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야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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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야누스
Traianus Glyptothek Munich 336.jpg
지위
로마 제국제13대 황제
재위 98년 1월 27일–117년 8월 8일
전임자 네르바
후임자 하드리아누스
신상정보
출생일 53년 9월 18일
출생지 히스파니아 이탈리카
사망일 117년 8월 8일
사망지 킬리키아 셀리누스
매장지 로마 (오늘날 소실된 트라야누스 원주의 아랫 부분)
가문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부친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
네르바 (계부)
모친 마르키아
배우자 폼페이아 플로티나
자녀 하드리아누스 (입양아)

트라이아누스(Traianus)는 로마 제국의 제13대 황제(53년 9월 18일 - 117년 8월 7일)이다. 오현제 중 한 사람이며, 속주 출신자로서는 처음으로 로마 황제에 올랐다. 로마 제국의 영토를 최대 판도로 넓힌 황제이다.

생애[편집]

서기 117년 로마 제국의 최대 판도.

게르마니아 속주 총독[편집]

로마 제국의 속주 히스파니아[1]의 이탈리카 태생이다. 대(對) 게르만족 최전선인 게르마니아 속주의 총독을 맡고 있었던 그는 97년에 네르바 황제의 양아들이 되어, 98년에 황제에 즉위하였다. 네르바 황제가 트라야누스를 양아들로 입양한 이유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으로, 유능한 트라야누스가 제국을 경영하도록 하는 지혜로운 생각이었다. 트라야누스 치세의 교회사를 미주한인크리스천신문에 기고한 한평우 목사에 따르면, 트라야누스 황제는 네르바 황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로마의 오현제(五賢帝) 중 한 사람으로, 탁월한 황제로 인정을 받았다. [2]

군사원정[편집]

군인 출신인 그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래의 방위 정책에 반해 군사 원정에 적극적이었다. 도나우 강을 넘어 그리스 북부에 위치한 다키아[3]를 정복하여, 일시적으로 아르메니아메소포타미아 지방도 제국령으로 삼는 등 트라이아누스의 치세 동안 로마 제국의 영토는 최대에 이르렀다. 이로 인해, 로마 제국의 판도는 동쪽으로는 메소포타미아, 서쪽으로는 이베리아 반도, 남쪽으로는 북아프리카지중해 연안 일대에서부터 이집트 남부, 북쪽으로는 브리타니아[4] 남부에까지 미쳤다. 다키아 원정 때의 일은 트라야누스 원주라고 칭해지는 대리석 기둥에 조각으로 새겨져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복지[편집]

내정 문제에 대해서는, 선제 네르바를 본받아 원로원과의 협조를 중시하였다. 또, 구빈 제도 충실, 세금 부담 경감, 공공사업 진흥 등의 사회복지와 행정 개혁을 대거 실시하는 등 제국의 번영에 노력하였다. 시내에 포로 로마눔 부근에 새로운 광장을 축조하여, 벽돌을 세워 공설 시장을 마련해 시민들을 입주시켰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신분과 빈부의 차이를 뛰어넘어 로마 시민 모두의 공감을 얻었다.

이러한 내정과 원정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원로원에서 "라틴어: Optimus Princeps"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이 칭호는, 당시 주조된 화폐에도 새겨져 있다.

기독교 탄압정책[편집]

비티니아 속주 플리니 총독이 그리스도인 즉 기독교인들의 예배에 대해 보고하고, 대처방안을 문의하자 '고발이 있을 경우에 심문을 하고, 배교를 하면 풀어주되, 배교를 하지 않는다면 처형할 것'이라는 행정지시를 내린다. 즉, 법치주의에 따라 기독교라는 신흥종교를 다스리라는 것이었는데, 이 시기에 이그나티우스 주교가 순교한다. [5]

사생활과 사망[편집]

사생활을 들여다보면, 여색보다는 남색을 더 좋아한 그는 항상 아름다운 한 무리의 젊은이들을 대동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러한 성향으로 인해 황제로서의 그의 직무 수행에 방해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그는 아이를 낳지 못한 채 죽고 만다. 제위는 양아들로 삼은 사촌형제로 하드리아누스가 계승하였다.

같이 보기[편집]

각주[편집]

전임
네르바
제13대 로마 제국 황제
98년 - 117년
후임
하드리아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