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인도교 폭파 사건 관련 논란

한강대교.

한강인도교 폭파 사건에서 사망자 수치 및 신원 논란, 폭파 시점 논란 등 관련 논란들을 정리한 문서이다.

사망자 수치 및 신원 논란[편집]

한강인도교 폭파 당시 급박한 전황으로 사망자 수치 및 신원과 관련하여 현재와 같은 시신 수습 등을 통한 이론의 여지없이 누구나 신뢰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통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따라서 현재까지도 가장 큰 논란거리 중 하나이다.

미 군사고문단 장교의 사망자 500~800명 추정수치[편집]

주한미군 군사고문단(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KMAG) 소속 장교의 한강인도교 폭파 사망자 500~800명 추정수치에 대해 이 수치가 그 동안 온전한 민간인 사망자 수치라고 알려지기도 했는데 이 수치는 군인, 경찰, 민간인 등 당시 다리 폭파로 사망했을 모든 사람들을 총합해서 추정한 수치로서[1] 로이 E. 애플먼(Roy E. Appleman)이 편찬하고 미 육군 군사연구소가 발행한 6.25 전쟁사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그리고 조셉 C. 굴든(Joseph C. Goulden)의 저서 'Korea: The Untold Story of the War'의 원문을 살펴보면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부연하자면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의 p. 33을 보면 '한 고속도로 교량의 두 경간을 남쪽 물 속으로 떨어뜨린 거대한 폭발은 2시 15분쯤에 군인들과 다리에 모여든 민간인에게 아무런 경고도 없이 발생했다.' 라는 내용으로 'military personnel and the civilian' 즉 군인과 민간인이라는 표현이 정확하게 기록돼 있다. 또한 'Korea: The Untold Story of the War'를 살펴보면 더욱더 명확하게 설명이 되어있다.

  • 'South to the Nakdong, North to the Yaul' p. 33 (미 육군 군사연구소, 1961년) - 미 군사고문단 장교의 인명피해자 관련 발언 원문 발췌
 The gigantic explosions, which dropped two spans of the Han highway bridge into the water on the south side, were set off about 0215 with no warning to the military personnel and the civilian population crowding the bridges. Two KMAG officers, Col. Robert T.Hazlett and Captain Hausman, on their way to Suwon to establish communication with Tokyo, had just crossed the bridge when it blew up—Hausman said seven minutes after they crossed, Hazlett said five minutes. Hausman places the time of the explosion at 0215 Several other sources fix it approximately at the same time.

Pedestrian and solid vehicular traffic, bumper to bumper, crowded all three lanes of the highway bridge, In Seoul the broad avenue leading up to the bridge was packed in all eight lanes with vehicles of all kinds, including army trucks and artillery pieces,as well as with marching soldiers and civilian pedestrians. 
The best informed American officers in Seoul at the time estimate that between 500 and 800 people were killed or drowned in the blowing of this bridge.
  • 'Korea: The Untold Story of the War' p. 82 (Joseph C. Goulden, 1982년) - 미 군사고문단 장교의 인명피해자 관련 발언 원문 발췌
Recontructing the disaster later, KMAG officers estimated that from 500 to 800 soldiers and civilians were killed by the blast or drowned when they fell into the river.

박종인 조선일보 기자의 연구 결과[편집]

박종인 기자는 한강인도교 폭파와 관련된 수많은 증언과 정황을 종합적으로 재구성하여 폭파로 무너진 중지도(노들섬)에서 강남 방향의 2번과 3번 상판에서 얼마나 많은 인명피해자가 발생하였는지 분석하였고 폭파로 무너진 두개의 상판 크기에 비추어 여기에 인파가 완전히 꽉 차 있었다고 가정하면 미 군사고문단 장교의 추정수치인 500~800명에 근접하지만 이는 당시 정황으로 볼 때 차이가 있으며 결론적으로 정확한 인명피해자 수치는 산출하기 어렵지만 사망자의 다수는 군인과 경찰이며 (극)소수가 민간인이라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2]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의 연구 결과[편집]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활동하며 6.25 전쟁에서 국군과 경찰 등 국가 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 사건들을 전문적으로 조사하였던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 역시 2014년 이전 한강인도교 폭파 당시 수많은 민간인들이 사망하였다고 주장하였지만 2014년 발간 6.25 전쟁 민간인 학살 조사서 '국민은 적이 아니다'(pp. 71–74) 그리고 2016년 발표 소논문 '기록과 기억, 그리고 진실'(pp. 6–7)에서 재조사를 통한 정확한 인명피해자 수치는 밝혀내지 못했지만 사망자 중에서 민간인 사망자는 없거나 경미했을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고 요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현재 알려진 500~800명 사이의 사망자 기록은 미 군사고문단 장교의 증언 형태로 전해진 자료만 존재할 뿐 어떻게 500~800명의 추정수치가 산출되었는지에 관한 실체적 근거자료가 존재하지 않으며, 당시 대한민국 정부에서 사고 조사를 통해 산출한 사망자 수치 등과 교차 검증이 이루어진 수치가 아니다. 그리고 미 군사고문단 장교 역시 500-800명의 사망자를 전부 피란 민간인이라고 특정하지 않았으며 군인관 민간인을 모두 합한 추정수치인데 어느 순간 500~800명의 민간인 사망자 확정수치로 확대·재생산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2) 고든 L. 로트먼(Gordon L. Rottman)의 2006년 저서 '인천 1950(Inch'on 1950)'에 수록된 사진과 설명을 보면 당시 한강인도교는 피란민으로 위장한 북한군 파괴공작원의 활동을 우려하여 피란민의 한강인도교 사용을 원천적으로 금지시키고 인도교 옆의 부교를 통해 이동시켰다. 한강인도교의 부교 존재는 임인식 국방부 정훈국 사진대 대장의 사진으로도 증명이 되며 관련 증언도 남겼다.[3]

한강인도교의 부교 존재는 임인식 사진작가의 사진으로도 증명이 되는데 이렇게 피란 민간인의 한강인도교 통행은 엄격하게 통제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통제 활동으로 폭파 중지 명령을 하달하려던 육군본부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과 작전과장 정래혁 중령조차 다리에 진입하지 못할 지경이었는데 수많은 민간인들이 마음대로 진입하여 건너다가 폭사했다는 사실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최종적으로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의 연구 결과를 정리하면 한강인도교 폭파 당시 민간인 사망자는 거의 없었으며 만약 500~800명 사이 사망자가 발생한 것이 진실이더라도 대부분 군인과 경찰 사망자로서 민간인 사망자는 없거나 경미했을 것으로 결론지었다.

황현필 역사강사의 연구 결과[편집]

황현필 역사강사는 왜곡 5 - 한강인도교 폭파 때 민간인 희생이 없었다는 거짓말.이라는 영상에서 미 육군 군사연구소의 6.25 전쟁사 'South to the Nakdong, North to the Yalu(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 국방부 공문, 증언 자료 등을 제시하면서 한강인도교 폭파 당시 민간인 인명피해자가 엄청나게 많았다는 결론을 내리며 과거 통용되었던 민간인 사망자 500-800명 설을 지지하고 있다.

미국 종군기자들과 스털링 라이트 대령의 증언[편집]

당시 지프로 다리를 건너던 중 눈 앞에서(기사에서는 in our faces 혹은 only 25 yards away로 표현) 폭파가 발생하여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고 나룻배를 이용해 한강을 도강했던 뉴욕 타임스 소속 버튼 크레인(Burton Crane), 시카고 데일리 뉴스 소속 키즈 비치(Keyes Beech), 타임 매거진 소속 프랭크 기브니(Frank Gibney) 이렇게 3명의 미국인 종군기자들이 있었다.

이들 모두 한강인도교 폭파 이후 기사를 작성했고 이 기사들은 당시 미국 여러 신문과 잡지사에 특별기고 형식으로 전재(轉載) 및 재배포되어 거의 동일한 내용의 기사가 미국의 여러 신문사와 잡지사에 게제되었다.

먼저 뉴욕 타임스 소속 종군기자 버튼 크레인이 작성한 뉴욕 타임스 기사(제목: South Koreans Kill Own Troops By Dynamiting a Bridge Too Soon;~ ")와 'The Charlotte Observer' 기사(제목: "Newsmen are caught in Bridge Blast")를 살펴보면 자신들의 지프 주위의 트럭들이 다리와 같이 폭파되면서 탑승해있던 수백명의 한국군들이 사망했다고만 보도하고 있으며 민간인 사망자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 '뉴욕 타임스', 'The Charlotte Observer' (1950년 6월 29일자) - 버튼 크레인 작성 기사의 인명피해자 관련 기술[4][5]
~ they blew up the bridge, killing several hundred of their own soldiers.
Our correspondents' jeep, only twenty-five yards from the blast, was protected by a large truckful of soldiers, all of whom died.

시카고 데일리 뉴스 소속 종군기자 카이스 비치가 작성한 'St. Louis Post-Dispatch' 기사(제목: "Reporter in Korea Has Feeling He saw Start of 3rd World War") 역시 자신들의 지프 주위의 한국군이 탑승한 트럭들이 다리와 같이 폭파되었다고만 보도하고 있으며 민간인 사망자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 'St. Louis Post-Dispatch' (1950년 6월 28일자) - 'Keyes Beech' 비치 작성 기사의 인명피해자 관련 부분 원문 발췌[6]
A truckload of South Korean soldiers just ahead of us was blown to bits
  • 'Korea: The Untold Story of the War', p 82 (Joseph C. Goulden, 1982년) - 'Frank Gibney'가 증언한 인명피해자 관련 부분 원문 발췌
The ROK soldiers in the truck ahead all looked dead. Scores, hundreds of bodies of the dead and the gravley wounded lay scattered over the brigde. Other screaming refugees raced pell-mell for the north shore. 

조셉 C. 굴든(Joseph C. Goulden)의 1982년 저서 'Korea: The Untold Story of the War'에 실려있는 프랭크 기브니의 증언을 살펴보면 프랭크 기브니 역시 직접적인 인명피해자는 군인만 언급하고 있다.

2012년 코리아 타임스 기사에도 프랭크 기브니의 증언이 실려있는데 여기에서는 처음으로 민간인 사망자를 보았다고 증언하였다.[7]

  • '코리아 타임스' 기사 (2012년 6월 22일자) - 'Frank Gibney'가 증언한 인명피해자 관련 부분 원문 발췌
All of the soldiers in the truck ahead of us had been killed. Bodies of dead and dying were strewn over the bridge, civilians as well as soldiers. Confusion was complete. With the cries of the wounded and the dying forming the background, scores of refugees were running pell-mell off the bridge and disappearing into the night beyond. 
  • 'War in Korea' p. 26 (마거리트 히긴스, 1951년) - 미 군사고문단장 직무대리 스털링 라이트 대령의 인명피해자 관련 발언
They blew that bridge with truckloads of their own troops on the main span. They've killed hundreds of their own men.

정리하자면 다리가 폭파되는 광경을 직접 눈 앞에서 목격한 미국인 종군 기자와 주변에서 목격한 미 군사고문단장 직무대리 스털링 라이트 대령의 증언들만 한정해서 분석해보면 트럭과 군인이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고 즉 일관되게 군인들이 탑승한 트럭들이 다리와 함께 폭파되었다고 증언하였으며 프랭크 기브니 혼자 민간인 사망자를 보았다고 증언하였다.

덧붙여 현재까지 사료를 통해 소속과 신원이 명확하게 밝혀진 인명피해는 8대의 트럭에 분승하여 한강인도교를 통해 철수하던 종로경찰서 경력 중 4번째 트럭까지는 무사히 통과하였으나 5번째 트럭부터 다리와 함께 폭파하여 순직한 이상훈 경위 외 경위 2명, 경사 10명, 순경 64명 등 총 77명의 경찰관들이며,[8] 6.25 전쟁 참전 경찰관들의 증언에 의하면 군으로부터 다리 폭파 작전에 대한 정보를 아예 받지 못하였다고 하였다.[9]

국군들의 증언[편집]

  • '국방부 정훈국 이창록 소위 증언[10]
윤중위와 같이 걸어서 폭파현장까지 가 보았습니다. 북쪽 두 째 아치쯤이 끊겼는데 그야말로 눈뜨고 볼 수 없는 아비규환의 참상이에요. 그 많던 차량은 온데간데없고 파란 인불길이 반짝거리며 타오르는데 일대에는 피바다위에 살점등이 엉겨있어요. 더우기 소름이 끼치는 것은 피투성이가 돼 쓰러진 사람들이 손으로 다리 밑바닥을 박박 굵으며 어머니를 부르고 있어요.
  • '당시 공병대 유모 소령[11]
폭파된 후 채장군과 한강 폭파 작전에 참가했던 일부 공병들은 철주로 강을 건넜지만, 다리가 끊긴지도 모르고 피난에 나섰던 수 많은 서울시민들과 남은 부대들이 다리로 밀려 닥치는 무질서와 혼돈의 틈바구니 속에서 수중의 고혼으로 사라진 수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국군 중에 유모 소령은 인명피해자 중 피란 민간인 사망자를 직접 목격했다고 명확하게 증언하였다.

폭파 시점 논란[편집]

조기 폭파가 명백하다[편집]

국군 주력부대가 철수하지 못 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강 인도교를 비롯한 한강교가 조기 폭파된다는 우려가 국군 내부에서도 존재하였으며 육군본부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과 작전과장 정래혁 중령이 직접 한강교 현장으로 파견되어 폭파 중지명령 하달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인민군 주력부대가 서울을 완전 점령하여 한강교 도착 시각이 11시 30분이기 때문에 최소 5시간 30분에서 최대 9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으며 이로인해 국군 주력부대의 퇴로가 막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최창식 공병감이 사형까지 당하였다.

조기 폭파는 결과론이다[편집]

먼저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한강교 폭파 이후 벌어진 전황 즉 인민군 주력부대가 서울을 완전 점령하여 한강교로 도착하기까지 최소 5시간 30분에서 최대 9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조기 폭파가 되어 새벽 2시 30분 폭파는 국군의 실패한 결정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북한군의 세부적인 서울 침공 작전 방향에 따라 오히려 늑장 폭파가 될 수도 있었으며 결론적으로 조기 폭파는 결과론에 가깝다는 반론들이 존재하며 이는 신기철 인권평화연구소장의 저서 '적은 아니다'(pp 65–69), 남정옥 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관의 포럼 발표[12]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요지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6월 28일 새벽 2시 30분은 국군의 사전 계획된 한강교 폭파 시각과 대동소이하였다.
먼저 당시 미 군사고문단은 북한군 전차가 한강교가 위치한 용산 지역에 진입했을 시점을 가장 적당한 한강교 폭파 시점으로 꼽았으며, 최창식 공병감은 북한군이 서울 시내에 진입하고 2시간 40분 후 폭파를 군 수뇌부에 건의하였고, 육군본부는 2시간 후 폭파를 방침으로 정하였다.

당시 증언들을 정리해보면, 북한군의 서울 시내 진입 증언 중 가장 빠른 시점은 27일 밤 11시, 가장 늦은 시점은 28일 새벽 1시 30분으로 이미 북한군 전차가 돈암동을 시작으로 창경원, 중앙청, 동대문 등 서울 곳곳에서 목격된 상황이었으며 원래 소련 군사고문단의 유능한 대령급 고급장교들이 작성해 준 남침 작전계획서에 의하면 원래 작전 계획도 최우선 순위가 한강교 점령이었기 때문에 북한군이 원래 서울 점령 작전 계획대로 최고 시속이 55km에 달하는 T-34 전차를 앞세워 한강교 점령을 목표로 전력으로 돌진했거나 혹은 한강교 점령을 목표로 특작부대를 투입시켰다면 전문 경비부대 없이 폭파 담당 공병대와 질서 통제 담당 헌병대 이런 소수의 국군 병력을 순식간에 제압하고 충분히 한강교를 탈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2) 북한군의 서울 점령 과정 중 작전 수행 미숙과 판단 실수에 의해 생긴 여유 시간이다.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폭파 이후 북한군 전차가 28일 오전 8시경에 용산 삼각지에 진입했으며 주력부대는 이날 11시 30분에 진입했기 때문에 최소 5시간 30분에서 최대 9시간이나 빨리 폭파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5시간 30분에서~9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던 것은 원래 북한군의 작전 계획상 제일 먼저 한강교를 점령했어야 하지만 이미 새벽에 한강교들이 이미 폭파되어 전략적 가치가 상실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해서 일부러 한강교로 늦게 진입했을 가능성 혹은 북한군이 한강교 보다는 중앙청을 비롯한 한국 정부의 주요 기관과 시설들을 점거하는 실수를 했기 때문에 늦게 도착한 것으로 북한군이 한강교 점령을 목표로 전력으로 돌진했는데도 6월 28일 오전 8시 이후 한강교에 도착한 것으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소련의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 중장 역시 전투 보고서에서 한강교 점령을 늦추고 국군이 한강교 폭파를 할 수 있게 허용한 것을 북한군의 큰 실책으로 지적하였다.

각 사단장들은 서울에서 퇴각하는 적을 적극적으로 추격하거나 한강 도선장들을 점령하지 않은 채, 결단을 내리지 못 하고 모호하게 행동하였다. 또한 제105땅크여단 예하부대들도 서울을 점령한 후 3일 동안 적을 추격하지 않은 채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음으로써 적에게 한강의 남쪽 강변을 강화하고 교량을 파괴할 수 있는 여유를 주었다.

(3) 국군 주력부대 대부분을 완전하게 철수시킬 수 있는 엄호부대와 화력지원이 존재하지 않았다.
국군 주력부대의 완전 철수를 위해 폭파 시점을 늦추고 기다렸다가는 국군 주력부대를 바싹 추격하며 엉겨붙은 북한군까지 같이 한강교로 들이닥치면서 일대 혼란과 함께 한강교를 탈취당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미아리 방면 등에서 북한군과 접전을 벌이며 철수하던 국군 주력부대가 완전히 철수할려면 목숨을 담보로 주력부대의 철수를 엄호하면서 북한군 추격을 늦추며 시간을 벌어줄 국군 엄호부대와 공군 및 포병 등의 화력 지원이 있었어야 하는데 이런 엄호부대와 화력 지원이 전무한 상황이었고 미아리에서 한강교까지 불과 최단거리 기준 8km도 안 되는 거리였기 때문에 북한군에 밀려 후퇴하는 국군 주력부대와 이를 추격하는 북한군이 거의 동시에 한강교로 들이닥치거나 오히려 T-34 전차를 앞세워 국군 주력부대를 추월해 먼저 한강교로 진입하는 북한군 선발 부대에 의해 한강교를 탈취당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