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 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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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 주씨
新安朱氏
나라한국
관향안휘성 휘주
시조주잠(朱潛)
원시조주자(朱子)
집성촌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전라남도 나주시 동강면
전라남도 여수시 화치동
전라남도 여수시 율촌면 월산리
전라남도 고흥군 도덕면 신양리
경기도 시흥시 과림동
충청남도 홍성군 광천읍
충청남도 홍성군 홍동면 운월리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임곡리
경상북도 울진군
경상북도 예천군 개포면 경진리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경상북도 경주시
경상남도 진주시 정촌면 화개리
경상남도 사천시 서포면 금진리
주요 인물주의수, 주논개, 주석면, 주진우, 주기용, 주요한, 주기철, 주요섭, 주영하, 주영섭, 주운화, 주재황, 주종환, 주평, 주일청, 주현, 주영순, 주진우, 주승용, 주철환, 주진오, 주성영, 주진형, 주호영, 주낙영, 주광덕, 주병진, 주철현
인구(2015년)148,207명

신안 주씨(新安朱氏)는 한국의 이다. 동국시조 남송 한림학사(翰林學士) 청계공(淸溪公) 주잠(朱潛)은 1224년(고려 고종 11년) 고려로 망명하여 능주에 정착하였다.

시조[편집]

동국시조 주잠(朱潛)은 송나라 사람으로 북송(北宋)의 현유 이부공(吏部公) 위재(韋齋) 주송(朱松)의 현손이자 성리학을 집대성한 대유학자 송태사휘국문공(宋太師徽國文公) 회암(晦菴) 주자(朱子)의 증손이다. 남송 문과 급제 이후 관직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하고 태학사(太學士)와 비서각직학사(祕書閣直學士)에 이르렀다. 남송 조정이 점차 화의로 경도되고 간신의 전횡으로 사직이 위태롭게되자 이를 분히 여겼던 그는 항몽기치를 높이던 이웃나라 고려의 기백을 내심 가상히 여기었다.

1224년(고려 고종 11년) 공은 가솔과 도성하(陶成河), 두행수(杜行秀), 섭공제(葉公濟), 유응규(劉應奎), 조창(趙昶), 주세현(周世顯), 진조순(陳祖舜) 등 문하의 7학사와 함께 뱃길을 통해 나주에 이르렀다. 이에 고려 고종(高宗)이 송경(松京)으로 초빙하여 문하시랑에 제수하고자 하였으나 남송의 신하로서 고려의 관작을 거부하였다. 나중에 쿠빌라이(훗날의 원 세조)가 송의 신하들이 고려로 달아난 사실을 알고 그들을 압송해올 것을 고려 조정에 요구하고 몽골 사신(使臣)이 공의 종적을 탐색하자 공은 화를 피하여 를 적덕(積德)으로 고치고 전라도 능성현 죽수부리(竹樹夫里)에 은거하였다. 공의 행적으로 인하여 인부리(仁夫里), 주자천(朱子川) 등 지금의 지명 등이 유래된 곳이 많고 재야에서 성리학 이념을 고려 사회에 전수하고 학문 연구와 유풍 진작 그리고 사림 양성에 진력하여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주자묘(朱子廟),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의 주천서원(朱川書院)과 청계사(淸溪祠)에 배향되었다. 사위는 능성 구씨(綾城 具氏) 시조 검교상장군 구존유(具存裕)이다.

함께 고려로 귀화한 한림학사 가운데 섭공제(葉公濟) 또한 남송에 대한 의리를 지켜 고려의 판도판서 벼슬을 거부하고 경주 섭씨(慶州 葉氏)의 시조가 되었다.

인물[편집]

청계공 주잠은 남송의 유신으로서 고려에 벼슬하지 않았으나 자손들은 고려의 신하로서 벼슬하도록 하였다.

  • 민휴공(敏休公) 주여경(朱餘慶)의 자는 필유(必有), 호는 여양(汝陽)이고, 시호는 민휴(敏休)이다. 청계공 주잠의 아들로 남송에서의 이름은 여(餘)였으나 동래 이후 부친과 함께 화를 피하여 은거하던 시절에 여경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능성현의 현리를 지내다가 고려 고종~원종 조에 은사과(恩賜科)에 등제하여[1] 성균악정에 올랐으며 좌승상(左丞相)과 밀직부사를 지냈다.[2] 묘소는 전라남도 화순군 동면 장동리에 있고 귀후재(歸厚齋)는 민휴공 주여경을 배향하는 재실(齋室)이다.
  • 문절공(文節公) 주열(朱悅)의 자는 이화(而和), 호는 죽수(竹樹)이고,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고려조의 명신이자 명재상으로 민휴공 주여경의 장자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남원판관(南原判官)에 부임하고 국학학록(國學學錄)에 보임되었으며 감찰어사(監察御史) 등을 거쳐 나주(羅州)·정주(靜州)·승천부(昇天府)·장흥부(長興府) 등의 원이 되어 정치를 잘하였다. 원종(元宗)조에는 병부낭중(兵部郎中)으로서 충청·전라·경상 삼도의 안렴사(安廉使)를 역임하며 위명(威名)을 떨쳤으며 백성들도 경외하였다고 한다. 예부시랑(禮部侍郎)이 되었으나 당시의 권신 임연(林衍)에게 거슬려 1269년(원종 10년)에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임연이 죽자 계림(鷄林)으로 가 동경유수(東京留守)가 되었다. 이후 예빈경(禮賓卿), 간의대부(諫議大夫), 판소부감사(判少府監事), 동궁시강학사(東宮侍講學士)를 역임하고 원나라가 일본정벌을 준비할 때 경상도안무사로 다녀와서 판비서성사(判秘書省事)로 승진하였으며, 충렬왕(忠烈王)이 즉위하게 되자 주열의 재명을 듣고 중용하였다.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제수하고 삼사사(三司使)로서 경상도계점사(慶尙道計點事)로 나가 유망민을 초집하였다. 판도판서(版圖判書), 부지밀직(副知密直)과 전법판서(典法判書)에 나아갔으며 지도첨의부사(知都僉議府事)로 치사(致仕)하였다. 1276년(충렬왕 2년)에는 정조사(正朝使)로 원나라 대도(大都)에 연행(燕行)하여 원 세조가 무리한 요구를 철회하도록 논리 정연하게 설복하여 구국재상(救國宰相)으로 칭송받았다. 조야에서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높았고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으며, 성품이 담박하고 활달하였다. 원나라의 관리들이 고려의 관리들을 매질하고 업신여기는 등 심히 무도하였으나 공의 앞에서는 명망과 위의를 두려워하여 결코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였다.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근검하였고 어느 편에도 기울지 않는 공평함이 있었다고 한다. 생전 능성군(綾城君)에 분봉되었고 좌리공신(佐理功臣)과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에 녹훈되었다. 몰후 평장사(平章事)에 증직되었다. 고려 청풍서원(淸風書院)에 배향되었으나 전하지 않는다. 『고려사(高麗史)』 열전에 올랐다.

능성군 주열의 세 아들 정숙공(正肅公) 주인장(朱印長), 문간공(文簡公) 주인원(朱印遠), 부사공(府事公) 주인환(朱印還) 역시 관로에 올라 각각 장파, 중파, 계파로 분적되었다.[3][4]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3명을 배출하였다.

분파[편집]

장파[편집]

장파는 정숙공파(正肅公派)라고도 한다.

  • 정숙공(正肅公) 주인장(朱印長)의 자는 거계(巨桂), 호는 도곡(陶谷)이고, 시호는 정숙(正肅)이다. 문절공 주열의 장남으로 1234년 태어나 문과 급제 이후 홍문관악정에 올라 한림학사(翰林學士), 전라도 안렴사 겸 순무사, 충청도 순무사, 평안도 감사와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퇴관하여 물러난 이후에는 고향 능주에서 여생을 보내었고, 몰후에는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검교상장군(檢校上將軍)의 작록을 받았다.

이후 능성파의 후손들 가운데 고려에 대한 충절로 충렬왕의 부마 이부상서(吏部尙書) 헌정공(憲靖公) 주의(朱義)의 아들 충렬공(忠烈公) 주흥득(朱興得)이 두문동(杜門洞)에서 나가지 않고 순사하여 불사이군의 청절(淸節)을 지켰고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 주능득(朱能得)이 조선조에의 출사권고를 거듭 거부하여 광양(光陽)으로 귀양을 갔으며, 호부상서(戶部尙書) 장경공(莊景公) 주순정(朱淳精) 역시 두문동에 순절하여 양민으로 전락하였으나 이에 장파(長派)는 주로 호남(湖南) 지방에서 세계를 이었고 영조(英祖) 대에 이르러 충렬공 주흥득의 18세손 공조참판(工曹參判) 주만리(朱萬离)의 상소로 신원이 회복되고 자헌대부와 문형(文衡, 홍문관대제학)에 추증(追贈)되었다.

  • 임정(臨政) 요인 주석환(朱錫煥)의 자는 자일(子逸)으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5월 만주로 넘어가 안동현(安東縣)에서 오동진(吳東振), 김승만(金承萬), 여순근(呂淳根) 등과 같이 안동현임시의사회(安東縣臨時議事會)를 조직하고 대한청년단연합회에 가입하는 등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남만주의 여러 독립운동단체가 통합하여 임시정부 직할의 광복군참리부(光復軍參理部)와 광복군사령부로 개편, 발족됨에 따라 광복군사령부 모험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지령으로 국내에 교통국(交通局)을 설치할 임무를 띠고 입국하였다. 1920년 만주에서 정의단(正義團)을 창설하여 각처에서 모금한 군자금을 임시정부로 송금하였다. 이어 평안남도(平安南道) 도청 평양부청(平壤府廳)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파괴하였고 일본 경찰과 대성리(大成里)에서 교전하다 체포되어 법정에서 13년 형을 언도받고 복역하고 1931년 출옥하였다. 1931년에 재차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지속하던 중 광복을 맞아 환국(還國)하였다. 임시정부에서 광복군 총영(總營)과 중앙기관 비서를 역임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獨立章)이 추서되었다.

중파[편집]

중파는 문간공파(文簡公派)라고도 한다.

  • 문간공(文簡公) 주인원(朱印遠)의 자는 모인(慕仁)이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246년 문절공 주열의 차남으로 태어나 부친에 이어 1277년(충렬왕 3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제수되고 안주병마판관, 예부시랑(禮部侍郞), 경상도 안렴사(慶尙道 按廉使) 겸 권농사(勸農使)를 역임하고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이어 삼사좌윤(三司左尹)을 지내고 낙향하여 이윽고 별세하였다. 생전에 두각을 나타낸 명신으로 항직(伉直)하였던 부친에게 개인적 원한을 품은 이들에 의한 참소가 많았으나 왕이 결코 듣지 않았다.
  • 문충공(文忠公) 주사충(朱思忠)의 자는 국보(國輔)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고려 공민왕(恭愍王)조의 문신으로 문과 급제 이후 1359년 고려로 쳐들어온 홍건적 3000명을 의주(義州)에서 섬멸하여 공을 세웠다. 성품은 강직하였으며 관직은 예부좌랑(禮部佐郞)과 호부상서(戶部尙書),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이르렀다. 1361년(공민왕 10년) 연행하여 표문을 지어올려 도로의 개통을 축하하였다. 원나라를 등에 업은 덕흥군(德興君)의 역모에 연루되어 사사되자 조야에서 이를 애석하게 여기었으나 이윽고 결백이 밝혀지어 공민왕은 문충(文忠)의 시호를 내려 깊이 애도하였다.[5]
  • 웅성군(熊城君) 주자정(朱子精)의 자는 덕성(德性)으로 문과 급제 이후 조선의 개국 공신이 되었으며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과 의금부사(義禁府事)를 지내고 웅성군(熊城君)에 분봉되었다. 왕자의 난을 보다 못하여 태조(太祖)를 호종하였다.
  • 동부령(東部令) 주내경(朱乃敬)과 현감공(縣監公) 주내근(朱乃謹) 형제는 본래 재야사림으로 등문과(登文科)하여 강원도(江原道)와 경상도 양도의 동해안에 부임하여 백성을 다스리고 외침을 방비하였다. 현감공 주내근은 진사과와 문과를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으며 연일현감(延日縣監)을 지냈다.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화곡리의 동현재(東賢齋)는 후손들이 동부령을 지낸 주내경(朱乃敬)을 배향하는 재실이다.
  • 전적공(典籍公) 주선림(朱善林)의 자는 정옹(挺翁)이고, 문과 급제 이후 전적에 올라 언양(彦陽), 진보(眞寶), 정의(旌義)에서 선정을 베풀어 치적이 뛰어났다. 1504년(연산군 10년)에 울진에 입향하였으며 할아버지 주내근(朱乃謹)의 묘를 오류촌(五柳村) 위에 있는 경주 진덕왕릉(眞德王陵)의 밑에 두고 울진 구만촌(九萬村)으로 피해 산 것이 입향의 내력이다. 삼군의 군수를 역임하며 치적이 있었고 왜에 사신으로 두 번 봉직하여 왜인들로부터 현대부(賢大夫)로 명성이 높았다. 후에 관직이 봉렬대부(奉列大夫)와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이르렀다. 장남 주수(朱壽)는 만호를 지냈으며 차남 주의(朱懿)는 강릉부사(江陵府使)를 지냈다. 자손은 울진(蔚珍), 청도(淸道), 영월(寧越), 강릉(江陵), 대구(大邱), 제천(堤川), 진양(晉陽), 서울에 분포하고 있으며 입향 이후에는 부사공파(府使公派), 효자공파(孝子公派), 교수공파(敎授公派)로 분파되었다.[6]
  • 부사공(府使公) 주의(朱懿)의 자는 휘지(徽之)이고, 호는 죽재(竹齋), 삼의정(三宜亭)이다. 전적공 주선림의 차남으로 1491년(성종 22년) 약관 18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중사마(中司馬)에 올랐으며 1506년(중종 원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정자(成均館正字)와 평안도사(平安都事)를 지냈고, 진보, 가평(加平), 풍기(豊基), 영월, 밀양(密陽)에서 백성을 다스렸으며 조천부사(朝天副使) 서장관(書狀官)에 올라 명나라에 사행을 다녀왔다. 그리고 1538년(중종 33년)에 강릉부사(江陵府使)에 임명받았으나 몸이 불편하여 출조를 사양하자 1546년(명종 원년) 명종이 누워서 편히 다스리라 하는 안와안치(安臥安治)의 하명과 삼의죽재 백세청풍(三宜竹齋 百世淸風)의 어필을 보내옴으로 부임하여 2년의 임기를 수행하였다.
  • 충효당(忠孝堂) 주경안(朱景顔)의 자는 여우(汝愚)이고, 시호는 충효당(忠孝堂)이다. 울진 고을의 이름난 효자이자 충신으로 조선 문정왕후(文正王后), 인순왕후(仁順王后), 명종(明宗), 의인왕후(懿仁王后), 선조(宣祖)의 국상(國喪)에 모두 삼년복을 입었다. 임진왜란을 당하여서는 구만동(九萬洞) 산봉우리에 축단(築壇)을 하여 놓고 7년 동안 하늘에 국운이 회복되기를 기도하니 사람들이 이곳을 축천대(祝天臺)라 하였으며 후에 고을 사람들이 그의 학행과 효행을 사모하여 향현사(鄕賢祠)에 배향하고 1965년에는 후손들이 축천대(祝天臺)에 유허비를 세웠다. 선조 조에 생전 정려되어 정려문(旌閭門)과 효자각(孝子閣)이 섰고 1748년(영조 24년)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증직되었으며 삼강록(三綱錄)에 올랐다. 불천사(不遷祠)에 배향되었고 충효당(忠孝堂)이 축성되었다. 경상북도 울진군 울진읍 고성리 구만동에 있다.
  • 무열공(武烈公) 주몽룡(朱夢龍)의 자는 운중(雲仲), 호는 용암(龍巖)이고,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무과(武科) 급제 이후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금산군수(錦山郡守)가 되었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하여 왜적이 침노하자 전열을 정비하고 임금에게 상소(上訴)하여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더불어 창녕(昌寧)에서 왜적을 격퇴하고 추풍령(秋風嶺), 조령(鳥嶺), 거제(巨濟)에서도 높은 전공을 세웠다. 여러 차례 전투에서 왜적을 크게 물리치고 영호(嶺湖) 양도를 방어하여 경상좌병사, 경상우병사 등에 제수되었다. 몰후 1612년(광해군 4년) 자헌대부(資憲大夫)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추증되고 전라남도 광양시 태인동의 충렬사(忠烈祠), 경상남도 진주시 남성동의 창렬사(彰烈祠), 그리고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의 충익사(忠翼祠)에 배향되었다.
  • 의정부찬정(議政府贊政) 주석면(朱錫冕)의 자는 경화(敬華)이고, 호는 월산(月山)이다. 한말(韓末)의 충신으로 학행으로 관직에 올라 소령원(昭寧園) 수봉관(守奉官)을 지내고 왕후궁주사, 내부참서관, 법부형사국장, 군부협판, 법부협판, 원수부 검사총장, 궁내부 대신, 경기도 관찰사, 전라남도 관찰사, 탁지부협판, 강원도 관찰사, 충청남도 관찰사, 함경남도 관찰사, 군부대신서리, 주차미국특명전권공사, 주차아국특명전권공사, 육군참장, 중추원의관, 의정부찬정 등의 요직을 두루 지내고 품계는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 1896년(고종 33년) 왕명으로 구미 각국을 유력(遊歷)하였다. 이후 나라를 일본에 강탈당하는 망국을 당하여 절치부심하고 만주 등지로 망명, 독립운동(獨立運動)에 투신하여 이자(二子)와 함께 순절한 우리 근대사의 거목(巨木)으로 지금도 강원도 춘천시에는 선정비(善政碑)가 남아있다.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주자묘에도 공의 충절을 기리는 영모비(永慕碑)가 서 있다.
  • 장로교 목사이자 독립운동가 주기철(朱基徹)의 아명은 기복(基福)이고, 호는 소양(蘇羊)으로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군 웅천면 사람이다. 주목사는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 상과를 지병으로 중퇴한 이후 재지에서 남학회(南學會)를 창설하여 교육과 애국사상을 고취하였고, 3.1 운동 당시 향리에서 대표로 활약하였으며 1926년 장로회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 졸업 이후에는 담임목사로 평양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에 시무하여 목회와 신앙구국에 투신하였다. 일제 말엽 신사참배를 단호히 거부하여 법정에서 10년 형을 언도받고 복역하던 중 1944년에 광복을 앞두고 옥중 순교하였다. 1963년건국훈장 독립장(獨立章)이 추서되었다.

계파[편집]

계파는 부사공파(府事公派)라고도 한다.

  • 부사공(府事公) 주인환(朱印還)은 1248년 문절공 주열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문과 등제 이후에 관직은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에 이르렀으나, 고려 조정의 유약함을 개탄하여 절친한 지기였던 이안사(李安社, 훗날의 조선 목조)와 함께 함경도 안변(安邊, 현 강원도 안변군) 등지로 이거하였는데 그의 후손이 조선왕조의 개국 공신인 검교한성부윤(檢校漢城府尹)과 전리판서(典理判書) 등을 역임한 안천군(安川君) 우군총제 주인(朱仁)이다.[7]
  • 호조좌랑(戶曹佐郞) 주대축(朱大畜)의 자는 경온(景蘊)이고, 호는 신재(愼齋)이다. 선조 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지냈다.

주대축의 아우인 주대림(朱大臨)의 직손인 주정(朱椗) 주형리(朱炯离) 주중순(朱重純)의 삼대가 문과 초시, 복시, 전시에서 장원을 차지하여 삼대관삼장(三代貫三壯)으로 칭송받았으며 역시 주기(朱杞) 주형질(朱炯質) 주중옹(朱重翁)의 삼대가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어 주격(朱格) 역시 과거에 급제하여 문중을 빛냈다. 주정은 숙종 조에 개성교수(開城敎授)를 역임하여 경원부사(慶源府使) 주표(朱杓)와 함께 이름을 높였다.

주대축의 종조부인 주세황(朱世凰)의 현손 주목(朱楘)과 주택정(朱宅正) 2대도 과거에 급제하였고 주택정과 주비(朱棐)는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을 사사하였다. 안천군 주인의 4남인 주진원(朱嗔元)의 직손인 주경환(朱景煥)과 주욱환(朱昱煥) 형제 역시 과거에 급제하였다. 계파(季派)는 주로 이북 지방에서 세계를 이었다.

  • 참봉공(參奉公) 주처정(朱處正)의 자는 정부(靜夫)이고 호는 미곡(美谷)이다. 단천군수(端川郡守)를 지낸 주목(朱楘)의 아들로, 1649년(인조 27년) 태어났다. 함흥(咸興)에 세거하였다. 1690년(숙종 16년)에 치러진 경오 식년시(式年試)에서 생원으로 합격하였다. 동생으로 주택정(朱宅正)과 주남정(朱南正)이 있다.
  • 정랑공(正郞公) 주택정(朱宅正)의 자는 정이(靜而)이고, 호는 덕곡(德谷)이다. 20세 이전에 향시에 합격하였고 우암 송시열덕원에 유배되어 있을 즈음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순릉참봉(純陵參奉)으로 1679년(숙종 5년) 식년문과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에 올랐다. 이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과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을 지내고 예조좌랑(禮曹佐郞)과 병조좌랑(兵曹佐郞),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역임하였으며 외임으로 나아가 은계찰방, 보령현감, 이성현감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689년(숙종 15년)에 기사환국(己巳換局)을 당하여 삭직되었으나 1694년(숙종 20년)에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성균관직강으로 복직하여 이어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지냈다. 학문에 뜻을 세워 스승을 정성껏 복사(服事)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도 학문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아 스승으로부터 “긴장해 있으면서 해이하지 않다.”는 말을 들었고 ‘학여불급(學如不及)’이라는 서증과 함께 항상 장려되었다. 관직생활 여러 해에도 근검하였고, 효심과 우애가 지극하였다.
  • 유학자이자 의병장 주용규(朱庸奎)의 자는 여중(汝中), 호는 입암(立菴)으로 부친은 주기섭(朱箕燮)이다. 백부 주종섭(朱宗燮)에게 입양되었으며, 성재(省齋) 류중교(柳重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과장(科場)에서 시문으로 이름을 날리고, 향시(鄕試)와 성시(省試)에 연이어 합격하였으나, 국가가 점점 혼란스러워지자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1895년(고종 32년) 장담(長潭)에서 『성재집(省齋集)』 간행에 종사하다가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고 전국 각도에 단발령이 선포되자, 『성재집』 간행을 중지하고 의암(毅菴) 류인석(柳麟錫)을 주석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휘하에서 참모로 활약하면서 팔도(八道)와 백관(百官), 각국공사(各國公司)에게 보내는 격문(檄文)은 하나같이 그가 지은 것인데, 읽는 사람마다 주먹을 불끈 쥐고 분발하도록 하는 명문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듬해인 1896년(고종 33년) 충주(忠州)에서 일본군과의 교전 중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2월 호좌의진이 단양(丹陽)군수와 청풍(淸風)군수 등 친일 관료들을 처단하고 충주성으로 달려가 관찰사를 베고 성을 장악하자 일본군은 성을 도로 빼앗기 위해 집요하게 공세를 퍼부었다. 이에 주용규는 “우리의 도가 보존되고 없어지는 것과 국가의 흥하고 망하는 것이 이 한 번의 거사에 달려있다”라며 손수 창을 들고 여러 선비들과 함께 남문의 누대에 올라 전투를 독려하다가 유탄에 맞아 순절하였다. 교전 중임에도 의암이 손수 염(殮)하고 입관(入棺)하여 선생의 시신을 본가로 보내었다. 학문적으로『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주자대전(朱子大全)』·『송자대전(宋子大全)』 등에 깊이 잠심하고 연구하였으며, 당시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하에서 대두되었던 심설(心說) 문제에 대하여는 류중교의 입장을 적극 지지하여 류중교를 공격하는 홍재구(洪在龜), 류기일(柳基一) 등을 배척하였다. 저서로는 『입암집((立菴集)』이 있다. 아들 주현구(朱鉉九)는 류인석을 좇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던 중 눈을 감았고, 주현삼(朱鉉三)은 정미의병 당시 운강(雲崗) 이강년(李康秊)의 종사관으로 종군하다가 일본군에게 잡혀 순절하였다. 선생의 명맥은 남은 자손들에 의하여 이어지고 보존되고 있다. 이후 1963년에 대통령 표창이,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愛國章)이 추서되었고,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면 구학리 탁사정(濯斯亭) 입구에는 지역민들에 의하여 숭모비가 건립되었다.

본관[편집]

조선 말기에 종로 주석면(朱錫冕)이 종지를 모아 상소하여 능주, 웅천, 전주, 공주를 비롯하여 107본 이상 분적되었던 분파 및 분적종들의 상당수는 고종(高宗)의 윤허로 주자의 관향을 좇아 신안(중국의 옛 지명)으로 합본을 이루었다.

고려 왕실과의 인척 관계[편집]

  • 충렬왕(忠烈王)의 부마 헌정공(憲靖公) 주의(朱義)

조선 왕실과의 인척 관계[편집]

  • 익조(翼祖)의 부마 좌군도통제(左軍都統制) 주단(朱端)
  • 안양군(安陽君) 이항의 부인 웅진군부인(熊津郡夫人) 공주 주씨(公州 朱氏)

항렬자[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최해(崔瀣)의 시문선집 『동인지문(東人之文)』에 1219년 향공(鄕貢) 신분의 주민휴공이 입격한 은사과를 주관하였다고 하는 김지대(金之岱)는 1255년에 동지공거(同知貢擧, 부시험관)로 비로소 과거(科擧)를 주관함에 간여하게 되고 1261년에 이르러 지공거(知貢擧, 주시험관)에 오른다. 더욱이 김지대는 해당 시문집의 민휴공이 등제하였다는 1219년에 바로 문과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직에 오른 인물이다. 이는 저자인 최해가 주여경의 등제연도를 오기한 것이다.
  2. 조선 건국 이후 『고려사(高麗史)』의 편찬 과정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비교하여 내용이 부실하고 졸속으로 이루어져 누락된 부분이 많고 『고려사』에는 공의 휘가 경여(慶餘)로 기록되어있으나 이는 간소한 오기로 보이며 문헌과 비문 등 각종 사료에 의하면 휘는 여경(餘慶)이 맞다.
  3. 『조선씨족통보』
  4. 『신안주씨대동보』
  5. 『고려사』,「세가(世家)」 권39, 권40
  6. 『울진군지』
  7. 조선 태종조 실록에는 안천군 주인이 여진의 유종(遺種)이라고 문서 말미에 한 차례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사초의 부족으로 인한 오류(誤謬)이거나 그가 이태조를 복위하려는 상왕파(上王派)라는 인식에 의하여 그를 의도적으로 폄훼한 기술로 보인다.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