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일 (18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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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일
출생1898년 9월 23일
대한제국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오송동
사망1980년 8월 8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사인노환 (자연사)
거주지대한제국의 기 대한제국->중화민국의 기 중화민국->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성별남성
국적대한제국의 기 대한제국, 중화민국의 기 중화민국,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별칭중국식 가명은 왕웅
학력귀주 육군군관학교 졸업
직업독립운동가·군인·공무원·정치인·사회기관단체인
김홍일
출생지 평안북도 용천
복무 국민혁명군 (중화민국)
대한민국 육군
복무기간 1926년 ~ 1951년
최종계급 중장
서훈 건국훈장 국민장
을지무공훈장
태극무공훈장

김홍일(金弘壹, 1898년 9월 23일 ~ 1980년 8월 8일)은 중화민국의 군인이자 일제 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가 출신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이다.

중국군 현역 군인 신분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김구를 도와 윤봉길, 이봉창 거사를 지원하였고 한국 광복군 참모장을 거쳐 국군 준장으로 6.25 전쟁에 참전하였다. 1961년 5·16 군사 정변 직후에는 외무부장관을 지냈다. 평안북도 출신으로, 본관은 김해이다. 초명은 홍일(弘日), 호는 일서(逸曙). 별명은 최세평(崔世平), 중국어 이름은 왕웅(王雄)·왕일서(王逸曙)·왕부고(王復高).

생애

독립운동가

평안북도 용천 출생으로 오산학교에서 남강 이승훈, 고당 조만식 선생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이후 오산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일경의 감시와 탑압을 피해 중화민국으로 망명하였다. 1920년 구이저우의 육군군관학교를 졸업, 국민혁명군 소위로 임관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 1923년에는 한국의용군사령관을 지냈다.

국민혁명군 활동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에 투신하여 1926년 중국국민혁명군 동로군 소교 참모로서 북벌전쟁에 참가하였다. 이후 연대장, 군단 및 집단군 참모장, 사단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39년에는 외국인으로서는 최초의 중앙군 소장에 이르렀다. 1943년에는 중국 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 193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김구 주석의 요청으로 폭탄을 제작하여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지원하였다.

광복 이후

1945년 11월 국민혁명군에 다시 복귀하여 두율명 소장의 동북보안사령부 고급 참모 겸 한교사무처장으로 부임하였고, 중장(2성장군)으로 남경의 국방부 정치부 전문위원으로 부임하였다.

군 복무

장군으로 입대

1948년 12월 10일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지시로 육군 준장으로 임관되었다. 이는 그의 실전경험에 바탕을 둔 탁월한 지휘력을 인정받아, 12329의 군번을 부여받고 특별히 육군 준장으로 임관하였던 것이다. 1949년 1월 육군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한국 전쟁

한국전쟁 때는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으로 한강 다리를 폭파, 북한군의 한강 도하를 5일간 저지하여 미국의 지상군 참전을 위한 시간획득에 기여하였다. 초기작전시 후퇴하는 상황에서 국군 제1군단을 창설하여 수도사단 1, 2사단을 효과적으로 지휘하여 진천-음성-청주 축선에서 미군과 협조된 지연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낙동강선 방어시 기계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등 1군단장으로서 반격작전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 뒤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정치 활동

중국 대사

1951년부터 1961년까지 주 중화민국 대사를 역임하였다. 중화민국 대사로 있던 1960년 4월 4·19 혁명이 발생하자, 김홍일은 그 원인으로 최고조에 달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악용한 기인하는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이번 사태가 극히 불행한 사건임을 시인하면서 중화민국에서 교육받은 대사는 기자들에 대하여 이번 사태는 6개 도시에서 계엄령이 선포되어 진정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적색음모를 방지할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김 대사는 본국 정부를 옹호하여 말하였다. 그러나 김 대사는 그가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현재의 이 폭동이 어느 정도까지 공산주의자들의 조작에 의한 것인지 단정할 수 없다고 부언하였다.[1], 1960년 무렵 모종의 정변계획을 세우고 강원룡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응답을 받지 못하였다.[2]

5.16 군사 정변

5·16 군사 정변 무렵

그 뒤 5.16 군사정변 이후 5월 20일 군사혁명위원회[3]가 구성되자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의 한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961년 5월 20일,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의하여 외무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4] 잠시 외무부장관을 맡았다.

그러나 박정희 등의 민정 참여를 반대하여 야당 정치인의 대열에 섰다.

야당 정치인

1965년 박정희 정권의 한일협정 체결에 반대하면서 정계에 투신하여 1967년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였으나 당권이 김학규 등에게 넘어가고 당선자를 내지 못하면서 한국독립당은 결국 몰락하고 말았다.

1966년 12월 24일 야당통합과 대통령후보 단일화 추진을 위한 위원회가 설치되자 추진위원으로 위촉되었다.[5]

1969년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받았고, 을지무공훈장, 태극무공훈장 등도 수훈한 바 있다. 중화민국 정부로부터도 충근(忠勤)·대수운마(大綬雲摩)·대수경성(大綬景星) 등의 훈장을 받았다.

만년

서독을 방문중인 한국의 국회의원 6인 중(왼쪽부터 다섯번째) - 1970년 11월 10일

1971년 5월 10일에는 운영위원회를 열고 유진산양일동 등 운영위원회 부의장들의 사퇴서를 수리하고 김홍일을 신민당 당수 권한대행으로 임명한다.[6] 신민당 당수가 되었으나 당내 내분을 겪은 뒤 1972년 당수직을 사임하였다.

이후 광복회 회장을 거쳐 국정자문위원에 위촉되었다.

수상 경력

연보

  • 1898년 9월 평북 용천 출생
  • 1920년 1월 중국 귀주강무학교 졸업 및 소위 임관
  • 1926년 1월 중국 국민혁명군 북벌에 참여 (동로군 인사참모 소령)
  • 1927년 중국 국민혁명군 대령 진급
  • 1927년 중국 국민혁명군 독립경비연대 부연대장 및 1대대장
  • 1928년 중국 국민혁명군 22사단 독립경비연대장, 용담전투 승리공훈, (공로장 수여받음)
  • 오송요새사령부 참모장, 상해 병공창 병기창주임, 19로군 후방 정보국장
  • 193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김구를 도와 거사에 쓸 폭탄을 구해 주다.
  • 1933년 중국군 제2로군 총지휘부 참모
  • 1938년 중국군 제4군단 102사단 참모장
  • 1939년 중국 중앙군 소장진급 (중앙군 최초 한국인 장성), 중국군 19집단군 참모처장 부임
  • 1941년 중국군 19집단군 19사단장 대리로 부임하여 중일전쟁 상고회전을 승리로 이끔 (대 일본군 33, 34사단)
  • 1943년 중국군 육군대학 졸업
  • 1944년 중국군 신편 2병단 참모장, 중국 지식청년군 부참모장
  • 1945년 4월 한국광복군사령부 참모장
  • 1945년 11월 중국군 육군 소장으로 복귀, 동북보안사령부 고급 참모 및 한교사무처장 부임
  • 1947년 중국군 중장 진급 및 중화민국 국방부 정치부 전문위원
  • 1948년 귀국
  • 1948년 12월 국군 입대 및 육군준장 임관 (창군 최초 장군임관자)
  • 1949년 1월 육군사관학교 교장
  • 1949년 3월 육군소장 (육군 최초)
  • 1950년 6월 육군참모학교 교장
  • 1950년 6월 시흥지구 전투사령관
  • 1950년 7월 육군 제 1군단장
  • 1951년 3월 육군중장 진급
  • 1951년 3월 예편
  • 1980년 8월 타계

일화

이승만 대통령은 1951년 9월 그를 중화민국 대사로 임명한 자리에서 “김 장군이 군인으로서 우리나라에 기여한 공로를 생각하면 오성 장군으로 제대시켜야 하는데, 우리 군에 그런 제도가 없다고 해서 그리 못했습니다. 하지만 김 장군은 우리나라 별 세 개에다 중국 별 두 개를 보태면 오성 장군과 마찬가지”라며 그의 군공(軍功)을 치하하며 위로했다. 이때부터 그를 오성 장군이라는 별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저서 및 논문

저서

  • 《대륙의 분노》

논문

  • 《국방개론》
  • 《군대정신교육》

같이 보기

주석

  1. “共産主義者들惡用”. 동아일보. 
  2.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3. 나중에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변경
  4. “革命內閣構成을發表”. 동아일보. 
  5. 박경수, 《장준하(민족주의자의 길)》 (돌베개, 2006) 347페이지
  6. 이영훈,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에디터, 2006) 111페이지

참고 문헌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태극무공훈장에 빛나는 6.25전쟁 영웅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3)
  • 국방부, 호국전몰용사공훈록 제3집 (국방부, 1997)
  • 국방부, 자유민에게 전해다오 제1집 (대한민국 국방부, 1955)
  • 육탄 10용사 현충회, 육탄 10용사 (도서출판 법정, 1986)
  • 육군본부, 한국의 전쟁영웅들, (육군본부, 1992)
  • 이원복, 호국용사100선 (명성출판사, 1976)
  • 병학사, 내 젊음 조국에 (병학사, 1987)
  • 국방부, 한국전쟁사 제8집 (국방부, 1975)

바깥 고리

전임
최덕신
제7대 육군사관학교 교장
1949년 1월 15일 ~ 1950년 6월 10일
후임
이준식
전임
이범석
제3대 주 중화민국 대사
1951년 10월 ~ 1960년 6월[1]
후임
백선엽
전임
정일형
제7대 외무부 장관
1961년 5월 21일 ~ 1961년 7월 21일
후임
송요찬
전임
박순천
제7대 국회의원(서울 마포구)
1967년 12월 17일 ~ 1971년 6월 30일
신민당
후임
노승환
전임
유진산
신민당 대표 권한대행
1971년 5월 12일 ~ 1971년 10월 16일
후임
김홍일
전임
김홍일
(대표 권한대행)
신민당 대표
1971년 10월 16일 ~ 1972년 9월 28일
후임
유진산
  1. 외교통상부. 《한국 외교 60년》 (PDF). 523쪽. 

틀:1999년-이 달의 독립 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