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자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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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옥
具滋玉
출생 1887년 3월 30일
조선의 기 조선
경기도 광주부
사망 1950년 11월 (64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자강도 강계군
필명 호(號)는 능주(綾州)
일본식 이름은 구쓰이에 치다마(具家滋玉)
직업 시인
종교인
교육자
정치가
행정관료
공무원
저술가
국적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소속 前 무소속 3선 경기도지사
학력 일본 도쿄 아오야마 학원 중퇴
활동기간 1909년 ~ 1950년
장르 시문학, 저술
친지 구자혁(형)
구본웅(조카)
종교 개신교(감리회)

구자옥(具滋玉, 일본식 이름: 具家滋玉(구쓰이에 치다마), 1887년 3월 30일 ~ 1950년 11월)은 시인 활약을 한 바 있는 일제 강점기종교인이자 독립운동가이며 대한민국정치가로, 본관은 능성(綾城)이다. 해방 직후 첫 경기도지사미군정이 임명한 루트 중령이 물러나면서 다시 경기도지사를 맡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에도 경기도지사를 맡아보았다.

한국의 기독교 청년운동가이자 교육자, 상담가로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며 각종 사회활동에 동참하였고, 3.1 운동흥업구락부 조직에도 참여하였다. 1941년 대화숙 보호관찰 처분을 계기로 전향, 친일활동을 하였으며, 광복 직후와 미군정 치하에서 경기도지사를 맡아 보았다. 6·25 전쟁 때 납북되었다.

감리교 활동 외에 독립운동에 동참하였고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 이후 대화숙에서 보호관찰처분을 받던 중 전향했다. 경기도 광주 출생이다.

생애[편집]

초기 활동[편집]

경기도 광주군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개신교 신자로서 활발한 사회 활동을 벌인 유명 인사였다. 한성관립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한성관립영어학교 재학 중 감리교 신자가 되고, 1910년 이후 중앙기독교청년회에 참여하였으며, 졸업 후 감리교협성신학교(監理敎協成神學校)로 진학했다. 그러나 중퇴한 뒤 일본으로 유학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에 입학했으나, 이곳 또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 신학부(靑山學院 神學部)에 입학했으나 역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독립운동과 기독교 신앙 활동[편집]

1917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간사가 되었다.1919년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혐의없음으로 풀려났다.

1920년 6월 윤치호, 김성수, 한기악(韓基岳), 조만식, 장덕수, 안재홍, 이갑성, 송진우 등과 함께 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고 조선인 민간 자본으로 대학교를 설립하려 노력하였으나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인허가를 내주지 않아 실패하였다. 1921년 미국으로 유학, 시카고시카고 조지 윌리엄스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시카고 조지 윌리엄스 대학을 수료하고 1923년 귀국하였다.

중앙학교 학감(學監)을 지냈으며, 그뒤 경성기독교청년회감리교 대표로 참여하고 바로 경성기독교청년회 총무로 선출되고,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연합회 사교부 간사 등을 역임하며 기독교청년운동에 힘썼다.

1925년 흥업구락부 결성에 참가했다. 흥업구락부는 경성부와 경기도 지방의 기독교계 지도자들인 이상재, 윤치호, 신흥우, 이갑성, 유억겸 등이 이승만 노선에 따라 조직[1] 한 것으로,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감리교 교회를 중심으로 온건한 민족주의 운동을 벌이다가 1927년 일찍 사망한 이상재를 제외하고는 광복 전 다양한 시기에 변절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는 이후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감리교측 대표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으며, 매각될 위기에 처한 이순신 장군 위토 보존 모금운동과 브나로드 운동, 농촌 계몽 활동 등에 참여하였다.

1930년대 다시 도미하여 메사추세스 기독교청년회에서 다년간 연구하고, 신학석사 학위를 수여받고 귀국하여 흥업구락부에서 활동했다.

1930년대 후반 이승만이 영향을 발휘하던 독립운동단체 흥업구락부에서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서대문경찰서에 감금된 윤치영의 진술로 1938년 5월 18일서대문경찰서장의 보고에 의하면 그는 흥업구락부의 동지회원의 한사람으로 보고되었다.[2]

태평양 전쟁 기간[편집]

구자옥도 1938년 발생한 흥업구락부 사건을 계기로 대화숙에서 보호관찰처분을 받고 1941년 전향하여 황도학회에 참여했고, 1944년매일신보》에 〈필승은 신의 명령〉이라는 제목의 논설을 기고하여 태평양 전쟁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전쟁 지원을 촉구하는 등 친일 활동을 했다.[3] 임전대책협의회경성정동연맹 등 친일 단체에도 가담했다.[4]

1940년 5월 창씨개명 때는 구쓰이에 치다마로 창씨개명하였다.

한때 신앙 활동차 도미 순방을 하기도 했고, 그밖에 경성부 영창중학교(英彰中學校) 교장 등을 역임했다.

광복 직후 활동[편집]

광복 직후 그의 뜻과 관계 없이 8월 16일부로 이쿠다 세이자부로가 직무를 그만두자, 임시 경기도 도지사가 되어 이쿠다 세이자부로로부터 업무를 인수인계받고 치안, 혼란을 수습하였다. 태평양 전쟁으로 유명무실화된 기독교청년회를 재건하자 그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연합회(대한기독교청년회(YMCA)의 전신) 총무로 선출되었다.

1945년 8월 16일 백남훈, 김성수, 김도연, 송진우, 윤보선, 허정, 장덕수 등과 함께 정치 세력을 형성한 뒤 우익 세력 연합으로 9월 한국민주당을 창당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고, 미군정 시기에 경기도 도지사를 역임했다. 당시 YMCA에서는 증경 총무를 맡고 있었다.[5]

해방 후 환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영회에 참석하고, 임정 봉대 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같은 기독교계열 인사인 김규식 등과의 접촉을 담당하였다.

경기도지사 재직과 최후[편집]

1947년 미군정에서 임명한 루트 중령이 경기도지사 직을 물러나면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다시 경기도지사직을 맡아보게 되었다. 그뒤 대한민국 건국 후 경기도지사로 다시 유임되었다. 1950년 3월 대한야구협회 고문의 한사람으로 위촉되었다.

경기도 지사 재임 중이던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한 뒤 조선인민군에게 이끌려 월북했다.[6] 전쟁 초기 대통령 이승만이 비밀리에 피신할 때 도지사와 경찰 간부들도 대부분 몸을 피했으나 도지사 가운데 구자옥만이 방송을 믿고 경기도청에서 머무르다가 조선인민군 정치보위부원 4,5명에 의해 피랍되었다.

번역서인 《현대 성경해석》(1934) 등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정치보위부원에 의해 북송되었으며, 납치된 아버지를 수행했던 아들 구본준은 중도에 탈출에 성공하였다. 1950년 11월 북행길 도중 강계 부근에서 사망했다는 증언이 있다.

사후[편집]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종교 부문 중 개신교계 인물로 포함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저서 및 역서[편집]

  • 《현대 성경해석》

가족 관계[편집]

참고자료[편집]

각주[편집]

  1. 반민족문제연구소 (1993년 2월 1일). 〈유성준 유만겸 유억겸 : 유길준의 양면성 ‘극복’한 유씨 일가의 친일상 (김도형)〉. 《친일파 99인 1》. 서울: 돌베개. ISBN 978-89-7199-011-7. 
  2. 우남 이승만 연구 (정병준, 역사비평사, 2005) 365페이지
  3. 임종국 (편) (1987년 8월). 《친일논설선집》. 서울: 실천문학사. 
  4. 곽형일, 일제말기 기독교의 친일행위, 원광대학교 학사 졸업논문 (2000년 12월)
  5. 한국 YMCA, 한국 YMCA 역사
  6. 한국전쟁 납북사건 자료원, 구자옥(具滋玉)

외부 링크[편집]

전임
이쿠다 세이자부로
(일제시대 경기도지사)
초대 미군정 경기도지사
1945년 8월 15일 ~ 1945년 9월 12일
후임
찰스 앤더슨
전임
루트 워크
(미군정 경기도지사)
초대 경기도지사
1946년 2월 15일 ~ 1950년 7월
후임
채응복
(직무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