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천 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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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천 주씨
熊川朱氏
이칭병산 주씨(屛山朱氏)
나라한국
관향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
시조주문익(朱文翊)
중시조주자정(朱子精)
주요 인물주자정, 주소, 주선림, 주의, 주양우, 주덕원
인구(2015년)2,359명

웅천 주씨(熊川朱氏)는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을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웅천의 별호인 병산(屛山)에 유래 병산 주씨라고도 한다.

역사[편집]

시조 주문익(朱文翊)은 여말 문과 급제 후 세자사부, 정당문학(종2품)을 지낸 향관 낙남조이다. 아들 주자정(朱子精)은 문과 급제 후 의금부사, 좌찬성(종1품)을 지냈으며 1392년(태조 원년)에는 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어 웅성군(熊城君)에 봉군되었다.

존화사상의 영향으로 조선 말기에 제파가 종로 주석면(朱錫冕)의 주도로 남송주자(朱子)를 도시조로 삼아 합본을 이룰 적에, 선계(先系)를 고증하기 어려움을 들어 이에 유보적으로 동조하지 않은 여남은 종인들이 영남 지방을 위주로 독자적으로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본관[편집]

유래[편집]

웅천의 옛 이름은 곰내로 곰(熊)은 짐승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검(儉, 君), 곰(神) 등의 뜻을 가진 옛말을 소리대로 표기한 것이다. 웅천은 존장(尊長)이 있는 곳을 표시하고 그 마을이 시냇가에 있음을 표시한 것이며, 옛날 이 많이 살고 있어 곰들이 내려와 냇물을 먹고 가는 곳이라 하여 웅계(熊溪)라 하였다가, 웅천으로 바꾸어 불렀다고 전한다.[1]

연혁[편집]

웅천은 경상남도 창원시에 속한 옛 지명으로 삼국시대신라 때에는 웅지현(熊只縣)이었으며, 757년(경덕왕 16년)에 웅신현(熊神縣)으로 개칭되어 의안군(義安郡)의 영현이 되었다. 1018년(현종 9년)에 금주(金州)의 속현으로 합병되었다. 조선에 들어 세종대에 첨절제사가 설치되고, 문종대에 웅천현(熊川縣)으로 독립하였으며, 이 때 완포현(莞浦縣)을 병합하였다. 1510년(중종 5년)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가 곧 현으로 복구되었다. 웅천의 별호에는 병산(屛山), 웅산(熊山)이 있다. 1895년(고종 32년)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 웅천군이 되었고, 1896년에 경상남도 웅천군이 되었다. 1910년 마산부가 설치되면서 마산부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가,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창원군에 편입되었다.

인물[편집]

  • 주소(朱邵) : 1417년(태종 17년)에 문과 급제 후 경술과 문장이 출중하여 왕자사부(문종), 대군사부(안평, 수양대군경연을 담당), 응교, 지군주를 지냈으며 스승에의 예우로 1455년(세조 원년) 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 주선림(朱善林) : 경주 태생으로 1504년(연산군 10년)에 문과 급제 후 전적, 현감, 감찰을 지냈다.
  • 주의(朱懿) : 울진 태생으로 1521년(중종 16년)에 문과 급제 후 부사를 지냈다.
  • 주양우(朱良佑) : 한성 태생으로 1534년(중종 29년)에 문과 급제 후 군수를 지냈다.
  • 주덕원(朱德元) : 한성 태생으로 1573년(선조 6년)에 문과 장원 후 군수를 지냈다.

과거 급제자[편집]

웅천 주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5명을 배출하였다.[2]

문과

주덕원(朱德元) 주선림(朱善林) 주소(朱邵) 주양우(朱良佑) 주의(朱懿)

무과

주건(朱楗) 주광현(朱光顯) 주양(朱{牛+梁}) 주몽룡(朱夢龍) 주얼동(朱於里同) 주응정(朱應貞) 주후재(朱厚載)

생원시

주계정(朱繼程) 주덕원(朱德元) 주사영(朱士英) 주선림(朱善林) 주세응(朱世應) 주소(朱邵) 주신언(朱愼言) 주양우(朱良佑) 주우(朱祐) 주의(朱懿) 주필대(朱必大) 주필혁(朱必赫) 주환벽(朱奐璧) 주휘(朱暉) 주흡(朱洽)

진사시

주경림(朱慶林) 주덕원(朱德元) 주붕(朱鵬) 주양우(朱良佑) 주우(朱祐)

인구[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