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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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둔도(鹿屯島, 러시아어: Ноктундо)는 조선 시대두만강 하구에 있던 섬으로, 17세기 말 ~ 19세기 초 사이[1]두만강의 퇴적작용으로 인해 강 동쪽의 연해주(러시아 프리모르스키 지방)에 붙어 육지가 되었다.[2]

지리

조산(造山)동에서 남쪽으로 약 4 km 떨어져 있었던 녹둔도는 둘레가 8 km 남짓[3] 되고 면적은 약 4 km²(여의도 면적의 1.5배 정도)[4][5] 였던 것으로 추정된다.[6] 이 섬에서 조선인들은 벼, 조, 옥수수, 보리 등을 재배하였고, 섬 주변에서는 연어, 붕어, 황어, 숭어 등이 주로 잡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1884년 경에는 녹둔도에 113가구, 822명의 조선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주민들 중 다른 나라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2][6][7]

역사

녹둔도는 1430년대세종대왕6진을 개척한 이후 1860년까지 조선이 영토로써 영유권을 유지하였다.[8] 1860년 10월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를 획득한 러시아 제국연해주에 붙은 녹둔도까지 점령하였고, 이후 소비에트 연방을 거쳐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다.

조선 정부는 러시아 제국이 이 땅을 점령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안 뒤 1880년대에 수차례 청나라에 항의하고[9] 러시아 제국과 수교한 1884년부터 10여 차례에 걸쳐 러시아에 녹둔도의 반환을 요구했다.[2] 1885년에는 청나라와 러시아에 3국의 공동 감계안(勘界案)을 제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2] 1890년에는 한성(서울) 주재 러시아 공사를 불러 녹둔도의 반환을 요구하는 의사를 재차 전했으나 러시아 측은 아무런 회보도 하지 않았다.[6]

현황

1984년 11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소비에트 연방 사이의 국경 회담에서 녹둔도 문제가 논의될 것인지 관심을 끌었다.[6] 그러나, 양국은 국경협정(1985년)과 국경설정의정서(1990년)를 체결하면서 두만강의 중심선을 경계로 합의했다.[9] 당시 협상과정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녹둔도 문제를 제기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 성과 없이 녹둔도에 대한 소련의 영유권을 인정하고 말았다.[9][10]

대한민국은 녹둔도에 대한 러시아의 영유를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정부 발행 지도상에 이곳을 한국의 영토로 표시하고 있지도 않다.

관련 항목

각주

  1. 북한·소련 국경분쟁에 국내학계 천명 경향신문, 1984.11.23
  2. 영토분쟁 현장을 가다 <10> 잊혀진 섬 녹둔도 동아일보, 2004.6.10
  3. 세종실록 지리지 함길도 길주목 경원도호부 편에서는 "두만강이 사차마도(沙次亇島)에 이르러 갈라져 5리 정도쯤 흘러서 바다로 들어간다."고 기록하고 있다.
  4. 이이화 (2009년 10월 5일). “못박힌 철조망 앞에서 간도·녹둔도를 기억하다.”. 경향신문. 
  5. 녹둔도의 면적이나 크기는 기록마다 제각각이다. 현재 러시아는 두만강 하구 32 km²를 군사지역으로 설정하고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데, 이 땅 전부를 녹둔도로 보는 견해(서울대 이기석 교수)도 있다. 동아일보(2004.6.10) 위 기사.
  6. 북한·소련 두만강 국경회담 배경 동아일보, 1984.11.15
  7. 19세기말 조선에서 편찬된 아국여지도(俄國輿地圖)에는 녹둔도가 남북 70리(28km), 동서 30리(12km)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녹둔도가 조산(造山) 남쪽에 있었다는 사실과 맞지 않는다. 아국여지도의 녹둔도 가구와 주민 수는 녹둔도 뿐만 아니라 인근의 일부 연해주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까지 포함한 기록으로 추정된다. 동아일보(2004.6.10) 위 기사.
  8. 세종실록 30년(1448년) 8월 27일 첫번째기사 함길도 경흥부(慶興府) 녹둔도(鹿屯島)가 소나무가 잘 되는 곳으로 기재되어 있다.
  9. <지평선> 녹둔도 한국일보, 2008.8.8
  10. 함경북도 나선시 행정구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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