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년 전쟁
| 미영 전쟁 | |||
미완공의 미국 국회의사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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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짜 | 1812년 6월 18일~1814년 12월 2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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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소 | 북아메리카 동부 해안, 걸프 코스트, 대서양 및 태평양 | ||
| 결과 | 겐트 조약 전후 양국 관계는 전쟁 이전의 상태(Status quo ante bellum)로 합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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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전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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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휘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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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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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 규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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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 전쟁 (미국에선 War of 1812, 영국에선 American War of 1812 to 1815라고 한다)은 1812년 6월 18일에 미국이 영국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발발하였다.
이 전쟁의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제임스 매디슨과 그의 지지세력들이 영국에 적대적이었다는 것과, 둘째로 영국이 프랑스로 가던 미국 선박들을 나포하여 미국의 수출에 타격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 전쟁은 누구의 승리도 없이 끝났다.
미국은 백악관이 불에 타 잿더미가 되는 등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 불타버린 백악관을 메디슨이 하얗게 칠했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쟁 과정 [편집]
1812년 6월 18일 미국이 영국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처음에는 미국이 영국에서 5,000km나 떨어져 있어 소수의 영국군이 캐나다에 주둔해 있을 뿐이었고 당시 캐나다는 인구 50만 명 미만이었지만 미국은 당시 인구 700만 명에 달했기 때문에 미국이 수적으로 우세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연방파의 본거지 뉴잉글랜드 지방은 전쟁에 협조하지 않았고 미국 군함은 1812년 영국 프리깃함과 싸움을 벌인 끝에 '게리에르'호를 상대로 '콘스티튜션'호가 거둔 승리를 비롯해 3번의 주목할 만한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 전쟁에서 나머지 3번의 승리는 영국에 돌아갔다.
이리 호(湖), 온타리오 호, 섐플레인 호의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한 여러 차례의 작은 접전이 벌어졌다. 미국은 디트로이트 탈환을 비롯, 몇 번의 작전에서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1814년까지도 영국은 미시간 호에 접근하는 통로를 그대로 지배하고 있었으며 새로이 미시시피 강 북쪽 유역을 점령했다.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해 나폴레옹 전쟁이 종결되자 영국은 본격적으로 정예 부대 6,000명을 메릴랜드에 상륙시켰다. 영국의 육해군은 체서피크 만(灣) 해안을 황폐화시켰고 블레이던즈버그 전투에서 승리한 뒤, 미국의 요크(토론토) 작전에 대해 앙갚음 하기 위해 워싱턴 D.C.의 공공건물들을 불태웠다.
1814년 9월 14일 밤에는 메릴랜드의 맥헨리 요새도 영국군에게 처함하게 파괴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워싱턴 변호사 출신 프랜시스 스콧 키가 현재의 미국 국가를 작곡하기도 했다. 미국의 선박들이 영국 상선을 방해하자 미국군의 사기는 높아졌지만 영국의 해상통제권을 교란시키지도, 미국 해안 봉쇄를 풀지도 못했다.
별 성과 없던 전쟁은 1814년 12월 24일 벨기에 겐트에서 맺어진 겐트 조약의 조인과 함께 종결되었다. 그러나 미영 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는 뉴올리언스 전투로 통신사정이 나빠 겐트 조약이 맺어진 지 며칠 뒤에 발생했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2,037명의 전사자를 낸 대 비해 미국군은 단 21명의 전사자만 낸 값진 승리로 지휘관 앤드루 잭슨이 영웅으로 떠올랐다.
전쟁 원인 [편집]
이 전쟁은 미국의 제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잉글랜드 은행과 로트실트 가문이 대주주로 있는 미국 중앙은행을 폐쇄시키자 로트실트 가문이 미국의 재정에 타격을 주어 중앙은행을 다시 만들기 위해 일으켰다는 견해도 있다.[2]
주석 [편집]
- ↑ Allen, Robert S. (1996). His Majesty's Indian Allies 121. Dundurn Press.
- ↑ 쑹훙빙, 화폐전쟁, 랜덤하우스, 2008,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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