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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스 칼리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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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스 칼리파국
الدولة العباسية

 

750년~1258년
1261년~1517년
국기
검은 깃발 [a]
수도쿠파
(750년~762년)

바그다드
(762년~796년)

락까
(796년~809년)

바그다드
(809년~836년)

사마라
(836년 ~ 892년)

바그다드
(892년 ~ 1258년)

카이로
(1261년~1517년)
정치
정치체제세습 칼리파제
칼리파
750년 ~ 754년


786년 ~ 809년

1242년 ~ 1258년


1261년 ~ 1262년


1508년 ~ 1517년

아부 알 아바스
(초대)

하룬 알 라시드

알 무스타심
(바그다드 정권 마지막 칼리파)

알 무스탄시르 2세
(카이로 정권 초대 칼리파)

알 무타왁킬 3세
(카이로 정권 마지막 칼리파)
역사
 • 아바스 혁명

 • 사마라의 혼란기

 • 칼리파, 정치적 권력
상실

 • 몽골의 침략

 • 멸망
750년

861년

940년~1258년


1258년

1517년
지리
750년 어림 면적11,100,000 km2
인문
공용어고전 아랍어
(중앙행정)

수많은 지역별 언어
민족아랍인
페르시아인
튀르크인
유대인
베르베르인
콥트인
경제
통화디나르
디르함
팔스
종교
국교수니파 이슬람교
이전 국가
다음 국가
우마이야 칼리파국
다부이드 왕조
맘루크 술탄국
몽골 제국
오스만 제국
지여르 왕조
파티마 칼리파국
부와이흐 왕조

아바스 칼리파국(/əˈbæsɪd, ˈæbəsɪd/) 혹은 아바스 왕조, 내지는 아바스 제국예언자 무함마드를 계승했다고 주장한 세 번째 칼리파국이었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삼촌인 아바스 이븐 압드 알무타리브의 후손들이 왕조를 개창하였으며, 따라서 왕조의 이름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5] 그들은 750년 호라산 일대에서 아바스 혁명을 일으켜 우마이야 칼리파국을 무너뜨렸으며[6] 오늘날 이라크바그다드를 수도로 두고 대부분의 이슬람 영토를 통치했다. 곧 바그다드는 당대 과학, 문화, 발명의 중심지가 되었고, 이슬람에 황금 시대를 가져왔다. 이곳에는 지혜의 집을 포함한 여러 주요한 학술 기관들이 위치해 있었으며, 광범위한 지역에서 다민족·다종교적인 배경의 여러 학자, 예술가,[7] 문학가, 과학자들을 수용함으로써 "학문의 중심지"이라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아바스 시대에는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고도화된 관료 체계가 자리잡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바르마크 가문으로 대표되는 페르시아 관료들이 대거 등용되어[8] 국가의 행정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한편 이들이 우마이야 칼리파국의 차별에 들고 일어나 국가를 세웠던 만큼, 이 시기에 움마에서는 마왈리(비아랍계 무슬림)들의 비율이 점차 늘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8세기 후반을 전후로 하여, 아바스 왕조는 점차 마왈리와 페르시아 관료들을 소외시키기 시작했다.[9][10]

아바스 칼리파들의 정치 권력은 945년과 1055년에 각각 바그다드를 점령한 이란의 부와이흐 왕조와 중앙아시아의 셀주크 제국에 가려져 급격히 감소했다. 비록 종교적인 부분에서 그들의 영향력은 여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대했던 제국의 영토는 날이 갈수록 축소되기 시작했다. 12세기 후반에 잠시 중흥기를 맞이하여 알 무크타피 치하에서 메소포타미아의 지배권을 재확인하고 알 나시르 치하에서 페르시아로 확장하기도 했으나,[11] 마침내 1258년 훌라구가 이끄는 몽골 군대가 쳐들어오면서 끝장나게 되었다. 몽골군은 바그다드를 손쉽게 함락시키고 당시 아바스 칼리파였던 알 무스타심을 처형시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때를 아바스 칼리파국의 멸망이라고 언급한다.

그러나 명맥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었고, 피신한 방계 친척들이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맘루크 술탄에 의한 명목상의 칼리파로 즉위함으로써 왕조를 겨우 이어갈 수 있었다. 비록 정치적인 실권은 없었으머 술탄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지만, 그들은 1516년까지 존속할 수 있었다. 마침내 1517년[12] 오스만 술탄 셀림 1세가 이집트를 정복한 뒤 마지막 아바스 칼리파 알 무타왁킬 3세로부터 칼리파 직위를 계승함으로써, 기나긴 아바스 왕조의 역사가 끝을 맺었다.[13]

명칭[편집]

언어별 명칭
아랍어 الدولة العباسية
(앗 다울라툴 압바시야, Ad-dawlat-ul Abbasiya)
الخلافة العباسية
(알 킬라파툴 압바시야, Al-khalifat-ul Abbasiya)
العباسيون
(알 아바시윤, Al' Eabaasiuwn)
페르시아어 خلافت عباسیان
(칼로파트 아바시온, khelaafat 'abaasiyaan)
영어 Abbasid Caliphate
어바시드 캘러페이트
Abbasid Dynasty
어바시드 다이너스티
Abbasid Empire
어바시드 엠파이어
한자 黑衣大食
흑의대식
한국어 아바스 칼리파국/압바스 칼리파국
아바스 왕조/압바스 왕조
아바스 제국/압바스 제국

국기[편집]

검은 깃발
الراية السوداء
ar-rāyat as-sawdā

검은 깃발(아랍어: الراية السوداء ar-rāyat as-sawdā) 또는 독수리의 깃발(아랍어: راية العقاب rāyat al-ʿuqāb), 혹은 단순히 깃발(아랍어: ‏ الراية ar-rāyah)은 아바스 칼리파국의 공식적인 국기였다. 본래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사용하던 깃발 중 하나로, 이슬람 종말론을 대표하는 상징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기원[편집]

7세기 무렵, 아랍 군대들은 전장에서 아군을 식별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채택하고 있었는데, 대표적으로는 붉은 터번이나 정사각형 깃발 등 표준적인 상징물을 사용하는 방법이 있었다.

이슬람 전통에 따르면, 무함마드의 출신 부족인 쿠라이시족은 검은색의 터번과 하얀색-검은색 혼용의 정사각형 깃발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후 무함마드가 예언하기를

"훗날 종말의 날이 다가오고 마흐디가 도래할 때, 호라산에서 검은 깃발을 앞세운 군대가 몰려올 것이다."

한편, 라시둔 칼리파국의 4대 칼리파였던 알리는 적의 군대와 맞서 싸우면서 흰색의 깃발을 사용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알리를 무찌른 무야위야가 창건한 우마이야 칼리파국 역시 국기로 흰색 깃발을 채택하였다.

사용[편집]

우마이야 왕조의 차별 정책에 반발한 이들은 747년 호라산에서 아바스 혁명을 일으키면서 검은색 깃발을 공식적인 상징물로 채택했다. 그 이유는 불명이지만, 아마도 우마이야 칼리파국의 국기가 흰색 깃발이라 적군과 확연히 대비될 수 있었으며, 또한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종말의 날에 오는 군대"의 느낌을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아바스 칼리파국과 맞섰던 세력들은 모두 그들만의 색깔을 내세웠다. 예를 들어 우마이야의 마지막 칼리파인 마르완 2세는 자신의 군대를 붉은색으로 치장시켜 아바스 군대와 구분할 수 있도록 했으며, 나중에 아바스 칼리파국과 대립하게 되는 파티마 칼리파국은 흰색 깃발을 공식적인 상징물로 삼았다. 특히 우마이야 칼리파국을 무너뜨린 이후, 아바스 왕조가 수니파 이슬람을 국교로 내세우면서 자연스럽게 시아파 이슬람 세력들은 흰색 깃발을 사용했으며, 따라서 이후에는 흰색 vs 검은색의 구도가 마치 시아파 vs 수니파의 구도를 상징하는 것처럼 되었다.

시아파 세력들은 아바스 칼리파국의 검은색 깃발이 무함마드가 예언했던 그 검은 깃발이 전혀 아니라고 마구 비난했는데, 아바스 칼리파국이 역사속으로 사라진 지 한참이 지난 뒤에도 멸망의 날이 도래하지 않자 수니파 세력 역시 아바스 왕조의 검은 깃발은 무함마드가 예언했던 그 깃발이 아니라고 시인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은 대신 무함마드가 말한 그 검은색 깃발은 더 클 것이며, 단순한 빚깔의 검은색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했다.

18세기 초에는 시아파 이슬람12이맘파를 공식 국교로 채택한 사파비 제국에 맞서, 미르와이스 호타크가 이끄는 수니파 아프간인들이 검은색 깃발을 상징물로 사용하면서 반란을 일으켜 호타키 왕조를 건국하기도 했다. 이후 아프가니스탄 토후국압두르 라흐만 칸 역시 검은색 깃발을 사용했다.

19세기 후반, 영국령 인도에서 발흥한 아흐마드파는 검은색을 그들의 상징물로 채택했다. 특히 1939년에 그들의 "처음으로 게양된 국기Liwaa-i Ahmadiyy"에 검은색이 사용되었으며, 아흐마드파 제 4대 칼리파인 미르자 타히르 아흐마드는 흑백의 상징성을 계시와 예언의 개념으로 풀어 설명하기도 했다.

현재[편집]

오늘날, 검은색은 그 역사성이 워낙 오래되고 상징성이 큰 덕분에, 여전히 범아랍권 국가의 국기들에서 흔히 사용되고 있다. 아랍 국가들의 국기에서 주로 등장하는 초록색, 흰색, 붉은색, 검은색을 한데 묶어서 '범아랍색'이라고 부르는데, 이 중에서 검은색이 바로 이 아바스 왕조에게서 유래된 것이다. 범아랍주의의 상징색들 중 하나가 마찬가지로 검은색이기도 하다.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깃발

이슬람 극단주의를 주요 강령으로 삼는 테러단체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의 깃발이 검은색인 것은, 아바스 칼리파국처럼 아랍권 전체를 아울러 칼리파 체제를 재건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이들 외에도 캅카스 남부의 일부 체첸 무장 투쟁 단체, 여러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들도 검은색 깃발을 내세우는 경우가 왕왕 있다. 만약 대부분이 그러한 깃발을 상징물로 내세운다면, 아바스 칼리파 체제를 계승하고 예언자 무함마드가 언급한 '종말의 군대'가 되겠다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역사[편집]

문화[편집]

이슬람 황금기[편집]

아바스 시대의 필사본

750년부터 시작되어 1258년 몽골의 바그다드 정복 직전까지 이어진 아바스 왕조의 역사적인 시기는, 대부분의 역사학자들과 사람들에게 이슬람 황금기로 인식된다.[14] 이는 8세기 중반 아바스 왕조의 부상과 바그다드로의 수도 이전에서 기원했던 것이었다.[15]

아바스 왕조는 "학자의 잉크가 순교자의 피보다 더 거룩하다"는 「쿠란」의 문구와 하디스의 영향을 받아, 그 어느 이슬람 왕조보다도 지식의 가치를 더욱 강조했다. 이 기간 동안 아바스 왕조가 지혜의 집을 설립하고 문화적인 발전에 힘을 기울이면서, 이슬람 세계는 당대 과학·철학·의학·교육의 지적 중심지로 거듭났다.[15] 이곳에서는 이슬람 학자뿐만 아니라 비이슬람 학자 역시 세계의 모든 지식을 수집하여 그들의 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 동참했다.[15] 덕분에 소실되거나 역사 속으로 잊혀질 뻔 했던 고대의 수많은 고전 작품들이, 아바스 왕조 치하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로 대거 번역됨으로써 비교적 온전하게 보전될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이슬람 세계는 로마, 중국, 인도, 페르시아, 이집트, 마그레브, 심지어 고대 그리스비잔틴 문명으로부터 받아들은 지식을 수집·종합했을 뿐만 아니라,[15] 오히려 더욱 발전 및 개량시킨 이른바 "문화의 가마솥"이었다. Huff에 따르면, "천문학·연금술·수학·의학·광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칼리파의 과학자들이 과학 발전의 선두에 있었다"고 한다.[16] 왕조가 쇠퇴한 뒤에도 그들의 업적은 빛을 잃지 않았으며, 몇 세기에 걸쳐 튀르크인, 히브리인, 라틴인들에게로 전해짐으로써[15] 인류의 역사에 길이길이 남게 되었다.

문학[편집]

천일야화[편집]

아바스 왕조 시대에 편찬된 대부분의 문학 작품은 오늘날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민담·전설·우화들의 모음집인 《천일야화》이며, 이슬람권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사랑받고 있을 정도로 그 명성이 뛰어나다. 이 작품은 사산 시대의 페르시아 원본을 아랍어로 번역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인도 전통 문학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특히 각지의 이야기들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아랍 식으로 각색되고[b] 아랍 설화들도 수록되기 시작함으로써 원본과는 상당히 달라지게 되었다. 나중에는 페르시아,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의 몇몇 설화들이 계속 추가되었는데, 14세기 즈음에 이르러서는 이야기의 수와 종류가 각 작품마다 매우 다양해졌다.[17] 《천일야화》의 다양한 이야기 중에는 알라딘, 신밧드, 알리바바와 같은 명작들이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형태를 갖춘 《천일야화》는 14~15세기 사이에 맘루크 왕조의 시리아에서 만들어진 아랍어 필사본이다. 그러나 이 사본은 282회 날 밤에서 중단된 불완전한 작품, 즉 미완성본이었다. 이외에도 16~17세기에 만들어진 사본들이 여럿 있었지만, 이들 역시 중간에서 끊겨서 정확한 내용을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18세기 프랑스의 동양학자이자 작가였던 앙투안 갈랑드가 시리아 필사본을 바탕으로 이집트의 판본과 여러 아랍 구전을 수록하고, 특히 상당 부분을 스스로 창작하는 등의 노력을 통해 1704년 최초의 서양 천일야화를 출판했다.[18][19] 이후 1721년까지 이 판본들이 유럽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아라비안 나이트Arabian Nights"라는 영어 제목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감상하는 천일야화의 대부분은, 영국의 동양학자이자 탐험가인 리처드 프랜시스 버턴이 소개한 영역본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는 이전의 영역판들이 이슬람에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기술하고 선정적인 부분을 삭제했던 것과 달리, 책의 내용에 아무런 손을 대지 않았으며 이전에 외교관으로 활동한 경험을 살려 이슬람의 풍습과 아랍 사회상까지 연구한 다음 번역을 주도했다. 그의 최종 번역본은 1885년에 완성되었는데, 당시에는 지나치게 에로틱시즘을 강조했다고 비난받기도 했으나 오늘날에 와서는 상당히 완성도 높은 사본이라 평가받고 있다.

다른 작품들[편집]

이슬람 시의 발전은 아바스 왕조 시대에, 특히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 상실페르시아계 왕조들의 부상 이전에 그 절정에 달했다. 가장 유명한 예는 《라일라와 마즈눈》으로, 본래는 아랍 이야기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아제르바이잔어, 페르시아어, 튀르크어 등의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어 이슬람권 전역에 널리 알려졌다.[20] 이것은 훗날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이 영원한 사랑을 주제로 하는 비극적인 이야기이다. 한편으로, 아바스 칼리파들은 예술 발전에 막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9세기 초의 유명한 아랍 시인이었던 아부 탐맘, 아부 누와스, 그리고 알 무타나비를 포함하여 수많은 인물들이 아바스 궁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훌륭한 작품들을 집필해 나갔다.

ذهبيّةٌ تختالُ في جنباتِها كالدرّ ألفَهُ نظامُ الراتقِ باكرتُها من كفّ أغيدَ شادن حسنِ التنعّم فوق سُؤلِ العاشق مُتَعَقربِ الصدغينِ في لحظاتهِ فِتَنُ لها مقرونةٌ ببوائق متخرّسٍ دينُ النصارى دينهُ ذي قُرطقٍ لم يتّصل ببنائقِ لَبِقٍ بديع الحسنِ لو كلّمتهُ لنبذتَ دينكَ كلّهُ من حالقِ واللَهِ لولا أنّني متخوّفٌ أن أُبتلى بإمام جَورٍ فاسقِ لتبعتهُ في دينهِ ودخلتهُ ببصيرةٍ فيه دخولَ الوامقِ إنّي لأعلمُ أن ربّي لم يكن ليخُصّهُ إلّا بدينٍ صادقِ

유리에 퍼지면 무수한 색을 자랑하여 모든 혀들을 잠잠케 하고

연인의 부탁에 아름답게 말을 건네는 나긋나긋한 청년의 손에 재단사와 같은 튼실한 금빛 몸매를 과시하며

관자놀이에는 곱슬머리가 물결치고 재앙을 불러오는 그의 눈을 들여다본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일지어니, 그는 호라산에서 만들어진 옷을 입고 윗가슴과 목을 훤히 드러내고 다니는구나.

만약 당신이 이 고상한 아름다움에 말을 건다면, 아마 이슬람 교리조차 높디높은 산꼭대기에서 당장 던져버릴지도 모르는 일일지어다.

모든 죄인을 타락으로 인도하는 그의 약탈을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나는 그의 종교로 개종하여 알면서도 사랑으로 그 종교에 들어갈 것이었을지라.

만약 그가 참된 교리를 믿고 있지 않았다면, 알라께서 이 젊은이를 이토록 아름답게 구별하지 않으셨을 것이라 착각했을 터이니.

아부 누와스의 시[21][22][c]

하룬 알 라시드 치세 동안 바그다드는 거리 여기저기에 널려 있는 수많은 서점들로 유명세를 떨쳤다. 751년 탈라스 전투를 계기로 중동에도 제지 기술이 도입되었는데, 이것은 이슬람 문명의 발전을 대단히 촉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757년 사마르칸트에 이슬람 최초의 제지 공장이 건설되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 전역에서 종이가 가죽과 양피지를 대체했다. 책의 생산량도 폭증했는데,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약 700년 이후의 유럽에서 구텐베르크인쇄기를 발명한 것과 맞먹을 정도로 당시 사회상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794년, 자파 알 바르막이 바그다드에 제지 공장을 지음으로써 본격적으로 아바스 궁정에서도 종이가 사용되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바그다드 상업 지구의 한 거리 전체가 종이와 책만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데 전념하게 되었다.[23]

철학[편집]

이슬람 철학에 대한 보편적인 정의 중 하나는, 바로 "이슬람 문화의 틀 안에서 생산되는 철학적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정의에 따르면 이슬람 철학은 반드시 종교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며, 오직 무슬림들에 의해서만 생산되는 것도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그들의 연구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적 교리가 이슬람 세계와 서유럽으로 전파되는 핵심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종종 철학자를 바꾸어 이지티하드 정신에 입각한 활기차고 열띤 토론을 벌였으며, 영향력이 있는 독창적인 철학 작품들을 여럿 집필했다. 그들의 사고는 중세 시대의 유럽 철학자들, 특히 토마스 아퀴나스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마침내는 기독교 철학의 한 부분으로 융합되었다.

알 킨디, 알 파라비, 이븐 시나 등의 사상가들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신플라톤주의를 이슬람을 통해 유입된 다른 사상들과 결합한다는 발상을 떠올렸는데, 이로 인해 성립된 것이 바로 아비센나주의였다. 한편 다른 영향력 있는 아바스 시대의 철학자들로는 알 자히스이븐 알 하이탐(알 하센) 등이 있었다.

건축[편집]

바그다드 공동묘지에 있는 무덤들. 1200년대에 지어진 것이다.

우마이야 왕조가 아바스 왕조로 대체됨에 따라 이슬람의 건축 문화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헬레니즘로마의 요소들을 특징으로 하는) 그리스–로마 전통의 건축 양식이 주를 이루었으나, 아바스 왕조가 들어서고 중심지가 보다 동쪽, 즉 이라크페르시아 일대로 옮겨지면서 동양풍의 건축 양식이 점차 발달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의 아바스 건축물들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이래로 계속 이어져 내려오던 여러 전통 요소들, 특히 사산 시대의 그것들에 영감을 다시 많이 받았던 것 같다. 한편, 구운 진흙 벽돌과 스투코를 사용하여 건축물을 축조하는 기독교 건축 양식 또한 도입되기도 하였다.

아바스 왕조가 워낙 광대한 영토를 통치했던 터라, 이들의 건축 양식은 중동 너머 마그레브중앙아시아로 급속하게 전파되면서 그곳의 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비록 870년을 전후로 하여 아바스 왕조의 영향력이 위축되기는 했지만, 이들이 남기고 간 건축 유산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이슬람 세계의 대부분에서 독자적인 건축 양식이 발전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주었다.

도시 내부의 집들은 대부분 2층으로 구성된 독신 또는 다가구 주택이었는데, 1층은 더위를 피하기 위해 약간 땅을 파서 바닥을 지면보다 낮도록 만들었으며 2층은 목재로 천장을 올리고 평평한 계단식 지붕을 쌓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주택은 외관만 보면 소박한 모습이었으나, 내부는 주택 내부에는 화장실과 냉각 장치가 보편화되어 있었고 수많은 화려한 장식품들로 꾸며져 있었다. 거주 구역은 사막에 종종 불어닥치는 모래바람을 피하기 위해 오밀조밀하게 붙어 있도록 설계한 것으로 추정된다.

튀니지카이로완 모스크와 같은 우마이야 시대의 여러 모스크들은 아바스 시대에 이르러서 대거 보수되었다.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는 보수를 넘어 아예 재건했다 보여질 정도의 이 사업은 이슬람 세계의 가장 먼 지역, 즉 아글라브 왕조가 통제하는 지역에서 대체로 실행되었으나, 이를 주도했던 것은 실질적으로는 아바스 왕조였다. 이집트의 독립적인 총독이었던 아흐마드 이븐 툴룬은 아바스 건축 양식을 바탕으로 879년에 완공된 이븐 툴룬 모스크를 의뢰했는데, 이는 오늘날까지 가장 잘 보존된 아바스 시대의 건축물 중 하나이다.

바그다드[편집]

762년, 제 2대 아바스 칼리파 알 만수르는 새로운 수도의 조성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그의 제국을 이전 우마이야 왕조의 중심지였던 다마스쿠스 일대로부터 분리하려는 시도이자 동쪽의 쿠파바스라에서 준동하는 시아파 반란 세력을 억누르기 위한 수단이었다. 메소포타미아는 비옥한 토지로부터 창출되는 높은 농업 생산량, 유프라테스강티그리스강 일대의 잘 정비된 관개 수로, 광대한 영토의 중심부, 실크로드인도양 무역로에 대한 접근성 용이라는 장점들 덕분에 제국의 수도가 되기에 매우 이상적인 지역이었다. 아바스 왕조 이전에 우르, 바빌론, 니네베, 크테시폰 등 역사적인 고도(古都)들이 여럿 존재했음이 이를 방증해준다.

서기 767년에서 912년 사이의 바그다드 지도. 원형 도심은 763년에 완공되었다.

약 1년 동안 10만 명의 노동자 및 1,800만 디나르가 투입되어 완공된 새로운 수도 바그다드는, 당대에는 마디나트 앗 살람(مدينة السلام, 평화의 도시)이라 불렸으며 오늘날보다는 그 규모가 훨씬 작았다. 하지만 내부의 원형 도심만 해도 지름 2.4km, 둘레 10km에 달했으며 쿠파·시리아·호라산·바스라라는 이름의 4개의 문이 있는 이중 방어벽으로 겹겹이 둘러싸여 있었다. 한편 도심 중앙에는 33,000m2의 칼리파 궁전과 8,400m2의 모스크가 있었고, 그 주위로 각종 수로들과 다리들이 촘촘히 설계되어 물류 운송 및 사람들의 이동을 원할하게 해주었다.

사마라[편집]

바그다드와 함께 아바스 건축의 정수로 언급되는 것이 바로 사마라이다. 도시 자체는 우바이드 시대의 유적지가 발견되는 등 기원전부터 존재했었으나, 이슬람의 팽창 이후 아바스 왕조 시대에 들어서야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836년, 제 8대 아바스 칼리파 알 무타심이 이곳을 수도로 삼은 것은 앞으로 이어질 사마라의 전례 없는 번영을 예고했다. 곧 사마라에는 거대한 궁전 복합 단지가 조성되었는데, 그 내부에는 모스크와 목욕탕, 접견실, 주거 공간, 드넓은 정원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848년에 제 9대 칼리파 알 무타와킬은 새로운 모스크를 건설할 것을 명했는데, 이리하여 시작된 새로운 모스크 건축 사업은 851년에 끝이 났다. 그 결과물인 사마라 대모스크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모스크였다. 모스크의 외벽은 구조를 지탱하는 44개의 반원형 탑들과 이를 연결해주는 진흙 벽돌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총 28개의 창과 16개의 문으로 밖과 안을 구별한다. 당대에는 아치형 기둥 열주들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정원, 대리석 타일로 제작된 분수, 그리고 황금빛과 푸른빛 모자이크 타일로 덮여있는 외벽 등으로 그 위엄을 뽐냈으며, 약 464개에 달하는 내부의 기둥들은 11m의 천장을 지탱하면서 예배를 하러 찾아온 사람들에게 장대한 느낌을 선사해 주었다. 그러나 아바스 왕조가 쇠락함에 따라 모스크 또한 점차 버려지기 시작했고, 1258년의 몽골 침입 이후 완전히 파괴되어 오늘날의 모습이 되었다.

말위야 미나렛을 아래서 바라본 모습. 이 건축물은 독특한 나선형의 외관 덕분에 '달팽이 첨탑'이라고도 불린다.

사마라의 대모스크가 유명한 이유는, 아마 모스크 자체보다는 내부에 있는 독특한 모양의 말위야 미나렛 덕분일 것이다. 위로 올라갈수록 면적이 작아지는 나선형 원뿔 외관 덕분에 동시대의 다른 미나렛들과도 확연히 구별되는 모습은, 가히 사마라의 랜드마크라고 불릴 만 하다고 평가된다. 혹자는 이 건축물이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에서 파생되었다고도 하고, 다른 사람은 사산 왕조의 고르 미나르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나, 확실한 증거가 밝혀지지 않아서 아직까지도 학계의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알 우카이디르 요새[편집]

아바스 왕조의 궁전은 현존하는 것들이 극히 드물다. 그나마 온전하게 잘 보존되어 있는 유적지 중에는 알 우카이디르 궁전이 매우 유명하다. 알 우카이디르 궁전은 아바스 시대의 과도기적인 이슬람 건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이기도 한데, 이 건축물은 사산 제국이나 우마이야 왕조의 건축 양식 및 재료를 거의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총 4개의 문으로 출입이 가능하며, 내부에는 현관 홀 및 중앙 안뜰, 현관 반대편 안뜰로 매우 개방된 주거 구역 등이 있는데 이곳에 있는 기둥들은 하나같이 두껍고 거대한 아치들을 지탱하고 있어 무겁고 육중한 느낌을 준다.

유리 세공 및 크리스탈 제작[편집]

중동은 이미 로마 제국 시대부터 고품질의 유리 공예품과 최상급 크리스탈의 중심지로 인식되어 왔다. 사산 제국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서깊은 유리 관련 기술은 이슬람 정복기에도 그 명맥이 끊어지지 않았으며, 이후 우마이야 왕조를 거쳐 아바스 왕조 시대까지 발전을 거듭해 나갔다.

9세기 경 사마라의 유리 공예소에서는 가정용 병, 플라스크, 접시, 컵, 화병 등 온갖 종류를 망라한 유리 기품들이 제작되었으며, 그 위에 정교하기 짝이 없는 화려한 장식들을 세공했다. 다만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우상화를 엄격하게 금지했으므로, 대부분은 복잡한 아라베스크 문양이나 식물 덩굴 무늬, 동물 등이 그려져 있었다. 니샤푸르에서는 각기둥 모양의 향수병과 함께 파란색·비취색의 유색 납 유리가 발견되기도 했다. 한편 몇몇 장인들은 컷글라스라고 일컬어지는 수준 높은 유리 공예 기술들을 구사했는데, 이는 당대 유리 공예 발전의 절정이었을 것이다.

회화[편집]

아바스 왕조 초기의 그림은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으며, 또한 그 이전이나 이후의 것들과 구별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사마라는 아바스 왕조에 의해 증축되어 번영했기 때문에 학자들에게 좋은 예가 되었다. 발굴된 궁전 내벽에는 생동감이 넘치는 여러 벽화 및 조각 석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대부분은 하렘, 동물, 춤추는 사람 등을 묘사하고 있으나, 몇몇 그림은 사산 시대의 예술 양식과 거의 흡사할 뿐만 아니라 그림에 그려진 인물들의 의상 역시 페르시아식이라는 점에서 아바스 미술이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았단 점이 확실해졌다.

니샤푸르에는 다른 지역과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예술 분파들이 있었는데, 이곳에서의 발굴 작업을 통해 8~9세기 사이에 단색·다색의 여러 작품들이 제작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 유명한 예술 작품은 매와 말을 타고 완전한 예복을 갖춘 채 사냥을 즐기고 있는 귀족들의 모습을 묘사했다. 아마도 이들은 아바스 왕조가 쇠퇴한 뒤 출현한 반독립적인 왕조들 중 하나인 타히르 토후국의 인물들이었을 것이다. 한편 다른 그림들에는 식물과 멋진 색상의 과일들이 그려져 있었다.

도자기[편집]

아바스 왕조에게, 회화 및 건축은 이전의 페르시아와 우마이야 시대의 것을 모방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에 별로 관심 분야가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 도자기 기술은 분명히 달랐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슬람 문화 전반에서 그들은 새로운 사상과 기술의 발전을 주도했다. 그들 작품의 몇 가지 예시에는 무늬를 새기고 황갈색, 녹색, 보라색 유리로 장식된 화려한 조각들이 있었으며, 디자인 역시 장미, 동물, 새, 인간과 함께 기하학적인 패턴과 고전 아랍어 서예, 그리고 아라베스크로 그 종류가 다양했다.

8세기에서 9세기 사이, 아바스 왕조의 도자기 기술은 절정에 달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여러 예술적인 도자기 작품들이 범람하듯이 쏟아져 나왔는데, 현재 그들의 중심지였던 이라크 일대부터 이집트의 카이로까지 광범위한 지역에서 수많은 도자기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도공들은 황토를 이용하여 도기의 형상을 빚은 뒤, 별도로 제작한 유약을 발라 여러차례 소성하여 금색, 갈색, 붉은색 등 다양한 금속성 광택을 내는 아름다운 작품들을 긴 시간에 걸쳐 제작했다. 사마라에서 발견된 도자기 조각들로 미루어보아, 이곳의 작품들은 심지어 그 이후의 시대보다 생동감과 아름다움이 뛰어나며, 주로 칼리파에게 헌상하는 용도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장인들은 이와 같은 기술을 사용하여 다채롭고 화려한 색의 광택자기를 제작하기도 했다.

직물[편집]

아바스 왕조의 여러 지역들, 그 중에서도 이집트를 위시로 한 북아프리카는 당대 섬유 산업의 중심지로서 아바스 치하 이슬람 문화 발전의 대표적인 예였다. 주로 콥트 기독교인들이 원단 생산에 종사했는데, 이들이 생산한 린넨과 실크는 그 품질이 대단히 뛰어나 지중해권의 여러 국가들에게 수출되었을 정도였다. 이집트의 또 다른 도시 티니스에는 아예 원단을 뽑아내는 대규모 공장이 세워져 있었으며, 도시 전체에 무려 5,000여 개가 훌쩍 넘어가는 베틀이 설치되어 고급 터번용 천인 "카사브", 상류층의 의류 제작을 위한 고급 원단 "바다나"를 전문적으로 생산했다.

한편으로 아바스 왕조는 메카카바 신전을 덮는 천 "키스와"를 투나, 다빅, 다미에타 등의 도시에서 별도로 주문 제작했다. 키스와는 그 무엇보다도 신성한 천이었기 때문에 장인들은 심혈을 기울여서 최신 기술과 최고급 직물들을 아끼지 않고 모조리 사용했는데, 심지어는 순금을 녹여 만든 액체형 금으로 흑색 비단에 자수를 새기기도 했다. 이 기술들은 훗날 유럽으로 전해졌다.

의상[편집]

이슬람 초창기부터, 무슬림들에게 화려한 복식은 곧 죄악으로 여겨졌다. 창시자 무함마드 그 자신부터가 눈에 띄는 복장을 멀리했으며, 지지자들에게도 지나친 사치를 부리며 자기를 치장하는 것은 죄를 범하는 일이라 언급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슬람 제국이 급속히 팽창하고, 중동에 막대한 부와 자원들이 흘러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스스로를 꾸밈으로써 자신의 능력과 부를 과시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욕구인지라, 우마이야 시대를 거치면서 무슬림들의 복장은 점차 화려하게 변해갔다. 이슬람 법학자들 역시 세속적인 것에는 그리 엄격하게 규제를 두지 않았으므로, 아바스 시대에 들어서는 무슬림들의 복장이 대단히 화려하고 눈에 띄게 되었다.

아바스 왕조의 존재 기간 내내 대단한 패션의 발전이 있었다. 이것이 처음 태동한 것은 우마이야 시대였으나, 아바스 시대를 거치면서 이들의 패션은 국제적인 스타일과 영향력 면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의류는 이 무렵에 가장 번성한 산업 중 하나였고, 또한 법률과 수용된 몇몇 요소들을 통해 엄격하게 규제되었다. 상류층에서는 패션이 주요 관심사가 되면서 스스로의 외모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수십~수백 개의 새로운 옷과 직물이 도입되었으며, '사치스럽다'고 하여 외면받았던 비단새틴에 대한 혐오감은 더 이상 관찰되지 않았다. 한편 페르시아 관료층 계급의 부상과 함께 페르시아식 궁정의 전통 의상들이 도입되었는데, 예를 들어 알 무타심은 후에 다른 아바스 칼리파들에 의해 채택되고, 그를 기리기 위해 '무타시미muʿtasimi'라고 이름 붙혀진 부드러운 새틴 모자 위에 터번을 착용함으로써 옛 페르시아의 황제들을 모방하려는 그의 열망을 드러냈다.

아바스인들은 여러 겹의 옷과 천을 몸에 걸쳤다. 의복에는 주로 양모, 리넨, 브로케이드비단이 사용되었는데, 이를 구매할 여유가 없었던 가난한 계층의 의복들은 저급한 양모나 동물 가죽등의 값싼 재료를 이용하여 만들어졌으며, 옷 면적이 더 적었다. 옷을 여러 겹 껴입는 것은 그 사람의 지위가 높다는 것을 의미했고, 때문에 상류층들은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얇은 옷을 여러 겹 둘러입고 산책을 자주 다녔다. 한편 여성들의 경우 붉은 비단과 같이 원단 자체가 그런 색을 띠고 있는 직물을 제외하고는 검은색, 녹색, 붉은색, 분홍색 의복은 웬만하면 착용하지 않았으며, 주로 사향, 백단향, 용연향, 히아신스 등을 이용하여 몸에 향이 나도록 했다. 한편 모피로 만든 여성용 신발, 페르시아 스타일의 부츠, 곡선 구두 등도 여성들의 필수품 중 하나였다.

아바스 궁정에서 가장 흔하게 통용되는 색깔은 검은색이었다. 애초에 아바스 왕조의 공식 국기부터가 검은색이기도 했고, 특히 알 만수르가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라는 의도로 궁정의 고위 관료들에게 검은색 예복을 착용할 것을 장려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때문에 사절단으로 방문한 중국인과 비잔티움인들은 이를 보고 신기하게 여겨, 아바스인들을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라 부르기도 했다. 검은색을 기본 바탕으로 하여 다른 색의 옷도 보조적으로 겹쳐 입을 수는 있었지만, 색의 조합을 잘 정해야 했다. 궁궐 안에서 감히 칼리파보다 더 화려한 옷을 입는 것은 미친 자나 할 법한 짓거리였고, 보편적으로 검은색과 색 배합이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진 밝은 노란색의 옷은 피해야 했다.(단, 황금색은 예외)

아바스 칼리파는 은, 또는 금을 세심하게 꼬아 만든 실로 제작된 페르시아식 가운과 소매 앞쪽에 단추가 달린 우아한 카프탄을 착용했다. 제 18대 아바스 칼리파 알 무크타디르는 멋을 내기를 좋아해서 평소에도 은으로 만든 원단과 실크로 장식한 카프탄을 입고 다녔으며, 그의 아들은 비잔틴산 비단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카프탄을 즐겨 입었다고 한다. 카프탄 옷은 아바스 왕조의 대외 교류와 함께 중동, 마그레브, 소아시아, 심지어 중국의 당나라에까지 퍼져 그곳에서 유행을 불러 일으켰다. 심지어 830년대에는 비잔티움 황제 테오필로스가 터번과 카프탄을 두르고 거리를 돌아다녔으며, 당나라 시대의 광저우에서도 페르시아식 카프탄이 유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필사본 제작[편집]

8~9세기 사이에 제작된 아바스 양식의「쿠란」필사본

주로 8세기 말에서 10세기 초 사이에, 아바스 왕조 치하에서는 「쿠란」의 필사본 제작이 번성했다. 특히 아바스 왕족들과 부유한 상류층에게서 수요가 많았는데, 이 덕분에 사회적인 측면에서 「쿠란」의 보급이 가속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랍어 서예, 제본 기술, 서예 장식의 채색 등에 일련의 발전이 있었다. 이러한 도서 예술의 확장과 그 개념의 확립은 이슬람 필사본 전통의 형성기를 거치면서 절정에 달했다.

캘리그라피[편집]

"신 아바스 양식"으로 쓰여진 필사본 예시

아바스 시대에, 「쿠란」을 필사하기 위해 제작된 최초의 서예 양식은 오늘날에는 '쿠픽'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정확하고 각진 글자, 넉넉한 간격, 기준선에서 글자의 수평적인 확장 및 기하학적인 비례에 중점을 두었다는 특징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 방식으로 쓰여진 「쿠란」은 가로로 쓰여졌으며 양피지에 기록되었다. 이러한 양식은 8세기 후반에 가장 인기가 많았다.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 동안, 아바스 와지르들과 서예가 이븐 무클라(866–940)에 의해 새로운 서예 체계가 도입되었다. 그가 개발한 이 비례적인 서예 시스템은 모양적인 측면에서, "갈대 펜 촉으로도 그릴 수 있는 알리프 크기의 원"과 "마름모 모양의 점"이라는 두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훗날 "신 아바스 양식"으로 알려진 이 방식은 수직적인 방향의 문자, 극단적인 각도, 획 너비 간의 뚜렷한 대조를 특징으로 한다. 또한 이 비례적인 글꼴의 개발은 수직적인 쓰기 방향으로의 전환을 가져왔다. 새로운 문자는 읽기 편리하고 효율적인 성격 때문에 더욱 세속적인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채색[편집]

기하학적·식물적 형태 채색의 대표적인 예시. 특이하게 아바스 왕조 말기인 13세기에 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의 특징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이슬람의 채색 기술과 특징은 종종 그 대상이 되는 필사본의 스타일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다. 초기 아바스 시대(8세기 후반)의 채색은 주로 기하학적·식물적인 형태를 띠었는데, 이러한 요소들은 주로 각 장의 사이 뿐만 아니라 책의 표지와 종장에 많이 분포해 있었다. 또 다른 특징적인 요소는 특이하게도 앞부분에 텍스트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0세기에 "신 아바스 양식"이 도입되면서 채색 기술의 변화가 이루어졌다. 채색을 전문으로 하는 장인들은 텍스트의 조밀한 배치와 수직적 방향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냈고, 점점 추가적이고 세밀한 채색 장식들이 이전의 그것들을 대체해나갔다. 이러한 양식적인 변화는 아바스 통치하에서 채색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본[편집]

「아마주르 쿠란」의 한 페이지

아바스 왕조 시대에 사용된 제본의 주요 형태는, 표지를 겸하는 제본용 상자 보관함이었다. 이러한 방법은 비록 투박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안전성 역시 보장되었다. 아바스인들은 대부분의 서적을 내부에 보호 안감이 덧대진 상자 안에 넣은 뒤, 잠금장치를 달아서 창고에 보관했다.

아마주르 쿠란[편집]

「아마주르 쿠란」의 또 다른 한 페이지

아바스 왕조 초기에 만들어진 가장 주목할 만한 양피지 필사본 중 하나는 「아마주르 쿠란」이다. 이것은 870~878년까지, 약 8년여간에 걸쳐 다마스쿠스의 아바스 총독이었던 아마주르 알 투르키에 의해 쓰여졌다. 「아마주르 쿠란」은 당시 아바스 지배층들 사이에서 표준화되어 가고 있던 사치스러운 집필 형식과 관행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그 내용에는 여지 없이 아바스 왕조의 초기 양식의 특징인 쿠픽 문자와 수평적 읽기 방향이 나타나 있는데, 이것은 동시기의 다른 작품들과 대부분 일치한다. 또한 「아마주르 쿠란」은 상술했던 초기 채색 양식과 상자 보관 방법이 명확하게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특이하게 종이가 아닌 양피지에 쓰였다는 점에서 특별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기술[편집]

역대 칼리파[편집]

바그다드 아바스조 칼리파[편집]

순서 이름 통치 기간 사건
1대 아부 알 아바스 750–754 아바스 왕조가 개창됨.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와의
탈라스 전투가 일어남.
2대 알 만수르 754–775 바그다드가 건설됨.
반란 진압 및 내부 개혁 등을 통해
신생 제국의 기반을 다짐.
3대 알 마흐디 775–785 시아파와의 일시적인 화해가 이루어짐.
비잔틴 제국과의 전쟁이 발발함.
4대 알 하디 785–786 1년 간의 짧은 치세 내내 반란과
비잔틴 제국과의 전쟁에 시달림.
5대 하룬 알 라시드 786–809 아바스 왕조의 전성기이자 이슬람 황금기의 시작.
마그레브 일대에 대한 바그다드 중앙 정부의 영향력이
점차 약화되기 시작함.
6대 알 아민 809–813 4차 피트나가 발발함.
이복 동생 알 마문과의 내전이 벌어짐.
7대 알 마문 813–833 이복형 알 아민과의 내전에서 승리함.
그의 치세에도 아바스 왕조는 여전히 번영을 누렸음.
8대 알 무타심 833–842 튀르크계 노예장군들이 계속 중용되기 시작함.
기존 아바스 군부의 지배층을 형성하던 아랍인들이
점차 권력에서 밀려남.
9대 알 와시크 842–847 선대의 튀르크인 우대 정책을 계승했으며,
비잔틴 제국과의 전쟁을 이어감.
10대 알 무타와킬 847–861 여러 대규모 건축 사업이 벌어짐.
이슬람의 황금기가 서서히 끝나감.
11대 알 문타시르 861–862 이슬람 황금기의 종말.
제국에 본격적인 혼란기가 도래함.
12대 알 무스타인 862–866 튀르크계 노예장군들이 실권을 장악함.
5차 피트나의 발발과 함께 지방 분권화가 가속화됨.
13대 알 무타즈 866–869 바그다드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완전히 붕괴함.
14대 알 무흐타디 869–870 튀르크계 권신들의 권력 다툼이 격화됨.
이라크 남부에서 잔즈 반란이 발발함.
15대 알 무타미드 870–892 9년 동안 이어지던 혼란기가 종식됨.
대외적인 위협을 완전히 일단락시킴으로써
아바스 왕조의 1차 중흥기가 시작됨.
16대 알 무타디드 892–902 이라크 북부와 시리아 북부, 페르시아 서부 등을
바그다드 중앙 정부의 직할령으로 편입하는 쾌거를 이룸.
툴룬 왕조사파르 왕조가 형식적으로나마 그에게 복종함.
17대 알 무크타피 902–908 툴룬 왕조를 정복하고 이집트를 직할령으로 편입함.
그의 사후 1차 중흥기가 막을 내림.
18대 알 무크타디르 908–932 튀르크계 권신들의 권력이 다시금 강해지기 시작함.
아바스 왕조가 급격히 쇠퇴함.
19대 알 카히르 932–934
20대 알 라디 934–940 2차 지방 분권화 시대. 아바스 왕조의 강역이
이라크 일대로 완전히 축소됨.
21대 알 무타키 940–944 이란에서 발흥한 시아파 계통의 부와이흐 왕조가 성장함.
22대 알 무스탁피 944–946 부와이흐 군대가 바그다드를 점령함. 아바스 칼리파가 부와이흐 통치자의 꼭두각시로 전락함.
23대 알 무티 946–974
24대 알 타이 974–991
25대 알 카디르 991–1031 가즈나 왕조의 통치자 마흐무드에게 "술탄"의 칭호를 하사함.
26대 알 카임 1031–1075 중앙아시아에서 발흥한 셀주크 제국
부와이흐 왕조를 몰아내고 바그다드를 점령함.

아바스 칼리파는 여전히 실권을 가지지 못했으며,
단지 종교적인 권위만 행사할 수 있었음.
27대 알 무크타디 1075–1094
28대 알 무스타지르 1094–1118
29대 알 무스타르시드 1118–1135 셀주크 제국에 두 차례나 대항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감.
30대 알 라시드 1135–1138
31대 알 묵타피 1138–1160 아바스 왕조의 2차 중흥기가 시작됨.
32대 알 무스탄지드 1160–1170
33대 알 무스타디 1170–1180
34대 알 나시르 1180–1225 그의 치세는 2차 중흥기의 절정에 달했다고 평가받음.
35대 알 자히르 1225–1226
36대 알 무스탄시르 1226–1242 아바스 왕조가 모술을 제외한 이라크 전체를 석권함.
37대 알 무스타심 1242–1258 훌라구가 이끄는 몽골군의 대규모 침공으로 수도 바그다드가 함락당함. 아바스 왕조가 사실상 멸망함.

카이로 아바스조 칼리파[편집]

순서 이름 통치 기간 사건
38대 알 무스탄시르 2세 1261–1262
39대 알 하킴 1세 1262–1302
40대 알 무스탁피 1세 1302–1340
41대 알 와시크 1세 1340–1341
42대 알 하킴 2세 1341–1352
43대 알 무타디드 1세 1352–1262
44대 알 무타와킬 1세 1362–1377
45대 알 무스타심 1377
복위 알 무타와킬 1세 1377–1383
46대 알 와시크 2세 1383–1386
복위 알 무스타심 1386–1389
복위 알 무스타심 1389–1406
47대 알 무스타인 1406–1414 맘루크 술탄직을 겸한 최초이자 마지막 아바스 칼리파.
48대 알 무타디드 2세 1414–1441
49대 알 무스탁피 2세 1441–1451
50대 알 카임 1451–1455
51대 알 무스탄지드 1455–1479
52대 알 무타와킬 2세 1479–1497
53대 알 무스탐식 1497–1508
54대 알 무타와킬 3세 1508–1516
복위 알 무스탐식 1516–1517
복위 알 무타와킬 3세 1517 마지막 아바스 칼리파.
오스만 술탄 셀림 1세가 이집트를 정복하자
그에게 칼리파직을 선양함.
이후 오스만 칼리파로 넘어감.

같이 보기[편집]

부연 설명[편집]

  1. The Abbasid Revolution against the Umayyad Caliphate adopted black for its rāyaʾ for which their partisans were called the musawwids.[1] Their rivals chose other colours in reaction; among these, forces loyal to Marwan II adopted red.[2] The choice of black as the colour of the Abbasid Revolution was already motivated by the "black standards out of Khorasan" tradition associated with the Mahdi. The contrast of white vs. black as the Umayyad vs. Abbasid dynastic colour over time developed in white as the colour of Shia Islam and black as the colour of Sunni Islam: "The proselytes of the ʿAbbasid revolution took full advantage of the eschatological expectations raised by black banners in their campaign to undermine the Umayyad dynasty from within. Even after the ʿAbbasids had triumphed over the Umayyads in 750, they continued to deploy black as their dynastic colour; not only the banners but the headdresses and garments of the ʿAbbasid caliphs were black ... The ubiquitous black created a striking contrast with the banners and dynastic color of the Umayyads, which had been white ... The Ismaili Shiʿite counter-caliphate founded by the Fatimids took white as its dynastic color, creating a visual contrast to the ʿAbbasid enemy ... white became the Shiʿite color, in deliberate opposition to the black of the ʿAbbasid 'establishment'."[3] After the revolution, Islamic apocalyptic circles admitted that the Abbasid banners would be black but asserted that the Mahdi's standard would be black and larger.[4]
  2. 주인공 샤흐리만은 분명 사산 제국의 왕이나, 셰예라자드의 이야기는 아랍 이슬람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바그다드·바스라·다마스쿠스와 같은 아랍 정복 이후의 도시명이나 하룬 알 라시드 같은 실제 역사의 사람들까지 등장한다는 점이 이질적이다.
  3. 이 시는 아부 누와스의 대표작으로서, 그의 사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시들 중 하나로 꼽힌다. 한눈에 보아도 소년애 성향과 그리스도교 신자들에 대한 예찬, 심지어 이슬람교에 대한 풍자가 드러나 있다. 포도주과 쾌락을 선호했던 아부 누와스는 동성애와 술을 혐오하는 당시 무슬림들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성향의 시들을 많이 남겼다.

각주[편집]

  1. Tabari (1995). Jane McAuliffe, 편집. 《Abbāsid Authority Affirmed》 28. SUNY. 124쪽. 
  2. Crone 2012, 122쪽
  3. Hathaway, Jane (2012). 《A Tale of Two Factions: Myth, Memory, and Identity in Ottoman Egypt and Yemen》.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97f쪽. ISBN 978-0791486108. 
  4. Cook, David (2002). 《Studies in Muslim Apocalyptic》. Darwin Press. 153쪽. ISBN 978-0878501427. 
  5. Hoiberg 2010, 10쪽.
  6. Bosworth, C. E. (1982). "ʿABBASID CALIPHATE". Encyclopædia Iranica, vol. I, Fasc. 1, pp. 89–95.
  7. Canfield, Robert L. (2002). 《Turko-Persia in Historical Perspective》. Cambridge University Press. 5쪽. ISBN 978-0521522915. 
  8. “ʿAbbasid caliphate”. 《Encyclopædia Britannica. 2023년 9월 5일에 확인함. 
  9. “Abū Moslem Ḵorāsānī”. 《Encyclopaedia Iranica》. 22 November 2015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 November 2015에 확인함. 
  10. Finer, S. E. (1999). 《The History of Government from the Earliest Times: Volume II: The Intermediate Ages p. 720》. OUP Oxford. ISBN 978-0198207900. 
  11. Richards, D. S. (2020). 《The Chronicle of Ibn al-Athir for the Crusading Period from al-Kamil fi'l-Ta'rikh. Part 3: The Years 589–629/1193–1231: The Ayyubids after Saladin and the Mongol Menace》 (영어). Routledge. ISBN 978-1-351-89281-0. 
  12. Holt 1984.
  13. “الكتاب : التاريخ الإسلامي – الموضوع : المتوكل على الله "الثالث" محمد بن يعقوب المستمسك بالله”. 2008년 6월 11일. 2008년 6월 1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22년 6월 2일에 확인함. 
  14. Abbas 2011, 9쪽
  15. Gregorian 2003
  16. Huff 2003, 48쪽
  17. Grant & Clute 1999, 51쪽.
  18. de Camp 1976, 10쪽
  19. Grant & Clute 1999, 52쪽
  20. Clinton 2000, 15–16쪽
  21. https://www.aldiwan.net/poem66631.html
  22. https://www.encyclopedia.com/arts/culture-magazines/diwan-abu-nuwas
  23. Bobrick 2012, 7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