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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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이황
李滉
출생1501년 음력 11월 25일
양력 1502년 1월 3일
조선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토계리
사망1570년 음력 12월 8일
양력 1571년 1월 3일 (70세)
조선 경상북도 안동군 도산면 토계리
사인병사 (노환)
거주지조선 경상북도 안동, 한성부, 안동
성별남성
국적조선
별칭자는 경호, 호는 퇴계·퇴도·퇴도만은·도수, 시호는 문순, 별칭은 이자, 이부자
학력한학 수학
직업학자, 문인, 사상가, 시인, 정치인
종교유교(성리학)
부모이식
배우자부인 김해 허씨, 후처 안동 권씨
자녀아들 이준
친척숙부 이우, 형 온계 이해

퇴계이황(李滉, 1502년 1월 3일(1501년 음력 11월 25일) ~ 1571년 1월 3일(1570년 음력 12월 8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교육자, 화가, 시인이다. 조선 명종·선조 시대의 사상가, 교육자이자 화가, 대성리학자였다. 정치보다는 학자 지향형 인물이다. 과거 급제 후 승문원부정자로 관직에 발을 들여놓았으나 사화(士禍)와 훈구파 내부의 정쟁으로 혼란스러워지자 관직을 사퇴한다.

1528년(중종 23년) 생원시에 입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다가 1534년 문과에 급제, 관직에 나갔으며 홍문관의 관직을 거쳐 풍기군수 등을 역임했다. 풍기군수 재직 시절 서원들을 지원하였으며, 임금 명종의 친필 사액(賜額)을 받아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으로 만듦으로써 사액 서원의 모범 선례가 되었고, 사림파의 세력이 확장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1545년 형 온계 이해을사사화로 희생된 뒤, 여러 번 관작이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낙향하여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그 뒤 공조참판, 이조판서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고 1569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직하고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그의 사상은 그의 직제자 김효원(金孝元)이 동인의 당수가 된 이후 동인으로 전달되었으며, 남인으로 이어졌고, 북인 일부에게도 계승된다. 소고 박승임, 서애 류성룡 등의 문하생을 배출했는데, 후일 동인이 분당된 뒤 박승임의 제자는 남인 일부와 북인 일부로, 류성룡과 그의 후예들은 남인으로 이어진다. 임진왜란 당시 그의 저서들이 일본군에게 약탈당했는데, 이때 약탈된 이황의 저서와 작품, 서한, 편지 등은 일본유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는 경호(景浩), 는 퇴계(退溪-퇴거계상[退居溪上]의 줄임말)·퇴도(退陶)·퇴도만은·도수(陶叟), 본관진보(眞寶) 혹은 진성(眞城)이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사후 이자(李子), 이부자(李夫子)로 존숭되었다. 진사(進士) 의정부좌찬성 이식(李埴)의 아들이다. 조선 정치사에서 특히 동인남인 계열의 종주이며 일부 북인도 그의 문인들이었다. 그는 안동부사를 지낸 송재 이우의 조카이자 문하생이다.

생애

생애 초기

출생과 가정 환경

퇴계 이황은 1501년 경북 안동부 예안현(오늘날의 안동시 예안면) 온계리(溫溪里)에서 진사(進士) 의정부좌찬성 이식과 부인 의성김씨(2남 1녀) 춘천박씨(5남)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때 그의 부모는 태몽을 꾸었는데 이식이 40세 때 진사시에 합격한 해에 어머니의 꿈에 '공자가 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이황을 낳았다하여 대문을 성림문(聖臨門)이라 일컬었다.[1]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마흔 살의 나이로 사망하여, 이황은 홀어머니 춘천박씨 밑에서 자라야 했다.

형은 온계(溫溪) 이해(李瀣)로 이해 역시 학자였으나 을사사화로 희생된다. 가정적으로도 불행하여 일찍이 김해허씨와 결혼하였으나 27세에 상처하고, 재혼한 안동권씨 역시 46세에 사망하였으며 둘째 아들과 증손의 요절을 보았다.

수학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으나 대대로 물려오는 재산이 있었으므로 어렵지 않게 생활하였다. 8세 때 중형(仲兄) 이징(李澄)이 칼에 손을 베였는데 다른 형제들 중 그만 이를 보고 통곡을 하였다. 이에 어머니가 손을 베인 형은 울지 않는데, 네가 어째서 우느냐고 물으니 그가 말하기를, "어찌 저렇게 피가 나는데 아프지 않겠습니까."하였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던 이황은 열두 살 때부터 숙부인 송재 이우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송재는 당시 관직에 있었는데, 바쁜 일과 중에도 친히 조카 퇴계를 비롯한 동리 청년들을 가르쳤다.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하여, 특히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여, 도연명주자를 인생의 사표로 삼았다.

숙부 이우에게 수학한 뒤 향리의 용수사에서 공부하였고, 20세 무렵부터 침식을 잊고 밤낮으로 독서를 하고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해쳐서 병을 얻었는데, 이후부터 그는 잔병치레에 시달렸다. 1528년(중종 23년)에 소과에 입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성균관유생이 되었다.


정치 활동과 학문 연구

1534년(중종 28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533년 다시 성균관에 입학하여 하서 김인후(金麟厚) 등과 교유하였고, 이때 《심경부주 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또한 노수신과도 만나 친분을 쌓았는데, 이퇴계는 조광조의 직계 제자는 아니었으나 노수신조광조의 제자인 이연경(李延慶)의 문인이었으므로 그를 통해 조광조의 영향을 받게 된다. 1533년 관직을 사퇴하고 귀향도중 김안국(金安國)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1534년 다시 문과에 급제, 1539년 홍문관수찬이 되었으며 동년 곧 사가독서(賜暇讀書)에 임명되었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의 낙향 소식을 접한다. 그 후 승진을 거듭하여 성균관 사성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들어가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러나 조정에서 다시 불러 다시 홍문관 교리를 지내고 그해 7월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이 되었다. 바로 일본과 강화를 하고 변경을 방어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그해 10월 이기로부터 을사사화의 역신인 김저와 같은 무리라는 탄핵을 당하고 파직당하였다.

1545년 10월이기가 다시 그에게 죄가 없다고 하여 다시 복관된다. 그 뒤 사복시 정 겸 승문원 참교, 1546년(명종 2) 사복시정(司僕寺正)을 거쳐 그해 3월 지제교(知製敎)로 있을 때 명나라에 보내는 자문을 잘못 지어 사은사 남세건의 탄핵을 당하였으나, 대제학(大提學) 신광한(申光漢)의 변호로 처벌을 모면하였다. 그해 8월 교서관 교리(校書館校理)를 거쳐 1547년 7월 안동 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로 부임했다가 1개월 만에 홍문관 부응교로 임명되어 다시 상경하였다.

지방관 생활과 낙향

그해 12월 의빈부 경력(儀賓府經歷)을 거쳐 이듬해 단양군수로 나갔다.

1548년(명종 3년) 1월 충청도 단양군수로 부임했다가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의 형이 곧 충청감사가 되어 발령하자, 전출을 자청하여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형 이해(李瀣)에게 연좌되어 화를 입어 한때 파직되었다가 복직하였으나, 이미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을 때이므로 사직하고 고향에 내려가 양진암을 짓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일찍 그가 서울에 있을 때 《주자전서》를 읽고 여기 몰두하여 성리학을 연구하여, 마침내 대성하여 '동방의 주자', '이부자' 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사방에서 학자들이 모여들어 학문을 배웠다.

비록 조정의 부름이 있더라도 관직에 오래 머물지 않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외직을 자청하였다. 명종 초에 단양·풍기 등의 군수를 역임한 것도 이 때문이다. 풍기 군수 시절에 서원들을 지원하였으며, 소수서원 사액을 실현시켰다. 지방관으로 활동하면서 향약주자가례의 장려와 보급에 치중하였고, 퇴청 후에는 문하생을 교육하여 성리학자들을 양성했다.

서원 건립과 후학 양성

풍기군수 재직 시절 임금 명종의 친필 사액(賜額)을 받아 백운동서원을 소수서원으로 만듦으로써 사액 서원의 모범 선례가 되었고, 사림파는 서원을 근거지 삼아 세력을 확대해 나가게 된다. 그의 소수서원 사액 실현은 사림파의 세력이 확장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1552년(명종 7년) 다시 내직으로 소환되어 홍문관 교리가 되었고, 시독관(侍讀官)이 되었다. 이어 불교를 배척할 것을 건의하였다.

임금이 힘써야 할 일은 경술(經術)을 택하고 왕도(王道)를 높이고 패공(覇功)을 억제하는 것일 뿐인데, 조금만 잡되어도 패도로 흐르게 됩니다. 지금은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려지기를 도모할 때여서 바야흐로 왕도가 행해지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佛敎)가 조금이라도 섞이게 되면, 비록 왕도에 마음을 다하더라도 마침내는 불교에 빠지고 맙니다. 지금 성학(聖學)이 고명(高明)하기는 하나 격물 치지(格物致知)의 도에는 미진한 점이 있는 듯싶습니다. 그 설(說)에 ‘백성들의 고통을 없애고 나라의 복을 연장하는 것은 이 가르침을 통하여 얻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참으로 격치(格致)의 학문에 밝아 그 거짓됨을 환히 안다면 권하더라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이어 소매 속에서 소지(小紙)를 꺼내어 어상(御床)에 놓으며 아뢰기를,

신이 1547년 에 소대(召對)하라는 명을 받고 입시하였을 적에 《논어(論語)》의 애공(哀公)이 사(社)에 대해 물은 장(章)의 전(傳)에 ‘재여(宰予)의 대답이 사(社)를 세운 본의(本意)가 아니다.’라는 데 이르러 상께서 하문하셨으나 신이 변변치 못하여 즉시 진달하지 못하였고, 그 뒤 외관(外官)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역시 아뢰지 못했습니다. 여기 이 소지에 쓴 것은 모두 사(社)를 세운 제도입니다. 제천(祭天)·교사(郊祀)는 우리 나라에서 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나, 그 예(禮)는 몰라서는 안 되기 때문에 감히 써서 아룁니다.

그해 5월 사헌부집의, 6월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 7월 성균 대사성 지제교(成均大司成知製敎)를 거쳐 그해 11월 사직하였다. 1553년성균관사예를 거쳐 다시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사직상소를 올렸다. 이후 성균관대사성·부제학·공조참판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앞서 풍기 군수의 직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왔을 때 그는 한서암을 짓고 1557년에는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세우기 시작했다. 이이가 그를 방문한 것도 이때의 일이며, 명종이 그가 관직에 나오지 않음을 애석히 여겨 화공에 명하여 도산(陶山)의 경치를 그려오게 하여 완상한 것도 이때의 미담이다.

조정 출사와 사퇴

1553년상호군으로 빈전에서 서얼 방금법 허용논의에 참석하였다. 이때 그는 서얼 허통을 지지하였는데 그는 일부 서자들이 적장자를 무시할 수 있음을 언급하였으나 서자라고 해도 실력이 있는 자는 채용해야 된다며 인재 채용시 귀천을 두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2]

1554년 5월 형조참의에 임명되어 상경하였고, 6월 병조참의를 거쳐 그해 12월 첨지중추부사로 전임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555년 2월 다시 상호군에 임명되어 한성에 왔는데, 상경할 적에 가난하여 의복과 관대(冠帶)가 없으므로 판서 조사수(趙士秀)가 겉옷 1벌을 주었지만 사양하고 옷을 받지 않았다. 1555년 5월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자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56년 5월 홍문관부제학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그해 8월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으나 역시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558년 성균관대사성을 거쳐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고사하였고, 한직인 충무위상호군직에 임명되었다. 1559년 다시 공조참판에 제수하여 불렀으나 올라오지 않았고, 여러번 그에게 올라올 것을 권고하여 그해 7월 상경하여 정사를 올려 사직하였다. 바로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고 낙향하였다.

학문 연구와 사상적 완성

퇴계 이황의 서한

그는 고향에서 학문 연구와 사색, 후진 양성에 주로 치중하였다. 명종은 그를 존경하여 자주 그에게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그는 조광조의 죽음을 봤고 왕의 출사 요청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출사 요청을 계속 거절하자 명종은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招賢不至嘆)’이라는 제목으로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으로 보내어 그 풍경을 그리게 하고, 송인(宋寅)으로 하여금 도산기(陶山記) 및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써넣게 하여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하여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하였다.

명종의 총애를 안 경상도관찰사 이감(李戡)은 수시로 그를 찾아 예를 표하고 우대하였다. 그의 사상은 50~60세에 걸쳐 완성되었는데, 변론·저술·편저 등 중요한 것은 모두 이 기간에 되었으며, 《계몽전의》, 《주자서절요》, 《송계원명이학통록》, 《인심경석의》 및 기대승과 문답한 《사단칠정분리기서》와 같은 것은 그의 대표적인 명저이다.

생애 후반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

1560년 고향 토계동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아호를 도옹(陶翁)으로 고쳤으며, 이후 7년간 주로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문하생들이 찾아와 이를 지도하였다. 1565년 4월 다시 동지중추부사직을 사직하였으나 왕이 반려하였다. 1566년 다시 동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자 왕이 반려하였다. 이후 명종 말에 예조 판서가 되고 대제학·판중추 겸 지경연사 등이 되어 유명한 《무진육조소》와 《성학십도》를 지어 임금께 올리니 이는 국은에 보답하고 학문을 개발하기 위한 만년의 대표작이다.

명종이 갑자기 죽고 선조가 즉위하여 그를 선왕의 행장을 짓는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으나 질병으로 부득이 귀향하게 되었다. 선조가 즉위한 후 선조가 여러번 부를 때마다 시정의 폐단을 간하는 사퇴 상소를 올리고 낙향했다가 거듭된 부탁으로 출사, 대제학, 지경연이 되어 성리학을 그림과 함께 쉽게 서술한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왕에게 올려 성리학이 국가 이념임을 밝히게 한다. 또한 그는 아녀자들도 쉽게 이해하게 하기 위해 성학십도를 언문으로 번역한 것을 인쇄, 간행하여 배포하기도 했다. 생애 후반에 그는 친구로서 호남의 대학자 하서 김인후, 사마시에 함께 급제한 김난상 등과 교류하였다.

당대 최고의 이론가였던 퇴계는 제자들과 토론하기를 즐겼으며, 성리학에 관한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1568년 1월 행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의를 표하였고, 그해 7월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어 상경하였다.

문하생 선별

퇴계는 문하생을 받아들일 때 사람됨됨이를 먼저 알아보고자 여러가지 시험 방법을 썼다고 한다. 그 중의 하나는 한여름 삼복더위에 의관을 정제하고 앉게 한 다음 이것저것 문답을 하였다. 이때 이황은 시원하고 가벼운 옷차림이었고, 제자 되기를 자청한 사람만 잔뜩 차려입고 더위를 참아가며 그와 대화를 주고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때 옷을 훌훌 벗어버리는 사람이 있고 끝까지 참아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 이황은 중간에 옷을 벗어버리는 사람을 제자로 맞아들이고, 끝까지 참아내는 사람은 사람됨됨이가 모질고 비인간적이라고 하여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념은 높이 샀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강인한 성격을 가진 자가 나중에 높은 벼슬이라도 하게 된다면, 보나마나 자기만의 그릇된 신념으로 백성들을 고달프게 만들 것이라는 점이 이황의 지론이었다. 그는 학문 연구를 일생 최대의 과업으로 여겼지만 자신의 자제나 문하생들에게는 자신의 뜻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죽음

1569년(선조 3년) 이조판서가 되어 상경하였으나 여러번 사직 상소를 올린 끝에, 사직소가 수리되어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평생 겸손함을 강조하며 청렴하게 살았으며, 생각이나 헤아림을 멈춘 상태에서 마음을 고요하게 간직하는 사색과 '경'(敬)을 중시했다. 만년에 병을 핑계로 낙향, 1570년 12월 8일 음력 고향인 안동 토계동에서 의관을 정제하고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향년 70세였다. 그가 죽자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파하고 조회를 하지 않았다.

사후 상례와 석물을 화려하게 하지 말고 작은 비석이나 하나 세우라는 그의 유언에 따라, 산소에는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 쓴 작은 비석이 하나 세워졌다.

사후

남산에 있는 퇴계 이황의 동상

그 뒤 문순공의 시호를 내리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춘추관사를 추증하였으며, 1610년 문묘(文廟)에 모셨다. 광해군 때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을 비롯한 전국 40여 개 서원에서 제사하고 있다.

학문상으로는 영남 지역이 기반인 동인과 남인의 종통이었다. 동인의 초대 당수 성암 김효원(金孝元)이 그의 제자였고, 그 밖에도 그의 학풍은 그의 또 다른 제자들이었던 박승임정구를 통해 유성룡·장현광·김성일·허목·이익 등으로 이어져 영남학파를 이루었으며 당색으로는 동인남인이었고, 박승임의 제자들 중 일부는 북인에 가담하기도 했다.

숙종 때까지 그를 기리는 뜻에서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에서 특별 과거가 주관되었다가, 노론 집권 후 영조 때 폐지되었으나 정조 때 가서야 정조가 행차하면서 부활하였다.[3] 1968년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의 특별 지시로 1천원 권의 첫 주인공으로 도완되었다. 이후 30년간 천원권 지폐의 도완 인물로 계속 유지되었다.

저서 및 작품

저서

  • <단양산수기>
  • <유소백산록>
  • 《계몽전의》
  • 《주자서절요》
  • 《송계원명이학통록》
  • 《인심경석의》
  • 《사단칠정분리기서》

작품

  • 《무진육조소》
  • 《성학십도》
  • 《자성록》
  • 《퇴계집》
  • 《도산십이곡》

가족 관계

첫 부인 허씨는 27세때 사망하고, 재혼한 권씨는 46세때에 사망한다. 그 뒤 이황은 재혼하지 않았고, 기녀 두향을 소실로 맞이하였다. 둘째 아들이 일찍 죽자, 둘째 며느리가 재혼할 수 있도록 친정에 돌려 보냈다.

사상과 신념

이황의 저서 《퇴계문집

이기 이원론

이이와 더불어 한국성리학(유학)의 가장 대표적인 학자로 주자의 이기이원론적 사상 및 영남학파의 창시자인 이언적주리설을 계승하여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는 철저한 철학적 사색을 학문의 출발점으로 하여 연역적 방법을 채택, 겸손하고 신중한 태도로 학문에 임하여 어디까지나 독단과 경솔을 배격하였다. 그는 우주 만물은 이와 기의 이원적 요소로 구성되어 그 중에 하나라도 결핍되면 우주의 만상을 표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기의 도덕적 가치를 말함에 이는 순선무악한 것이고 기는 가선가악한 것이니, 즉 이는 절대적 가치를 가졌고 기는 상대적 가치를 가진 것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심성 문제를 해석함에도 역시 이러한 절대·상대의 가치를 가진 이기이원으로 분석하였다. 이것이 뒤에 기대승과의 논쟁이 벌어진 유명한 ‘사단칠정론’으로 이후 한국 유학자로서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아니한 사람이 없을 만큼 중요한 주제를 던진 것이다. [6]

그의 학문은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쳐, 에도 시대에는 기몬 학파와 구마모토 학파가 있었고, 메이지 시대의 교육 이념의 기본 정신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황의 학문적 근본 입장은 진리를 이론에서 찾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진리는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으로 지와 행의 일치를 주장, 그 기본이 되는 것이 성이요, 그에 대한 노력으로서 ‘경’이 있을 뿐이라 하였다. 실로 그의 학문·인생관의 최후 결정은 이 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이 경을 70여 생애를 통하여 실천한 것이 이황이었다. 그는 문학·고증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그 사상·학풍이 후세에 계승되어 영남학파를 형성, 유학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조식과의 논쟁

이황은 조식에 대해 "오만하여 중용의 도를 기대하기 어렵고, 노장에 물든 병통이 있다"고 비판[7]했다.

그러자 조식은 선비들이 공부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부모의 고혈을 짜고, 여러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다고 응수했다. 남명은 "요즘 학자들은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 하늘의 진리)를 담론하며 허명(虛名)을 훔친다"고 맞대응 하는 등의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8] 그러나 이황의 조식 비판은 후일 정인홍이 조식을 옹호하는 글을 올림으로서 다시한번 재현된다.

臣(鄭仁弘)이 젊어서 조식(曺植)을 섬겨 열어주고 이끌어주는 은혜를 중하게 입었으니 그를 섬김에 군사부일체(君師父一体)의 의리가 있고, 늦게 성운(成運)의 인정을 받아 마음을 열고 허여하여 후배로 보지 않았는데, 의리는 비록 경중이 있으나, 두 분 모두 스승이라 하겠읍니다. 신이 일찍이 故 찬성 이황(李滉)이 조식(曺植)을 비방한 것을 보았는데, 하나는 상대에게 오만하고 세상을 경멸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높고 뻗뻗한 선비는 中道를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老莊을 숭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운에 대해서는 淸隱이라 지목하여 한 조각의 절개를 지키는 사람으로 인식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원통하고 분하여 한 번 변론하여 밝히려고 마음먹은 지가 여러 해입니다.(중략) 曺植과 成運은 같은 시대에 태어나서 뜻이 같고 도가 같았읍니다. 태산교옥(泰山喬嶽) 같은 기와 정금미옥(精金美玉)과 같은 자질에 학문의 공부를 독실히 하였으니 ...(중략)... 이황은 두 사람과 한 나라에 태어났고 또 같은 道에 살았읍니다만 평생에 한 번도 얼굴을 대면한 적이 없었고 또한 자리를 함께 한 적도 없었읍니다. 그런데도 한결같이 이토록 심하게 비방하였는데, 신이 시험삼아 그를 위해 변론하겠읍니다. 이황은 과거(科擧)로 출신하여 완전히 나아가지 않고 완전히 물러나지도 않은 채 서성대며 세상을 기롱하면서 스스로 중도(中道)라 여겼습니다. 조식과 성운은 일찍부터 과거를 단념하고 산림(山林)에서 빛을 감추었고 도를 지켜 흔들리지 않아 부름을 받아도 나서지 않았읍니다. 그런데 滉이 대번에 괴이한 행실과 老莊의 道라고 인식하였으니 너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중략) 더구나 조식성운은 비록 세상을 피해 은거하였다고 하지만 선대 조정의 부름을 받아 조정으로 달려가서 한 번 임금을 존중하는 뜻을 폈고, 누차 상소를 올려 정성을 다해 치안과 시무를 발씀드렸는데, 이것이 과연 괴벽의 도리이며 이상한 행실입니까. 그때 나이 이미 70이었습니다. 어찌 벼슬을 그만두어야 할 나이인데 出仕하려고 하겠습니까. 수레를 버리고 산으로 돌아가 자신의 행실을 닦고 삶을 마친 것이 과연 중도(中道)에 지나치고 괴이한 행실을 한 것이며 세상을 경멸하는 老莊의 학문이란 말입니까 신은 의혹스럽습니다.

후일 조식의 제자와 이황의 제자들은 율곡 이이성혼의 제자들과 대립하며 동인을 형성했다. 그러나 이황의 제자와 조식의 제자 간 사상의 차이는 다시 동인을 양분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같은 해에 태어난 두 거유의 상이한 출세관과 학문관은 결국 남인북인의 분화로 이어졌고, 당쟁을 격화시키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8]

이이와의 논쟁

그는 사물을 이(이성)과 기(물질, 힘)로 보되, 이와 기는 서로 다른 것으로 보고 이기이원론을 주장했다. 또한 이기이원론이면서도 이로써 기를 다스려야 한다는 주장을 피력했다. 이는 이와 기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이이와 논쟁하게 된다.

이황은 이이의 이기일원론을 수용하지는 않았으나 그의 탁월한 학문적 능력을 인정하여, 후생가외라 불렀다. 그러나 젊은 이이가 스승 이황과 논쟁하는 것을 본 이황의 문하생들은 이이에게 적개심을 품기 시작한다. 이후 지배층의 논리인 서인 이이의 이기일원론에 대항하여, 이황의 제자들은 논쟁을 공리공담으로 여긴 조식의 제자들, 이언적의 제자들과 연합하여 영남 학파와 동인 붕당을 형성하게 된다.

일본 유학에 영향

임진왜란 당시 그의 저서들이 일본군에게 약탈당했는데, 이때 약탈된 이황의 저서와 작품, 서한, 편지 등은 일본유학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1592년(선조 25년)부터 발생한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지역의 서적과 도공 등이 상당수 약탈당했는데, 이때 이황의 저서가 상당수 약탈당하였다. 경상북도의 해안가를 통해 유출된 이황의 서적, 서한들은 후일 일본성리학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18세기 미국에 의해 서구 문물이 강제로 유입되기 전까지 일본에는 조선에서 전래된 이황 계열의 성리학이 막부 세력의 사상적 기반이 되어 유행하였다.

양명학에 대한 이단시

이황은 양명학을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후에 최명길은 퇴계에 의하여 이단으로 지목되었던 양명학을 남몰래 공부하여 양명학적인 사상을 저술에서 암암리 드러낸다.[9]

이황은 <전습록변>(傳習錄辨)에서 양명학을 '사문(斯文·주자학)의 화'라고 비판했다. 그가 양명학을 '사문의 화'라고 비판한 다음부터 금기시되기 시작했다.[10] 그러나 이황의 비판에는 양명학의 핵심인 '치양지설'(致良知說)에 관한 내용이 빠져 있으니 <전습록> 전체를 보지 못하고 비판한 셈이 된다.[10]

문하생

소고 박승임, 성암 김효원,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11] 등을 문하생으로 배출한다. 김효원동인의 영수가 되었고, 박승임은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으나 그 제자들 중 일부는 북인, 일부는 남인으로 출사한다. 류성룡과 그의 주변 인물들, 제자들은 모두 남인으로 이어진다.

양반가의 자제들 외에 상민의 자제들도 그의 문하에 출입하여 수업하고 배울 수 있었다. 그가 소수서원에서 성리학 강학을 할 때면, 대장장이 배점이 뜰에 꿇어 엎드려 배우기를 간청하자 그는 이를 허락한다. 그가 죽자 배점은 3년간을 상복을 입고 소식(素食)하며 심상(心喪)했다.

불행한 가정사

생후 1년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에게서 성장했다. 그러나 45세 되던 해 을사사화로 친형 이해가 연루되어 처형당한다. 첫 부인 허씨를 27세에 잃고, 재혼한 둘째 부인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으로, 46세에 사별한다. 그러나 그는 이 둘째 부인을 무척 가여워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그는 재혼하지 않고 48세 때 만난 기녀 출신 소실 두향 외에는 일체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고 평생을 보냈다.

1548년 2월 이황의 둘째 아들이 일찍 요절하였다. 그는 둘째 며느리는 정혼한 후 1년도 안되어 남편이 죽고 청상과부가 되자, 며느리의 개가를 허용하고 남의 눈을 피해 친정으로 몰래 돌려보낸다. 그가 선조 즉위 초 한성부로 가던 길에 한 주막에 들렀을 때, 그의 입맛에 딱 맞는 음식을 해온 이가 있었는데 그때 그가 개가를 허용한 둘째 며느리였다 한다.

한성부에 분가한 그의 손자 내외가 아이에게 고열이 있어서 위중하자, 그에게 도움 요청을 하였으나 그는 냉정하게 거절한다. 그의 증손자는 병을 치료하지 못하고 그보다 앞서 사망하고 만다.

평가

그의 제자 중 학봉 김성일은 선생께서 산과 계곡을 거닐 때면 마치 '신선 같다'고 평하였다.

유홍준은 '퇴계는 평생에 처사가 되기를 원하여 죽을 때 영정에 벼슬이름을 적지 말고 '처사'라고 써주기를 희망했다지만 그는 처사 지망생이었지 처사는 아니었다.[12]'라고 평하였다.

당대에 이미 그의 제자들은 경상좌도와 영남학파를 형성하였으므로 영향력이 있었다. "경상좌도에는 퇴계가 있고 우도에는 남명이 있다.[12]'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기타

1982년부터 2007년 1월 21일까지 쓰였던 대한민국 1000원권에 실린 이황의 초상
2007년 1월 22일부로 쓰이는 대한민국 1000원권에 실린 이황의 초상

대한민국의 1000권 지폐 앞면에 그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그의 도산 서원에서는 많은 학생들이 배출되었고, 동인과 남인, 북인 학자와 정치인들을 양성한 요람으로서 1910년 이전까지는 성역화 되었다. 그러나 유교 성리학을 비판하던 경상북도의 공산주의자들은 도산서원을 도산서원(盜産鼠院)이라 하여 도둑들을 생산하는 쥐새끼들의 소굴이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하여 물의를 빚게 되었다.

사림 확산에 기여

풍기군수 재직 중 서원들에 대한 지원을 계속했으며, 백운동 서원의 현판을 왕의 사액 하사운동을 추진하여 성공시킨다. 이후 서원의 보급과 사액서원의 수가 늘어나면서 사림파(士林派)의 세력의 확장에 기여하였다.

또한 조식의 문하생인 북인소북대북으로 나뉜 뒤, 소북이 대북에게 숙청되고 대북은 서인에게 숙청되면서 그의 문하는 쇠퇴했고, 이언적은 많은 제자를 내지 못하여 이황의 제자들이 영남학파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성호학파에 영향

후대의 실학자 성호 이익은 자신의 학문적 뿌리를 이황에게서 찾으려 했다. 성호 이익의 아버지 이하진을 비롯한 선대 인사들은 대부분 윤휴와 가깝게 지냈다. 이익의 6촌 형님뻘 되는 반계 유형원도 윤휴와 어느정도 거리를 두면서도 절친한 사이였다. 또한 성호 이익의 스승 중 한사람인 송곡 이서우는 윤휴와 허목 모두에게서 수학하였다. 이에 따라 성호 이익의 문도들 중에는 윤휴와의 연관성을 주장하며 그의 학문을 계승했음을 강조하였다. 윤휴와의 관계를 다소 부담스럽게 여겼던 성호 이익은 자신의 학통을 퇴계 이황이 근원임을 여러번 강조하였다.

이익 가문의 학문은 17세기까지 북인 계열의 윤휴와 상당히 유사하였다. 이하진이나 이잠 형제, 조하주 등은 윤휴와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13] 이익의 6촌 형인 유형원윤휴와 자주 만나며 연락하던 사이였다.

반면 뒷날 이익이 계승한 인물로 평가받는 허목과는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거리가 있었다. 이때까지 이익 집안의 학문은 성리학적 흐름과는 무관하였으며, 오히려 주희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13]

1699년 이잠은 정시한을 예방하여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는 퇴계학 수용의 증거로 지목된다.[13] 정시한은 이황의 학문을 계승한 인물 중의 한사람이었다. 이서는 주희의 경전 해석을 따르면서 이황의 학문을 수용하였다. 이익 단계인 1710년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이기심성론과 관련된 저술을 하면서 학파를 개창하기에 이르렀다. 퇴계학을 수용하고 이기심성론과 관련된 성과를 낸 성호 이익은 이제 이황과 자신을 연결하고자 하였다.[13] 그러나 윤휴의 학문이 다소 과격하고 급진적이라는 비판적인 견해가 계속 제기되자 이를 부담스럽게 느꼈던 성호 이익은 학문적 전통을 윤휴에게서 찾던 형 섬계 이잠이나 유형원 등과 달리 허목을 거쳐서 퇴계 이황으로 연결하려 했다. 이러한 시도는 [이익의 스승 중 한사람인 이서우허목과 윤휴 모두에게서 수학한 것에서 근거로 삼았다.

1715년에서 1720년 사이 성호 이익은 전대에 거리가 있었던 허목과 이하진의 관계를 강조하면서, 허목을 자신이 사숙한 스승으로 규정하였다.[13] 이러한 시도는 퇴계학으로 자정한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근기 남인들에게 수용되었다.[14] 한편 이익은 허목의 후학으로 자정한 이후에도 경전해석이나 경세론 분야에서는 여전히 윤휴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일부에서는 전통적인 윤휴와의 계통을 강조하였는데, 이들은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학문 경향을 보였다. 윤휴를 강조하던 인사들이 신유 박해로 몰락하면서 성호 학파의 학통은 오로지 퇴계학과 관련된 내용으로 전승되게 된다.[13]

이익은 이황의 사상을 직접 계승하지는 않았으나 이익의 스승 중 한명인 이서우허목의 문인이고, 허목의 스승인 정구는 이황의 문하에서도 배웠고, 조식의 문하에서도 공부하였다. 이익은 이 점을 들어 퇴계 이황과의 관련성을 계속 강조하였다.

북인계 학문의 전통을 가진 윤휴에게 영향을 받은 성호 학파는 지속적으로 퇴계학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고자 하였으며, 이는 18세기 후반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완성되었다.[15]

기생 두향

그에게는 소실로 '두향'이라는 기생이 있었다. 1548년(명종 3년) 1월 단양군수로 부임한 후 만난 기생 두향은 이후 그가 떠나간 뒤에도 그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

1571년(선조 27년) 그의 부음을 들은 기생 두향충주 강선대에서 충주호로 몸을 던져 투신했다. 그 뒤 매년 10월이면 이황의 후손들은 이황에 대한 절개를 지켜 순사한 두향의 묘소를 찾아 벌초하고 시제를 드린다 한다.

일화

그가 도산서원에 있을 때 어느 행인이 말을 타고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시중을 들던 제자들과 하인들이 지나가는 이의 무례함을 지적했다. '선생님, 저 사람 행동이 지나칩니다. 선생님 앞을 지나면서도 말에서 내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황은 '내버려 두어라, 말 탄 사람이 그림속의 사람처럼 좋은 경치를 더해 주는데 무슨 허물이냐?'라며 하인과 제자들에게 자신을 못알아보는 행인을 내버려 두라고 지시한다.

이문형, 윤두수, 윤근수 등을 탄핵했던 훈구파 권신 이감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그를 찾아 문안인사를 드렸다 한다.

같이 보기

주석

  1. 역사인물 기행:퇴계 이황
  2. 명종실록 15권, 명종 8년(1553 계축 / 명 가정(嘉靖) 32년) 10월 7일(경진) 1번째기사 "영의정 심연원 등이 서얼 방금법 등에 대해 의논한 법 개정을 결정하다"
  3. 이인좌의 난에 억울하게 연루된 영남 선비들을 위문하는 뜻에서 도산서원, 소수서원에서 행하는 별시를 부활시킨다.
  4. 그는 1583년 진성이씨 족보 간행을 주관한다.
  5. 이황이 죽자 절개를 지키다가 투신한다.
  6. 조선성리학을 이기이원론, 이기일원론으로 파악하는것은 이기론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것이므로 수정하길 바람.
  7. 노대환, 《조선의 아웃사이더》 (도서출판 역사의 아침, 2007) 204페이지
  8. 노대환, 《조선의 아웃사이더》 (도서출판 역사의 아침, 2007) 205페이지
  9. 임석진 외 편저, 《철학사전》 (임석진 외, 중원문화, 2009)
  10. 어느 양명학자의 커밍아웃 한겨레 21 2006년12월14일 제639호
  11. 황윤길과 함께 일본 정세를 정탐하러 파견되었다.
  12. 나의문화유산답사기: 산은강을넘지못하고 (창작과 비평, 2007) 56페이지
  13.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 제12권》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2008) 131페이지
  14.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신항수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텍스트가 없습니다
  15.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 제12권》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2008) 132페이지

관련 서적

  • 노대환, 《조선의 아웃사이더》 (도서출판 역사의 아침, 2007)
  • 이덕일, 사화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2005)
  • 이덕일,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1997)
  •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웅진닷컴, 2004)
  • 부남철, 조선시대 7인의 정치사상 (사계절, 1996)
  • 이상은 ,퇴계의 생애와 학문(서문당, 1973)
  • 유정동, 퇴계의 생애와 사상(박영사, 1974)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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