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진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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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李斯, ? ~ 기원전 208년 )는 중국 전국시대진나라의 승상이다. 여불위의 천거로 진나라 조정에 출사하여 시황제를 섬겼다. 유학자였으나 법치주의에 그 사상적 기반을 두어, 도량형의 통일, 분서등을 실시하여, 진시황을 도와 진의 법치주의 기반을 확립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고, 시황제의 사후, 조고와의 권력 싸움에 패하고 살해되었다. 생전에는 유학자를 자처하였으나 사후 법가로 분류되었다. 순황의 문인이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초 상채(上蔡)의 사람으로, 젊은 무렵에는 말단 관리로서 초나라를 시중들고 있었다. 이사는 측으로 사람의 분뇨를 먹어 사람의 모습을 보고 도망가는 쥐와 자금고 안에서 사람의 모습에 무서워하지 않고 편히 자금을 먹는 쥐를 보고, 「사람이 있는 환경에서만 사람의 영리함 등 가치가 정해져 버리는 것인가」라고 한탄하여, 유가의 순황의 제자가 되었다.

동문으로서 한나라(韓)의 공자 한비(韓非)가 있었다. 모두 순자로부터 배웠고, 진나라에 들어가 여불위의 식객이 되어, 여불위로부터 그 재능을 인정 받아 추천을 받고 관직에 진출했다. 공자의 문인인 자궁(子宮)의 문도였던 스승 순자로부터 사서육경을 배웠다. 그는 어려서부터 공자를 사숙하였으며 정의로운 사회의 실현을 위해서는 강력한 법질서가 필요하다 확신하였다. 처음에는 한비와 절친하였으나 나중에 진나라에서 경쟁을 하게 되면서 정적으로 변신한다.

관료 생활[편집]

시황제을 모시고, 그 시종이 되었다. 본래 법가는 유가 중 현실주의, 법치주의를 강조하던 한 분파였고 그는 생전에 유학자를 자처하였다.

이사는 시황제의 명령으로 타국에 잠입하여, 각국의 왕족과 장군의 사이의 이간책을 실시하여 공적을 세우고, 객경(客卿, 타국 출신의 대신)이 되었다.

기원전 237년 순조롭게 출세하고 있던 이사이지만, 노애(嫪毐)라고 하는 타국 출신자가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국내에서 타국 출신자의 평판이 나빠져, 이윽고 외국인의 추방령이 나왔다. 이대로는 곤란했던 이사는 편지를 영정에게 내 추방령의 철회를 요구했다. 이 편지는 실로 이로 정연한 명문으로, 후에 문선에도 수록되고 있는 만큼이었다. 영정도 이 명문에 설득되어 추방령의 철회를 결정했다.

집권[편집]

집권 초기[편집]

권력자인 여불위가 자결한 후에, 더욱 더 영정의 신뢰가 두터워진 이사이지만, 그 지위를 위협하는 사람이 있었다. 동문인 한비이었다. 영정은 그 전에 한비의 저작인 한비자(韓非子)를 읽고, "이 작자와 친하게 할 수 있다면, 죽어도 후회는 없다."라고 할수록 심취하고 있었고, 만약 이대로 한비가 등용되어 버리면 자신의 지위는 매우 위험해진다고 생각한 이사는 정에 한비의 중상 모략을 하여 투옥시키고, 옥중에 있는 한비에게 독약을 건네주어 죽어버렸다.

이렇게 하고, 라이벌을 제거한 이사는 진나라의 부국 강병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여, 기원전 221년에 결국 진나라는 중국을 통일하여, 영정은 진 시황제(秦始皇帝)가 되었다.

개혁 정책[편집]

진나라의 중국 통일 후에 시황제는 승상인 왕관(王綰), 어사대부 풍겁(馮劫) 등 중신으로부터, 주나라의 제도인 봉건제를 채용하여 시황제의 왕자들을 각지의 왕으로서 봉하도록 진언이 있었다. 하지만, 이사는 거기에 맹반대하고, 주나라가 왜 멸망했는지의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하고, 더 한층 강한 군현제도의 시행을 말했다.

그에 의하면 중앙에서 지방에 직접 지방관을 파견하여 중앙에서 직접 지방관을 통제하도록 하였고, 지방관들의 근무 태도나 비위행위를 수시로 감할할 관리를 파견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왕의 형제나 친속에게는 친왕(親王)과 같은 이름뿐인 작위를 부여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 정치에 쓸데없는 비판을 실시하는 학자들의 저서를 모아 분서를 실시하도록 진언 했다. 이는 후일 진시황분서갱유에 대한 정당화의 근거로 제기되었는데, 이때문에 그는 선비들을 죽음으로 몰고가게 했다 하여 사후 다른 유학자들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게 된다.

생애 후반[편집]

기원전 210년 가을 7월에, 시황제가 순행 도중에 사망하여, 이사는 조고(趙高)와 함께 위조를 만들고, 호해를 즉위 시켜 진 이세황제(二世皇帝)로서 태자 부소를 자결시켰다.

시황제 사후 기반이 흔들려 버린 진나라에 대해서, 다음 해에 마침내 진승 오광의 난을 비롯해 반란이 연발하여, 국내는 대혼란이 되었다. 이 때에 되어도 2세 황제는 흥청망청하고, 궁정의 밖의 상황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이사는 이것을 어떻게든 충고하려고 했지만, 이것을 이용한 조고의 책략으로 2세 황제가 분노하게 되었다.

기원전 208년 이사는 우승상 곽거질(霍去疾)과 장군 풍겁(馮劫)과 함께 아방궁의 축조를 멈추도록 2세 황제에 고했지만 거절 당하고 곽거질과 풍겁은 자해 했다. 그리고도 재삼 이세황제에 간하였지만, 오히려 2세 황제의 분노를 사 조고에게 중상 모략되고, 조고에게 집요한 고문을 받았다. 고문에 견디지 못하고 조고가 날조 하여 올린 죄(초나라 항량의 군사에게 이사의 장남으로 삼천군 군수의 이유가 초나라 군과 내통 하고 있었다고 하는 죄)를 인정하였다.

죽음[편집]

7월, 함양의 시장 바닥에서 요참형에 처하였다. 이사는 옥에서 나와 함께 잡힌 둘째 아들을 보며 말하였다.

너와 함께 다시 한 번 누런 개를 끌고 상채 동쪽 문으로 나아가 토끼를 사냥하려 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겠구나!

이사와 아들은 소리내어 울고, 삼족이 모두 죽음을 당하였다.

저서[편집]

  • 《태산각석(泰山刻石)》
  • 《낭야각석(琅邪刻石)》
  • 《역산각석(嶧山刻石)》
  • 《회계각석(會稽刻石)》
  • 《진량》

평가[편집]

이사는 법가 이론의 완성자 한비에 대해서, 법가의 실무의 완성자로 여겨진다. 이사는 한비를 모살한 일이나 위조로 부소를 죽인 일, 그 밖에도 유생을 철저하게 탄압한 분서 갱유에 깊게 관련되었기 때문에, 후세의 평판은 매우 나쁘지만, 진의 중국 통일에 두어 가장 큰 역할을 이루어 있었다. 사마천도 사기에 대해 이사가 길을 잘못하지 않으면 그 공적은 주공, 소공에 비견 했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은 이사를 두고 "권력을 좇지 않고 충성을 다하였더라면, 이사의 공은 주공(周公) · 소공(召公)과 어깨를 겨룰 만하였을 것"이라고 평하였다.

기타[편집]

그와 동명이인의 묵가 사상가 이사 도 있다.

관련 항목[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