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녕군
![]() 福寧君 | |
---|---|
지위 | |
군(君) | |
이름 | |
휘 | 이욱 혹은 이유(李栯) |
시호 | 효헌(孝獻) |
신상정보 | |
출생일 | 1639년 |
출생지 | 조선 경기도 부평 인평대군 사저 |
사망일 | 1670년 음력 10월 15일 (32세)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
왕조 | 조선 |
가문 | 조선 왕조 전주 이씨 |
부친 | 소현세자(양부) 인평대군(생부) |
모친 | 민회빈 강씨(양모) 복천부부인 오씨(생모) |
배우자 | 군부인 양천 허씨 |
자녀 | 아들 양원군 아들 의원군 딸(유혁연의 외손부) |
기타 친인척 | 인조(조부) 효종(중부) 허열(장인) 현종(사촌 아우) 복창군(친아우) 복선군(친아우) 복평군(친아우) |
종교 | 유교(성리학) |
복녕군(福寧君, 1639년 ~ 1670년 음력 10월 15일)은 조선 후기의 왕족이다. 조선 제16대 임금 인조와 인렬왕후 한씨의 3남인 인평대군의 장남이다. 또 고종은 복녕군의 직계 후손으로, 복녕군의 7세손이 된다. 성은 이(李), 이름은 욱 또는 유(栯)[1],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그는 일찍 요절하여 예송논쟁과 삼복의 변에는 휘말리지 않았다. 그밖에 박문수의 처진외증조부가 된다.
생애[편집]
가계[편집]
1639년(인조 17년)[2] 인조와 인렬왕후 한씨의 셋째 아들 인평대군의 적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우의정을 지낸 동복 오씨(복천 오씨) 오단(吳端)의 차녀 복천부부인 오씨(福川府夫人 吳氏)이다[3]. 소현세자와 효종 등의 친조카이며, 현종과는 친사촌간이다. 또 숙종 때 "삼복(三福)"으로 불리며 정치적으로 많은 영향을 끼치고, 역모의 혐의를 뒤집어 쓰고 마침내 사형까지 당하게 되는 복창군(福昌君), 복선군(福善君), 복평군(福平君)의 친형이다[2].
한편 그의 아버지 인평대군은 자녀 없이 죽은 삼촌 능창대군의 양자로 사후 입양되었다. 따라서 친조부였던 인조는 혈통상 종조부가 되었다.
왕족 시절[편집]
백부 효종이 즉위한 후인 1651년(효종 2년) 음력 6월 20일 정식으로 복녕군(福寧君)에 봉작되었다[4]. 이후 1655년(효종 4년) 음력 4월 22일에 종실들에게 시행한 시험에서 합격을 하여 특별히 가자되고[5], 1662년(현종 3년) 음력 2월 14일에는 소덕대부(昭德大夫)가 가자되었다[6]. 한편 1666년(현종 7년)과 1667년(현종 8년)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가 온양온천으로 거둥할 때에는 그 어가를 수행하는 일원이 되기도 하였다[7][8].
복녕군은 1670년(현종 11년) 음력 10월 15일 32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복녕군의 사망 소식을 들은 현종은 관례에 따라 장례를 지내고 필요한 물품들은 넉넉히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당시 서인 세력이 주도하여 기록한 《현종개수실록》[9] 에서는, 이러한 현종의 명에 대해서 현종과 복녕군이 어릴 때부터 서로 친하게 지냈으니 당연하다고 하면서도, 복녕군을 비롯한 인평대군의 아들들에 대해서는 무뢰하고 왕의 총애만을 믿고 못된 짓을 자행한 인물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또 복녕군 형제가 외가 식구인 오정일(吳挺一) 등과 함께 무리를 짓고 친분을 맺는 바람에, "흉역의 싹"이 되어 화란이 일어날 뻔 하였다고도 하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복녕군 형제들을 보며 항상 눈을 흘기고 이를 갈았다고 한다[10].
사후[편집]
복녕군 사후 그의 형제들은 남인의 편에 서서 정치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그들은 1680년(숙종 6년) 경신환국 때 서인들에게 밀려 복평군을 제외한 나머지 두 형제는 모두 사형을 당하였다[2]. 한편 복녕군은 고종 즉위 후인 1864년(고종 원년) 음력 7월 9일 효헌(孝獻)의 시호를 받았다. 이는 고종이 복녕군의 직계 7세손이기 때문이다[11].
복녕군의 사위 김석달(金錫達)은 판관을 역임하였지만 자녀가 없어 양자 김도협(金道浹)을 입양했다. 김도협은 목사가 되었고, 김도협의 둘째 사위가 암행어사로 유명한 영성군 박문수가 된다.
가족 관계[편집]
복녕군은 지평(持平)을 지낸 양천 허씨 허열(許悅)의 딸과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12][13]. 장남의 이름은 이환(李煥)이고, 훗날 양원군(陽原君)에 봉해졌다. 차남의 이름은 이혁(李爀)이고, 의원군(義原君)에 봉해졌다. 이 두 형제는 경신환국 때 연좌되어 모두 그 직첩이 회수되었다가, 1693년(숙종 19년) 숙종에 의해 다시 서용하라는 명이 내려졌다[14]. 복녕군의 딸은 유혁연(柳赫然)의 외손자 며느리가 되었다[15].
한편 복녕군의 차남 의원군으로부터 뻗어나간 후손 중, 복녕군의 7세손에 해당하는 이가 고종이다[16][17].
- 조부 : 인조(1595~1649) 조선의 제16대 임금
- 조모 : 인렬왕후(1594~1632)
- 양조부 : 능창대군 - 인조의 동생
- 아버지 : 인평대군 (1622~1658)
- 외조부 : 오단 (吳端, 1592~1640)
- 외조모 : 청송 심씨 심액(沈詻)의 딸
- 어머니 : 복천부부인 오씨 (福川府夫人 吳氏, 생몰년 미상)
- 장인어른 : 허열(許悅, 생몰년 미상)
- 백부 : 소현세자 (1612~1645)
- 백부 : 효종(1619~1659) - 조선의 제17대 임금
- 숙부 : 용성대군 (龍城大君, 1624~1629) - 복평군 이연을 후사로 삼음
- 외숙 : 오정일 (吳挺一, 1610~1670)
- 외숙 : 오정원 (吳挺垣, 1614~1667)
- 외사촌 : 오시수 (吳始壽, 1632~1681)
- 외사촌 : 오시대 (吳始大, 1634~1694)
- 외숙 : 오정위 (吳挺緯, 1616~1692)
- 외숙 : 오정창 (吳挺昌, 1634~1680)
같이 보기[편집]
출처 및 각주[편집]
- ↑ 욱 또는 유로 읽는다. 네이버 한자사전 〈栯〉 참고
- ↑ 가 나 다 이한우 (2007년 8월 30일). 《숙종, 조선의 지존으로 서다》. 해냄. 217 ~ 250쪽. ISBN 978-89-7337-871-5.
|id=
에 templatestyles stripmarker가 있음(위치 1) (도움말) - ↑ 가 나 《국조인물고》〈인평대군 이요〉
- ↑ 《조선왕조실록》효종 6권, 2년(1651 신묘 / 청 순치(順治) 8년) 6월 20일(을축) 1번째기사
- ↑ 《조선왕조실록》효종 14권, 6년(1655 을미 / 청 순치(順治) 12년) 4월 22일(병자) 1번째기사
- ↑ 《조선왕조실록》현종 5권, 3년(1662 임인 / 청 강희(康熙) 1년) 2월 14일(무오) 1번째기사
- ↑ 《조선왕조실록》현개 15권, 7년(1666 병오 / 청 강희(康熙) 5년) 3월 26일(병오) 1번째 기사
- ↑ 《조선왕조실록》현개 17권, 8년(1667 정미 / 청 강희(康熙) 6년) 4월 11일(을묘) 1번째기사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현종개수실록》
- ↑ 《조선왕조실록》현개 23권, 11년(1670 경술 / 청 강희(康熙) 9년) 10월 15일(기해) 1번째기사
- ↑ 《조선왕조실록》고종 1권, 1년(1864 갑자 / 청 동치(同治) 3년) 7월 9일(정미) 3번째기사
- ↑ 차남 의원군은 인평대군의 묘지명이 지어지던 당시 태어나지 않은 듯 하다. 《국조인물고》〈인평대군 이요〉 참고
- ↑ 네이버 지식백과 〈허경〉[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 《조선왕조실록》숙종 25권, 19년(1693 계유 / 청 강희(康熙) 32년) 7월 13일(을묘) 1번째기사
- ↑ 《조선왕조실록》숙종 9권, 6년(1680 경신 / 청 강희(康熙) 19년) 7월 3일(경인) 1번째기사
- ↑ 복녕군 → 의원군 → 안흥군 → 이진익 → 이병원 → 남연군 → 흥선대원군 → 고종
- ↑ 지우선 (2006년 4월 15일). 《풍수비급》. 경덕출판사. 69쪽. ISBN 8991197213.
|id=
에 templatestyles stripmarker가 있음(위치 1) (도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