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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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후의 유럽 모습. 붉은 라인이 신성로마제국의 영역이었고, 그 안에 보이는 작은 독일 국가들이 있다.
날짜1618년~1648년
장소
유럽의 독일 지역
결과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인한 평화.
교전국
스웨덴 제국
덴마크-노르웨이 (1625-1629)
네덜란드
프랑스 왕국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작센
오스만 제국
트란실바니아
보헤미아 왕국(1618-1620)
크로아티아
루스 차르국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자포로지안 지방
신성 로마 제국
(가톨릭 제후연맹)
스페인
오스트리아
바이에른 공국
헝가리
덴마크-노르웨이(1643-1645)
보헤미아 왕국 (1620-)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지휘관
프리드리히 5세
리벤 백작
구스타브 아돌프 2세
요한 베너
리슐리외 추기경
콩데 공작
튀렌 자작
크리스티안 4세
베른하르트
요한 게오르크 1세
오스만 2세
틸리 백작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페르디난트 2세
페르디난트 3세
올리바레스 백작
페르디난트추기경
막시밀리안 1세
병력
~495,000,
스웨덴 150,000,
덴마크 20,000,
네덜란드 75,000,
독일 ~100,000,
프랑스 150,000
~450,000,
스페인 300,000,
독일 ~100-200,000

30년 전쟁(영어: Thirty years' War, 독일어: Dreißigjähriger Krieg 드라이시크예리거 크리크[*]))은 신성 로마 제국이 있던 독일을 중심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를 믿는 국가들과 개신교 (특히 루터교회)를 믿는 국가들 사이에서 벌어진 종교전쟁이다. 최후의 종교전쟁[1], 최초의 국제전쟁[2]이라 불리고 있다. 30년 전쟁이란 표현을 처음 쓴 이는 17세기의 사무엘 폰 푸펜도르프(Samuel von Pufendorf)라고 한다.

1618년 신성 로마 제국페르디난트 2세보헤미아의 개신교도를 탄압한 것에 대해 개신교를 믿는 보헤미아의 귀족들이 반발하여 일어난 전쟁으로,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전쟁이 끝났다. 전쟁 기간은 대체로 네 시기로 구분하며, 앞의 두 시기 (1618년 ~ 1620년, 1625년, 1629년)는 종교적 성격을 띄었고 뒤의 두 시기 (1630년 ~ 1635년, 1635년 ~ 1648년)는 유럽 국가간의 이권 싸움의 성격을 띄었다.[2] 처음에는 신성 로마 제국과 보헤미아 사이의 종교싸움이었으나 곧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가 개신교도를 지원하기 시작했고, 1630년대에 이르러서는 신성 로마 제국(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 프랑스부르봉 왕가, 덴마크의 바사 왕가 등 여러 강대국의 이권 분쟁으로 변했다.[2] 이 전쟁으로 독일 지역은 지역 대부분이 황폐화되고 인구가 크게 떨어졌으며, 베스트팔렌 조약의 영향으로 여러개의 영방국가로 나뉘게 되었다. 네덜란드스위스는 각각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았고, 프랑스와 스웨덴은 영토를 늘렸으며, 루터교회 뿐만 아니라 개혁교회(Reformed Church)도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2]

배경

독일에서 벌어진 종교 갈등

1517년 마르틴 루터독일에서 95개조 반박문을 통해 교황을 정면으로 공격한 이후, 1522년 마르틴 루터의 주장을 따르는 라인 강 하류 지역의 기사들이 "형제단"을 세우고 신성 로마 제국에 반기를 들었으며, 이들이 진압당한 뒤에도 독일 곳곳에서는 로마 가톨릭 교회를 버리고 루터의 주장을 따르는 루터교회로 개종하는 도시들이 늘어났다.[3] 특히 뮌스터에서는 재세례파 위원회가 결성되어 지역 주교의 군대에 저항했다. 비록 뮌스터는 주교가 이끄는 군대에 함락당했지만, 로마 가톨릭 교회를 버리면 기존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재산들을 압수할 수 있었기 때문에 루터교회나 장 칼뱅개혁교회로 개종하는 영주들은 늘어만 갔으며, 이어 기사들과 도시민들도 루터교회나 개혁교회로 개종하기 시작했다.[4] 결국 1526년에 열린 슈파이어 제국 의회에서, 오스만튀르크 제국 등과의 전쟁을 위해 영주들의 힘을 필요로 했던 신성 로마 제국은 영주들의 루터교회의 신앙을 인정했지만, 1529년 빈 공방전에서 신성 로마 제국이 승리한 이후 황제 카를 5세는 기존의 《보름스 칙령》을 다시 발표해 루터교회를 탄압하려 했다.[4] 개신교도 영주들은 1531년 2월 27일 튀링겐에 모여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하고 카를 5세와 로마 가톨릭 교회에 저항했다. 슈말칼덴 동맹과 신성 로마 제국 사이의 전쟁은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재공격과 작센 공국의 동맹 이탈 등으로 혼선을 빚다, 작센 공국이 다시 반합스부르크 동맹을 결성하고 프랑스 왕 앙리 2세와 《샹보르 조약》을 체결해 프랑스의 지원을 받았다. 대신 반합스부르크 동맹은 프랑스에 캉브레, 메츠, 툴, 베르됭 등을 넘겨주기로 했다.[4]

아우크스부르크 조약

1555년에 이르러 카를 5세는 1526년 슈파이어 제국 의회에서의 결정을 인정하고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 서명함으로써 독일 내의 로마 가톨릭 교회개신교간의 종교 전쟁이 끝을 맺었다. 이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 독일 내 제후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개신교 교회 중 하나를 자신의 종교로 선택할 수 있다. 단, 로마 가톨릭 제후가 개신교로 교파를 옮길 경우에는 재산을 로마 가톨릭 교회에 반납해야 한다.
  • 주교의 관할 구역내에 있는 루터교회 신도들은 자신의 신앙을 지속할 수 있다.
  • 루터교회1552년 파사우 화의 이후 취득한 로마 가톨릭 예배당들을 계속하여 자신들의 소유로 할 수 있다.
  • 루터교회로 개종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교는 자신의 관할 교구를 포기하여야 한다.
  •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중 하나를 공식적인 종교로 선포한 나라라 할지라도 다른 종교차별하지 못한다.

아우크스부르크 조약은 양 진영의 적대 행위를 종식시켰으나 종교적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었다. 조약이 체결된지 몇 년 지나지 않아 칼뱅주의가 독일에 빠르게 확산되었으나, 조약의 쌍방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았던 칼뱅주의로마 가톨릭루터교회 모두에게 탄압받았다.[5]또한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주장하며, 유아세례에 반대한 급진파인 재세례파도 아우크스부르크 조약 내용에 해당되지 않으므로 탄압을 피할 수 없었다.

각국의 이해 관계

유럽의 각국은 독일 지역에 대해 복잡한 이해 관계로 얽혀 있었고 이것은 전쟁의 또 다른 원인이었다.

개요

30년 전쟁은 30년간 끊임없이 계속된 것은 아니었고, 수개월에서 혹은 2년 정도의 소강 상태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다. 당시의 군대는 대부분 장기간 통제할 수 있는 용병에 의존했다. 국왕 직속의 상설 군대인 상비군은 매우 희귀했다. 또한 장기간 전쟁을 지속하기엔 국가 재정의 압박이 심했기 때문에 숨을 돌리기 위해 잠시 전쟁이 중단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 되면서 휴식기간은 서서히 짧아지게 되고, 30년 전쟁의 최종단계에는 13년간 전투가 거의 끊이지 않았다.

30년 전쟁을 개신교회(프로테스탄트 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 사이에 벌어진 종교전쟁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으나, 그것은 30년 전쟁의 교회사적인 배경만 생각해서 생긴 오해이다. 그 실례로 30년 전쟁은 처음에는 종교전쟁의 이름을 빌린 민족대립 양상을 보였으나, 전쟁이 2기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국가 간 패권투쟁의 양상으로 변하면서 유럽에서 패권을 확립하던 합스부르크 왕가와 이것을 제지하려는 세력 간의 국제전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전쟁이 단순한 개신교로마 가톨릭 교회간의 신학적인 대립에 의한 종교전쟁이 아니라는 것은 전쟁발발 초반의 역사를 보아도 알 수 있다. 보헤미아의 개신교 제후들과 같은 개신교 제후인 팔츠 선제후가 일으킨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반란을 로마 가톨릭 교회 측의 사보이 공국이 지원했으며, 개신교 진영인 작센 선제후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그들과 개신교 연합(유니온)을 결성하지 않고, 오히려 합스부르크 왕가를 중심으로 모인 로마 가톨릭 교회 동맹(리그)을 지원하였다. 하지만 작센 선제후의 경우, 황제 측에 있다가, 나중에 배신하고 개신교 측에 돌아선다. 즉, 30년 전쟁은 종교가 아니라, 정세와 전쟁의 진행상황에 따라서 입장을 번복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진행된 전쟁이었다.

이후 보헤미아와 팔츠의 개신교 세력이 진압되어 개신교 연합이 해체되고, 합스부르크 왕가에 의한 개신교 탄압과 강압적인 로마 가톨릭 교회 정책이 독일 전역에 미치기 시작하자, 영국(잉글랜드), 덴마크, 스웨덴 등 개신교파 여러 나라가 반(反) 합스부르크 동맹의 깃발을 들고 간섭하기 시작했다.

반합스부르크 동맹세력의 중심에는 전통적인 로마 가톨릭 교회 국가인 프랑스 왕국이 있었다. 부르봉 왕가의 지배를 확립하고 프랑스의 세력 확대를 꾀하던 재상 리슐리외는 덴마크와 스웨덴을 독일 정세에 개입시키는 것을 뒤에서 지원하였고, 전쟁이 제4기에 이르렀을 때는 직접 군사개입을 결정하여 실력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을 굴복시키려 했다.

프랑스가 합스부르크 제국의 세력 확대를 저지하려고 한 이유는 단순히 유럽 정세에서 힘의 우위를 확보하는 것 이상의 목적이 있었다. 만약 독일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가 확립된다면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는 스페인과 독일에 둘러싸인 프랑스에게는 대단한 위협이 된다. 그러면 부르봉 왕가의 지배가 흔들릴 위험성이 있었다. 따라서 부르봉 왕가의 안전을 위해서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독일 지배는 어떻게든 저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반합스부르크 동맹국인 스웨덴과의 사이가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었다. 독일에서 스웨덴군의 세력 확대를 경계한 프랑스는 증원이라는 이름 하에 군대를 증강하여 스웨덴을 견제하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이러한 대국들의 흑심에 의해 독일의 소국과 백성들은 휘둘리게 되었고, 격렬한 전투로 국토는 황폐화 되었다. 훗날 외교 교섭에 의해 전쟁 종결의 길이 열리게 되었고, 세력 균형을 원칙으로 한 국제질서가 형성된 것도 이 때부터이다. [6]

이 전쟁은 전쟁의 주재국을 기초로 4기로 나눠 구분한다. 즉 제1기는 보헤미아-팔츠 시기, 제2기는 덴마크 시기, 제3기는 스웨덴 시기, 제4기는 프랑스-스웨덴 시기이다.

보헤미아-팔츠 시기(1618년 ~ 1624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 이며 보헤미아의 왕이다. 기독교 신앙의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그의 종교적 신념은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 이며 보헤미아의 왕, 1634년 헤라르트 판 혼트호르스트가 그린 작품이다. 프리드리히 5세는 2년 후 사망한다.

당시 보헤미아(현재 체코의 일부)는 로마 가톨릭 국가였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 하에 있었고,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양쪽 교도들 사이에 여러 차례 불협화음이 일어났으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보헤미아의 개신교도의 세력이 크다는 것을 인식하고 신앙을 인정해 주었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겸 보헤미아의 왕 마티아스(황제 재위: 1612~19년, 보헤미아 왕 재위 : 1611~17년)도 양쪽 진영에 대한 융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열렬한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인 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아 왕에 선출(재위: 1617~37년)되는 동시에 개신교에 대한 탄압을 실시했다. 그 와중에 프라하 대주교령에 있던 개신교 예배당들이 철거되었고, 개신교 신자들은 이에 항의하였으나 묵살되었다. 결국에는 탄압에 반발한 개신교 시민들이 프라하의 왕궁을 습격해 국왕 고문관 2명을 왕궁의 창문에서 던져버리는 프라하 창문 투척사건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으며(1618년), 개신교 신자인 보헤미아 제후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단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30년 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반란군 제후들은 다른 개신교 제후에게 협력을 호소하였고, 개신교 제후 연합의 찬성을 얻어냈다. 황제 마티아스가 사망하고(1619년), 보헤미아 왕 페르디난트 2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도 겸임(재위: 1619~37년)하게 되자, 보헤미아의 제후들은 페르디난트 2세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고, 개신교 제후 연합의 중심적 존재였던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의회에서 보헤미아의 왕(재위: 1619~20년)으로 선출하고 황제에게 대항하였다.

하지만 개신교 동맹측이 개혁교회(Reformed church, 장로교회)와 루터교회의 대립으로 발이 묶인 사이,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로마 가톨릭 교회 세력의 연대를 강화해 교황의 원조금과 스페인-합스부르크 왕가의 지원군 및 바이에른 대공 막시밀리안 1세(재위: 1623~51년) 등의 로마 가톨릭 교회 제후의 원조를 받아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군대를 파견했다.

사실상 로마 가톨릭 교회 동맹세력이 우위를 차지함으로써 이 시점에서 승부는 이미 결정되었다. 1620년 11월 8일 개신교 동맹측의 보헤미아군은 백산(白山) 전투에서 틸리 백작이 이끄는 로마 가톨릭 교회 동맹군에게 괴멸적인 대패를 당했고, 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는 저항하지 못하고 항복했다. 프리드리히 5세는 겨우 1년 만에 왕위에서 쫓겨나게 되어 겨울 왕이라 불리게 되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 동맹군이 팔츠에 침공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5세는 1622년 네덜란드로 도망쳤다. 그는 복위를 노렸으나 신성 로마 황제에 저항하는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재위: 1611~32년)의 전선 복귀 요청은 거절하였다. [7] 1623년 황제 페르디난트 2세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에게 팔츠를 하사하고, 선제후의 지위를 주었다. 이것은 금인칙서에 위배되는 행위였기 때문에 제후들의 분노를 사게 되어 30년 전쟁이 장기화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보헤미아 지배는 강화되었다. 곧이어 1627년 신(新)영지조례법에 의해 의회는 권력을 모두 빼앗기게 되어 사실상 속령이 되었다. 이로 인해 다수의 보헤미아 귀족 및 개신교도가 망명하여 유럽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 왕가에 의한 재산몰수 및 국외추방이라는 가혹한 전후 처리는 다른 개신교 제후의 이탈을 초래하게 되었고, 전쟁이 장기화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덴마크시대(1625년 ~ 1629년)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 개신교 측에 서서 황제군과 싸웠다.

황제는 프리드리히에 대한 처벌로 영방의 라인팔츠와 오버팔츠에 있던 선제후위를 빼앗고, 새로이 전공을 세운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가 선제후가 되었다. 황제권력 앞에 정세는 긴박하게 움직여 황제 대 선제후라는 정치적 대립관계가 종교상의 대립과 미묘하게 교체하게 되었다.

또한 이 라인팔츠의 영유를 둘러싼 문제는 국제적 이해관계까지 얽히게 만들었다.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3세는 이미 1617년 페르디난트 2세에게 오스트리아 계승권을 인정해주는 대가로 선대 황제 마티아스로부터 알자스 지방의 영토를 할양받는다는 밀약을 맺고 있었다. 이 지역은 북 이탈리아에서 프랑슈콩테를 거쳐 개신교 국가 네덜란드로 군대를 보낼 수 있는 중요한 전략적 루트였다.

이 지역 문제는 그대로 프랑스의 이해 관계와 맞아 떨어진다. 이 당시 프랑스로마 가톨릭 국가였기 때문에 직접 행동에 나서지는 못했다. 1624년 합스부크르 왕가의 세력 강화를 두려워한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은 프랑스 및 네덜란드, 영국, 스웨덴, 덴마크를 포함한 [대(對) 합스부르크 동맹]을 결성하고 합스부르크 왕가와 가톨릭 동맹을 견제했다. 또한 프랑스, 사보이, 베네치아가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로부터의 지원 루트를 막았다.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 황제군과 바이에른군의 실질적인 야전 사령관으로 30년 전쟁 중기까지 대활약한다.

1625년 5월 덴마크의 왕 크리스티안 4세가 개신교 측에 참가하여 전쟁에 뛰어들었다. 크리스티안 4세는 개신교도였고, 바이센베르크 전투(흰산 전투)의 승리에 자신감을 가진 가톨릭 진영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 표면상의 참전 이유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신성로마제국 니더작센의 구역장으로서 오랫동안 빈 자리로 남아있는 2개의 제국내 사교직(司教職)에 자신의 아들을 취임시켜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이를 거절하고 틸리 백작의 군대를 니더작센에 진군시켜 머무르게 한 것이 진정한 이유였다.

이렇게 되자, 북 독일에서의 세력 확대와 함께 발트 해, 북해에 대한 패권확립을 노리던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는 아들의 사교직 취임 문제에 대한 페르디난트 2세의 노골적인 반대를 명분으로, 프랑스, 영국, 스웨덴의 동맹국들로부터 지원을 받아 1625년 5월에 전쟁에 참전했다. 처음엔 스웨덴과 함께 개입하려 했으나, 양쪽의 주도권 다툼이 벌어져 결과적으로 스웨덴은 폴란드 문제에 주력하고 덴마크가 단독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덴마크의 참전에 대해 영국은 군사비를 제공하고, 만스펠트, 브라운슈바이크란 2명의 용병대장의 군대를 지원군으로 파견하였다.

황제군 측의 유명한 용병대장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

덴마크의 참전 때문에 페르디난트 2세는 군사비 부족으로 궁지에 빠지게 되었다. 상비군으로 응전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황제는 보헤미아의 용병대장 발렌슈타인을 등용하고 그의 군대에게 개신교군과 싸울 것을 의뢰했다. 한편 덴마크군과 용병부대 사이에서는 전략에 대한 주도권 다툼이 일어나 결국 3사람 모두 각자 행동하기로 하였다. 이것은 발렌슈타인의 각개격파 전술의 좋은 먹잇감이 되어버려 만스펠트는 데사우 전투에서 패배하고, 브라운슈바이크도 1626년 1월 13일에 전사하고 말았다. 그리고 1626년 8월 크리스티안 4세는 믿고 있던 프랑스의 지원을 얻지 못해 루터 전투에서 가톨릭 동맹군 사령관 틸리 백작에게 완패하였다.

크리스티안 4세가 전력을 잃어버리자, 발렌슈타인과 틸리 백작의 군대는 덴마크에 침입해 덴마크가 신성로마제국 영내에 가지고 있던 포메른, 메클렌부르크 공작령 뿐만 아니라 유틀란트 반도도 유린했다. 크리스티안 4세는 스웨덴에게 지원을 요구했고 곧 동맹이 성립되어 얼마 안 가 발렌슈타인을 덴마크에서 물러나게 할 수 있었다. 결국 1629년 뤼베크 조약이 체결되면서 덴마크는 독일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또한 같은 해 황제가 발령한 회복칙령은 광대한 사교령과 수도원 령의 로마 가톨릭으로의 복귀를 성사시켰다.

스웨덴시대(1630년 ~ 1635년)

브라이텐펠트 전투 (1631년)에서의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

1630년 7월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황제군의 발트 해 진출에 대해 위협을 느끼는 한편, 이를 대륙진출의 찬스라고 생각했다. 그는 곧 개신교 옹호를 표방하고 프랑스 재상 리슐리외의 군사비 원조를 얻어 28척의 전함과 수송선에 기병 16개 부대, 강력한 포병이 배속된 보병 92개 중대, 합계 13,000명의 대군을 승선시키고 북부 독일의 우제돔에 상륙했다.

한편 그해 8월 24일 레겐스부르크의 선제후 회의에서 황제는 가톨릭 제후의 지원을 얻지 못해, 발렌슈타인과 그의 용병부대를 대량으로 해고하고 틸리 백작의 가톨릭 동맹군으로의 편입을 추진시키고 있었다. 구스타브는 곧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서 포메른 지역의 요새화를 꾀하고, 보급 병참기지를 설정하려 했으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및 개신교 제후들이 협력을 거부하여 그의 전략은 차질을 빚고 있었다.

당시 유일하게 마그데부르크 시(市)가 황제의 지배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자, 틸리의 군대가 도시를 포위하였다. 이 마그데부르크 시 구원을 위해 구스타브는 프랑크푸르트 공격을 미끼로 양동작전 등을 구사해 틸리군을 유인해 내려고 했으나, 이에 대해 틸리도 노련한 수완을 보여줘, 일진일퇴의 기동(起動)을 되풀이 하였다. 결과적으로 프랑크푸르트와 마그데부르크 양측 도시가 각자의 군대에게 약탈을 당하는 결과를 빚게 되어, 구스타브의 마그데부르크 구원 작전은 실패했다.

스웨덴군은 그 후 곧바로 방어자세로 일관했다. 1631년 7월~8월에 걸쳐 보급의 차질로 인해 위험한 상태에 빠지자 베를린에서 수비에 들어갔다. 틸리는 이곳을 2번에 걸쳐 공격했으나, 공격은 모두 실패했다. 이것을 보고, 관망하던 북부 독일의 2대 개신교파 브란덴부르크와 작센의 양 선제후가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9월 11일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1세는 자신의 군대를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지휘 하에 두었다. 한편 틸리군은 9월 15일 라이프치히 시에 입성했다. 군대는 약 36,000명으로 증가한 상태였다. 그에 반해 스웨덴군 26,000명과 작센군 16,000명의 각 군은 북쪽 약 25마일(약40km)의 뒤펜에서 합류했다.

스웨덴의 스톡홀름에 있는 군사박물관에서 30년 전쟁 당시의 무기와 진형을 전시한 모습

1631년 9월 17일 황제군의 명장 하인리히 파펜하임 기병장군(1594~1632)은 교묘한 기동으로 스웨덴군을 유인하여 라이프치히 북쪽 약 4마일(약6.4km)의 브라이텐펠트 평원에 포진한 틸리군과의 결전으로 구스타브 왕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구스타브는 자신의 군을 새로운 군제(軍制), 장비, 전술로 탈바꿈시키고, 신 전술의 전투대형으로 배치했다. 결과적으로 신 전술의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구체제의 테르시오로 조직된 틸리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이 전투로 인해 세력관계는 단숨에 역전되어, 황제측이 수세로 몰리게 된 것과 더불어, 이 브라이텐펠트 전투는 구스타브가 네덜란드의 마우리츠 모델의 전술을 계승 발전시켜 횡대, 기병, 포병의 3병전술의 우수성을 실증하여 보여준 전투라고 할 수 있다.

브라이텐펠트 전투 (1631년)의 전투에서 승리한 스웨덴 군대와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모습을 그린 그림.

브라이텐펠트 전투 승리 후 구스타브 왕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마인 강을 건너 라인란트와 제국 여러 도시를 제압해 12월 22일 마인츠를 점령하고 남은 동절기를 이곳에서 보냈다. 다음해 봄 남부 독일을 침공한 구스타브는 자신이 구상하는 스웨덴 주도의 독일 개신교도 제후의 대동맹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뮌헨으로 남하했다. 그래서 1632년 4월 15~16일에 걸쳐 레히 강 전투에서 틸리의 야영진지를 기습해 틸리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고 남부 독일을 점령했다. 틸리는 이 때 받은 부상으로 인해 얼마 안 가 죽고 말았다.

이 시기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크게 당황하였다. 틸리의 전사 이후 그를 대신할 만한 유능한 지휘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스웨덴군의 위협에 대항해 황제는 당시 보헤미아의 영지에서 재기를 노리던 발렌슈타인을 재기용하기로 결심한다. 황제는 1630년 8월 전횡이 극에 달했다는 이유로 면책되었던 발렌슈타인으로부터, 군대의 전권, 화평교섭권, 조약체결권의 전면 위임과 합스부르크 제국령과 선제후령의 할양" 이라는 어마어마한 조건을 받아들여 그를 황제군의 지휘관으로 재소환하였다.

발렌슈타인은 빠른 시간에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여 1632년 7월 11일 발렌슈타인군은 스히바츠에서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의 군대와 합류했다. 구스타브는 2만 병력에 2배 이상 되는 45,000의 병력을 이끌고 아르테 페스에서 야영에 들어갔다. 한편 구스타브는 8월 31일부터 9월 4일에 걸쳐 야영 중인 발렌슈타인 군에 대한 기습에 나섰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결국 발렌슈타인은 보헤미아로, 구스타브는 북서쪽으로 각자 후퇴했다.

그 후 9월부터 10월에 걸쳐 발렌슈타인은 3만의 병력을 이끌고 작센에 침공했다. 후방연락선이 차단될 위협을 느낀 구스타브는 곧바로 북상을 개시했다. 그리고 나움부르크에서 11월 9일부터 15일까지 야영을 했으나, 발렌슈타인이 파펜하임에게 대증원부대를 요청했다는 정보를 얻은 구스타브는 급히 공격을 위해 출격했다.

그래서 11월 16일 라이프치히 남서쪽 뤼첸에서 기어코 결전의 서막이 열렸다. 격렬한 전투 끝에 가까스로 스웨덴군이 승리를 거두었으나, 구스타브 자신은 흉탄에 쓰러져 전사하고 말았다(뤼첸 전투). 전투 후 국왕의 전사소식을 들은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는 크리스티나가 여왕으로 즉위했다. 재상 악셀 옥센셰르나는 독일의 개신교 제후들과 하이브론 동맹을 체결하고 방어전쟁이란 형식으로 전쟁을 이끌어 나갔다. 이 소식을 알게 된 프랑스의 리슐리외는 개신교 제후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스웨덴과 손잡고, 가톨릭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도 이 동맹에 참가했다. 30년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구스타브의 죽음은 개신교 제후들을 동요시켰다. 거기에 스웨덴군과 개신교 제후들 간의 분열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것은 황제군의 사기를 높여주었고, 이에 자신감을 갖게 된 황제는 자신의 야심을 드러낸 발렌슈타인을 1634년 1월 24일에 암살했다. 하지만 발렌슈타인 제거는 군사적으로는 마이너스였고, 아직도 자신에게 반감을 품고 있는 제국 제후들의 의향을 무시할 수 없었다. 황제는 자신의 아들 페르디난트의 세습을 위해 제후에게 양보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개신교측은 구스타브가 죽은 후 작센-바이마르 후작 베른하르트와 구스타브 호른이 지휘를 물려받았다. 1634년 9월 6일 스웨덴-개신교 제후군(하이브론 동맹)은 보병 16,000명, 기병 9,000명을 이끌고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황제 페르디난트 3세와 스페인 추기경 황태자 페르디난트의 군대 35,000명에게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스페인군은 스웨덴군의 약점이었던 일제사격 후 재장전의 빈 틈을 노린 돌격으로, 개신교군에게 전사자 17,000명, 부상자 4,000명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안겨준 대승리를 얻게 되었다. 이 승리로 주도권을 되찾은 황제는 아들 페르디난트를 로마 왕으로 선출시키는데 성공했다. 또한 이 전투에서 스웨덴군은 엄청난 피해를 입어 이후 30년 전쟁의 주도권을 잃게 되었다.

황제는 바이에른 공작과 작센 공작과도 화해하고 스페인의 참전에 용기백배하여 여러 지역에서 전투를 계속하였고, 그 결과 다음해 5월 30일 황제 측이 유리한 상황 하에서 프라하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황제의 위광을 높여주었지만 결국 일시적인 것에 불과했다. 스웨덴이 세력을 잃고, 하이브론 동맹이 붕괴의 위기를 맞게 되자 재상 옥센셰르나는 수완을 발휘해 흑막 뒤에 있던 프랑스를 직접 전쟁에 개입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이제 30년 전쟁은 제4기를 맞이하게 된다.

프랑스-스웨덴 시대(1635년 ~ 1648년)

스웨덴과 독일 개신교 제후의 든든한 방패였던 프랑스는 스웨덴의 구스타브 왕이 전사한 후 재상 옥센셰르나가 이끄는 스웨덴군이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패배하여, 서부, 남부 독일 개신교 제후의 하이브론 동맹이 와해되면서 스웨덴이 고립되게 되자, 기어코 전쟁의 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1635년 5월 21일 스페인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여기서 부르봉 왕가 대 합스부르크 왕가의 직접 대결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서는 프랑스의 재상 리슐리외, 스웨덴의 재상 옥센셰르나,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의 전략이 서로 맞붙었다. 프랑스군은 주로 스페인군과, 스웨덴군은 황제군과 전투를 벌였다.

전황은 처음 수 년간 프랑스에게 유리한 상황이 아니었지만, 프랑스는 훗날 명장이라 칭송받게 되는 최고의 장군인 튀렌(1611~75년)과 콩데 공(公)(1621~86년)을 전쟁에 참가시키면서 이들의 활약으로 조금씩 전황을 역전시켜 나갔다. 이때 공세에 나선 황제군이 비토슈토크 전투에서 스웨덴군에게 패배하고, 승리한 스웨덴군은 다시 독일을 침공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대 합스부르크 세력의 정세가 호전되었고, 1640년부터는 합스부르크 세력이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네덜란드에서는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이 스페인을 격파해 요충지 브레다요새를 함락시켰다. 이 승리는 네덜란드의 독립을 확실하게 만들었고, 거꾸로 스페인의 패권이 무너졌음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정세 속에서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사망했다. 새로이 황제가 된 인물은 뇌르틀링겐 전투에서 명성을 얻은 아들 페르디난트가 페르디난트 3세로서 즉위했다.

프랑스군의 용병대장이 된 작센-바이마르 공작 베른하르트도 공세에 나서 1638년 라인팔츠, 브라이베르크, 브라이자크를 함락시켰다. 다만 베른하르트는 프랑스와 마찰을 일으켜, 후에 작센 군과 프랑스군이 서로 전투를 벌이게 된다.

그 해 스웨덴군은 하이브론 동맹을 배반한 작센 군을 켐니츠에서 격파하고 보헤미아에 침공했다. 이때 스웨덴군 베넬 장군의 야심으로 인해 통솔이 어지럽혀져 격퇴되었다. 다음 해 1639년 에르푸르트에서 프랑스군, 스웨덴군, 프로이센군이 접촉하였다. 무엇보다 프로이센군은 후에 대 선제후로 불리게 되는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다음해 1640년 프로이센 공(公)이 되면서 방위전쟁에서 물러나 사실상 중립을 지키게 되었다.

1640년 경부터 황제는 화평을 향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으나 그 고압적인 태도에 응하려는 세력이 없었다. 그리고 스페인군은 이 시기부터 프랑스, 네덜란드 앞에서 패퇴를 거듭해 몰락의 징후가 보이고 있었다. 그 해 스페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포르투갈 왕국이 독립하였다.

1642년 황제군은 브라이텐펠트에서 다시 스웨덴군과 맞붙었으나 패배했다. 이곳은 예전에 황제군과 스웨덴군이 맞붙었던 유명한 브라이텐펠트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였다. 황제는 이 패배에 굴복해 화평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제국 전체에서 전투를 기피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었다. 1642년 후반쯤 라인 강의 양쪽 강변에서 화평회의가 설치되었으나 1644년이 되어서야 교섭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교섭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것과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투가 뒤섞이면서 매우 격렬해지는 모순된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제국 법에 의해 국제회의는 설치되었으나 전쟁의 주도권을 빼앗은 스웨덴이 화평회의를 귀담아듣지 않았다. 이때 프랑스에서는 1642년 재상 리슐리외, 1643년 프랑스왕 루이 13세가 차례로 죽고, 리슐리외의 정책은 새로운 재상이 된 마자랭이 물려받았으나, 새로이 국왕이 된 루이 14세는 아직 어렸기에 프랑스 국내는 불안정해졌다. 그 때문에 마자랭은 물려받은 정책 중에 국왕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만들라는 야심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643년 5월 19일 프랑스 왕족 콩데공이 로크루아 전투에서 스페인군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어 여기서 스페인의 군사력은 붕괴되었다. 그리고 1644년 프라이부르크 전투에서 가톨릭 동맹군의 중심이었던 바이에른 군을 격파하면서 프랑스는 30년 전쟁에서 승리를 확신하게 되었다.

한편 스웨덴은 독일에서 전투를 벌이는 스웨덴군의 배후를 위협하던 덴마크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 전쟁은 지휘관의 이름을 따서 토르스텐손 전쟁이라 불리었다. 스웨덴군은 네덜란드 해군을 우방으로 만들어 덴마크를 굴복시키고 30년 전쟁으로 인해 중단된 발트 해의 패권을 기어코 거머쥐게 되었다. 또한 이 전쟁에서 구스타브 호른 장군이 복귀하였다. 황제군은 덴마크를 지원하기 위해 달려왔으나 참패했다.

스웨덴은 30년 전쟁의 승리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다시 보헤미아에 침공하였다. 1645년 프라하 근교의 얀카우 전투에서 또다시 황제군은 대패했고, 이때 프라하에 있던 황제 페르디난트 3세는 으로 도망쳤으나, 이것은 예전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보헤미아 왕)의 도망과 비슷했기 때문에 프리드리히의 도망이라고 조소받았다.

이 사건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패배는 결정적이 되었다. 같은 해 바이에른군도 스웨덴군에게 패배해 바이에른 공작은 프랑스와 화해를 맺고, 고립된 작센 공작도 스웨덴군과 휴전조약을 체결했다.

일련의 상황으로 인해 화평회의는 순식간에 진전되었다. 국제회의에서는 영국, 네덜란드, 러시아 제국, 오스만 제국을 제외한 모든 유럽 여러 나라가 참가했다. 그러나 1646년 황제군이 얀카우 전투의 패전에서 경이적인 부활을 이루어냈다. 황제군이 바이에른과 다시 합류하는 것을 두려워한 스웨덴은 바이에른에 다시 침공하였다. 프랑스는 이것을 월권행위로 보고, 스웨덴의 견제를 위해 명장 튀렌을 파견하였다. 양군에게 포위된 바이에른은 굴복했으나, 이후 바이에른군의 장군이 반란을 일으켜 황제군에 합류했다.

1618년 보헤미아-팔츠 전쟁이 발발했던 그곳에서 최후의 전투가 벌어졌다. 1648년 스웨덴-프랑스 연합군은 황제-바이에른 연합군을 격파하고 대세를 굳혔다. 스웨덴군은 프라하를 포위하고 이곳을 점령한 후 제국의 수도 빈을 공격하려는 태세를 준비했다. 황제는 기어코 10월 24일 화평조약에 서명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스웨덴은 보헤미아의 정복과 개신교화를 위해 1648년 7월 26일 이후 프라하에서 전투를 계속하었다. 가톨릭 진영의 최후의 요새였던 프라하는 격렬하게 저항하였고, 결코 항복에 응하지 않았다. 후에 스웨덴의 왕이 된 당시 스웨덴군 총사령관 칼 10세도 원군으로 달려와 포위전은 3개월이나 지속되었다.

11월 2일 프라하에 베스트팔렌 조약의 체결소식이 전해지자 이로써 30년 전쟁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스웨덴에서는 친정을 개시한 크리스티나 여왕의 정책으로 인해 화평교섭에 새로운 전개가 일어나게 되었다.

결과 및 영향

이 전쟁은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조직을 넘어서 전 유럽의 정세에 엄청난 영향을 끼쳐 그 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유럽의 국제정세를 규정하는 것이 되었다. 1648년 체결된 역사상 최초의 다국가간 조약이었던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서도 전쟁은 최종적으로 결판나지 않아, 그 결과 거의 300개에 달하는 연방국가의 분립상태가 확정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은 1806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1세)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존속하지만, 그것은 망령과도 같이 단순히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는 국가로 남아 있게 된다.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왕가는 독일 왕이 아닌 오스트리아 대공, 후에 오스트리아 황제로서 18세기, 19세기까지 살아남게 되었다. 장기간에 걸친 전쟁 및 용병에 의한 약탈로 독일 국토는 황폐해졌고, 당시 유행하던 흑사병 (페스트)의 영향도 더해져 인구는 격감해 교전국간의 경제에도 엄청난 마이너스 효과를 주게 되었다.

또한 프랑스스페인의 전투는 30년 전쟁 이후에도 계속되어, 1659년 피레네 조약에 의해 겨우 종결되었다. 이 조약은 「루시용, 아르투아 등의 할양」,「루이 14세펠리페 4세의 왕녀 마리아 테레사의 결혼」,「마리아 테레사는 50만 에스쿠도를 지참금으로 갖고 오는 대신 그 대가로 스페인 왕위계승권은 포기한다」는 조건이 들어 있었다. 이 전쟁을 거치며 스페인의 패권이 상실되고, 프랑스의 패권시대가 시작되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은 30년 전쟁에 직접 참전하지 않았으나, 속국 트란실바니아 후(侯)의 개입으로 인해 간접적으로 30년 전쟁에 관여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을 압박했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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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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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30년 전쟁, 박문각 시사상식사전(네이버 지식백과).
  3. 키친, 101쪽 ~ 112쪽.
  4. 키친, 113쪽 ~ 115쪽.
  5. 프라하 화의, historylearningsite.co.uk
  6. 김용구. 《세계외교사》 1995(上·下 合本)판. 서울대학교 출판부. 1쪽. ISBN 89-7096-413-4. 18세기 유럽국제정치질서를 지배하고 있던 원리는 이른바 세력균형원칙이라는 것이었다. 세력균형원칙이란 근대국가를 구성단위로 하는 국제정치질서의 기본원칙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이 근대국가를 구성단위로 한다는 점에서 이 원칙의 기원을 15세기 북부 이탈리아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이 원칙이 유럽정치질서의 지배원리로 정착하게 된 것은 30년전쟁 후의 일이다. 
  7. 결국, 프리드리히 5세는 1632년 객사했다.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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