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 (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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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정으로 집권한 두 번째 군주였다. 그러나 사적인 욕심이나 원한으로 반정을 일으킨 [[세조 찬위]], [[인조 반정]]과는 다른 각도에서 평가되나, 전반에는 공신 세력에 의해, 후반에는 외척 세력의 전횡에 휘둘렸다. 재위 중반에 [[조광조]] 등의 사림을 일시에 기용하였으나 개혁정책에 피로를 느껴 숙청한 뒤, 외척에게 정사를 위임한다. 이는 후일 [[대윤]], [[소윤]]간의 정쟁의 원인이 된다.
반정으로 집권한 두 번째 군주였다. 그러나 사적인 욕심이나 원한으로 반정을 일으킨 [[세조 찬위]], [[인조 반정]]과는 다른 각도에서 평가되나, 전반에는 공신 세력에 의해, 후반에는 외척 세력의 전횡에 휘둘렸다. 재위 중반에 [[조광조]] 등의 사림을 일시에 기용하였으나 개혁정책에 피로를 느껴 숙청한 뒤, 외척에게 정사를 위임한다. 이는 후일 [[대윤]], [[소윤]]간의 정쟁의 원인이 된다.

2011년 6월 2일 (목) 12:48 판

조선 중종
조선의 제11대 국왕
재위 1506년 ~ 1544년
전임 연산군
후임 인종
부왕 성종
신상정보
부친 성종
모친 정현왕후
배우자 단경왕후
장경왕후
문정왕후

중종(中宗, 1488년~1544년, 재위: 1506년~1544년)은 조선의 제11대 이다. 는 역(懌), 는 낙천(樂天). 사후 시호는 중종공희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中宗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이다. 성종의 차남으로 정현왕후 소생이다.

반정으로 집권한 두 번째 군주였다. 그러나 사적인 욕심이나 원한으로 반정을 일으킨 세조 찬위, 인조 반정과는 다른 각도에서 평가되나, 전반에는 공신 세력에 의해, 후반에는 외척 세력의 전횡에 휘둘렸다. 재위 중반에 조광조 등의 사림을 일시에 기용하였으나 개혁정책에 피로를 느껴 숙청한 뒤, 외척에게 정사를 위임한다. 이는 후일 대윤, 소윤간의 정쟁의 원인이 된다.

생애

생애 초반

1494년에 진성대군(晉城大君)으로 봉해졌다가 1506년음력 9월 2일 연산군의 폭정에 반발한 성희안(成希顔) · 박원종(朴元宗) · 유순정(柳順汀)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이 성공함에 따라 조선의 새 임금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진성대군은 자신을 국왕으로 세우기 위해서 온 반정군을 적으로 여겼을 정도로 정치에 큰 관심이 없었다.

즉위

즉위 초반

하지만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반정세력의 정치적 의도로 국왕으로 등극한 중종은 혁명을 일으킨 공신들의 세력에 밀려 실질적인 권력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한 나약한 국왕이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연산군의 폭정으로 말미암아 문란해진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자 연산군이 폐지시켰던 모든 법제를 복귀시켰으며, 국왕의 자문을 담당하는 기관인 홍문관의 기능을 대폭 강화하고 신하들의 월과 춘추과시, 사가독서 등을 시행했다. 또한 중종은 왕도정치를 앞세워 공신들의 세력 팽창을 억누르려고 시도했으나 공신들의 힘이 너무나도 막강하여 성공하지는 못했다.

박원종, 홍경주 등의 공신 세력의 권력이 강화되고 왕 이상의 권한을 행사하려 하자 그는 사림 세력을 다시 등용하기로 결심한다.

개혁 정치와 폐지

중종은 조광조갑자사화로 밀려났던 사림파를 중심으로 현량과를 실시하는 등 철저한 유교적 개혁 정치를 행하여 문벌세가를 누르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급진적이고 과격한 조광조의 개혁 정책은 보수적인 기득권층인 훈구 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하고 지지하던 중종마저도 싫증을 내게 된다. 특히 조광조의 반정 공신 명부 정리 작업(공신 명부에 올라온 공신들이 진짜 공을 세웠는지를 확인하는 작업)으로 다수의 공신들이 명단에서 이름이 삭제되는 일이 벌어지자 훈구파들의 위기감은 극에 달한다.

중종 임금에게 한 궁녀가 궁궐의 나뭇잎 하나를 가져다 바친다. 벌레가 갉아먹은 자리를 따라 나뭇잎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주초위왕(走肖爲王)> , 조씨(走+肖=趙)가 왕이 된다는 글이다.[1]

"조광조의 역심(逆心)을 하늘이 알려준 것이옵니다.[1]"

반정으로 등극한 중종은 자신 역시 쿠테타로 축출될수 있다는 생각을 하여, 이복 형제들, 성종의 다른 왕자군이나 기타 왕족들을 불신하고 경계했다.

반정으로 등극한 중종은 조광조를 의심하나, 나뭇잎의 글씨는 궁녀가 과일즙을 발라놓은 자리를 개미들이 파먹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말하자면 음모이다.[1]

그날 밤, 홍경주와 남곤, 심정 등은 은밀히 입궐해 중종을 만나 주청한다. "조광조가 붕당을 만들어 국정을 어지럽히고 있사오니 이들을 처단해야 합니다." 중종은 조광조, 김식, 김구 등 사림파를 투옥시킨다.[1] 결국 중종은 1519년 남곤심정, 홍경주와 계획해서 조광조를 비롯한 다수의 사림들을 실각시켰고, 의심 많은 왕 중종은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려[1] 죽음을 당하게 된다(기묘사화). 연산군이 갑자사화를 일으켰다는 명분으로 역모를 꾀하여 왕이 된 중종이 기묘사화를 일으킨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 이다.

외척의 전횡

그 다음에는 외척 세력이 새로이 등장하여 중종의 치세 중기와 후기에는 외척 세력과 반정 공신들 간의 정권 다툼으로 인해 크고 작은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 정국이 편안할 날이 없었다. 1531년에는 기묘사화 후 집권했던 심정(沈貞)·이항(李沆)·김극복(金克福) 등이 화를 당했고, 1537년에는 심정 일파를 모함한 김안로(金安老)·허항(許沆)·채무택(蔡無擇) 등이 주찬되는 등 재위 동안에 화옥(禍獄)이 그치지 않았다.

정국이 불안해지자 그 동안 잠잠하던 남쪽의 왜구들이 삼포왜란을 일으켜 경상도 해안 일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또 북쪽에서는 여진족이 4군 6진 지역을 빈번하게 노략질하는 등 오랑캐들의 약탈이 끊임없이 발생하자 중종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 비변사를 설치하였다. 그밖에 《속삼강행실도》,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다방면에 걸친 책들이 편찬, 간행되었으나 기묘사화 이후로는 문화 발전 정책이 거의 정지되었다.

한편 윤임, 김안로, 윤원형, 윤원로 등의 척신 세력이 발호하였으나 그는 이를 막지 못했다.

왕릉

38년 2개월이라는 긴 세월 동안 왕위에 머물러 있었던 중종은 정국이 혼란을 거듭하는 바람에 이렇다 할 만한 업적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왕세자에게 왕위를 넘겨준 다음날인 1544년 음력 11월 14일, 57살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능은 서울특별시 강남구에 있는 정릉(靖陵)으로 능원에 중종 혼자만 묻혀 있다.

가족 관계

기타

북방의 방어에 신경을 써 이계동, 유담년, 이지방 등의 무관을 파견하여 평안도간도, 함경도 등의 여진족을 수시로 토벌하게 한다.

작품 속의 중종

중종을 연기한 배우, 성우들

참고 문헌

주석

  1.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1997) 42페이지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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