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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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
출생 1574년 9월 3일
조선 조선 전라북도 장수현 계내면 대곡리
사망 1593년
조선 조선 경상남도 진주성
사인 순국(익사)
국적 조선 조선
본관 신안 주씨
별칭 의기
직업 기생
종교 유교(성리학)
배우자 최경회
부모 아버지 주달문(朱達文), 어머니 밀양박씨
친척 조부 주용일(朱溶一), 숙부 주달무

의기 주씨(義妓朱氏) 또는 의기 신안주씨(義妓 新安朱氏, 1574년[1] 9월 3일 ~ 1593년)는 조선 선조 때의 관기이다. 그녀는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고 시문(詩文)에 능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장을 유인하여 남강(南江)에 투신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다만, 논개(論介)라는 이름이 그녀의 본명인지 확실하지 않다. 주달문과 밀양박씨 사이의 딸이며 병마절도사 최경회의 부실(副室)이었다.

생애[편집]

논개는 전라북도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 주촌 태생으로, 1574년 선비 주달문(朱達文)과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의 반가의 딸로 태어났다. 부친 주달문은 진사(進士)로서 슬하에 아들 주대룡을 두었으나 15세에 괴질로 요절하였다. 이후 40이 넘은 나이에 논개를 보았다.

1578년 부친 주달문의 별세 후 숙부 주달무의 집에 의탁하였으나, 숙부가 벼 50석에 김부호(金富豪)에게 허혼(許婚)하니 모녀는 경상도(慶尙道) 안의현의 친가에서 피신하였다. 부호의 기소로 구금되었다.

1579년 부호의 기소로 구금되었으나, 장수 현감 충의공(忠毅公) 최경회(崔慶會)의 명판결로 석방되었다. 현감의 관저에 의탁하게 되고 최경회가 논개를 부실(副室)로 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최경회가 전라우도의 의병장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병사를 훈련할 때 논개는 이를 도왔다.

1593년 최경회가 경상우도(慶尙右道)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동행하였으나, 진주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순국하자 논개는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연회를 벌이고 있을 때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유인하여 남강(南江)에 투신하여 순국(殉國) 하였다.[2] (게야무라 로쿠스케가 확실한 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본에서는 박종화의 소설 《논개와 계월향》(1962년)에서 최초로 언급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3])

기록[편집]

1594년 유몽인(柳夢寅)은 삼도순안어사가 되어 하삼도의 피해상황을 살피게 되는데, 진주에 머물면서 진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명단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논개의 이야기를 듣고, 신분이 미천하여 정사에 실리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하였다. 논개가 관기라는 이유만으로 광해군 9년 편찬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순국 사실이 기록되지 않자, 이를 안타까워하며 논개의 순국 기록을 1621년 자신이 편찬한 《어우야담(於于野談)》에 남기게 된다.

권1 인륜편(人倫篇) 효열(孝烈)에 논개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인륜편에는 효열, 충의, 덕의, 은둔, 혼인, 처첩, 기상, 붕우, 노비, 배우, 창기 등으로 나누어 인물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논개의 이야기는 처첩, 노비, 창기에서 다뤄지지 않고 인륜편에 실려 있다. 《어우야담》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논개는 진주의 관기였다. 계사년에 창의사 김천일이 진주성에 들어가 왜적과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군사들은 패배하였고 백성들은 모두 죽었다. 논개는 몸단장을 곱게 하고 촉석루 아래 가파른 바위 위에 서 있었는데 바위 아래는 깊은 강물이었다. 왜적들이 이를 바라보고 침을 삼켰지만 감히 접근하지 못했는데 오직 왜장 하나가 당당하게 앞으로 나왔다. 논개는 미소를 띠고 이를 맞이하니 왜장이 그녀를 꾀어내려 하였는데 논개는 드디어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함께 뛰어들어 죽었다.

《어우야담》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논개가 관기였다는 점과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 들어 죽었다는 기록만 나온다. 1987년 해주 최씨 문중에서 발행한 《의일휴당실기(日休堂實記)》에 논개 관련 부분이 언급되는데, 최경회를 의미하는 경상우병사증좌찬성최공시장(慶尙右兵使贈左贊成崔公諡狀)에 논개 관련 부분이 언급되어 있다.

공의 부실(副室)이 공이 죽던 날 좋은 옷을 입고 강가 바위에서 거닐다가 적장을 유인해 끌어안고 죽어 지금까지 사람들은 의암이라고 부른다 (且其副室 公死之日 盛服婆娑於江中巖石 誘賊長因而俱墜死 至今人稱義巖)

이것을 근거로 논개가 최경회의 부실(副室)로 알려진 것이다.

의암과 의암사적비[편집]

1625년(인조 3년) 논개가 순국한 지 32년 뒤 논개가 떨어져 죽은 바위에는 진주의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논개의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었는데, 함경도 의병장 정문부의 둘째 아들 정대륭이 진주로 이사를 와서 의암(義巖)이라는 글씨를 써서 바위에 새겼다.[4] 1651년(효종 2년) 경상우도의 재난을 살피러 조정에서 파견된 오두인이 진주에 들렀다가 바위에 새겨진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보고, 촉석루에 의암기(義巖記)를 지었다. 1721년(경종 1년),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이 의암사적비의암 바로 위에 세워 그 뜻을 기렸다.

의기사[편집]

1739년(영조 16년)에는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가 논개의 애국충정을 추모하는 사당인 의기사촉석루 옆에 세웠다.

1846년 장수현감 중주석이 논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논개생장향수명비(論介生長鄕竪名碑)’라는 추모비를 세운 후, 1955년 군민들의 성금으로 남산에 의암사(義巖祠)라는 사당을 건립하였다. 현재 지방기념물 제4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논개가 태어난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 마을에는 논개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의암별제[편집]

1868년(고종 5년) 진주목사 정현석(鄭顯奭)의 노력으로 매년 6월 논개를 기리는 의암별제(義巖別祭)가 마련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중단되었다가 최근에 진주논개제로 부활하였다. 진주논개제는 매년 5월 의암별제 서막으로 시작된다.

재조명 노력[편집]

한편 19세기까지만 해도 그는 유교사회에서 첩이 되었다는 점, 혹은 왜장을 껴안고 투신한 점, 그의 숙부가 가산을 탕진한 점 등으로 문중에서 기피인물로 외면당하다가 1970년대에 방계 후손들이 그의 묘소를 방문하면서 재평가 논의가 이루어졌다. 묘소는 최경회와 정실, 계비가 안장된 묘소 아래에 안장되어 있고, 유인신안주씨지묘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논개 영정[편집]

2008년 2월 4일 문화체육관광부충남대학교 윤여환 교수가 그린 논개 영정을 국가표준영정 제79호로 지정하였다. 진주시는 표준영정 원본을 진주박물관에 보관하고, 사본을 의기사에 봉안해 일반인들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원래 의기사에는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미인도 논개' 그림의 사본이 걸려 있었으나, 2005년 6월 10일 한 진주 지역 시민단체가 의기사에 봉안되어 있던 논개 영정을 무단으로 뜯어낸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논개의 출생지인 전북 장수군과 순국지인 경남 진주시가 공동으로 표준영정 제작에 합의해 전국에 걸쳐 공모를 하였으며, 윤여환 교수가 새로 그린 그림이 표준영정으로 채택되었다.[5]

문학 속의 논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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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시[편집]

한시[편집]

전통 시가[편집]

그 외[편집]

  • 1980년대에 가요 '논개'를 가수 이동기가 불렀고, 이 노래는 당시 많은 인기를 모았다. 가사 "꽃입술 입에 물고 바람으로 달려가 작은 손 고이 접어 기도하며 울었네... 몸 바쳐서 몸 바쳐서 떠내려 간 그 푸른 물결 위에..."로 되어 있다.[6] 이 노래는 지금도 대학가 응원가로 사용되고 있다.

같이 보기[편집]

갤러리[편집]

가계도[편집]

  • 할아버지 :
  • 아버지 : 주달문
  • 어머니 : 밀양박씨
    • 오빠 : 주대룡(요절)
  • 삼촌 : 주달무[7]
  • 종조부 : 주용일(朱溶一)[8]
  • 종조모 : 장수서씨

각주[편집]

  1. 1574년 이전에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2. 주논개 정보시스템 (2008년 11월 16일). “논개의 생애”. 주논개 정보시스템. 2008년 11월 16일에 확인함. 
  3. 최관 崔官 (1994). Bunroku Keichō no eki [Jinshin-Teiyū Waran] 文禄・慶長の役 [壬辰・丁酉倭乱] (in Japanese).
  4. 주논개 정보시스템 (2008년 11월 16일). “의암바위”. 주논개 정보시스템. 2008년 11월 16일에 확인함. 
  5. 윤성효 기자, '논개 표준영정' 만들어졌다, 오마이뉴스, 2008년 2월 9일
  6. 스타 연예인의 굴욕사 《매일경제》 2008년 5월 23일 16:24
  7. 주달무의 후손들은 일부 강원도에 생존해 있다.
  8. 할아버지 이름미상은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낸 주용일의 형이었다.

참고 자료[편집]

바깥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