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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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잠(朱潛, 1194년(고려 명종 24년)∼1260년(고려 원종 1년))은 고려 후기의 귀화인으로 남송(南宋)의 한림원태학사(翰林院太學士)이자 신안 주씨(新安 朱氏)의 동국시조이다. 자는 경도(景陶), 호는 청계(淸溪)이고, 본관은 송나라 강남동로(江南東路) 휘주부(徽州府) 신안현(新安縣)으로 오늘날의 중국 강서성 무원현이다.

증조부는 송태사휘국문공(宋太師徽國文公) 주자(朱子: 1130년1200년)이고 조부는 안양후(安陽侯) 주야(朱埜)로, 항몽절신(抗蒙節臣)인 부친 광국후(光國侯) 충무공(忠武公) 주거(朱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남송(南宋)의 관인으로 음서를 거쳐 문과 급제 이후 관직은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내고 한림원태학사(翰林院太學士)와 비서각직학사(祕書閣直學士)에 이르렀다. 그러나 국운이 점점 쇠해가던 남송은 간신이 일어나 전횡을 부리고 나라를 망치기에 이르렀다. 이를 개탄한 공은 1224년(고려 고종 11년) 가솔과 문하생 도성하(陶成河), 두행수(杜行秀), 섭공제(葉公濟), 유응규(劉應奎), 조창(趙昶), 주세현(周世顯)과 진조순(陳祖舜) 7학사를 거느리고 뱃길을 통하여 고려로 망명하였으며, 전라도 금성(錦城: 지금의 나주(羅州))에 정착하였다. 나중에 쿠빌라이(훗날의 원 세조)가 고려로 피신하여온 송나라 신하들을 압송해가려고 하자 휘(諱)를 적덕(積德)으로 고치고 전라도 능성현(綾城縣)의 죽수부리(竹樹夫里: 고정리, 考亭里)에 은둔하였다. 이로써 그는 신안 주씨(新安 朱氏)의 동국시조가 되었으며 지금도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에는 신안 주씨의 세거지가 있고 청계공 주잠을 비롯한 후손들의 묘역 그리고 주자묘(朱子廟) 등이 있다.

이후 무주(茂朱) 무풍면(茂豊面)을 거쳐 다시 전라북도 진안(鎭安) 주천면(朱川面) 신안촌(新安村)으로 은거하며 서당을 열어 인재를 기르고 학문 연구와 향풍 교화에 진력하였고 능주(綾州)에 돌아와 눈을 감았다.

아들로 민휴공(敏休公) 주여경(朱餘慶)이 있으며, 손자로 능성군(綾城君) 문절공(文節公) 주열(朱悅)이 있다.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의 주자묘(朱子廟) 경내의 동원사(東源祠)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의 주천서원(朱川書院)과 청계사(淸溪祠)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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