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루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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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루크(고대튀르크어:Old turkic letter OQ.pngOld turkic letter L1.pngOld turkic letter R1.pngOld turkic letter Q.png[1], 영어: Qarluq, 중국어 간체: 歌邏禄, 정체: 葛邏祿, 병음: Géluólù)는 7세기부터 12세기에 걸쳐 준가얼 분지중앙 아시아 지방에 존재한 튀르크계 유목민이다.

명칭[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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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루크의 존재는 동 · 서 사료의 양쪽에 기록되고 있어 다양한 이름이 존재한다.

부족[편집]

《신당서》에 의하면 갈라록(카를루크)에는 세 개의 부족이 있으며, 북정대도호부(zh:北庭大都护府)와 알타이 산맥의 서쪽에 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경 2년(657년)에는 각각 도독부가 놓여졌다.

  • 모락부(謀落部) → 음산도독부(陰山都督府)
  • 치사부(熾俟部) → 대막도독부(大漠都督府)
  • 답실력부(踏実力部) → 현지도독부(玄池都督府)

위의 세 개의 부족을 삼성갈라록(三姓葛邏祿)이라고 불렀다.

역사[편집]

서돌궐 지배와 당의 기미정책[편집]

600년경의 아시아

처음엔 서돌궐의 구성 종족으로서 갈라록(카를루크) 외에 돌륙(咄陸), 노실필(弩失畢), 처월(処月), 처밀(処密), 고소(姑蘇)등이 있었다.

그러나 정관 원년(627년) 서돌궐의 통엽호가간(en:Tong Yabghu Qaghan, 재위 : 619년경 - 628년)은 자국이 강성한 것을 자부하여 지배중인 다른 민족들을 홀대하였다. 그 결과 서돌궐은 여타의 민족들에게 원망을 안기 시작했으며, 갈라록 역시 반란의 조짐을 보였다.

정관 13년(639년), 서돌궐의 을비돌륙가간(zh:乙毗咄陆可汗, 재위 : 638년 - 653년)은 아사나하로(zh:阿史那贺鲁)를 엽호(관직의 일종)로 임명하여 탈라스 강에 보냈다. 그곳에서 아사나하로는 처밀, 처월, 고소, 갈라록, 노실필의 5성을 통괄하였다.

정관 20년(646년), 동돌궐차비가간(zh:车鼻可汗)이 당의 기미정책에서 자립하면서, 서쪽의 갈라록은 북쪽의 결골(en:Yenisei Kirghiz)과 함께 차비가간에 붙었다.

정관 23년(649년), 이세민은 우효위낭장 고간을 회흩(위구르)부로 파견하여 차비가간을 공격하였다. 이윽고 당은 아사나하로의 부락을 하라주(賀魯州)로, 갈라록과 읍달(에프탈)을 아울러 갈라주(葛邏州)로 편성하여 운중도독부(雲中都督府)에 속하게 했다.

영휘 원년(650년) 9월, 차비가한이 고간에 패배하자, 당은 그 나머지 민족과 갈라록의 서쪽을 우튜켄 산(en:Ötüken)에 이주시켜 혼하주(渾河州)로, 갈라록의 오른쪽을 낭산도독부(狼山都督府)로 하여 낭산도독에 통합시켰다.[2] 당은 그 후, 단우도호부(単于都護府)와 한해도호부(瀚海都護府)를 설치했다.

그 결과, 갈라록의 대부분은 몽골 고원의 우튜켄 산에 이주했지만, 알타이 산맥의 서쪽엔 갈라록의 일부 세력도 존재했다. 그 일부 세력은 현경 원년(656년)에 처밀, 처월, 고소, 노실필 등과 함께 서돌궐의 아사나하로에 붙어 반란을 일으켰다. 그 해 8월, 좌위대장군인 정지절(zh:程咬金)은 이들을 격파했다.

현경 2년(657년), 당은 모락부(謀落部)를 음산도독부(陰山都督府)로, 연후부(熾俟部)를 대막도독부(大漠都督府)로, 답실력부(踏実力部)를 현지도독부(玄池都督府)로 편성하여, 각 부족의 추장을 고용해 도독으로 삼았다. 이를 삼성갈라록(三姓葛邏祿)이라고 불렀다. 그 후 당은 연후부를 나누어 금부주(金附州)로 두었다.

장안 4년(704년), 당은 서돌궐의 아사나회도(阿史那懐道)를 십성가간겸 몽지도호(十姓可汗兼濛池都護)로, 아사나헌(阿史那献)을 적서절도사(磧西節度使)로 발탁했다. 십성부락의 도담(都擔)이 반역을 일으켜, 아사나헌은 그를 처형했다. 당은 쇄엽(碎葉)의 서쪽과 갈라록, 호옥(胡屋), 서니시(鼠尼施)의 세 부족을 편입시켰다. 동돌궐의 아사나묵철(阿史那默啜)이 침략해오자, 당은 아사나헌을 정원도대총관(定遠道大総管)으로 삼아, 북정대도호부(北庭大都护府)의 탕가혜(湯嘉恵)와 함께 협공하였다. 당은 돌기시(突騎施) 도독의 차비시철소녹(車鼻施啜蘇禄)을 순국공(順国公)으로 삼았다. 그러나 돌기시는 이미 발환(撥換)과 대석성(大石城)을 포위하고 있었으므로, 당은 탕가혜를 안서부대도호(安西副大都護)에 임명해 삼성갈라록에서 군사를 증원해 아사나헌과 함께 공격하게 했다.

그 후 개원(713년 - 741년) 즈음에 갈라록은 당으로 되돌아왔다.

관련항목[편집]

주석[편집]

  1. Ethno Cultural Dictionary, TÜRIK BITIG
  2. 사료에 따라서는 좌 · 우가 바뀐 경우가 있다. 어쨌든 당이 카를루크를 알타의 산맥에서 우튜켄 산으로 이주시킨 것은 설연타부(薛延陀部)의 남하를 막는 목적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