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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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떡
호떡 단면

호떡(胡-)은 한국중국 등에서 먹는 간식으로, 찹쌀이나 밀가루를 반죽하여 만든 설탕이 들어있는 뜨거운 이다. 열량이 230칼로리정도 된다.

개요[편집]

설탕과 같은 속을 둥글고 흰 떡이 둘러싼 형태로, 겨울에 먹는 대표적인 음식이다. 보통 계피맛이 나는 흑설탕을 넣지만 요즘엔 흑설탕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해 밀가루를 첨가하거나 땅콩 등의 견과류를 갈아넣어 점성을 높이기도 한다.

그리고 호떡의 떡은 보통 흰색이지만 녹차가루을 넣어 색이 녹색인 녹차호떡으로 만들 수 있다.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주로 팔린다.

역사[편집]

배경[편집]

제1차 세계대전1918년 끝난 이후 아시아 전쟁으로 후퇴를 했던 유럽 자본으로 일본 경제는 어려움을 겪었고, 1923년 9월 1일에는 도쿄 일대에 초대형 관동대지진이 발생했다. 지진 피해를 복구하기 위한 확대한 재정지출은 금융위기로 이어졌고, 이것은 금융공황을 낳았다. 1920년대 내내 일본 경제는 전후 반동공황, 지진 재해로 인한 공황, 금융공황 등 연이은 공황의 타격을 받았다. 노동자들은 해고와 임금 삭감을 당했으며, 형편없이 낮은 임금을 받았다.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식계획을 거치며 농토를 잃은 농민과 중국인 쿨리들이, 한반도로 유입되었다. 쿨리는 일반적으로 일종의 ‘집단 채무 노예’, 또는 사실상의 노예로서 ‘아무 일에나 투입되는 중국인 또는 인도인 노동자’를 지칭하는데, 이 말은 힌디어의 ‘क़ुली(Kuli)’(‘날품팔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이를 1727년 독일인 앙겔베르트 캄페르 박사가 네덜란드와 교역했던 나가사키의 일본인 노역자를 ‘쿨리(Coolie)’로 부른데서 유래하여, 이 말은 곧 중국인 노동자나 인도인에게도 적용되었고, 이것이 다시 한자어인 ‘쿠리’(苦力)으로 음역됐다.[1]

이러한 러쉬 행렬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재조선 중국인이 ‘적국민’으로 취급받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가수 김정구의 《왕서방 연서》는 1938년 봄에 나왔다.)[2]

유래[편집]

1927년 봄에는 매일 1천 명이 넘는 쿨리가 인천에 상륙했다. 한국에 정착해 있던 화교들은 재빨리 가난한 고객에게 팔기에 가장 좋은 음식을 개발했는데, 이것을 ‘오랑캐의 떡’이라고 하여 ‘호떡’이라 불렀다. 원래의 이름은 ‘화소’(火燒) 또는 ‘고병’(枯餠)이었지만, 당시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일본인들은 ‘지나빵’(支那パン)이라 불렀다. 쿨리가 많은 곳에는 어디에나 호떡집이 있었고, “호떡집 불났다”라는 속어도 생겼다.[3]

상업용 상품[편집]

호떡의 재료를 담아 파는 제품이 삼양사, 오뚜기, CJ제일제당 등의 업체에서 개발되어 판매되고 있다. 호떡을 가정에서 만들 수 있게 고안된 상품이다.

기타[편집]

중국식 호떡[편집]

중국식 호떡

중국식 호떡은 호떡의 일종으로, 납작하게 만든 형태의 공갈빵이다. 공갈빵과 비슷하게 속이 비어 있으며, 내부에 설탕이 입혀진 것이 특징이다. 일부 노점상에서는 버블호떡이라는 명칭으로 판매하기도 한다.

같이 보기[편집]

주석[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