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대공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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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2d Battalion, 27th Infantry.jpg
낙동강 전투 당시의 보병대
교전국

유엔의 기 유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미국 더글라스 맥아더
미국 월턴 워커
미국 존 H. 처치
미국 에드워드 A. 크레이그
미국 윌리엄 B. 킨
대한민국 백선엽
대한민국 김백일
대한민국 유재흥
대한민국 김홍일

오스트레일리아 딕 크레스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용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무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리권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웅
병력
140,650명 105,800명
피해 규모

미국 미국

영국 영국

  • 3명 사망[1]
  • 17명 부상[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34,000명
Naktong Defense (ko).jpg
낙동강 대공세 당시의 지도

낙동강 대공세한국 전쟁 당시 1950년 9월 1일부터 9월 15일까지 이어진 북한군의 공세로 대한민국유엔에 대한 공격이었다. 조선인민군국제연합 사령부가 구축한 부산 교두보를 돌파하기 위한 마지막 공격이었지만 이는 실패로 끝났다. 전쟁 초기 북한군은 유엔군을 만날 때마다 이들을 패배시켜 남쪽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8월부터 유엔군과 한국군은 230km에 달하는 한반도의 남동쪽 끝인 부산 교두보로 후퇴할 수 밖에 없었지만 전쟁이 시작된 이래로 처음 연속적인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 방어선으로 북한군은 측면을 뚫거나 압도적인 수로 방어선을 돌파할 수 없었다. 교두보에 대한 북한군의 공격은 둔화되었고, 8월 말 모든 공격 축선이 상실되었다. 교두보를 따라 발생하는 장기간의 분쟁에 대한 위험을 발견한 이후, 북한 수뇌부는 유엔군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9월에 대규모 공세를 준비했다.

북한군은 5개의 공격축을 바탕으로 교두보를 향한 동시다발적인 공세를 계획했다. 9월 1일 마산, 경주, 대구, 영천낙동강 돌출부 등의 도시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이후 부산으로 이어지는 도로에 대해 양측이 다투며 2주 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몇몇 지역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은 기술적, 수적 측면에서 우세한 유엔군으로부터 그들의 점령지를 지켜낼 수 없었다. 이 공세에서 정지된 북한군은 이후 인천 상륙 작전에서 궤멸한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