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토 대지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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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층 모델 ===
=== 단층 모델 ===
간토 대지진의 단층 모델은 1971년 가나모리 및 여러 학자들이 가설을 내놓았으며 이들 가설 모두 우향으로 어긋난 [[충상단층|낮은 섭입각의 역단층]]이 주성분이지만<ref name="Sato1989b" /> 관측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아 확정적인 단층 모델을 얻고 있지 못하며 진원 또한 여러 곳인 것으로 추정되지만 데이터 부족으로 지진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ref name="Ishibashi1994-2">石橋克彦 [[#Ishabashi (1994)|『大地動乱の時代 -地震学者は警告する-』]] 岩波新書、1994年, pp125-126.</ref>

* 1971년 가나모리 : 주향 290°, 경사각 34°, 미끄럼각 162°, 길이 130 km, 폭 70 km, 미끄러진 길이 2.1 m<ref name="Kanamori1971" />
* 1971년 안도 : 주향 315°, 경사각 45°, 미끄럼각 153°, 길이 130 km, 폭 65 km, 미끄러진 길이 6.7 m<ref name="Ando1971">Ando, M.(1971):[https://hdl.handle.net/2261/12576 A Fault-Origin Model of the Great Kanto Earthquake of 1923 as Deduced from Geodetic Data], ''Bulletin of the Earthquake Research Institute'', '''49''', 19-32.</ref>
* 1974년 안도 : 주향 315°, 경사각 30°, 미끄럼각 153°, 길이 85 km, 폭 55 km, 미끄러진 길이 6.7 m<ref name="Ando1974">Ando, M.(1974):[https://doi.org/10.4294/jpe1952.22.263 Seismo-Tectonics of the 1923 Kanto Earthquake], ''Journal of Physics of the Earth'', '''22''', 263-277, {{naid|130003962726}}, {{doi|10.4294/jpe1952.22.263}}</ref>
* 1980년 이시바시 : 주향 325°, 경사각 45°, 미끄럼각 160°, 길이 40 km, 폭 40 km, 미끄러진 길이 7.0 m, 주향 325°, 경사각 35°, 미끄럼각 160°, 길이 45 km, 폭 60 km, 미끄러진 길이 7.0 m, 주향 195°, 경사각 30°, 미끄럼각 60°, 길이 15 km, 폭 30 km, 미끄러진 길이 6.0 m, 주향 195°, 경사각 30°, 미끄럼각 60°, 길이 15 km, 폭 15 km, 미끄러진 길이 4.0 m 총 4개 단층<ref name="Ishibashi1980">石橋克彦(1980):[http://ci.nii.ac.jp/naid/10003710128 伊豆半島をめぐる現在のテクトニクス], 月刊地球, 2, No.2, 110-119.</ref>
* 1980년 마쓰우라 : 주향 294°, 경사각 25°, 미끄럼각 140°, 길이 95 km, 폭 54 km, 미끄러진 길이 4.8 m 외 1개 모델<ref name="Matsu'ura1980">Matsu'ura, M., T. Iwasaki, Y. Suzuki and R. Sato(1980):"[https://doi.org/10.4294/jpe1952.28.119 Statical and Dynamical Study on Faulting Mechanism of the 1923 Kanto Earthquake]", ''Journal of Physics of the Earth'', '''28''', 119-143., {{doi|10.4294/jpe1952.28.119}}</ref>

=== 지진의 다원성 ===


== 피해 ==
== 피해 ==

2020년 5월 21일 (목) 11:10 판

간토 대지진
본진
UTC 시각??
ISC 지진번호
USGS-ANSS
발생일 *1923년 9월 1일
발생시간 *11시 58분 32초 (일본 표준시)
현지일
현지시간
지속시간48초(첫 지진만)[1]
4분[2]에서 10분 이상(지진 시작부터 진동 끝까지)[3]
규모   모멘트 규모 Mw 7.9
- 8.2
일본 기상청 규모 Mj7.9 - 8.1
표면파 규모 Ms8.2 - 8.3
최대 진도   일본 기상청 진도 계급 진도 6 : 일본 도쿄부 도쿄시
진원 깊이0-10km,[4] 25[5] km
진앙일본 야마나시현 동부, 가나가와현 서부, 사가미만 등
종류해구형지진
우향 주향성분이 포함충상단층[6]
여진
횟수규모 M7 이상 6회[7]
피해
피해 지역일본 제국 일본 제국
피해액약 45억 엔[9]
지진해일시즈오카현 다가타군 아타미정 최대 12m[10][11]
산사태네부카와 역 인근에서 대규모 산사태 (네부카와역 열차 추락 사고)
사상자105,385[8]–142,800 명
2004년 지진조사위원회가 가정한 1923년 간토 대지진(빨간 실선), 1703년 겐로쿠 지진(빨간 점선)의 추정 진원 영역.

간토 대지진[12][13](일본어: 関東大震災 간토다이지신[*]) 또는 관동 대지진1923년 9월 1일(다이쇼 12년) 11시 58분 32초(일본 표준시)에 일본 미나미칸토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거대지진이다.[14][15] 지진의 진동은 본진이 시작될 때 부터 완전히 멈출 때까지 4분에서 최대 10분까지 걸린 오래 지속된 지진이다.[3] 이 지진으로 인한 피해를 간토대진재(일본어: 関東大震災 かんとうだいしんさい[*])라고 부른다.[16]

1703년(겐로쿠 16년)에 일어난 지진도 간토 대지진과 거의 비슷한 구조로 일어났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이 지진을 다이쇼 간토 지진(일본어: 大正関東地震)으로 부르고 1703년 간토 지진을 겐로쿠 간토 지진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17][18][19] 이 두 지진은 사가미 해곡판 경계를 따라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20] 두 지진을 한데 묶어 사가미 해곡 거대지진으로 부르며[21] 간단하게 사가미 해곡에서 일어나는 지진을 총칭하여 간토지진으로 묶어 부르기도 한다.[22]

지진 개요

1971년 가나모리 히로가 발표한 지진 매커니즘에 따르면 간토 대지진은 미우라반도 연장선 방향의 사가미 해곡의 주축에 평행한 우향 낮은 섭입 각도의 역단층으로 일어난 지진으로 추정된다.[6][23] 1996년 다케무라 마사유키도 P파의 초동분포를 통해 진원 매커니즘을 분석하여 가나모리가 말한 대로 필리핀해판의 섭입 방향으로 추정되는 북동동 방향으로 34도 정도 경사진 경사면이 단층면으로 추정되며 옆으로 어긋난 성분이 많다고 추정하였으나 다른 가설들도 많아 이것이 확실한 것은 아니다.[24] 일본 지진조사위원회에서는 필리핀해판이 침강하는 판 경계간 지역에서 북아메리카판이 끌려 내려가다 반대로 튕겨 올라가면서 일어난 지진으로 보고 있다.[25]

반면 필리핀해판혼슈 쪽 판 사이 경계 지점은 지질학적으로 제니스 부근에 있으며, 지질학적 시간 척도에서 스루가 해곡에서 일어날 것으로 추정되는 도카이 지진을 볼 때 간토 대지진은 판 내부에서 일어난 지진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26]

지각변동을 통한 추정으로는 진원단층이 쇼난 지역 내륙 안쪽까지 있다고 추정되며[17] 지진의 진동은 오다와라 지역이 제일 심했다.[16] 도쿄도에서 진도6을 관측했으나 이 간토 대지진을 마지막으로 2000년 미야케섬 화산 분화로 인한 지진을 제외하고는 도쿄도에서 진도6 이상을 지진을 관측한 적이 없다.

지진의 전조

지진 예측

간토 대지진이 발생하기 전인 1905년, 도쿄제국대학 교수 오모리 후사키치(大森房吉)와 이마무라 아키쓰네(今村明恒) 사이에 다음과 같은 논쟁이 있었다. 이마무라 교수는 잡지 태양에 도쿄 남쪽의 사가미만에서 50년 안에 대지진이 발생할 것이라고 예측했고, 사설을 통해 도쿄 전역은 대지진과 그로 인한 화재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7] 하지만 이마무라의 예측은 명확한 근거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잡지 기고가 선정적으로 보도되었기 때문에 다른 학자들의 신뢰를 얻는 데에 실패했다. 특히 여러 번 지진 예측에 성공한 세계적인 지진학자였던 오모리 교수는 이 예측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28][29] 오모리 교수는 정기적인 소규모의 지진 발생은 단층의 지진응력을 해소하여 지진의 위험성을 줄인다는 가설을 내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간토 대지진 발생 직전까지도, 도쿄에서 1921년 말(M6.4-7.0 이바라키현 남부 지진), 1922년 중반(M6.8 가나가와현 동부 지진), 1923년 초(M6 이바라키현 해역 지진)에 주기적으로 지진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도쿄 지역에서의 대지진의 위험성이 해소되었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1923년 간토 대지진의 발생으로 오모리의 이러한 가설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30]

전진

아래는 간토 대지진 이전 전진으로 추정되는 지진이다.

  • 8년 전 : 1915년(다이쇼 4년) 11월 도쿄에서 유감지진이 과거 최다인 18회 이상 일어났다. 이후 지진이 진정되었으며 오모리-이마무라 간토 대지진 논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 1-2년 전
    • 1921년 규모 M7.0의 이바라키 남부 지진 발생.[31]
    • 1922년 규모 M6.8의 우라가 수도 지진 발생. 사상자 25명.
  • 2-3개월 전
    • 1923년 5-6월 이바라키현 동부에서 2-300회가 넘는 군발지진이 발생. 유감지진이 미토 73회, 조시 64회, 도쿄 17회 일어났다.[32]

경과

도쿄부 혼고구도쿄제국대학 지진교실 안에 있던 지진계에 관측된 동서방향의 지진파형이다. 매우 큰 흔들림 때문에 지진계가 측정할 수 있는 한계 끝까지 바늘이 흔들렸다.[33]

본진은 1923년(다이쇼 12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32초 간토 지방 남부를 진원으로 일어났다.[4] 당시 지진학자인 이시모토 미시오는 도쿄 혼고구의 가속도가 대략 300gal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도쿄 요코하마의 야마노테에서 최대 가속도의 주기가 0.3초 정도였다고 추정한다.[34] 본진의 흔들림은 진원에서 약 9,000 km 떨어진 오스트리아 기상청에도 관측이 되었으며[23] 오스트리아 기상청 측에서 재빨리 간토 대지진의 발생을 알렸다.[35]

진앙

각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간토 대지진의 진앙 위치

간토 대지진의 진앙은 연구자마다 견해가 전부 다르다. 주된 설에는 다음이 있다.

규모

1951년 가와즈미 히로시는 간토 대지진의 규모를 M7.9로 추정했는데,[45] 도쿄에서 진도가 대략 진도6이라고 했을 때 진앙과의 거리가 100km라고 가정해 계산한 값이었다.[46] 1964년 쓰보이도 규모는 대략 M7.9라고 추정했으나[47] 일본 국외 지역의 지진파형을 이용해 분석하면 규모 M8 이상이 타당하다고 주장했으며[13] 표면파 규모는 대략 Ms8.2[4][48]에서 Ms8.3[49][50]까지 다양한 설이 존재한다.

다케무라 마사유키, 이케무라 도모노리, 노자와 히로시(1999-2000)는 아키타, 센다이, 나가사키 등 7개 지역의 이마무라식 강진지진계 기록 데이터를 바탕으로 규모를 Mj8.1±0.2로 추정하였다. 하지만 원래 사용하였던 규모 M7.9도 오차 범위 안에 있으므로 타당한 값이라고 결론내렸다.[46] 이 규모는 당시 관측기록에서 벗어나지 않은 완전한 기록을 바탕으로 추정한 것으로 일본 중앙방재회의 재해교훈계승에 관한 전문조사회 2006년 7월 보고서(1923년 간토대진재보고서 제1편)에 개재되어 있다.[51]

1977년 가나모리 히로는 모멘트 규모를 Mw7.9로,[4][52] 2011년 나메가야는 Mw8.0으로 추정했다.[53] 일본 중앙방재회의 수도직하지진모델 검토회에서는 간토 대지진의 모멘트 규모를 Mw8.2로 추정하였으며 이 규모가 지각 변동이나 쓰나미 높이를 잘 재현하였다고 발표하였다.[54]

단층 모델

간토 대지진의 단층 모델은 1971년 가나모리 및 여러 학자들이 가설을 내놓았으며 이들 가설 모두 우향으로 어긋난 낮은 섭입각의 역단층이 주성분이지만[6] 관측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아 확정적인 단층 모델을 얻고 있지 못하며 진원 또한 여러 곳인 것으로 추정되지만 데이터 부족으로 지진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55]

  • 1971년 가나모리 : 주향 290°, 경사각 34°, 미끄럼각 162°, 길이 130 km, 폭 70 km, 미끄러진 길이 2.1 m[23]
  • 1971년 안도 : 주향 315°, 경사각 45°, 미끄럼각 153°, 길이 130 km, 폭 65 km, 미끄러진 길이 6.7 m[56]
  • 1974년 안도 : 주향 315°, 경사각 30°, 미끄럼각 153°, 길이 85 km, 폭 55 km, 미끄러진 길이 6.7 m[57]
  • 1980년 이시바시 : 주향 325°, 경사각 45°, 미끄럼각 160°, 길이 40 km, 폭 40 km, 미끄러진 길이 7.0 m, 주향 325°, 경사각 35°, 미끄럼각 160°, 길이 45 km, 폭 60 km, 미끄러진 길이 7.0 m, 주향 195°, 경사각 30°, 미끄럼각 60°, 길이 15 km, 폭 30 km, 미끄러진 길이 6.0 m, 주향 195°, 경사각 30°, 미끄럼각 60°, 길이 15 km, 폭 15 km, 미끄러진 길이 4.0 m 총 4개 단층[58]
  • 1980년 마쓰우라 : 주향 294°, 경사각 25°, 미끄럼각 140°, 길이 95 km, 폭 54 km, 미끄러진 길이 4.8 m 외 1개 모델[59]

지진의 다원성

피해

리히터 규모 7.9에서 8.4 사이로 추정되며 4 ~ 10분 정도 지속되었다. 도쿄 지역과 요코하마 지역, 지바현, 가나가와현, 시즈오카현 등에서 10만 명에서 14만 2천 명 이상이 사망했고, 3만 7천 명이 실종되었다. 10만 9천여 채의 건물이 전부 파괴되고 10만 2천여 채는 반파 되었다. 마천루료운카쿠도 붕괴되었다.

2차 피해

1923년 9월 10일매일신보. 신문에는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이 폭동을 조장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글로 전면을 다루고 있다.

1923년 도쿄 일원의 간토 지방은 지진으로 인하여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흉흉해진 민심 덕분에 일반인들 사이에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이 싹트는 가운데, 내무성은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각 지역의 경찰서에 지역의 치안유지에 최선을 다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런데, 이때 내무성이 각 경찰서에 하달한 내용 중에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라는 내용이 있었다. 이 내용은 일부 신문에 보도되었고 보도내용에 의해 더욱더 내용이 과격해진 유언비어들이 신문에 다시 실림으로써 "조선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약탈을 하며 일본인들을 습격하고 있다" 라는 헛소문이 각지에 나돌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지진으로 인하여 물 공급이 끊긴 상태였고, 목조 건물이 대부분인 일본의 특징 때문에 일본인들은 화재를 굉장히 두려워하였으므로, 이러한 소문은 진위여부를 떠나 일본 민간인들에게 조선인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을 유발하였다. 이에 곳곳에서 민간인들이 자경단을 조직해 불시검문을 하면서 조선인으로 확인되면 가차없이 살해하는 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죽창이나 몽둥이, 일본도 등으로 무장하였고, 일부는 총기로 무장하기도 하였다.

우선 조선식 복장을 한 이는 바로 살해당하였으며, 학살 사실을 알고 신분을 숨기기 위해 일본식 복장을 한 조선인들을 식별해 내기 위해서 조선인에게 어려운 일본어 발음 한국어에 없는 어두유성음 및 종종 정확하게 발음되지 않는 장음 발음(撥音)등으로 이루어진) 「十五円五十銭 (じゅうごえんごじっせん)」(쥬고엔 고주센)을 시켜보아 발음이 이상하면 바로 살해하였다. 예를들어 '쥬고엔 고쥬센'을 일본어가 어눌한 발음의 '츄고엔 고쥬센'으로 발음하는 것이다. 이 때,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류큐인, 외자 성을 강제당해 조선인으로 오인받은 아마미 제도 출신, 지방에서 도쿄로 와 살고 있었던 지방의 일본인(특히 도호쿠 출신)들도 발음상의 차이로 조선인으로 오인받고 살해당하는 등, 자경단의 광기는 상상을 초월할만큼 잔악했다.

1923년 간토 대지진의 조선인 학살

일부 조선인들은 학살을 피해 경찰서 유치장으로까지 피신하였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서 안까지 쳐들어와 끄집어 내어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경찰은 학살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하였으며, 오히려 조선인을 조직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야쿠자 등 비공권력 범죄 집단의 일부가 조선인을 숨겨주는 일이 있었다. 조선인 학살과 더불어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인권운동가, 반정부 행위자 등으로 경찰에 요주인물로 등록되어 있던, 주로 좌파 계열의 운동가에 대한 학살 사건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치안 당국은 "조선인들이 폭동을 저지르려고 한다"는 소문이 헛소문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혼란 수습과 질서 회복의 명분하에 자경단의 난행을 수수방관하였고, 일부는 가담, 조장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점차 자경단의 만행이 도를 넘어서 공권력을 위협할 정도가 되어, 그제서야 개입하였으나, 이미 수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당한 후였다. 자경단의 살상 대상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으며, 상당수는 암매장되었다. 학살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는 도쿄에 흐르는 스미다 강아라카와 강은 시체의 피로 인해 핏빛으로 물들었다고 한다. 일본 정부는 최종적으로 유언비어를 공식확인하였으나, 피해자의 수를 축소 발표하고, 자경단 일부를 연행,조사하였으나, 형식상의 조치에 불과하였으며, 기소된 사람들도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무죄 방면되었다. 학살 사건으로 인한 사법적 책임 또는 도의적 책임을 진 사람이나 기구는 전혀 없었다.

일본인 요시노 사쿠조는 그의 저서 『압박과 학살』에서 2534명으로, 김승학은 『한국독립운동사』에 피해자가 6066명이라고 적었지만, 그에 비해 당시 일본정부의 추산은 233명이었다.

각지의 진도

진도 관측된 지역
7

(격진)

오다와라, 사가미만, 보소반도 남부 등 (추정)
6

(일진)

구마가야, 도미사토, 도쿄 지요다 오오데마, 요코스카, 고후
5

(강진)

우쓰노미야, 조시, 나가노, 이이다, 누마즈, 하마마쓰, 미야즈
4

(중진)

후쿠시마, 미토, 쓰쿠바, 아시오, 마에바시, 마쓰모토, 후시키, 후쿠이, 나고야, 히코네, 오사카, 사카이시,

도쿠시마

복구

지진 이후 수도를 이전하자는 주장이 잠시 대두되었다. 히메지,경성이 거론되기도 하였다. 복구를 하면서 현재의 도쿄의 기틀을 구성하는 도로와 철도 그리고 공원등이 계획되어 보다 근대적 모습으로 도시가 재건되었다. 특히 공원은 이후 있을지 모르는 대지진의 피난처 구실을 하게끔 만들어졌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다시 파괴되는 경험을 겪게 된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일본의 안전 불감증의 심각함을 잘 드러내는 사건이 되었다. 이후 9월 1일을 방재의 날로 정하였다.

같이 보기

각주

  1. Reiji Kobayashi, Kazuki Koketsu (2005). “Source process of the 1923 Kanto earthquake inferred from historical geodetic, teleseismic, and strong motion data”. Earth, Planets and Space. 2016년 3월 12일에 확인함. 
  2. Panda, Rajaram. “Japan Coping with a National Calamity”. Delhi: Institute for Defence Studies and Analyses (IDSA). 2011년 12월 21일에 확인함. 
  3. James, Charles. “The 1923 Tokyo Earthquake and Fire” (PDF).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2007년 3월 16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12월 21일에 확인함. 
  4. 金森博雄; 宮村摂三 (1970년 6월 10일). “Seismomentricak Re-Evalution of the Great Kanto Earthquake of September 1, 1923”. 《東京大学地震研究所彙報》 (東京大学地震研究所) 第48冊 (2): 115–125. ISSN 0915-0862. 
  5. 1923年関東地震の震源の深さについて 浜田信生 『験震時報』 50巻 pp.1-6, 昭和61年度
  6. 佐藤良輔, 阿部勝征, 岡田義光, 島崎邦彦, 鈴木保典 『日本の地震断層パラメーター・ハンドブック』 鹿島出版会、1989年, pp141-151.
  7. 武村雅之(1994):1923年関東地震の本震直後の余震活動 『地震 第2輯』 1994年 46巻 4号 p.439-455, doi 10.4294/zisin1948.46.4_439
  8. 諸井孝文, 武村雅之 (2004). “関東地震 (1923年9月1日) による被害要因別死者数の推定”. 《日本地震工学会論文集》 4 (4): 21-45. doi:10.5610/jaee.4.4_21. 2016년 3월 19일에 확인함. 
  9. 関東大震災発生後における政策的対応国立国会図書館, 2011-04-28, 2016-03-11閲覧。
  10.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Ikeda1925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텍스트가 없습니다
  11. 羽鳥徳太郎 (1984). “28. 熱海・初島における1923年関東地震津波の挙動”. 《東京大学地震研究所彙報》 (東京大学地震研究所) 58 (3): 683-689. 2016년 3월 19일에 확인함. 
  12. 今村明恒(1925):關東大地震調査報告(1), 震災豫防調査會報告, 第100號(甲), 21-65.
  13. 宇佐美龍夫 『最新版 日本被害地震総覧』 p272.
  14. 宇津徳治 『地震学』 p125, p179, p218.
  15. 気象庁 過去の地震津波災害
  16. 那須信治『地学事典』「関東地震」(地学団体研究会編、平成8年(1996年) 平凡社発行、ISBN 4-582-11506-3
  17. 石橋克彦(1977): 「1703年元祿関東地震の震源域と相模湾における大地震の再来周期 (第1報)」 『地震 第2輯』 1977年 30巻 3号 p.369-374, doi 10.4294/zisin1948.30.3_369
  18. 寒川旭『地震の日本史 -大地は何を語るのか-』 p137, p213.
  19. 福和伸夫. “繰り返しやってくる巨大地震” (HTML). 2008년 8월 1일에 확인함. 
  20. 宇津徳治 『地震の事典』 p588, p615.
  21. 石橋克彦 『大地動乱の時代 -地震学者は警告する-』 岩波新書、1994年, pp125-129.
  22. 井元政二郎, 森川信之, 藤原広行(2015):「M8クラス関東地震発生確率の不確定性について」 『日本地震工学会論文集』 2015年 15巻 7号 p.7_173-7_179, doi 10.5610/jaee.15.7_173
  23. 金森博雄(1971): 「関東地震(1923年)の断層モデル」 『東京大学地震研究所彙報』 第49冊第1/3号, 1971.9.30, pp.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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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문헌

외부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