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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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전투
한국 전쟁의 일부
Hill 99 Attack.jpg
교전국

유엔 국제연합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
지휘관

대한민국 신성모
대한민국 김홍일
대한민국 김백일
대한민국 김석원
미국 존 B. 콜터
미국 존 H. 처치

미국 월턴 워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용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책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무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웅
군대

미국 제24보병사단
오스트레일리아 제77비행중대
대한민국 제1군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제2군단

경주 전투미국 주도의 유엔군과 북한군이 한국 전쟁 초인 1950년 8월 31일부터 1950년 9월 15일까지 경주시를 두고 싸운 전투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안강-기계 전투라고도 불린다. 이 전투는 넓은 의미에서 부산 교두보 전투의 일부였으며, 다부동 전투를 비롯한 같은 시기의 전투만큼 규모가 컸다. 유엔군은 이 전투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몇 번이고 격퇴한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경주시 안강읍 북쪽의 "경주 협곡"이라 불리는 지역을 사수한 이후 대한민국 육군 제1군단조선인민군 제2군단을 상대로 기습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이는 낙동강 대공세의 일부로, 조선인민군이 최후의 반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대한민국 군대는 이미 사기가 꺾인 상황이었고 강력한 방어선을 고수하기 위해 분투했지만, 그들의 거점에서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미국 육군은 인민군의 공격을 격퇴하기 위해 대한민국 육군을 지원하게 되었다. 전투는 포항과 안강을 되찾기 위해 치열하게 벌어졌다. 조선인민군은 경주 협곡을 통과해 부산에 위치한 유엔 기지를 공격하고자 했다. 그러나 유엔의 우세한 공중 및 항공 지원으로 미국 육군과 대한민국 육군은 2주 간의 전투 끝에 조선인민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배경[편집]

부산 교두보[편집]

한국 전쟁의 발발과 북한의 대한민국 남침 이후, 조선인민군은 대한민국 육군과 대한민국의 붕괴를 막기 위해 그곳에 파견된 유엔군에 비해 병력과 무기 면에서 우위에 있다는 것을 이점으로 살렸다.[1] 조선인민군의 전략은 유엔군과 대한민국 육군을 공격적으로 밀어붙인 이후 부대의 양측면을 포위하는 것으로, 이는 북한군이 적군의 모든 방향을 포위하고 적을 무질서하게 흩뜨리고 장비를 두고 가게 만들었다.[2] 6월 25일 침공을 시작해서 7월과 8월 초에 이를 때까지 조선인민군은 이 전략을 통해 효과적으로 유엔군을 격파하고 남쪽으로 진격했다.[3] 그러나 미국 제8군의 지휘 하에 유엔군이 8월에 부산 교두보를 구축했을 때, 유엔군은 한반도 남쪽에서 연속적인 방어선을 설치하고 이를 고수해 조선인민군이 측면으로 우회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유엔의 효율적인 병참으로 인해 유엔군의 무기와 병력이 보충되면서 조선인민군의 수적 우세는 장점을 잃어버렸다.[4]

조선인민군이 8월 5일 부산 교두보에 접근했을 때 그들은 교두보를 향해 4개의 주요 공세로를 형성하면서 이전과 같은 전면 공격을 시도했다. 8월 내내 조선인민군의 제6사단제7사단미국 제25사단마산 전투에서 혈전을 벌였다. 조선인민군은 곰암리[5]전투산[6]에서 조우하기 전까지 유엔군의 반격을 격퇴했다. 이 공격들은 제대로 무기를 지급받고 충분한 예비군을 보유한 유엔군이 조선인민군의 공격을 격퇴하면서 정지되었다.[7] 마산시 북쪽에서는 조선인민군 제4사단미국 제24보병사단낙동강 돌출부 지역에서 맞붙었다. 제1차 낙동강 돌출부 전투에서 조선인민군 사단은 수많은 미군 예비군의 반격으로 낙동강 맞은편에 교두보를 유지할 수 없었고, 8월 19일 조선인민군 제4사단은 전 병력 중 50%가 피해를 입으며 낙동강 좌안으로 철수했다.[8][9] 대구 지역에서는 대구 전투 기간에 5개의 조선인민군 사단이 유엔군 3개 사단에 여러 번 공격을 가했으나 격퇴되었다.[10][11] 특히 볼링장 전투에서는 격전이 벌어져 조선인민군 제13사단이 거의 궤멸되었다.[12] 동해안에서 3개의 조선인민군 사단이 포항 전투에서 격퇴되었다.[13] 모든 전선에서 조선인민군 병력은 이러한 패배에 크게 동요되었는데, 처음으로 그들의 전략이 유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4]

9월 공세[편집]

조선인민군은 새로운 공세를 계획하였고, 이 과정에서 인민군 사령부는 유엔군의 측면을 치는 것이 유엔 해군의 지원으로 불가능하다고 결론내렸다.[12] 그 대신, 인민군은 교두보를 돌파하기 위해 전면 공격을 사용해 전투에서 승리를 달성하는 기미조차 제거하고자 했다.[4] 소련에서 온 정보를 바탕으로 조선인민군은 유엔군이 병력을 강화하고 있으며 이들이 공세를 곧 수행하거나 전투에서 패배할 것이라는 것을 인지했다.[15] 부차적인 목표는 대구를 포위하여 이곳에 주둔한 유엔군 및 대한민국 육군의 부대를 격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임무의 일부로써 조선인민군은 대구로 이어지는 보급선을 처음으로 차단하고자 했다.[16][17]

8월 20일, 조선인민군 사령부는 그들의 예하 부대에게 작전명령을 하달했다.[15] 조선인민군은 유엔군의 방어선을 향해 5개의 동시 공격을 요구했다. 이 공격은 유엔 방어병력을 압도하고 조선인민군에게 적어도 유엔군을 후퇴시킬 수 있는 장소 한 곳을 제공해 돌파구를 만들어줄 수 있었다. 5개의 전투단이 형성되었다.[18] 가장 동쪽에 위치한 부대는 조선인민군 제12사단제5사단으로, 이들은 대한민국 육군 제3사단수도사단포항경주에서 축출하는 임무를 맡았다.[19]

전투[편집]

1950년 9월 부산 교두보 전투의 지도에 나타난 경주 협곡은 지도의 동북부 끝에 있었다.

조선인민군은 한반도 동해안에 위치한 유엔군의 우측면을 먼저 공격했다.[20] 조선인민군 제2군단은 북쪽과 동쪽에서 벌어질 경격을 9월 2일로 계획하고 있었지만, 5,000명의 병력을 보유한 조선인민군 제12사단은 계획보다 일찍 산맥을 통과해 전진하던 중 포항과 기계에서 패배한 후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21] 제12사단은 음식 보급과 무기, 탄약이 부족했고, 병사들은 사기가 저하된 상황이었다.[22][23] 8월 26일 포항과 기계에 있던 미국 및 대한민국 장교들은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그들은 부산 교두보에 대한 적의 마지막 위협이라고 생각한 이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서로 축하하고 있었다.[21]

초기 공격[편집]

조선인민군 제12사단과 만난 첫 부대는 수도사단이었다.[22] 8월 27일 오전 4시 기계 북쪽에서 대한민국 수도사단 제17연대에게 조선인민군은 공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연대 전체가 굴복해 후퇴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제18연대 역시 측면이 노출되어 동쪽으로 후퇴했다. 철수하는 동안 제17연대는 기계읍을 빼앗겼고, 수도사단 전체가 기계읍에서 남쪽으로 3km 떨어진 지점까지 후퇴했다.[24][25]

8월 27일 대구에서 브리핑을 받은 후 미국의 월턴 워커 중장은 이러한 상황 전개에 우려를 표했다. 1달 전에 한국에 도착했던 존 B. 콜터 소장도 여기에 참석했다.[22] 30분간의 브리핑이 끝나고 워커는 콜터에게 동부의 대한민국 육군을 관찰하고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25] 콜터는 경주로 가서 12:00에 그곳에 도착했다. 한편 워커는 공식적으로 제8군의 부사령관으로 콜터를 임명한 이후 대한민국 제1군단의 지휘를 그에게 맡겼다. 이 때 제1군단은 수도사단과 대한민국 제3사단, 미국 제21보병연대의 제3대대, 미국 제9보병연대, 제73중전차대대 C 중대를 예하 부대로 두고 있었다. 콜터는 이 부대를 잭슨 특수임무부대로 재명명하고 그의 본부를 대한민국 제1군단과 주한 미군 군사 고문단이 사령부로 사용했던 건물에 본부를 수립했다..[25]

콜터는 경주에 도착한 그 날 대한민국 제1군단이 급속히 와해되고 있고 사기가 저하되었음을 발견했다.[26] 콜터는 기계 지역에 형성된 조선인민군의 돌출부를 제거하고 포항에서 북쪽으로 12km 떨어진 월포리영천 북쪽 고지까지 진격하는 임무를 맡았다. 영천과 월포를 잇는 이 선은 기계에서 북쪽으로 16km 떨어진 곳에 위치했다.[27] 콜터는 잭슨 특수임무부대가 기계의 첫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최대한 빠르게 공격을 개시할 예정이었다. 워커가 그의 명령을 철회하고 경주에서 상황을 호전시키고 신속히 진격하라는 지시를 내린 이후, 이를 콜터에게 보고하기 위해 8월 27일 미국 제21보병연대는 대구 북쪽의 거점으로 이동 중이었다.[25] 연대는 대구에서 오전 10시에 출발해 오후에 경주에 도착했다. 콜터는 즉각적으로 제3대대를 수도사단 전방에 위치한 지역인 안강읍으로 보냈다.[28]

UN군 반격[편집]

콜터의 공격 계획은 8월 28일로 연기되었다.[29] 수도사단의 사단장이었던 김홍일 소장은 그가 공격을 할 수 없다는 것과 사상자가 너무 많이 발생했다는 것, 그리고 대한민국 육군이 지쳐있다는 것을 콜터에게 말했다. 포항에 있던 조선인민군 제5사단은 남쪽으로 다시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적과 충돌한 대한민국 제3사단은 철수하려는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주한미군 군사 고문단은 제3사단의 사단장이었던 여단장 김석원에게 반격을 해줄 것을 충고했으나, 김석원은 이를 거부했다. 다음 날 김석원은 포항에 있는 그의 여단본부를 철수시킬 예정이라고 말했다.[28] 주한미군 군사 고문관은 고문단이 포항에 남아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김석원은 매우 히스테리해졌지만, 체면을 구기지 않기 위해 그곳에 남아있기로 결정했다. 그 날 워커는 대한민국 육군과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 신성모에게 특별연설을 발표했다. 그는 부산 교두보에서 대한민국 군대가 방어선을 고수해줄 것을 요구했고, 남아있는 유엔군에게 가능한 확고하게 그들의 거점을 방어해 줄 것과 필요하다면 북한군이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반격을 해줄 것을 강조했다[30]

압력을 직면한 상황에서 대한민국 군대의 혼란은 조선인민군의 엄청나게 큰 것이어서 잭슨 특수임무부대가 공격을 개시할 수 없을 정도였다. 미국 제21보병연대는 안강에 위치한 집결지에서 28일 아침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대한민국 제17연대는 그 날 밤 기계 북쪽에 위치한 고지의 거점을 빼앗겼고, 공격은 취소되었다. 대한민국 육군은 그들의 거점을 오후에 되찾았지만 밤에 다시 빼앗겼다. 같은 시간 조선인민군 제5사단의 일부 부대원은 포항 남서쪽에 위치한 대한민국 제3사단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콜터는 제21보병연대에게 이 돌파를 격퇴하라고 명령했다. 8월 29일 제21보병연대의 B 중대가 제73중전차대대 B 중대의 지원 하에 성공적으로 포항 남쪽 끝에서 북서쪽을 향해 반격을 가했다. 대한민국 부대가 그들을 따라갔다. 이후 미군 부대는 포항에서 철수했다. 그 날 밤 대한민국 부대도 철수했고, 다음 날 미군 보병-전차 부대가 하루 전 실시했던 전투를 반복했다. 제21보병연대는 이후 대한민국 제3사단의 포항 북쪽 및 북동쪽 구역을 인계받았다.[30]

8월 29일, 미국 전차와 포병의 지원을 받은 수도사단은 기계를 탈환하고 조선인민군의 반격에 맞서 밤 동안 지역을 방어했다. 그러나 새벽에 이들은 다시 기계를 빼앗겼다. 미국 공군은 기계 지역에서 빠른 템포로 공격을 지속했다. 대한민국 병력은 공군의 공격으로 사망한 많은 조선인민군의 시체를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그들은 군복에서 민간인으로 위장한 옷가지들도 많이 발견했다.[30] 기계 지역에서 미국 공군이 활동한 이후, 미국 해군의 선박들은 동해안을 따라 진격하는 조선인민군 제5사단을 정지시키는 것을 돕기 위해 노력했다. 순양함 1척과 구축함 2척이 포항 북쪽으로 8km 떨어진 흥해 지역에서 화력을 집중시켰다. 흥해 지역에서 조선인민군 제5사단은 집결 중이었고, 전방 보급기지가 이곳에 위치했다. 3척의 함선은 8월 29일부터 30일까지 대한민국 제3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1,500발의 포를 쏘았다. 이러한 항공 및 함선 지원에도 불구하고 8월 31일까지 기계와 포항에서는 전투가 지속되었다.[31]

참고[편집]

인용[편집]

자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