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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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아누스
로마 제국 33대 황제
재위 기간 253년~260년
타고난 이름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Publius Licinius Valerianus
황제 이름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Caesar Publius Licinius Valerianus Augustus
전임 황제 아이밀리아누스
후임 황제 갈리에누스
로마 황제 연대표

발레리아누스(Publius Licinius Valerianus, 200년? ~ 260년?)는 로마 제국의 33대 황제(임페라토르)이다.

생애[편집]

다른 군인 출신 황제와는 달리 발레리아누스 자신은 유서 깊은 로마 원로원 의원 일족 출신이었다. 그의 전반생은 확실하지 않지만, 에그나티아 마니아나와 결혼해 두 아들을 두었다고 하며, 여기에는 훗날 로마 황제가 되는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이그나티우스 갈리에누스와 발레리아누스 미노르도 있었다.

238년의 로마 내전 속에서 여섯 황제의 한 사람이었던 고르디아누스 1세에 의해 일찍이 프린켑스 세나투스로 선출되었다. 당시 고르디아누스 1세는 원로원 의원 가문 출신인 발레리아누스를 통해 원로원과 교섭하고자 한 것이다. 244년에 미시케(Mesiche)라는 곳에서 사산 조 페르시아의 대왕(샤힌샤) 샤푸르 1세와의 전투에서 고르디아누스 1세의 손자 고르디아누스 3세가 죽고(이를 필리포스의 쿠데타에 의한 것이라고도 한다), 필리포스 아라부스가 군영 안에서 스스로 황제(임페라토르)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249년필리포스가 데키우스에게 피살되고, 황제(임페라토르)가 된 데키우스에게 251년 감찰관(콘술)로 선출된다. 또한 라인 강 연안의 노리쿰과 라에티아 두 속주의 총독(코메스)를 지냈다.

데키우스가 아브리투스에서 전사하고 뒤를 이은 트레보니우스 갈루스 때에도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총독(코메스)으로 일하는 등, 발레리아누스의 지위는 유지되었지만, 마르쿠스 아이밀리아누스가 반란을 일으켜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및 그 공동 황제였던 가이우스 볼루시아누스(Gaius Vibius Volusianus)가 피살되자, 아이밀리아누스를 내쫓기 위해 발레리아누스는 군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얼마 안 가서 아이밀리아누스는 자신의 병사들에게 살해당했고, 253년에 발레리아누스가 로마의 황제(임페라토르)가 되었다.

발레리아누스는 황제가 된 뒤 데키우스의 기독교 박해 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카르타고 주교 치프리아누스로마 주교 식스토 2세를 처형했다. 한편 그는 아들 갈리에누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해 로마 제국의 서반부를 맡기고, 자신은 사산 조 페르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던 동쪽을 맡았다. 그러나 259년, 군세를 몰아 페르시아로 쳐들어 갔던 발레리아누스는 그만 에데사(지금의 샨리우르파)에서 샤푸르 1세에게 패해 포로가 되고 말았다(에데사 전투).

포로가 된 발레리아누스는 비샤푸르로 압송되어, 죽을 때까지 노예 취급을 받으며 사후에도 박제가 되어 신전에 전시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승에 대해서는 사실 여부가 확실하지 않지만, 황제(임페라토르)가 적국의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로마에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그 뒤로도 11세기 셀주크 투르크와의 전투에서 포로가 된 동로마로마노스 4세 디오게네스 외에는 이러한 사례가 없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아브리투스 전투(데키우스 전사)와 함께 로마 제국의 국력 저하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평가받으며, 이후 로마 세계는 스스로 황제(임페라토르)를 참칭하는 자들의 난립과 영토 분열 등으로 그 혼란이 더욱 심해져 갔다.

관련 항목[편집]

전 임
아이밀리아누스
제33대 로마 제국 황제
253년 - 260년
후 임
갈리에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