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업구락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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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는 일제 강점기에 결성된 기독교 계열의 사회운동 단체이다.

결성[편집]

1924년조선기독교청년회전국연합회(YMCA) 총무인 신흥우하와이 주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을 방문하여 이승만이 운영하던 재미 조선인 단체 동지회의 자매 단체를 결성하기로 합의했다. 신흥우는 귀국하여 이상재, 윤치호, 유억겸, 안재홍 등과 논의한 뒤 1925년 3월에 흥업구락부를 조직했다.

인적 구성 측면에서 조선기독교청년회전국연합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며, 기독교 기반의 애국계몽과 실력양성 운동을 목표로 했다. 흥업구락부의 결성은 3·1 운동 이후의 유화 국면에서 타협적인 자치운동이 발생하였기에 이에 대항하고, 이승만이 미국에 구축해 둔 항일 기지를 지원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 무렵 이광수가 중심이 된 흥사단 계열의 수양동맹회천도교 신파의 최린 계열과 함께 사실상 조선 독립을 포기하고 항일 운동의 목표를 자치권 획득으로 하향 조정하는 흐름을 주도하고 있었다.

흥업구락부는 3·1 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 이승만이 국내에 지지 기반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다. 주로 서울과 경기도 출신의 기독교인이 참여하여 수양동맹회와 같이 안창호를 따르는 서북 지역 출신이 중심이 된 단체와는 가장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관계였다. 또한, 기독교의 혜택을 받은 서구형 지식인들 위주로 구성되어 천도교나 동아일보 계열의 민족 운동과도 이질적이었다.

활동[편집]

흥업구락부의 주요 활동은 이승만의 동지회에 대한 자금을 지원하는 것과 자치운동의 저지를 위하여 실력양성 운동을 재점화한 것 등이 있다. 1929년 좌우 합작의 신간회가 탄생했을 때 이상재와 유억겸, 안재홍, 박동완, 이갑성, 정춘수 등 흥업구락부 계열이 대거 참여했다. 이들은 신간회 우파 계열 가운데서 기독교와 조선일보 측을 대표했다.

흥업구락부는 1931년 경부터 산업부 설치 문제로 내분을 겪게 되었고, 설립의 주역이자 지도자 역할을 해온 신흥우가 자본가 회원들의 소극적인 자세를 비판한 뒤 적극신앙단을 새로 조직해 순수 기독교인 중심의 사회운동을 추구하기로 하면서 크게 약화되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는 실업인 친목단체 수준으로 활동이 미미해졌으며 개량화되었다는 비판을 들었다.

흥업구락부 사건[편집]

그러나 일본중일 전쟁 발발 후 강압적인 사회 체제를 조성하면서 1938년에 뒤늦게 흥업구락부 사건을 일으켜 이 단체 관계자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했다. 이는 전쟁 수행을 위해 사회 불안 요소를 제거함과 동시에, 이들 기독교 지식인 세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던 미국과의 전쟁을 대비하는 다목적의 포석이었다.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검거된 회원들은 강제로 전향해야 했고 흥업구락부도 해체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수양동맹회의 후신인 수양동우회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해체되었다. 이 사건 이후 흥업구락부의 핵심 인물이던 윤치호신흥우, 유억겸, 정춘수 등은 전쟁 기간 중 일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같이 보기[편집]

참고자료[편집]

  • 이이화 (2004년 5월 1일). 〈제3부 조선민족은 없다 - 4. 조국을 위하여〉. 《한국사 이야기 21 (해방 그날이 오면)》. 서울: 한길사. ISBN 8935651605. 
  • 윤치호; 김상태 (옮긴이) (2001년 2월 10일). 〈제3부 중일전쟁·태평양전쟁 전후 - 제1장 흥업구락부사건의 와중에서(1938)〉. 《윤치호 일기》. 서울: 역사비평사. ISBN 89769624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