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원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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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선 (1969년)

윤원선(尹源善, 1910년 10월 27일 - 1971년 12월 16일)은 일제강점기의 관료이자 기업인, 대한민국의 행정공무원, 정치인, 기업인이었다. 윤치소와 이범숙의 셋째 아들이자, 대한민국의 서울특별시장, 4대 대통령을 역임한 윤보선의 동생이다.

1935년 조선총독부 농림국 임정과 직원으로 임용되었고, 1948년 8월 해방 직후 정부수립과 동시에 내무부 건설국 서무과장, 1950년 10월 서울 환도 직후에 경기도 내무국장 등을 역임했다. 한때 한국운수의 중역으로도 활동했고, 1960년 경기도지사를 지냈다. 구한말의 개혁자 윤치호의 당조카이며, 제4대 대통령 윤보선의 친동생이자 가수 남궁연의 외종조부이기도 하다. 흥선헌의대원왕 이하응의 장손인 이준용의 서녀 사위이기도 하다. 호는 활천(活泉)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생애[편집]

초기 활동[편집]

1910년 10월 27일 가선대부, 중추원참의 등을 지낸 윤치소(尹致昭)와 중추원의관 이봉하(李鳳夏)의 딸 이범숙(李範淑)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서울특별시장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역임한 윤보선(尹潽善)은 그의 친형이었다. 이승만미국 독립운동 측근이자 내무부 장관, 서울특별시장을 지낸 윤치영(尹致暎)은 그의 삼촌이었다. 조선 말의 개혁사상가, 민권운동가 좌옹 윤치호(尹致昊)는 그의 5촌 당숙이었다.

어머니 이범숙은 전주이씨로 세종대왕의 넷째 아들 광평대군 이여의 후손이었다.

그의 집안은 조선 중기의 형제 정승 윤두수, 윤근수 가문의 후예였으나 5대조 윤발이 관직을 얻지 못했고 고조부 윤득실은 통덕랑에 그쳤다. 고조부 윤득실의 셋째 아들인 증조부 윤취동아산에 대농토를 마련했고, 할아버지 윤영렬, 종조부 윤웅렬 형제가 무관이 되면서 가세를 일으켰다.

그의 당숙 윤치호는 자신의 사촌의 아들들 중 그가 외모가 잘생겼다고 한다. 1934년 11월 6일의 일기에 사촌의 아들들 중 그가 가장 잘생겼다고 하였다. 재동보통학교에 입학, 재동보통학교 재학 중 1926년 1월 17일 조선체육협회가 주관한 한강 빙상 경기에 출전하여 학동부문 최종 결승전에서 3위로 도착했다.[1] 재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 동경고등원예학원(東京高等園藝學院)과 도쿄농과대학(東京農科大學)을 수학했다. 일본 유학중이던 1929년 8월 11일부터 8월 13일까지 원산 송도원에서 개최된 수영강습에 동생 윤한선과 함께 참가, 만기 수료일 수영대회에서 윤한선은 5급, 윤원선은 6급을 받았다.[2]

관료 활동과 기업인 활동[편집]

도쿄농대를 졸업하고 귀국, 1933년 조선총독부 농림국 임정과(林政課) 농림촉탁으로 임용되고, 1941년까지 근무하였다. 1934년 11월 19일 그해 경성여자고보를 졸업한 영선군 이준용의 서녀 이진완과 약혼, 그해 12월 20일 경성부 장곡천정교회에서 결혼하였다. 그의 결혼은 신문과 언론에 보도되었다.[3] 이진완흥선대원군의 증손녀였고, 장인 이준용의 양자가 된 운현궁가 종주 이우는 그의 양 처남이 되었으며, 박영효와도 인척관계가 되었다.

결혼식 피로연은 결혼식 당일 12월 20일 경성부 종로방 명월관(明月館)과 12월 22일 경성 장곡천정(長谷川町, 현 소공동) 조선호텔에서 열렸는데, 이는 그의 5촌 당숙 윤치호가 12월 20일자 일기와, 12월 22일자 일기에 조선호텔 방문을 기록한 일기를 통해 알려졌다. 12월 20일 명월관에는 하객 5백 명이 왔는데 윤치호에 의하면 그 중 150명은 불청객이라 한다.

1935년 6월에는 경성원예전수학원(京城園藝專修學園)에서 주최하는 가정부인원예강좌(家庭婦人園藝講座)에도 출강하였다. 6월 24일부터는 JODK 방송의 오후 원예강좌에 출연하였다.[4] 1939년 다시 조선총독부 농림국 임정과 농림촉탁이 되었다가, 1941년 농림국 임정과 주사가 되었다. 그가 언제 조선총독부 농림국을 사퇴했는지, 사직 시점은 알려진 것이 없다.

1941년 당시 창씨개명이 실시되자 그의 집안과 가문에서는 성씨를 이토(伊東, 이동)으로 단체로 창씨개명하였다. 그러나 윤원선과 그의 형 윤보선 등 몇명은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본명을 사용하였다. 1943년 7월 12일 마루야마 요시히(丸山喜久)의 강원제약주식회사(江原藥業株式會社) 이사가 되고[5], 7월 19일 박창훈(朴昶勳)의 강릉약업주식회사(江陵藥業株式會社)의 이사로 참여했다.[6] 1944년 7월 24일 강릉약업주식회사가 윤덕기(尹德基)가 인수하자 이때에도 강릉약업의 이사로 참여하였다.[7] 이때 모두 명의는 본명인 윤원선으로 나타난다. 1945년 7월 김을한과 함께 조선을 방문한 이우를 방문, 그로부터 미군의 공습 소식을 접하였다.

광복 이후[편집]

해방 이후 강원생약통제주식회사(江原生藥統制株式會社)에 입사, 상무 취체역으로 근무하였다. 1948년 8월 정부 수립과 동시에 다시 공직에 임용, 서기관 내무부 건설국 서무과장, 1949년 3월 4일 다시 서기관과 건설국 서무과장에 유임되었다.[8]

1950년 10월 서울 환도 직후에 경기도청 내무국 서기관이 되고, 10월 15일 내무국장 최유복(崔惟福)의 황해도 내정국장 전출로 경기도청 내무국장이 되었다.[9] 이후 보건부 소관 세출예산 경기도 담당 재무관, 1953년상공부 특허국 심사관 등을 거쳐 1960년 퇴직하였다.

경기도지사 재직과 퇴직[편집]

1960년 초 공직에서 물러나 한국운수(韓國運輸)의 주주가 되고, 그해 6월 4일 한국운수주식회사 주주총회에서 취체역에 선출되고[10], 같은 6월 한국운수 상무로 선출되었다. 1960년 10월 7일장면내각에 의해 경기도지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대통령이 그의 친형인 윤보선이었다. 그러나 지방자치단체장이 관선에서 민선으로 바뀌면서 12월 28일에 퇴임하였다.

1960년 8월 각 시도지사가 관선에서 민선으로 바뀌면서 바로 신민당에 입당, 그해 11월 광역자치단체장 선거에 신민당 공천으로 경기도지사 후보로 입후보하여 확정, 기호 7번으로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60년3.15 부정 선거 관련자로 지목된 내무부 지방국장 출신 최병환에게 사형이 구형되자, 1961년 3월 3일 이태용(민주당), 양일동(신민당), 김의택(신민), 이해익 등 9명과 함께, 3.15 부정선거로 기소중이던 내무부 전 지방국장 최병환의 구명 탄원서를 제출하였다.[11][12] 탄원은 받아들여져 특재 최종 재판에서 최병환은 징역 5년으로 감형되었다.[13]

생애 후반[편집]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 정변 이후, 군정에서 정치정화법(1962년 3월 공포)을 실시할 때 정치정화법 대상자로 선정되었다. 1962년 4월 1일 정당사회단체의 중앙조직 부장 및 중앙위원급 이상과 도의 정부책임자 334명을 정치정화법 심사대상자로 선정할 때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14] 1963년 2월 28일 정치정화법 대상자에서 해제되었다.[15]

1971년 12월 16일에 사망했다. 12월 18일 영등포구 상도1동 111-17, 숭실대학교 근처에서 발인하여 평택군 팽성면 객사리 선영으로 운구되었다.[16]

사후[편집]

경기도 평택군 팽성면 객사리(현 평택시 팽성읍 객사리) 선영 근처에 안장되었다.

역대 선거 결과[편집]

실시년도 선거 대수 직책 선거구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락 비고
1960년 지방 선거 9대 도지사 경기도 신민당
0%
2위 낙선 민선 1기

기타[편집]

가족 관계[편집]

어머니 이범숙은 광평대군의 후손이었다.

기타[편집]

당초 그의 결혼식은 박영효가 주례를 보기로 하였으나[18], 박영효가 불참하여 김우현(金禹鉉) 목사가 주례로 바뀌었다.[19] 윤원선의 5촌아저씨 윤치호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 윤치소와 삼촌 윤치오 등이 박영효의 허락을 받지 않고 청첩장에 박영효의 이름을 넣었다고 했다.

같이 보기[편집]

참고 자료[편집]

각주[편집]

  1. "氷上에서 演出된 希有의 大激戰", 조선일보 1926년 1월 19일자 2면, 스포츠면
  2. "興趣津津한 十日間 水泳講習圓滿終了", 동아일보 1929년 8월 13일자 2면 사회면
  3. "李鍝公전하 御令妹 결혼, 20일 오후 2시에 공회당에서", 조선중앙일보 1934년 12월 20일자 석간, 2면 4단
  4. "JODK放送番組", 조선신문 1935년 6월 24일자 3면, 3단
  5. 조선총독부 관보 제4942호 1943-07-12, 17면 廣告/登記, 商業登記
  6. 조선총독부 관보 제4938호 1943-07-19, 13면 廣告/登記, 商業登記
  7. 조선총독부 관보 제5240호 1944-07-24, 2면 廣告/登記, 商業登記
  8. "政府人事發令", 조선중앙일보 1949년 3월 4일자 1면 14단
  9. "京畿道知事에 李海翼氏가 就任", 동아일보 1950년 10월 17일 2면, 사회면
  10. "韓運重役 選出", 경향신문 1960년 6월 4일자 2면, 경제면
  11. "反革命을 비호하는 民議員들 崔炳煥을 寬大히‥‥", 경향신문 1961년 3월 4일자 3면 사회
  12. 崔炳煥 救命運動", 조선일보 1961년 3월 4일자 3면, 정치면
  13. "崔仁圭에 死刑", 동아일보 1961년 4월 17일자 1면, 정치면
  14. "政淨法 審査對象者名單", 동아일보 1962년 4월 1일자 정치면, 2면
  15. "政淨法該當者中 解除者의 名單", 조선일보 1963년 2월 28일자 정치면, 4면
  16. "訃音", 조선일보 1971년 12월 17일자 6면, 사회면
  17. 이준용의 첩 전순혁 소생이다.
  18. "李鍝公전하 御令妹 결혼, 20일 오후 2시에 공회당에서", 1934년 12월 20일자, 02면
  19. 매일신보 1934년 12월 21일자
전임
최문경
제7대 경기도지사
1960년 10월 7일1960년 12월 28일
후임
신광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