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카 도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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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카 도너

출생 1900년 6월 15일(1900-06-15)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사망 1992년 3월 19일 (91세)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사인 병사(노환)
매장지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동작구 사당2동 국립서울현충원
거주지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 (1900~1933)->미국 미국 워싱턴 D.C(1933~1945)->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1945~1960)->미국 미국 하와이(1960~1965)->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 (1965~1969)->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특별시(1970~1992)
별칭 이금순 또는 이부란
학력 -
직업 대통령 영부인
종교 개신교
배우자 헬무트 뵈룅(1920 - 1923, 이혼), 이승만(1934 - 1965)
자녀 양자 이강석(사망), 양자 이인수
부모 부:루돌프 도너
친척 며느리:조혜자, 손자:이병구, 손자:이병조

프란체스카 도너(독일어: Franziska Donner 프란치스카 도너[*], 영어: Francesca Donner Rhee, 1900년 6월 15일 ~ 1992년 3월 19일)는 대한민국의 제1, 2, 3대 대통령 이승만의 두 번째 아내로, 한번 결혼했으나 이혼했고, 1931년 빈 회의에 참석차 오스트리아를 방문한 이승만과 만났다가 그와 재혼하였다.

1960년 이승만의 하야 이후 함께 하와이에 망명하였고, 이승만 사후에는 오스트리아로 가 있다가 1970년 대한민국 정부의 허가로 귀국하였다. 오스트리아 출신 귀화인으로 대한민국의 1번째 영부인이었다. 한국어 이름은 이금순 또는 이부란(李富蘭)이다. 별칭은 호주댁[1] 이다.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프란체스카 도너는 1900년 오스트리아 에서 가톨릭 가문[2]오스트리아 사업가 루돌프 도너의 3명의 딸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20년 독일의 자동차경주 선수 헬무트 뵈룅과 결혼하였으나 3년만에 이혼하였다.

이승만과의 결혼[편집]

1934년 제네바에서 국제 연맹 회의에 참석차 방문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 이승만(李承晩)을 처음 만났고, 모친의 반대에도 재혼을 강행하여 같은 해 10월 8일 미국 뉴욕 클레어몬트 호텔에서 결혼했다.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린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너

그는 한때 ‘호주댁(濠洲宅)’으로도 불렸는데, 이는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너의 존재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한인 교포들과 독립운동가들이 그를 여사라 부르지 않고 ‘호주댁’이라 부른 데에서 비롯한다.[출처 필요] 참고로 ‘호주댁’은 그의 출신 국가인 오스트리아가 이름이 비슷한 나라인 오스트레일리아로 와전돼서 붙은 이름이다. 한때는 미국 출신이라는 설도 돌기도 했다.[출처 필요] 이승만은 그에게 직접 이금순, 이부란이라는 한국어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다.

한국 입국[편집]

한국 방문 중 경교장을 찾아온 피치 박사 부부와 함께 (1946년)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프란체스카 도너, 가운데는 김구, 앞줄 왼쪽은 피치 박사 부부, 앞줄 오른쪽은 조완구, 뒷줄 왼쪽 첫 번째는 엄항섭, 세 번째는 이기붕, 네 번째는 안우생, 가운데는 안미생, 오른쪽 첫 번째는 선우진, 네 번째는 서영해

1945년 10월 이승만과 함께 귀국하였다. 이후 돈암장이화장에서 거주하다가 이승만은 1948년 5월 30일에는 국회의장에, 8월에는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프란체스카는 이승만을 따라 경무대로 이주하여 살았다. 1948년 1월 12일 UN한국위원회가 서울에 도착하자 이승만을 따라 회의에 참관하였다.

이후 남편 이승만이 제헌 국회의원과 국회의장에 당선되고,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자 영부인 자격으로 이화장에서 경무대에 입주하였다. 그러나 경무대 입주 직후 남편 이승만을 만나는 방문객 문제에 일일이 개입하여 보좌관들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그는 해방 직후 남편 이승만을 찾아오던 정치인들 중 안재홍을 무시하고, 냉소적으로 대접했다. 결국 안재홍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는 이승만에게 동참했지만, 등을 돌려 1950년 제2대 총선에는 독자적으로 출마하게 된다. 이승만의 측근 윤치영의 비서를 지냈던 최기일에 의하면 프란체스카는 이승만을 찾아온 손님들 중 송필만, 고희동을 무시하였다.

제1공화국 시절[편집]

남편 이승만임영신과 불륜관계라는 소문이 돌자 마자 이유 없이 임영신을 해고하였고, 그 뒤 윤치호의 딸 윤노라가 그녀의 시중을 들다가 이승만의 비서인 이기붕의 부인 박마리아윤치영의 부인 이은혜가 프란체스카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 그러나 양반 출신의 고고한 이미지의 이은혜를 부담스러워한 반면 가난한 집안 출신이며 평소에 싹싹한 박마리아를 편애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박마리아와 그녀의 남편 이기붕이승만의 최측근으로 발탁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박마리아는 그녀의 총애를 자신의 남편 이기붕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이용한다.

1960년 5월 29일자 경향신문.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성명 발표 후 하와이 망명가는 모습

청와대의 방문객과 접대 문제에 일일이 개입하면서 이승만의 보좌관이었던 박용만과 외무장관 장택상 등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장택상은 프란체스카에게 밉보였던 박용만을 특별히 배려하여 그녀의 시선과 멀어지도록 자신의 주변으로 발령시켰다.

1955년 11월 중앙대학교 대학원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3]

생애 후반[편집]

두 번째 남편 이승만 한국 대통령

1960년 쇠약해진 이승만을 대신해 여러 정책 문제를 자신이 스스로 처결했다. 얼마 뒤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자진 사퇴한 후 하와이로 휴양차 출국하자 함께 하와이로 떠났다. 거주지를 정하지 못해 수시로 거처를 옮겨다니던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너는 하와이 한국인 교포단체의 유지인 최백렬(崔伯烈), 오중정(吳重政), 윌버트 최 등의 도움으로 한 빌라에 머무르다가 이승만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하와이의 요양원으로 옮겨졌다.

1965년 7월 19일 이승만이 사망하고 그 뒤로도 하와이에서 거주하다가 외무부 장관이 발급한 특별 여권을 소지하고 오스트리아로 갔다. 이후 친정 동생, 친정 언니의 집을 전전하였다.

1970년 5월 16일대한민국 정부의 배려로 귀국하였다.[4] 이후 청와대가 주관하는 각종 행사에 귀빈으로 초대되었다. 이후 양자 이인수 내외와 함께 살았다. 만년에는 동작동 국립묘지의 중단에 묻힌 남편 이승만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1987년 이승만의 전직 비서였던 윤치영의 구순 기념 논문 봉정식에 참석하였다. 1990년 소피텔 엠배서더 호텔에서 90회 생일 축하연을 했다. 이 때 오스트리아에 남아 있던 소수 친지들의 방문을 받았다. 1992년 3월 19일 0시경 서울특별시 이화장에서 향년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편집]

3월 23일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영결식을 마친 뒤 동작동 국립묘지의 남편 이승만의 묘소 옆에 안장됐다.

가족 관계[편집]

신혼기간(1932년 미국에서)

저서[편집]

  • 《이승만 대통령의 건강(이승만 연구총서 1)》(출판사 촛불, 2006)

학위[편집]

평가[편집]

이승만의 비서실장을 지냈던 정치인 윤치영의 공보비서로 돈암장을 출입했던 최기일은 그를 상당히 인색하고 냉정하다고 평가했다.

최기일에 의하면 그는 '매우 인색한 사람이었다. 예를 들면, 이 박사의 생신날이 되었을 때 사람들은 집오리고기, 닭고기, 쇠고기 등 온갖 종류의 귀한 식품들을 가져왔다.[6]' 그러나 '그녀는 남은 음식을 돈암장 직원들과 나눌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일부 음식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결국 1주일 후에 음식들이 상했기 때문에 그 전부를 내버려야 했다.[6]'는 것이다.

그는 남북협상, 좌우합작론을 주장하다가 전향하여 이승만을 찾아온 안재홍을 무시하고 냉소적으로 대했다. 이를 본 최기일은 '안재홍 씨가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푸대접을 받고 가시는 것을 보고 나는 조선 사람으로서 분한 마음이 들었다.[6]'고 증언한 바 있다. 윤치영임영신은 "이박사님이 너그러운 성품을 가진 한국 여성과 산다면 좋을 걸"이라고 이구동성으로 한탄하였다 한다.[6]

이승만의 비서인 박용만은 그녀와 수시로 충돌하던 사람 중 한사람이었는데, 그는 이승만 박사가 괄괄한 성품의 첫 부인과 이혼한 이후 그녀와 결혼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이승만이 평생 후덕한 성품의 여성과 결혼하지 못했던 것을 한탄했다.

프란체스카를 연기한 배우[편집]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1. 당시 오스트리아와 오스트레일리아를 착각한 사람들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 프란체스카 도너는 분명히 오스트리아 출신이나, 오스트리아오스트레일리아의 국명이 비슷한 관계로 이런 오해가 생겼다.
  2. Donner는 동유럽 유대인(Ashkenazic Jew)의 성. Millett논문에 따르면 여러 대 위의 집안 배경이 유대인. 이승만 부부와 친하였던 Oliver는 "from the Central European background"라 표현
  3. "중대서 학위 수여 대통령부인등 육명", 경향신문 1955년 11월 07일자 3면, 정치면
  4. 월간조선 2001년 3월호
  5. 이봉수는 이승만의 본처 박씨 소생 장남이다. 이봉수에게 프란체스카는 계모가 된다.
  6. 최기일,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 (생각의나무, 2002) 92페이지

참고 서적[편집]

외부 링크[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