 이장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