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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으로 [[이승만]]이 피난하자 [[신익희]]와 [[조봉암]]은 [[이승만]]을 찾아 [[경무대]]로 갔다가 이승만의 도피소식을 접하였다. [[신익희]]는 측근들과 함께 가자 해놓고 가족들과 먼저 [[경기도]] [[수원]]으로 피신한 반면, 조봉암은 끝까지 남아 서류들을 정리하고 불태운 뒤 동료 의원들을 피신시킨 뒤 미처 피하지 못한 [[윤길중]] 등의 청년들을 데리고 남하하였다. 그러나 아내 [[김조이]]는 차마 데려오지 못하고 그대로 실종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윤길중]] 등은 조봉암을 따르게 되었다. 이때 [[서울]]은 [[조선인민군]]이 점령하였고 '반역자 조봉암은 체포하면 죽인다.'라는 문건이 담긴 포스터와 방이 붙여져 있었다. 뒤늦게 야밤에 [[대전광역시|대전]]으로 내려오자, [[이승만]]은 [[공산당]]과 내통하였다더니 내려왔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한국전쟁]]으로 [[이승만]]이 피난하자 [[신익희]]와 [[조봉암]]은 [[이승만]]을 찾아 [[경무대]]로 갔다가 이승만의 도피소식을 접하였다. [[신익희]]는 측근들과 함께 가자 해놓고 가족들과 먼저 [[경기도]] [[수원]]으로 피신한 반면, 조봉암은 끝까지 남아 서류들을 정리하고 불태운 뒤 동료 의원들을 피신시킨 뒤 미처 피하지 못한 [[윤길중]] 등의 청년들을 데리고 남하하였다. 그러나 아내 [[김조이]]는 차마 데려오지 못하고 그대로 실종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윤길중]] 등은 조봉암을 따르게 되었다. 이때 [[서울]]은 [[조선인민군]]이 점령하였고 '반역자 조봉암은 체포하면 죽인다.'라는 문건이 담긴 포스터와 방이 붙여져 있었다. 뒤늦게 야밤에 [[대전광역시|대전]]으로 내려오자, [[이승만]]은 [[공산당]]과 내통하였다더니 내려왔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1952년]]에는 다른 야당인사들과 함께 [[이승만]]을 실각시키려는 내각제 개헌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통령직선제 카드로 [[5월 15일]]부터 [[7월 일]]까지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킨다. [[부산정치파동]] 직후 반(反)[[이승만]]의 기치하에 모였던 정치인들 중 일부는 다시 [[자유당]]으로 돌아갔고, 일부는 신당 창당을 추진했다. 죽산 조봉암은 이때부터 신당 결성을 추진했다. 조봉암은 [[장면]]을 찾아가 함께 자신과 함께 신당운동을 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장면은 한번에 거절하였다. [[장면]]이 조봉암의 청을 거절한 이유는 조봉암의 정치노선이 탐탁치 않다는 것과, 신당운동은 아직 때가 아니다라는 이유에서였다.
[[1952년]]에는 다른 야당인사들과 함께 [[이승만]]을 실각시키려는 내각제 개헌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통령직선제 카드로 [[5월 15일]]부터 [[7월 일]]까지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킨다. [[부산정치파동]] 직후 반(反)[[이승만]]의 기치하에 모였던 정치인들 중 일부는 다시 [[자유당]]으로 돌아갔고, 일부는 신당 창당을 추진했다. 죽산 조봉암은 이때부터 신당 결성을 추진했다. 조봉암은 [[장면]]을 찾아가 함께 자신과 함께 신당운동을 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장면은 한번에 거절하였다. [[장면]]이 조봉암의 청을 거절한 이유는 조봉암의 정치노선이 탐탁지 않다는 것과, 신당운동은 아직 때가 아니다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뒤 [[대한국민당]]을 탈탕하고 [[1952년]] [[8월 5일]]에 치러진 [[195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제2대 대통령 선거]]에 [[유엔]]감시하 총선거를 통한 평화통일, 국민의료제도, 국가보장교육제도,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 [[농촌]] 고리채 지불 유예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ref>[http://h21.hani.co.kr/section-021109000/2007/08/021109000200708160673036.html 한국에 사회민주주의가 필요한 이유,한겨레 21 2007년 8월16일 제673호]</ref> [[한국전쟁]] 휴전 후 [[국회의장]] [[신익희]], 국회부의장 [[장택상]], 조봉암은 이승만을 찾아가 '수도 서울을 지키겠다고 약속해놓고 약속을 위반하고 도주한것에 대한 대국민사과를 발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내가 [[당 덕종]]이냐면서 거절했다. 그래도 조봉암은 끝까지 [[이승만]]에게 국민앞에 사과하라고 요구하자, [[이승만]]은 제스처를 하며 '다 과인이 부덕한 탓이오 이럴까?'하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한다.
그뒤 [[대한국민당]]을 탈탕하고 [[1952년]] [[8월 5일]]에 치러진 [[195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제2대 대통령 선거]]에 [[유엔]]감시하 총선거를 통한 평화통일, 국민의료제도, 국가보장교육제도,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 [[농촌]] 고리채 지불 유예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ref>[http://h21.hani.co.kr/section-021109000/2007/08/021109000200708160673036.html 한국에 사회민주주의가 필요한 이유,한겨레 21 2007년 8월16일 제673호]</ref> [[한국전쟁]] 휴전 후 [[국회의장]] [[신익희]], 국회부의장 [[장택상]], 조봉암은 이승만을 찾아가 '수도 서울을 지키겠다고 약속해놓고 약속을 위반하고 도주한것에 대한 대국민사과를 발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내가 [[당 덕종]]이냐면서 거절했다. 그래도 조봉암은 끝까지 [[이승만]]에게 국민앞에 사과하라고 요구하자, [[이승만]]은 제스처를 하며 '다 과인이 부덕한 탓이오 이럴까?'하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한다.

2010년 5월 29일 (토) 20:31 판

틀:인물

조봉암
출생1898년 9월 25일
대한제국 경기도 강화군
사망1959년 7월 31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사인처형(교수형)
성별남성
국적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대한민국
별칭호 죽산(竹山).
학력일본 주오대학교 정치학과 1년 수료
직업독립운동가, 정치인
종교무신론,
부모아버지 조창규(曺昌奎), 어머니 유씨(兪氏)
배우자김금옥, 김조이
자녀딸 조호정, 딸 조의정, 딸 조임정, 아들 조규호
친척형 조수암, 동생 조용암

조봉암(曺奉岩, 1898년 9월 25일 인천 강화 ~ 1959년 7월 31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통일운동가이자 정치가이다. 일제 강점기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 동방 공산대학 2년 수료하고, 1925년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었을 때, 조직중앙위원장을 지냈으며 소련, 중국, 만주 등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등[1] 공산주의 운동을 하였으나, 1946년 5월 박헌영과의 갈등을 계기로 사상전향하여 좌우합작·남북협상 노선을 걷다가 1948년 단정에 참여, 5.10 단독총선거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제1대 농림부장관과 제2대 국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제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고,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30%라는 지지율을 받아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1958년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선고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본관은 창녕(昌寧)이고 호는 죽산(竹山)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출신[2]

활동

유년기와 학창시절

조봉암은 1898년 9월 25일 경기도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에서 창녕조씨인 아버지 조창규(曺昌奎)와 어머니 유씨(兪氏)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항렬상 환(煥)자 돌림이었으나, 두 아들을 일찍 잃은 아버지 조창규는 셋째 아들을 명이 길었으면 하여 수암(壽岩)이라 짓고, 이어서 넷째는 봉암(奉岩), 막내 아들 이름을 용암(龍岩)이라 지었다.

그는 강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농업보습학교로 진학했다. 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한 후 극심한 가난으로 중학 진학을 포기하고, 1년을 허비하다가[3] 군청에 공무원으로 임용, 강화군청 사환으로 잠시 복역했다. 그뒤 강화군청을 그만두고 경성부로 상경, 경성YMCA중학부에서 1년 학습하였다.

조봉암의 주산 실력은 최고였던 것으로 보인다. 토지대장을 꾸미느라 숫자를 맞추고, 통계를 내는 데 10명의 일을 혼자서 했다고 한다. 그러나 괴팍한 성격의 상사와의 불협화음으로 곧 공무원직을 그만두게 되었다고 한다. 이 때도 잘못하지 않은 일에 고개를 숙이는 일은 없었다 한다.[3]

독립운동

3.1운동과 공산당 조직 활동

YMCA중학부 재직 중 3·1 운동에 참여하여 1년간 투옥되었다가 1919년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 임시정부 경무국 소속 직원으로도 활동했었다.[출처 필요] 그뒤, 임시정부의 파벌 싸움에 실망감과 염증을 느껴 도일, 일본 중앙대학교(中央大學敎) 전문부에 입학했다. 주오 대학교 정치학과 1학년에 재학 중 '흑도회'(黑濤會)라는 공산주의 계열 단체에 참가하여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했었다. 그러나 흑도회가 해체되면서 그는 주오대학을 1년 수료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1924년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일파인 화요회에 가입해 회원이 되었다.

1922년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귀국하였다.[4] 그해 10월 코민테른의 지령을 받고 소련으로 건너가 소련에서 열린 베르흐네우딘스크 대회에 한국인 대표로 참석하였다.[4] 1923년소련 공산당의 명으로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 속성과에 입학하였다.[4] 그해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 속성과를 수료했고, 9월 조선 공산청년동맹과 조선공산당을 조직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비밀리에 국내에 잠입하였다.[4]

1925년 4월 17일 경성에서 열린 조선공산당의 조직에 참여하고, 4월 18일 서울에서 박헌영, 김단야 등과 박헌영의 집에서 비밀리에 고려공산청년회를 조직하고 간부가 되었다. 그러나 1925년 11월 조선총독부 당국의 탄압으로 조선공산당 1차 조직이 와해되자 조봉암은 도주 피신하였고, 1925년 12월 박헌영 등과 제2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1926년 4월 제2차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자 그는 만주로 건너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滿洲總局)을 조직하고,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책임비서에 선출되었다.[5][4] 1926년 7월 코민테른 극동국 조선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민족정당 통합노력, 노동·독립운동 단체 조직

1927년 4월 이동녕·홍진·조완구 등의 독립운동지도자 24명과 함께 상하이에서 한국유일독립당 촉성회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직을 맡았다.[6] 27년 5월 중국공산당 한인지부를 조직하여 책임자로 활동했고, 중국공산당 한인지부를 중국인 교포들에게 넘긴 뒤 1926년 6월 조봉암은 국제적색노동조합(프로핀테른) 주최의 범태평양노동자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해 조선의 노동운동 방침을 밝혔다.[7] 그러나 조봉암은 상하이에서의 활동 당시 애인 문제와 자금 문제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8] 이후 ML당(마르크스-레닌 당, 제3차 조선공산당)을 조직하는데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29년 10월 조선독립운동자동맹을 조직, 결성하는데 앞장섰다.[4], 1931년 12월 만주사변 발발을 계기로 상하이에서 한국인 교포들의 반제국주의 독립운동 단체인 상하이 반제동맹 한인지회를 결성했다.[4]

한편 조선공산당이 해산된 이후 조봉암은 사회주의 혁명활동을 그만두고 비조직적으로 처신하였다.[9] 1932년 이후 그는 다른 공산주의자들과의 접촉을 줄여나갔는데, 러시아연방국방성의 비밀문서에 의하면 그는 1932년~1933년박헌영 및 다른 공산주의자들과 어떠한 접촉도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9]

1932년 11월 항일 운동에 연루되어 일본 경찰에 피검되어 일제 강점기 조선으로 송환되었으며[4] 재판을 받고 징역 7년형을 언도받은 뒤 평안북도 신의주감옥에 수감되어 7년간 복역하였다.[10] 1939년 출소하여 경기도 인천부로 내려왔다. 출옥 후 인천에서 지하운동을 하다가 조선총독부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태평양 전쟁 이후

1940년 이후 일제 총독부의 가혹한 감시와 탄압으로 인해 활동을 중지하였는데, '유휴분자'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11] 그는 서대문 형무소에서 투옥중일 때 리승엽에게 '친일파로 사상 전향한것을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비판하였고, 전향을 권유하였다.[12] 이후 그는 창씨개명을 거부하였고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지하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그가 프락치였다는 의심도 받았다. 러시아의 비밀문서에 의하면 1938 ~ 1941년 인천부에서 암약하던 한 공산주의자는 자신이 인천부에서 활약하는 사실을 조봉암에게 비밀로 했다고 한다.[9] 그에 의하면 조봉암은 당시 일본인들의 비호를 받고 있었고 총독부 경찰의 보호하에 있었기 때문[9]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계속 지하활동에 참여하던 그는 1945년 1월 조선총독부 당국에 의해 전격 검거되었다.[4]

광복 이후의 정치활동

광복 직후

1945년 8월 15일 해방직후 일본의 항복과 동시에 수감에서 풀렸다. 여운형은 그의 출소를 직접 마중나가기도 했다.[13] 8월 16일 인천부 치안유지회를 조직하고, 건국준비위원회 인천광역시인천부지부를 조직했다.[4] 이어 인천부 내 노동조합 결성과 실업자대책위원회 인천지구를 조직하였다.[4]

10월 인천부윤 선거에 무소속으로 인천부윤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조선공산당 중앙간부직에 있다가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인천지구 위원장등 공산주의계열에서 활동을 하다가 1946년 박헌영과 갈등, 반목하게 된다. 박헌영은 조봉암을 공산당 창설과정에서 배제하려 하였는데,[14] 1932년무렵부터 조봉암과 박헌영은 사이가 안좋았다 한다.[15]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조봉암이 간부로 있던 조선공산당 인천지부에 일제 말 조봉암의 소극적이거나 개별적인 활동을 문제삼았다. 조선공산당 본부는 일제 말 그가 혁명활동을 포기하고 일제 당국의 비호하에 있었다 하여 조봉암을 직위해제하였다.[9]

1946년 3월 박헌영을 비판하는 공개 편지를 보내다가, 민전 인천시 지구를 수색하던 미군 CIC 방첩대에 의해 빼앗겼다.[16] 그뒤 일부를 개작하여 발표했다.

1946년 5월, 박헌영에게 경고하는 공개서한을 보내고 좌익에서 우익으로 사상전향, 공개서한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공산주의와 완전히 결별선언하였다. 그는 원래 공산당에서 출발했지만 광복 후, 박헌영의 노선을 비판하면서 공산당과 결별하게 됐다.[17] 1945년 5월 15일 민전 인천시지구 위원장직으르 사퇴하였다.[18]

  • 첫째, 인민위원회가 조직이나 운영 면에서 문제가 많다. 현금의 인민위원회는 비공산적 요소가 거의 없어 공산주의자들의 정치구락부에 지나지 않는다.
  • 둘째, 민전에 공산당원이 과대히 침투하여 비당 군중의 능동적 행동을 스스로 제약하고 있다.
  • 셋째, 모스크바 3상회의 지지투쟁의 방침은 진실로 옳았지만, 기술적으로 졸렬했기 때문에 군중들로부터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 넷째, 무원칙하다.
  • 다섯째, 종파적이다.

[19][20]

조선공산당과 결별을 선언한 조봉암은 당시 배신하였다고 하여 북쪽으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다.[21]

1946년 6월 12일 미국 CIC 방첩대에 의해 구금되었다.[22] 6월 22일 석방되었다. 6월 23일 민전 주최의 인천시민대회 때 좌익을 비난하는 노골적인 성명서가 그의 명의로 배포되었다.[23] 서중석은 이를 공작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24]

좌우합작과 남북협상 참여

1946년, 조봉암은 김규식여운형을 지지하고 그들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려고 하였다. 조봉암은 중간운동 하던 리극로와 손잡고 제3전선인 민주주의독립전선을 만들었다. 그런데 독립전선이 좌우합작위원회에 참여하려 하였고[25]그래서 김규식을 찾아가 좌우합작운동에 참가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조봉암을 '공산주의자'로 인식하던 김규식은 그의 참여를 거절하였다.[25] 김규식이 조봉암을 거절한 이유는 공산주의를 하던 사람을 어떻게 믿느냐는 것이었다. 조봉암은 조선공산당을 탈당한 후 김규식을 만나려고 했는데, 김규식은 조봉암의 면담요청을 거부하였다. 여운형의 측근이었다가 김규식 진영으로 건너간 강원용김규식에게 “만나야지 왜 거부합니까” 했더니 “이 사람아, 한번 공산당 한 사람은 바뀌지 않아. 조봉암씨는 믿을 수 없어. 공산당 하던 사람을 어떻게 믿어” 하는 것이었다.[25]

그 무렵 조봉암이 공산당을 탈당한 게 아니라 박헌영이 이승엽을 인천지구당 책임자로 앉혔기 때문에 반발했을 뿐이라는 소문이 돌았다.[25] 조봉암은 김규식을 지지하고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려고 했지만, 김규식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25] 김규식은 공산당이라고 하면 아예 상대를 하지 않았다.[25] 그 결과 조봉암은 리극로와 함께 별도로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을 추진하게 된 것이라 한다.

조봉암은 한글학자 이극로와 함께 민주주의독립전선을 조직하고 민족주의독립전선의 간부로서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하였다.[25] 그러나 좌파에서 전향한 이유로 조봉암은 1948년 4월 남북협상때 북한에 다녀올 수 없었고, 민주주의독립전선의 대표로는 이극로 홀로 북한을 다녀왔다.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이 실패로 끝난뒤, 이극로는 북한에 남아 있었고, 민주주의독립전선1948년 5·10 선거에 참여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논란을 벌이다 와해되고 말았다. 이후 이극로 계열은 북으로 올라가고, 조봉암과 그의 계열은 남한에 남게 되었다.[26] 1948년 5월 10일의 단독정부 수립 총선거에 참여의사를 밝힌 뒤로는 테러 위협에 시달렸는데, 선거기간 중 테러의 위협을 피해 민가에 은신하며 생활하기도 했다.[3]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참여

농림부 장관과 국회부의장

1948년 5.10 총선거선거에서 강원명이 조봉암을 도와달라며 이범석을 찾아갔으나 거절당하였다. 역시 이범석의 총리 인준시 무소속 의원들이 협조를 부탁하자, 조봉암은 이범석을 '군국주의자'라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27] 5.10 총선거에 출마하여 제헌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948년 5월 제헌국회에서 헌법기초위원을 선출할 때 한민당에서 무기명투표방식을 주장하며 다수득표자 순으로 헌법기초위원을 선출하자고 제안하자, 곽상훈과 함께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28] 그뒤 조봉암은 헌법기초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7월 22일 초대 내각 인준시 초대 농림부 장관에 취임하여 농지개혁법을 입안하였으며, 관사 문제로 농림부장관직을 사퇴했다. 1949년 연말 민강위 조직이 추진되었으나 조봉암은 그것에 가담하지 않았다.[29]

1950년에는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는 대한국민당 공천으로 민의원 출마하여 재선되었고, 국회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1] 1950년 한국 전쟁 중에는 국회의장 신익희와 함께 대통령 이승만을 면담하러 갔으나 이승만은 각료들의 권고로 도피하였고, 대통령을 면담하지 못한 조봉암과 신익희는 국회 휴회를 선언하고 의원들에게 피신령을 내렸다.

6.25 전쟁 전후

한국전쟁으로 이승만이 피난하자 신익희조봉암이승만을 찾아 경무대로 갔다가 이승만의 도피소식을 접하였다. 신익희는 측근들과 함께 가자 해놓고 가족들과 먼저 경기도 수원으로 피신한 반면, 조봉암은 끝까지 남아 서류들을 정리하고 불태운 뒤 동료 의원들을 피신시킨 뒤 미처 피하지 못한 윤길중 등의 청년들을 데리고 남하하였다. 그러나 아내 김조이는 차마 데려오지 못하고 그대로 실종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윤길중 등은 조봉암을 따르게 되었다. 이때 서울조선인민군이 점령하였고 '반역자 조봉암은 체포하면 죽인다.'라는 문건이 담긴 포스터와 방이 붙여져 있었다. 뒤늦게 야밤에 대전으로 내려오자, 이승만공산당과 내통하였다더니 내려왔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1952년에는 다른 야당인사들과 함께 이승만을 실각시키려는 내각제 개헌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통령직선제 카드로 5월 15일부터 7월 일까지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킨다. 부산정치파동 직후 반(反)이승만의 기치하에 모였던 정치인들 중 일부는 다시 자유당으로 돌아갔고, 일부는 신당 창당을 추진했다. 죽산 조봉암은 이때부터 신당 결성을 추진했다. 조봉암은 장면을 찾아가 함께 자신과 함께 신당운동을 할 것을 간청하였으나 장면은 한번에 거절하였다. 장면이 조봉암의 청을 거절한 이유는 조봉암의 정치노선이 탐탁지 않다는 것과, 신당운동은 아직 때가 아니다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뒤 대한국민당을 탈탕하고 1952년 8월 5일에 치러진 제2대 대통령 선거유엔감시하 총선거를 통한 평화통일, 국민의료제도, 국가보장교육제도, 노동자들의 경영 참여, 농촌 고리채 지불 유예 등을 공약으로 내걸고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30] 한국전쟁 휴전 후 국회의장 신익희, 국회부의장 장택상, 조봉암은 이승만을 찾아가 '수도 서울을 지키겠다고 약속해놓고 약속을 위반하고 도주한것에 대한 대국민사과를 발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내가 당 덕종이냐면서 거절했다. 그래도 조봉암은 끝까지 이승만에게 국민앞에 사과하라고 요구하자, 이승만은 제스처를 하며 '다 과인이 부덕한 탓이오 이럴까?'하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한다.

자유당 정권의 방해 공작으로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등록조차 하지 못하였으나, 1956년 5월 15일에 치러진 제3대 대통령 선거에 다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무려30%의 지지율을 기록하는 등 선전하였다.

야당 정치 활동

1954년 11월 30일 자유당의 연임에 저항하는 호헌동지회에 참여하려 하였다. 호헌동지회가 조봉암의 참여를 놓고 논란이 일자 장택상, 김성수, 박기출, 서상일은 조봉암의 호헌동지회 참여에 찬성하였으나, 조병옥, 장면, 김도연, 박순천, 곽상훈 등은 조봉암의 참여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신익희는 한발 물러서 있었다. 장택상, 서상일, 박기출, 김성수 등은 민주대동의 입장에서 조봉암의 호헌동지회 참여를 지지하였던 것이다. 조봉암의 영입을 반대하는 세력은 자유민주파, 찬성하는 입장은 민주대동파로 불렸다.

1955년 1월 21일 호헌동지회 총회가 열릴 때 호동은 조봉암의 참여를 놓고 호동은 민주대동파(대동단결파)와 자유민주파로 나뉘었다.[31] 이때 김성수는 자유민주파에 영향력을 주고 있었다. 김성수는 조봉암에게 사람을 보내 공산당이 아니라는 성명서를 내줄 것을 부탁하였다.[32] 대한민국의 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봉암은 굴욕감을 느꼈지만 순순히 받아들여 "인촌이 그리 하기를 원한다면 내가 그리하겠다." 하고 자신은 공산당이 아니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32] 호헌동지회에 참여하려던 조봉암은 김성수를 찾아가 자신이 전향했음을 거듭 확인시키기도 하였다.

후일 윤제술은 '김준연조병옥이 조봉암을 받아들이는 것을 극렬하게 반대하자, 신도성김준연이 조봉암을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것을 격렬히 비난했고, 조병옥이나 신익희는 어물어물 할 다름이라고 증언했다.[33][34] 이 문제에서 신익희는 회피하였다. 김성수는 "민주대동이라고 했으면 그대로 해야지, 왜 딴소리들을 하느냐. 해공의 책임회피가 문제야."라며 양쪽 모두 공박하였다.[35][33]

인촌 김성수민주국민당이 조봉암의 신당 참여문제로 알력이 심하였을 때, 민주대동의 입장에서 조봉암과 합작할 것을 보수파에 권고하였다.[33] 보수파들은 김성수의 정치적 영향력에 마지못해 조봉암이 반공주의노선을 견지하겠다는 것을 공적으로 약속한다면 좋다는 태도로 나와, 김성수는 조봉암에게 태도를 명확히 표명해줄 것을 권고하였다.[33] 조봉암은 다시 성명서를 작성해서 2월 22일 발표하였으나 김성수는 조봉암의 2차 성명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고 말았다. 조병옥, 김도연, 김준연, 장면, 곽상훈, 박순천 등은 조봉암의 신당 참여를 극렬히 반대했고, 신익희는 모호한 입장이었으며 장택상, 서상일, 박기출 만이 조봉암의 신당 참여에 찬성했다. 결국 조봉암의 참여는 좌절되었고, 이 일로 장택상, 박기출, 서상일 등은 호헌동지회 참여를 거부하게 되었다.

장택상은 다시 자유당으로 되돌아갔고, 조봉암은 이후 박기출, 서상일 등과 함께 혁신정당 구성을 추진하였으나, 서상일 등과도 이견이 생겨 서상일 일파가 분리되어 나갔다. 1956년 11월 박기출 등과 '책임 있는 혁신정치, 수탈 없는 계획경제, 민주적 평화통일'의 3대 정강을 내걸고 민주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 정당인 진보당을 조직하였다.

55년 6월 그는 한국일보에 "한국인은 강도 일본의 침략을 받아서 40년 동안 신음하면서 일본식 독점자본주의의 잔인성과 무도와 비인간성을 보았고 또 그 해독을 보아왔으며, 그 독점자본주의가 우리 농민이나 노동자의 노력을 착취하여 우리 민족 전체가 고혈을 빨렸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였다"[36]고 지적하였다.

생애 후반

제3대 대통령 후보

1956년 1월 조봉암은 진보당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혁신정당의 창당준비에 들어갔다.[37]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쟁취의 역사적 성업인 3·1 운동의 숭고한 정신을 다시 환기 계승하여 우리가 당면한 민주수호와 조국통일의 양대 사업을 수행할 수 있는 혁신적 신당을 조직하고자 이제 분연히 일어섰다.

우리는 진정한 혁신은 오로지 피해를 받고 있는 대중 자신의 자각과 단결 위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관료적 특권정치의 배격과 대중 본위의 균형 있는 경제체제를 확립할 것을 기약하고, 국민대중의 토대 위에 선 신당을 발기하고자 한다.[37]

그러나 진보당이 정식 창당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는 1956년 무소속으로 제3대 대통령 후보로 출마, 등록했다. 이때 민주당 공천으로 대통령에 입후보한 신익희와 만나 후보단일화를 협상하기도 했다. 56년 3월 31일 진보당전국추진위원대표자회의에 참석하였다. 진보당전국추진위원대표자회의에서는 대통령 후보에 조봉암, 부통령 후보에 서상일을 지명했으나 서상일이 고사해 박기출로 바뀌고 서상일은 선거대책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정부 당국에서 이 회의에 참석한 진보당추진위 대표들에게 협박·공갈·회유를 했고, 대회장에는 폭력단이 난입해 테러를 자행했다.[38]

신익희와 조봉암은 선거운동에 돌입하기 전에 협상부터 해야 했다. 단일후보가 나와야 이승만을 이길 수 있다는 여론의 압력 때문이었다. 진보당은 4월 3일 두 당이 후보지명을 백지화하고 새로 연합후보를 내.[38]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민주당은 진보당추진위 측이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응하지 않았다.[39]

그 결과 조봉암이 양보하는 조건으로 신익희가 3대 대통령을 하고 조봉암이 차기를 차지하기로 계획하고 지지를 몰아주기로 묵계했으나 5월 5일 신익희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후보단일화 논의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호헌동지회때부터 반감을 갖던 민주당에서는 조병옥 등이 나서서 신익희후보의 표를 다른 정당 후보에게 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여 개표결과 신익희 추모표가 발생하는 이변이 발생했다.

그러나 5월 15일 선거 결과 216만 4천여 표로 504만 6천여 표를 받은 이승만의 절반에 해당되는 득표를 했다. 후보단일화를 했을 경우를 가정했을때 이는 자유당을 경악하게 하고도 남았다. 그후 진보당결성운동을 추진하였으나 결성 과정에서 서상일 계열, 장건상 계열 등과 의견이 맞지 않아 조봉암은 박기출 등 소수의 인원과 함께 진보당 창당 조직을 준비하게 된다. 1956년 11월 진보당을 창당, 위원장에 선출되어 정당활동을 하였다.

대선 출마 과정

강원용은 그가 대선에 출마하게 된 원인을 미국으로 지목하였다. 강원용의 증언에 의하면 미국 인사가 그에게 접근, 한국이 미국의 최일선 기지인데, 당신 같은 사람이 대통령을 할 수 있겠냐고 했더니 조봉암은 그렇지가 않다며 거절하였다. 그러나 미국 인사는 자기가 미8군 사령관도 만나고 미국대사도 만났는데, 그 사람들이 “남북 문제는 평화적 해결 외엔 방법이 없다. 그 일에는 당신이 적임자니까 당신이 해야 된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40]

강원용은 주한 미국대사와 8군 사령관이 조봉암을 찾아와서 대선출마를 권유했다 하며 한국 대통령이 되는 데 가장 큰 문제는 영어를 못한다는 것을 지적하고 힘들겠지만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조언했다고 증언하였다.[40] 조봉암은 미8군 소속 미군의 방문을 받게 되었는데 사령관이 매일 아침 자기 부하를 조봉암씨에게 보내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고 강원용에게 말했다고 한다. 조봉암은 미국이 자신을 지지한다고 확신하였다. 조봉암의 측근이었던 윤길중 등은 그런 미국의 속내를 모르고 미국이 조봉암 선생을 지지하는 것은 사실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40] 조봉암은 강원용과 친해지고자 나는 당신이 좋으니까 당신 보러 주일마다 경동교회에 나가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강원용의 아내의 반대로 경동교회에 나가는 일은 포기해야 했다.[40]

3월 31일 진보당추진대표자회의에서 평화통일이라는 말이 등장했는데, 민주당은 진보당 측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협상이 깨질 것 같자 김창숙 등 원로들이 나섰다. 4월 25일 조봉암과 신익희는 비밀회동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조봉암은 대통령 후보 양보의 뜻을 밝히고 신익희에게 부통령 후보는 중요하지 않으니 양보해달라는 의사를 전했다.[39] 신익희는 고려해 보겠다고 했으나 민주당 측은 부통령 후보도 양보할 의사가 전혀 없었다. 야당 단일화 협상은 5월로 이어졌는데 조봉암, 서상일 등은 종반전에 들어갈 때 정부통령 후보를 양보하는 것에 합의했다. 정부통령 선거야 말로 조봉암이 진보당추진위의 정치이념과 정책을 선전할 절호의 기회였고, 초반전 사퇴는 이런 좋은 기회를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39]고 판단했다. 조봉암은 민주당의 성향으로 볼 때 자유당과 별로 다른 것이 없고 어떤 면에서는 더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39]

조봉암이 일찍 사퇴하지 않은 것은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는 자신이 1954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입후보조차 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통령 선거에서 후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이 야당표 분산을 계산[39]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조봉암은 일찍 후보단일화가 이루어지면 야당 대통령 후보의 신변이 위태로울 것이라고 판단했다.[41]

선거 패배와 사형

1956년 대통령 선거 중 북한을 비밀리에 왕래하는 상인 양명산(梁明山)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 자유당 정부와 관변단체 및 우익단체들은 조봉암이 양명산을 통해서 북한으로부터 정치자금을 제공받았다고 공격하였다.

1958년 1월 12일 새벽 진보당 간부들에 대한 일제 검거가 시작되었다. 1958년 1월 13일 진보당 간부들을 일제히 검거했다. 1월 12일 새벽, 돌연 비상사태에 돌입한 서울시경 관하 형사대는 이강국 치안국장과 최치환 시경국장 진두 지휘 아래 진보당 간부에 대한 일제검거에 나섰다. 민의원선거 4개월을 앞두고 선거대책에 몰두하다가, 겨우 잠자리에 든 윤길중, 조규택 등은 서울에서, 진보당부위원장 박기출은 부산에서 각각 체포되었다. 조봉암은 피신하여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1월 13일 약수동의 조봉암의 집을 급습한 10여 명의 형사대는 이미 이틀 전에 그가 집을 나간 채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극도로 당황했다. 이로부터 48시간 동안 시경은 관하 전 경찰관을 투입하여 조봉암 색출에 투입했으나 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조봉암은 이때 은신중이었는데, 동지들의 체포소식에 도망을 가면 무고한 혐의가 사실화될 것이고 애꿎은 동지들만 희생될 것이라고 말하며, 1월 13일 오전 당국에 전화를 걸어 자진출두 하겠다고 전하였다. 이틀 전에 치안국에서 새어나온 수사기밀을 탐지하고 감쪽같이 자취를 감춘 뒤였으며 관철동에 있는 친구의 집에 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12일 밤 그는 그곳에서 밤새껏 술을 마시며 사후 대책을 협의했다. 친구들은 이제 붙들리면 다시 나오기 어렵다고 강조하면서 그에게 모든 준비를 해줄 터이니 해외로 망명이나 하라고 권했으나, 그는 거부하였다. '망명을 한다면 어느 나라에서 나를 받아주겠는가. 또 설사 해외탈출이 가능하다고 해도, 나에게 걸린 혐의는 사실화되고 애꿎은 당원들만 희생될 것이 아닌가. 설마 하니 나를 죽이기야 하겠는가. 선거가 끝나면 내주겠지!' 하고 그는 태연히 대답했다는 것이다.

1958년 1월말,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고 진보당 주요 간부들과 함께 간첩죄로 체포되었고, 1심에서는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2심에서 간첩 혐의에 대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조봉암이 사형을 선고받자 조봉암과 가까웠으며 그를 잘 알고 있었던 장택상은 조봉암의 구명운동을 하였으나 실패하였다.[10] 2월 20일 육군특무부대는 양명산 사건을 발표하여 조봉암이 양명산과 접선하면서 북과 접촉하였고, 정치자금(공작금)을 받았고, 북한의 지령에 따라 여러가지 간첩행위를 했다고 발표하였다.[42]

이후 장택상은, 조봉암의 거부에도 불구하고 직접 나서서 조봉암 구명운동을 하였고, 조봉암을 변호하는 변론을 써서 법정에 대신 제출해 주기도 했다. 1심 재판부는 조 위원장에 대해 징역 5년을 선고했다. 국가보안법 위반은 유죄로 인정했지만 간첩 및 간첩방조죄는 무죄를 선고했다. 판결 후 자유당의 정치깡패인 이정재 수하들과 반공청년단원 200명이 용공판사타도를 외치며 법원으로 난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42] '대한반공청년회' 200명은 대법원에 난입하여 "조봉암 일당에 간첩죄를 적용하라", "친공판사 유병진을 타도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대법원 청사를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렸다.[43] 1심의 변호인단이 구속되거나 검찰의 신문을 받기도 했다.[42] 그 후 2심 재판부의 판단은 크게 달랐다. 양명산이 진술을 번복, 검찰과 특무대에서 허위진술해 조 위원장을 간첩으로 몰았다고 말했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간첩죄를 적용, 사형을 선고했다. 대법원도 2심과 마찬가지 판단을 내렸다.[42]

장택상은 해방 후 좌파탄압에 힘을 쏟던 사람이었는데, 조봉암에게 끝내 사형 집행이 선고되자 장택상은 이를 개탄하였다고 한다.[21] 조봉암은 1959년 7월 31일 교수형에 처해 사형되었다. 사형집행 당시 죽산은 창백한 표정으로 끝내 무표정하게 사형전 성직자가 사형수를 위해 해주는 설교와 기도를 자청하였다고 한다.

사후

조봉암의 죽음은 당시에도 억울하게 생각하는 견해가 있었다.[21] 1958년 5월 28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죽산이 간첩 양명산에게 속았다는 진술을 했다”고 보도하였고 1959년 7월 31일에 집행된 교수형 상황에 대해선 “양명산은 처형 직전 조선인민만세의 발악 언사를 하였지만 그에 비해 죽산(조봉암)은 창백한 표정으로 끝내 무표정하게 설교와 기도를 자청하였다”고 전했다. 간첩으로 판명된 양명산과의 사적인 관계 때문에 자신에게 씌워진 거짓 누명을 죽산은 시대적 상황으로 받아들인 것이다.[21]

생전에 한국 전쟁 당시 반역자, 배신자, 변절자로 낙인찍고 공격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조봉암의 사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애국렬사릉에 가묘를 설치하였고, 1990년대 이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

이적행위 여부 논란

그가 양명산공산주의자인 것을 알 리 없다는 반론과, 양명산이 법원 진술에서 고문으로 강요당했다며 진술을 번복[44]한 것을 들기도 한다.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여 이승만에게 도전한 것이 죽음의 원인이라는 주장과 함께 법살, 사법살인이라는 견해도 있다.

한편 그가 공산주의자가 아닌 이유로는 공개발표한 전향서와 반공주의장택상이 그를 옹호하고, 조봉암의 구속, 재판시에는 장택상이 나서서 직접 구명과 변론을 한 점을 들기도 한다.

평가

여운형은 그에 대한 인물평으로 '그(조봉암)가 술을 좋아하고 잘 마셨으며, 시를 읊었고 강개가 북받치면 눈물을 흘리는 감성적인 사람.'이었다고 한다. 조봉암의 장녀 조호정씨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여운형과 가장 친했으며, 한국민주당박헌영,이승만,김구를 다 안좋게 생각했다고 한다. 특히 김구를 '테러리스트'라며 싫어했다고 한다.[45]

조봉암 재평가는 시작 단계에 있다. 2007년 9월 27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진보당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인정하고 국가의 유가족에 대한 사과와 독립유공자 인정, 판결에 대한 재심 등을 권고하였다.[46] 2007년 10월 에는 죽산조봉암추모사업회가 발족되었다.[46]

이를 계기로 최근에는 조봉암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조봉암에 대한 전기,평전등 서적으로 발간되어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47] 한편 그의 독립유공자 서훈은 추진중에 있다.

가족

조봉암을 연기한 배우들

드라마

연극, 영화

기타

참고자료

관련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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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태균, 조봉암 연구(창비(창작과비평사), 1995)
  • 정태영 외, 죽산 조봉암 전집(정태영, 오유석, 권대복 정리, 세명서관, 1999)
  • 이영석, 조봉암 누가 그를 죽였는가? (도서출판 세상의 창, 2000)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2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1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
  • 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50년대편2 (강준만, 인물과사상사, 2006)
  • 서중석, 조봉암과 1950년대(상, 하) (역사비평사, 1999)
  • 정태영, 조봉암과 진보당 (정태영,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2006)
  • 역사비평(1995년 봄)(역사문제연구소 지음, 역사비평사, 2006)
  • 홍우출판사, 정계야화 (전2권) (홍우출판사, 1966)
  • 임영태, 대한민국 50년사 1권 (들녘, 1998)
  • 서중석, 대한민국 선거이야기:1948 제헌선거에서 2007 대선까지 (역사비평사, 2008)
  • 주대환, 한국사회와좌파의재정립:보편주의적 복지국가를 향한 새로운 좌파 선언의 전략 (산책자, 2008)
  •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사, 2007)

함께 보기

바깥고리

주석

  1. Untitled Document
  2. 생전에 강화군은 경기도 소속이었다.
  3. 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w.html?idxno=349978#
  4.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9j2296a
  5.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역비한국학연구총서 1) (서중석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2006) 495
  6.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19j2296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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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kbs인물현대사 제32회 방송분 '진보,사형당하다-조봉암'
  21.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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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사, 2007) 158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서158"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40.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②)이승만·조봉암 사이에서 양다리 걸친 미국 신동아
  41.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사, 2007) 159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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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 [2]
  48. '여성 코뮤니스트' 김조이, 건국포장 받는다 오마이뉴스 2008.08.15일자


전임
초대
제헌 국회의원(인천부 을)
1948년 5월 31일 - 1950년 5월 30일
무소속
(인천부 갑: 곽상훈)
후임
(인천시 갑)이용설
(인천시 을)곽상훈
(인천시 병)조봉암
전임
초대
제1대 농림부장관
1948년 8월 15일 - 1949년 2월 22일
후임
이종현
전임
(인천부 갑)곽상훈
(인천부 을)조봉암
제2대 국회의원(인천시 병)
1950년 5월 31일 - 1954년 5월 30일
(인천시 갑: 이용설, 인천시 을: 곽상훈)
무소속
(인천시 을)곽상훈
(인천시 병)표양문
후임
(인천시 갑)김재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