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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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식(Kheshig)은 몽골 제국의 왕족들, 특히 칭기즈 칸이나 왕비 보르테와 같은 지배자를 위해 창설되었던 친위대이다. '케식'은 몽골어로 '축복받은, 신성한'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이들의 주요 임무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제국의 칸이나 황제의 곁에서 이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밤낮에 따라 2개의 부대로 나뉘었는데, 밤에 근무하는 부대는 케브톨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들은 정규군으로부터 분리되어 그들과 함께 전투를 치르는 대신, 후방에서 호위의 업무를 맡도록 되어 있었다. 케식 부대의 대장은 '체르비'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몽골 제국의 전쟁이 유라시아의 대부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케식 부대가 미친 영향은 그만큼 넓은 지역에 거대하게 작용하였다. 한편, 케식이란 이름은 한 때 무굴 제국의 친위대에게도 사용된 적이 있었다. 또 페르시아의 중요 인사들을 밤중에 보호하는 임무를 맡은 부대에게 '케식키'라는 명칭이 붙은 적도 있었다.

한편 오늘날 몽골의 '케식텐' 부족은 북원의 케식 부대의 후손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역사[편집]

몽골 역사에서 적대 부족간의 부족장 암살은 강자에게 붙는 유목민의 특성상 상대 부족의 결속력 약화 및 상대 부족에 대한 주변 부족들의 공격을 유도하기 위한 전략으로서 빈번히 발생하는 사건으로, 대표적인 예가 칭기즈 칸의 아버지인 예수게이 바토르의 타타르족에 의한 독살이었다. 이러한 문제는 성벽이나 돌집과 같은 방어 요새나 장치 없이 생활해야 하는 유목민의 특성상 밤중에 영지 내에 접근하기가 쉬웠고 가죽으로 된 천막은 창칼에 뚫리기 쉬워 암살 시 천막을 뚫고 목표물을 공격하기가 용이했기 때문에 그 위험성 또한 매우 높았다. 따라서 몽골 내 몽골이나 투르크족 족장들은 개인 호위병을 둘 수밖에 없었다. 케레이트의 부족장이었던 토그릴칸은 '토르구드'라는 친위대를 두었는데, 오늘날의 토르구드 부족이 이들의 후손이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토그릴 칸이 1203년 몽골족에 의해 패배한 이후, 칭기즈 칸은 자신에게 극도의 충성을 바치는 자들을 모아 케식 친위대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초기에 이들은 낮에 근무하는 70명의 '토르구드'와 밤에 근무하는 80명의 '케브툴'로 나뉘었다. 칭기즈 칸의 통치기간 동안, 이들은 '사준'이라고 불리는 무칼리, 치라운, 보오르추, 보로클의 네 장수가 각각 지휘하는 부대로 나뉘었다. 케식의 구성원들은 몽골 제국 내 대부분의 병사보다 높은 지위에 있었다. 이들에 대한 보수는 매우 훌륭했고, 때문에 부대원들의 업무에 대한 천직 의식은 강렬했다. 이후 케식 부대의 수는 빠르게 증가해, 나중에는 한 명에 평균 3일 정도만 근무하면 될 정도로 늘어났다. 이러한 이유로, '케식'이란 단어는 '축복받은, 신성한'이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케식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으로 여겨졌고, 구성원들은 인질 교환 시에는 적국의 상류층 인사에 대응한 인사로서 교환되었다. 초창기 이들의 수는 1,000명 정도였으나, 칭기즈 칸의 통치 기간동안 이들의 수는 10,000명으로 늘어났으며, 바얀의 숙부인 나야가에 의해 통솔되었다.

케식 부대는 원래 몽골과 투르크족으로만 구성되었었다. 그러나 제국이 빠르게 팽창하면서, 칭기즈 칸 사후 후계자들의 케식 부대는 중국인, 킵차크인, 조지아인, 아르메니아인, 고려인, 이탈리아인, 러시아인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인종의 혼합체가 되었다. 케식은 황제의 개인 재산으로 취급되었던 만큼, 케식 부대는 황제의 후계자에게 상속되는 것이 아니었다. 대신에, 사망한 황제의 케식 부대는 황제의 가족과 가정을 돌보고 수호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구유크 칸의 경우 부황제 우구데이 소속의 케식 부대를 대부분 자신의 친위대로 만들기도 했다.

이후 쿠빌라이 칸은 케식 부대의 기능을 제한하고, 새로운 친위대를 창설하였다. 그러나, 그의 케식 부대는 여전히 '사구'의 후손들에 의해 통솔되었다. 이 때 쿠빌라이에게 소속된 케식 부대원들은 총 12,000명이었다.

같이 보기[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