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버라 매클린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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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버라 매클린톡
Barbara McClintock
연구실에서의 바버라 매클린톡(1947년 촬영)
연구실에서의 바버라 매클린톡(1947년 촬영)
출생 1902년 6월 16일(1902-06-16)
미국 코네티컷주 하트퍼드
사망 1992년 9월 2일(1992-09-02) (향년 90세)
미국 뉴욕주 헌팅턴
국적 미국
주요 업적 옥수수의 전이성 유전인자 발견
수상 미국 국가 과학상(1970년)
로젠스틸상(1977년)
토머스 헌트 모건 메달(1981년)
앨버트 래스커 기초 의학 연구상(1981년)
루이자 그로스 호르위츠상(1982년)
노벨 생리학·의학상(1983년)
분야 세포유전학
소속 미주리 대학교
콜드스프링하버 연구소

바버라 매클린톡(영어: Barbara McClintock, 1902년 6월 16일 ~ 1992년 9월 2일)은 미국세포유전학자이다. 1983년에 옥수수의 전이성 유전인자를 발견한 공로로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다.

학력[편집]

  • 1914~1918년: 에라스무스 홀 고등학교 (졸업)
  • 1918~1923년: 코넬 대학교 식물학과 (학사)
  • 1923~1925년: 코넬 대학교 대힉원 식물학과 (석사)
  • 1925~1927년: 코넬 대학교 대학원 식물학과 (박사)

생애[편집]

가족 관계[편집]

뉴잉글랜드 출생 어머니 사라 앤디(Sarah Andy)와 영국 이민 3세대였던 아버지 토마스 헨리 매클린톡(Thomas Henry McClintock)사이에서 태어난 3남 중 셋째로 태어났다. 위로는 두 언니 마조리(Marjorie, 1889 출생)와 마뇽(Mannon, 1890 출생)이 있으며 아래로는 동생 말콤 라이더(Malcom Rider)가 있다.[1]

어린 시절[편집]

그녀의 부모님은 세 번째 자녀에게 아들일 것임을 기대하고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 벤자민이란 이름을 붙이려 했다. 그러나 예상 외로 딸이 태어나자, 처음에는 엘레노어라는 이름을 붙였다가 아기 때 그녀의 담대한 성품을 보곤 조금 더 남성스러운 바버라라는 이름을 새로 지어 주었다. 집안 형편 때문에 막내 말콤이 태어난 뒤 바버라는 고향 하트퍼드를 떠나 뉴욕 브루클린의 고모 댁에서 자라게 되었다. 초등학교 때에는 다시 부모님과 함께 살았는데, 가족들은 모두 어린 시절의 그녀를 외톨이이면서 독립적이었던 아이였다고 평가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사내 아이들과 노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것은 그녀의 사춘기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1908년에는 브루클린으로 이사를 하여 그곳에서 에라스무스 중,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생 시절 그녀는 높은 학구열을 보이며 대학 진학 의사를 밝혔다.[2]

코넬 대학교[편집]

바버라 매클린톡은 1919년 코넬 대학교의 농과 대학에 입학하였다. (매클린톡이 입학하던 시기에는 형편이 조금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당시 여성의 대학 진학률은 굉장히 낮았다. 그녀가 농과대학에 진학한 것은 가정형편을 고려한 선택으로, 농과대학에서는 농장에서 일하는 대가로 등록금을 면제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대학교에서 바버라는 1학년 여학생 대표를 하는 등 활발한 학생 활동을 했다. 그녀는 레스터 샤프(Lester Sharpe) 교수와 친하게 지내며 주말마다 개인 교습을 받기도 했고, 그 덕분에 대학원 2학년 때 전공을 빨리 정할 수 있었다. 바버라는 어린 시절 보여주었던 외톨이의 모습과 달리 대학생 때에는 활발한 학생으로 지냈는데, 당시 무시 받던 유대인 친구들과 특히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코넬 대학교에서 그녀는 진정한 친구들 마르쿠스 로우즈조지 비들 그리고 해리엇 크레이튼을 만나게 된다. 1931년, 매클린톡이 크레이튼과 함께 옥수수 염색체에 있어 연관 유전자 표식과 교차 현상의 명확한 증거를 찾는 연구를 하고 있을 때 코넬 대학교를 방문했던 유전학의 대부 모건(Thomas Hunt Morgan)교수가 출판을 서둘렀다는 일화가 있다. 당시 독일에서는 쿠르트 슈테른이 초파리를 이용한 비슷한 실험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대학원 졸업 후[편집]

코넬 대학에서의 남성 동료들이 각자의 안정된 직업을 얻는 동안 그녀는 계속 코넬에 남아 특별한 일자리 없이 자신의 연구를 계속했고, 여기서 즐거움을 느꼈다. 1931년부터 2년간 국립 학술연구 진흥재단에서 프로젝트 연구비를 지원받는 등, 그녀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연구비를 받아 코넬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중간중간에 캘리포니아 공대나 미조리 대학교의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녀는 이 시기에 에스터 파커와 절친한 사이로 지냈다. 1933년과 1934년에 걸쳐 6개월 동안 매클린톡은 쿠르트 슈테른과 함께 연구할 목적으로 독일을 방문했다. 그러나 슈테른은 이미 미국으로 떠난 뒤였고 그녀는 대신 리차드 베네딕트 골트슈미트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 유럽의 살벌한 정치적 분위기 속에 둘러싸여있던 그녀는 코넬 대학교로 일찍 돌아왔고, 1936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미주리 대학교[편집]

1936년, 스태들러의 도움으로 매클린톡은 미주리 대학교의 조교수 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옥수수의 동그란 염색체가 생겨나는 원리와 조각난 염색체들이 서로 이어지는 방식에 대해 연구했다. 그녀는 옥수수 알갱이에 생기는 알록달록한 색깔 문양에 집중하여, 이것의 원인이 동원체가 2개인 염색체와 염색체의 분절-접속 현상 때문임을 밝혀내었다. 그녀 최초의 정규직이었지만, 직장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자신의 설명을 한번에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실망스러움을 그대로 드러낸다거나, 타인의 논리 중 틀린 부분이 있으면 그대로 지적하는 그녀의 성격이나 벽을 타고 올라가 창문을 통해 방에 들어간다던가 하는 독특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던 그녀의 행동은 미주리 대학의 다른 연구원들과 융합되기 힘들었다. 미주리에서는 각종 연구소에서 매클린톡 앞으로 보낸 서신들을 모두 차단하는 등 철저하게 그녀를 고립시켰다. 1936년 그녀는 논문을 하나도 발표하지 못했고 사람들의 소외 속에서 고통받던 그녀는 결국 1941년 조교수직 5년 만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편집]

미주리 대학의 조교수 자리를 포기한 그녀는 1942년 초, 전 해 말에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에 발령받은 밀라슬라프 데메렉(Milislav Demerec)의 도움으로 그곳에 정착할 수 있었다.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는 정기적인 세미나가 열리는 곳이기도 했지만 평소에는 굉장히 조용한 곳이었다. 처음에 그녀와 그녀 주변 사람들은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가 매클린톡의 끼를 발산하기엔 너무 구석진 곳이라 걱정했지만 몇 년이 흐른 뒤 매클린톡은 이곳을 진정으로 좋아하게 되었고, 40년 이상을 이곳에서 일했다.

연구와 업적[편집]

Ac/Ds의 조절과 옥수수 알갱이 색깔의 관계. 아무런 무늬가 없는 10번 옥수수 알갱이는 Ac가 없고, Ds가 안토시아닌을 억제한 결과이다. 11번부터 13번까지는 하나의 Ac가 존재한다. Ds가 이동할 수 있어 약간의 안토시아닌이 합성될 수 있다. 14번에는 2개, 15번에는 3개의 Ac가 존재한다.

주요 경력[편집]

동그라미 모양 염색체의 발견[편집]

매클린톡은 1931년과 1932년 여름동안 유전학자 루이스 스태들러와 함께 미주리 대학교에서 엑스레이를 이용한 옥수수 유전자의 인위적 돌연변이에 대해 연구했다. 그녀는 이 연구 중 방사선에 의해 손상된 염색체의 끝부분에서 일어나는 융합 현상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환상염색체를 식별해 내었다. 이 증거로부터 염색체 끝에 안정성을 담당하는 구조가 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매클린톡은 후속 연구에서 감수분열과정에서 일어나는 환상염색체의 손실이 옥수수잎에 나타나는 얼룩무늬의 원인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또한 이 시기에 옥수수의 6번 염색체 위에 의 조립에 필요한 인 형성체가 존재함을 발견했다.

X선과 옥수수 얼룩무늬[편집]

미주리 대학교에서는 엑스레이를 이용한 옥수수 세포유전학 연구를 계속했다. 그녀는 이 과정에서 옥수수 염색체들의 분절과 접속 현상을 관찰하였다. 체세포분열 과정에서 분절된 염색체들은 염색체가 복제되는 동안 다시 달라붙었다. 체세포분열 후기에 분절된 염색체들은 염색분체다리(염색분체교)를 형성하였다. 이 염색분체다리는 염색체가 세포의 극으로 끌려갈 때 분해되었다. 염색체의 분절된 끝부분은 다음 세포분열의 간기동안 다시 접속되었다. 이 과정이 세포주기와 함께 계속 반복되었으며 이것은 곧 배젖에서 관찰되는 얼룩무늬의 원인으로 밝혀졌다.

옥수수 유전자 지도 그리기[편집]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로 자리를 옮긴 뒤 그녀는 X선을 이용하여 옥수수의 유전자가 염색체의 어느 부분에 위치하고 있는지 밝혀내려 노력했다.

자리바꿈 현상의 발견[편집]

콜드 스프링 하버 연구소에서 매클린톡은 제9염색체에 문제가 있는 옥수수를 자가 수분시켰다. 그리고 그 씨앗을 밭에 심어 재배했다. 이는 염색체의 ‘분절-접속 과정’에서 나타나는 돌연변이를 지속적으로 관찰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염색체의 ‘분절-접속 과정’의 양상에 따라 자식 세대의 옥수수가 변이를 일으켰다. 자식세대는 이파리의 색깔에서 다양한 형질변이를 보였으며 다른 돌연변이와 달리 한 세대 안에서도 계속해서 돌연변이가 일어났다. 다른 생물에서는 비슷한 사례가 있었는데 이 현상을 대개 ‘돌연변이 유전자(mutable genes)’, ‘잡색(variegation) 현상’, ‘모자이크(mosaicism) 현상’ 등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매클린톡은 이 과정에서 보이는 얼룩무늬의 규칙성과 근접한 조직끼리의 발생 빈도 등을 연구하여 세포분열 초기에 세포들이 서로 다르게 분화한다는 발생유전학의 지표를 열었다. 매클린톡은 인접한 두 구역에서 발생하는 돌연변이의 빈도가 서로 반비례함을 발견했다. 관련성이 있던 세포는 서로 자매 세포였다. 따라서 그녀는 체세포분열이 일어날 때 어미세포로부터 딸 세포가 서로 다른 유전자를 받아 다르게 분화한다는 확정 현상을 기본으로 2년여간의 연구를 거쳐 이것이 염색체의 ‘분절(breakage)’ 혹은 ‘분해(dissociation)’을 제어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음을 알아냈다. 이는 염색체의 ‘자리바꿈’을 최초로 포착한 단서이기도 하다. 매클린톡은 염색체의 활동을 제어하는 기본 원리를 어떤 인자가 신호를 받으면 반응하여 원래 붙어있던 자리에서 떨어져 나오는 현상을 관찰하고 ‘Ds-Ac 체계 라 이름붙였다. Ds는 다른 요소들과 분리되는 분해자(dissociation)을 뜻하고 Ac는 신호를 전달하는 활성자(activator)를 뜻한다. 이때, 분해자인 Ds나 활성자인 Ac가 원래의 위치가 아닌 다른 곳에서 발견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포괄해서 유전자의 ‘자리바꿈’ 혹은 ‘전이’라고 칭한다. 같은 모세포에서 서로 다른 유전자 구성을 가진 딸 세포가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 바로 Ds 유전자의 전이 현상 때문이다. 매클린톡과 트랜스포존의 중요성이 과학계에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프랑수아 자코브자크 모노에 의해 박테리아의 lac 오페론이 주목을 받은 이후부터였다. 오페론은 매클린톡이 주장한 조절 인자의 실존하는 예시였다.

옥수수의 기원에 대한 연구[편집]

1957년 매클린톡은 록펠러재단의 후원으로 남아메리카에서 연구를 할 기회를 얻었다. 옥수수의 종류가 다양하게 존재했던 남아메리카에서 그녀는 옥수수의 진화에 대해 흥미를 가졌다. 그녀는 1962년부터 노스캐롤라이나 롤리의 대학에서 옥수수를 연구하는 다른 과학자들을 감독했다. 록펠러재단의 후원을 받는 다른 몇몇 과학자들은 1970년대 이후까지도 그녀의 옥수수 연구를 이어 진행했다. 이 연구를 통해 트랜스포존의 존재가 밝혀지게 되었으며, 이후 유전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3]

수상 경력[편집]

생명의 느낌[편집]

생명의 느낌은 이블린 폭스 켈러가 집필한 바버라 매클린톡의 전기이다. 저자와 매클린톡은 짧은 기간 동안 같은 건물에 산 적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서로의 연구 분야가 달랐기에 별다른 접점이 없었다. 이후 전기를 쓰고자 마음먹은 뒤 저자는 매클린톡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을 폭 넓게 인터뷰했다. 책의 서술 역시 독자가 직접 과학자들을 인터뷰하는 느낌이 들도록 이루어졌다.

주요 내용 소개[편집]

책은 어린시절부터 노년기까지 여성 과학도 바버라 매클린톡의 삶을 담고 있다. 이블린 폭스 켈러를 통해 드러나는 매클린톡은 자유분방하고 스스로가 외톨이를 자처하는 모습이다. 또한 아주 총명하고 천재적이며 동시에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드러난 사상[편집]

그녀가 현미경으로 염색체나 세포를 관찰할 때 그녀는 그 행동을 자신이 현미경을 통해 세포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라고 비유한다. 그녀는 자신이 그 생명체가 된다는 느낌으로 연구를 하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당시 대다수의 세포유전학자들이 더듬이가 자라날 자리에 다리가 자라나거나, 뒷날개 대신 앞날개가 자라나는 초파리 돌연변이와 같은 파괴적인 실험을 통해 논문을 썼다면, 매클린톡은 덜 파괴적인 식물의 얼룩무늬 현상을 꼼꼼히 관찰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노벨상 수상을 할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 같은 사람이 노벨상을 받는 것은 참 불공평한 일입니다. 옥수수를 연구하는 동안 나는 모든 기쁨을 누렸습니다. 아주 어려운 문제였지만 옥수수가 해답을 알려준 덕분에 이미 충분한 보상을 받았거든요.” 그만큼 그녀는 연구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주요 저서[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참고 문헌[편집]

연구 자료[편집]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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