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안니스 6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Picto infobox prétendant à un trône.png
요한네스 칸타쿠제누스
Ἰωάννης Ἄγγελος Παλαιολόγος Καντακουζηνός
블라케르나이 궁전의 공의회에 참석한 요한네스 6세
블라케르나이 궁전의 공의회에 참석한 요한네스 6세
지위
비잔티움황제
재위 1347년 5월 21일 - 1354년 12월 10일
전임 요안니스 5세
후임 요안니스 5세
공동재위자 요안니스 5세
신상정보
출생일 1292년
사망일 1383년 6월 15일
사망지 모레아 전제군주국 펠로폰네소스
매장지 펠로폰네스 미스트라
왕조 칸타쿠지노스 왕조
가문 칸타쿠제누스
부친 미카엘 칸타쿠제누스
모친 테오도라 팔라이올로기나 안젤리나
배우자 이레네 아사니나
종교 동방 정교회

요안니스 6세 칸타쿠제노스(그리스어: Ἰωάννης ΣΤʹ Καντακουζηνός, 1292년 ~ 1383년)는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이다.

생애[편집]

요안니스 칸타쿠제누스는 모레아의 총독인 미카일 칸타쿠제누스와 테오도라 팔레이올로기나 안젤리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본래 황제인 안드로니코스 3세 팔레올로고스의 친구로, 그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6년 동안 안드로니코스를 도와 안드로니쿠스가 내전에서 승리하게 되었다. 1328년 안드로니코스 3세가 즉위하자, 그는 내무대신이 되었으며, 최고 행정권을 위임받았고 그의 통치 기간 내내 대내외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레스보스 섬과 아이톨리아 공국이 제국에 다시 충성하게 하기도 하였으며, 절제와 금욕을 미덕으로 삼았다. 그는 1341년 6월 안드로니쿠스 3세가 후계지정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안드로니코스 3세의 적장자인 요안니스 5세의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내전[편집]

내전 초반[편집]

칸타쿠제노스는 안드로니코스 3세에 의해 공동 황제로 등극하는 것을 여러 번 거부한 그 자신의 어떠한 야망이 없이 시작되었다. 황제가 죽은 후, 요안니스 6세가 쓴 「역사」에 따르면, 칸타쿠제노스는 요안니스 5세의 주장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소년이 성년이 될 때까지 제국의 관리를 감독하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다시 한번 왕위에 오르기를 거부했다. 그가 충성심을 유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요한 5세와 그의 어머니 안나에게 헌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를 반역자로 의심하게 되었다. 전황제와의 우정과 그의 권력은 그의 전 원수들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 14세와 알렉시오스 아포카우코스의 질투를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일련의 시도가 실패한 후, 1341년 9월 그가 수도 밖으로 나가 군대를 준비하던 중에 섭정을 전복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펠로폰네소스의 일부를 여전히 보유하고 있는 십자군 공국을 선동하였다. 그는 찬탈자들과 협상을 시도했지만 거절당했고 그의 군대는 해산 명령을 받았다. 게다가,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그의 친척들은 망명하거나 투옥되었고, 그들의 재산은 대적자들에 의해 몰수되었다. 그의 어머니 테오도라는 가택 연금 중에 겪은 학대 때문에 사망했다. 그의 군대는 새로운 섭정들의 명령을 무시하고 트라키아의 디디모테이촌에서 요안니스 6세를 황제를 선포했다. 그는 요안니스 5세의 하위 통치자로 계속 칭하면서 이것을 받아들였다.

이어진 내전은 6년 동안 지속되었다. 모든 종류의 외국 동맹국들과 용병들을 불렀고, 양측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제국을 거의 망쳤다.

내전 후반[편집]

이어 요안니스 6세는 먼저 데살로니카로 진군하였다. 그러자 통치자들이 그에게 데살로니카를 넘겨주려고 하였다. 아포카우코스는 이 움직임을 예상하고 도시를 강화하기 위해 함대를 파견하여 요한은 세르비아로 도망쳐야 했고, 스테판 두샨은 그를 보호하고 군사 지원을 해주었다. 이것은 대부분 효과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고, 요안니스 6세의 오랜 친구이자 아이딘의 우무르의 개입만이 디디모테이촌에 있는 그의 본부에 대한 섭정군의 포위망을 무너뜨렸다.

이듬해 테살로니카에 대한 또 다른 시도에서, 세르비아인들은 새로운 섭정을 지원하는 편을 바꾸었고, 그는 한 번 더 고립되었다. 그러나 다시 아이딘의 우무르가 그를 구하러 왔고, 그들의 연합군은 마케도니아에서 탈출하여 디디모테이촌으로 돌아왔다. 비록 시간이 그의 편이긴 했지만, 양측 모두 상대방을 몰아낼 수 없었기 때문에 전쟁은 4년 더 질질 길게 끌었다. 그는 당시의 편견을 뛰어 넘어 직접 튀르크어를 배우고 오스만오르한 가지와 우정을 쌓았다. 그는 오스만과 협상을 해서 오르한이 그의 딸 과 결혼하였으며, 1347년 2월 8일 요안니스 6세는 승리를 거두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했다. 요한네스 5세와 요한네스 6세는 후자가 10년 동안 선임 황제로 통치하고, 그 후 10년 후 요한네스 5세가 연공에 올라 칸타쿠제노스와 동등한 권력을 공유할 것이라는 데 동의했다. 요한네스 6세의 공식 대관식은 5월 21일에 거행되었다.

재위 기간[편집]

요한네스의 통치 기간 전부터 제국은 이미 분열되고 궁핍하고 약해졌으며 사방에서 계속 공격을 받았다. 그가 확고한 최고 권력을 쥐고 그의 제국을 건지려는 뜻을 펼치려 했을 때 제국에는 필요한 자금이 전혀 남아있지 못했다.

1347년 봄에는 흑사병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휩쓸었고, 많은 제국인들이 죽었으며 그의 막내아들도 잃었다.

당시 제노바인들은 당시 제국의 경제를 약화시키고 있었다. 갈라타에서 그들의 식민지를 허용한 조약의 조건을 무시한 제노바인들은 그것을 요새화하고 무장하기 시작했다. 보스포루스의 통제로 인한 수입의 87%가 제국 대신 그들에게 돌아갔다는 것이였다. 요한네스 6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자신의 재산을 줄이고 전쟁에 대비하여 산산조각난 제국의 해군을 재건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9척의 공정한 크기의 배와 약 100척의 작은 배를 건설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빌릴 수 있었고, 그 후 요금을 낮추고 제노바의 수입을 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전쟁을 선포했을 때, 그들은 1349년 초까지 그의 함대를 침몰시키거나 사로잡을 수 있었다. 제노바은 갈라타의 주요 지역이 부두와 창고를 포함하여 불에 탄 후 협상할 수밖에 없었지만, 제국은 이후 해군 보호를 위해 베네치아 공화국과 동맹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1350년 전쟁에 개입하게 되었지만, 파가니노 도리아는 이듬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피리치 승리를 거두어 그는 제노바와 평화협상할 수밖에 없었다.

1351년에 그는 제5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감독했는데, 그곳에서 그레고리 팔라마스의 헤시카즘 신학은 정통으로 선언되었다.

세르비아의 스테판 두샨은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에피루스를 점령하였고, 제국을 위협하였다. 요한네스 6세는 오스만과 다시 동맹을 맺어 추가 침공에 대한 도움을 확보했다. 지진이 있은 후, 그들은 1354년에 그의 많은 빚을 부분적으로 갚기 위해 유럽에서의 첫 발판인 칼리폴리스를 합병하였다. 그는 1353년에 그의 아들을 또 다른 공동 황제로 삼았고, 정부의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 세금을 확대하려는 요한네스 6세의 시도는 오랫동안 불쾌하였다. 그는 결국 1354년 말에 요한네스 5세에 의해 선임황제가 되었고, 12월에 스스로 퇴위하였다.

그의 재위기간 중에는 아주 평화로운 시절도 있었으며, 그는 비잔티움이 원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는 아니었지만, 제국을 위해 헌신한 그의 공로도 인정받을만 하다. 또한 니케포로스 그레고라스는 만약 요한네스 칸타쿠제노스가 팔라마스의 이단에 빠지지 않았다면 그는 비잔티움의 가장 위대한 황제의 반열에 올랐을 것이라 평하기도 하였다.

말년[편집]

칸타쿠제노스는 수도원으로 은퇴했고, 그곳에서 그는 수도사 요아사푸스로서 「역사」를 저술하였다. 1320년에서 1356년까지의 그의 책은 주관적인 생각도 들어 있으며 변명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그것을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동로마의 황제가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 남긴 유일한 생존 기록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1367년 요아사푸스는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화해를 시도하기 위해 라틴 총대주교 바울과 협상하기 위해 동방 정교회의 대표로 임명되었다. 그들은 교황과 동서 교회의 모든 총대주교, 대주교, 주교들이 참석하는 세계 공의회를 소집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교황 우르바노 5세는 이 계획을 거부하였고, 결국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였다.

1383년에 그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죽었고 그의 아들들에 의해 라코니아의 미스트라에 묻혔다.

같이보기[편집]

자료[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