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석

권기열 (토론 | 기여)님의 2014년 4월 28일 (월) 15:49 판
세례자 요한 이태석 신부
교구살레시오회
성직
사제서품2001년 6월 24일
수여 김수환 추기경
개인정보
출생1962년 10월 17일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경상남도 부산시 남부민동
선종2010년 1월 14일(2010-01-14)(47세)
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초구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안장지전남 담양 천주교 공동묘역 살레시오 성직자 묘역 북위 35° 22′ 15″ 동경 126° 57′ 56″ / 북위 35.370728° 동경 126.965663°  / 35.370728; 126.965663
국적대한민국의 기 대한민국
교파천주교
부모어머니 신명남 (안토니아)
가족형 이태영 (마리요셉,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 신부
재직살레시오회 수단 선교사(2001년 ~ 2008년)
전직수단 톤즈 돈보스코병원
학력인제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광주가톨릭대학교 신학과 졸업
이태석
별명 세례명 세례자 요한
출생지 대한민국 경상남도 부산시
사망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복무 대한민국 육군
복무기간 1987년 ~ 1990년
근무 군의관
최종계급 대한민국 육군 대위
지휘 군의무장교
기타 이력 천주교 사제
외과 전문의
수단 톤즈 선교병원 원장

이태석(李泰錫, 1962년 10월 17일(음력 9월 19일) ~ 2010년 1월 14일)은 대한민국로마 가톨릭 수도회살레시오회 사제외과 의사아프리카 남수단의 마을인 톤즈에서 교육 활동과 의료 활동을 펼쳤다. 세례명은 세례자 요한이다. 별칭으로는 톤즈돈 보스코, 수단슈바이처로 불리었다. 톤즈 마을 사람들은 그의 세례명에 성을 더해 발음하기 쉬운 쫄리(John Lee)로 부른다.

생애

출생과 성장

부산시의 남부민동에서 10남매 중 9번째로 태어나 송도성당에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9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며, 어머니가 자갈치시장에서 삯바느질을 해서 아이들을 키웠다. 초등학교 시절 동네 성당에서 하와이몰로카이 섬에서 버림받은 한센병 환자들과 산 벨기에 선교사 다미앵 신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모로카이(MOLOKAI)를 보고 다미앵 신부와 같은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1] 학창시절에는 송도성당에서 주일학교 교사, 청년회, 학생회, 성가대, 보좌복사 등 종교 활동을 계속 하였다.[2]

청년기

1981년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87년 부산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으며,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가톨릭 신부가 되는 뜻을 품었다. 복무를 마치고 특히 청소년교육에 대한 깊은 관심에 따라 1991년 8월 살레시오 수도회에 입회한다. 그리고 1992년 광주가톨릭대학교수도회 소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1993년 1월 24일 수련을 시작해서 1994년 1월 30일 첫 서원을 하고, 광주 가톨릭 대학교에서 2년 철학과정을 마친 후 서울 대림동 살레시오 수도원에서 역시 2년 과정의 사목실습을 하였으며, 1997년 로마 교황청립 살레시오 대학교로 유학한다. 그곳에서 재학 중, 한국에서 이미 20년 동안 선교사로 활동하다 1991년 아프리카 수단으로 다시 파견된 공고미노 수사가 로마에 휴가차 들렀을 때 그를 만났는데 그로부터 수단의 이야기를 듣고 선교사가 될 것을 권유받는다. 1999년 방학 때 선교체험을 하려 아프리카 케냐에 들렀을 당시 남수단 톤즈에서 활동을 하고 있던 제임스라는 인디아 출신 살레시오 수도회 신부를 만나 톤즈로 가게 되고, 이때 강렬한 인상을 받아 톤즈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칠 것을 결심한다.

사제 생애

2000년 4월 27일 종신서원을 하고, 2000년 6월 28일 로마에서 부제서품을 받았다. 2001년 6월 24일 서울 구로3동 천주교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같은 해 10월 아프리카를 향해 선교사로 출발하여 12월 7일 아프리카 남부 수단 와랍 주 톤즈에 부임한다. 그곳에서 가난과 기아,질병 등으로 도탄에 빠진 마을의 참상을 보게 되고,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겸한 의료봉사활동과 구호운동에 헌신한다. 병실 12개짜리 병원을 짓고[3] 진료소를 만들어, 하루 200~300명의 환자를 돌보며 인근 80여개 마을의 순회진료와 예방접종도 했다. 학교를 만들고, 초·중·고교 11년 과정을 꾸려 수학음악도 가르쳤다. 기숙사도 짓고 톤즈 브라스 밴드를 만들어 악기도 가르쳤다.

나로 하여금 소중한 많은 것들을 뒤로 한 채 이곳까지 오게 한 것도 후회 없이 기쁘게 살 수 있는 것도 주님의 존재를 체험하게 만드는 나환자(한센인)들의 신비스러운 힘 때문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하게 된다.

— 이태석,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중[4]

그러나 2008년 11월 한국에 휴가차 잠시 입국하였을 때, 대장암 4기를 진단받아 톤즈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암투병 끝에 2010년 1월 14일 서울특별시 서초구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에서 새벽 5시 35분에 살레시오회 형제들과 가족들 그리고 친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선종하였다. 유해는 전남 담양 천주교 공동묘역 살레시오 성직자 묘역에 안장됐다. 그의 이야기는 가톨릭 잡지 《생활성서》에 연재되었고, 《친구가 되어주실래요》라는 단행본으로도 소개되었다.

사후 봉사단체 난립

사후 이태석 신부의 이름을 건 단체가 나타나, 그의 소속 수도회인 살레시오회에서는 수회에 걸쳐 상업적 이용을 금하라는 경고를 하였다. 엉뚱한 사람 혹은 조직에서 상업적 이득을 보는 것이 그릇됨은 물론, 그의 정신에 대한 훼손, 그의 삶에 대한 모든 것이 잘못 다뤄지기 때문이다. 살레시오회측에서 수차례 경고한 내용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태석 신부를 팔지마라" 살레시오회 강력경고</ref>

  • 수도생활을 봉사로 격하하는 문제
    • 이태석 신부의 행위는 수사신부의 지위로 수도회의 명을 받들어 지킨 숭고한 수도생활이다. 이것을 단순한 자원봉사자의 '봉사'로 격하하고 있다. 사후 난립 단체가 이태석 신부의 생전 행위를 수도생활이 아닌 봉사로 격하하는 것은 천주교 수도회에 대한 기본적 지식조차 없다는 반증이다.
  • 톤즈 사람들에 대한 그릇된 인지
    • 사후 난립한 단체들은 이태석 신부의 사후 톤즈가 더욱 가난해지고 곤궁해졌다는 식으로 홍보하는데, 이 역시 이태석 신부의 생전 방향과 정반대이다. 톤즈 사람들이 이태석 신부를 위했던 것은, 이전 봉사단체에서 로테이션으로 근무하던 의사들과는 달리 자기 자신을 톤즈 사람들과 동일한 인간이란 자세로 접근하였다. 톤즈 사람들은 못살고 불쌍하니 우리가 일방적으로 구휼할 존재로 보는 것은 이태석 신부의 유지로 볼 수 없는 자세다.[5]

기타

이태석은 음악적 재능을 타고났으나 가난하여 성당에 있는 오르간으로 독학했다. 이뿐만 아니라 첼로, 색소폰, 클라리넷 등도 독학으로 연주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성탄’, ‘둥근 해’, ‘작은 별’ 등 쉬운 동요를 작곡했으며, 중학생 때에는 부산시에서 작곡부문 대상을 받기도 했다. 그가 중학교 시절 지은 곡으로 ‘묵상’(청소년 성가에 수록), ‘새 아담을 찾아서’와 의대 재학시절 작곡한 ‘아리랑’, 2005년 남북 수단이 평화협정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감격에 싸여 지은 ‘슈쿠란 바바’(하느님 감사합니다.)가 있다.[6]

십자가 앞에 꿇어 주께 물었네. 오~오~오 /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 / 총부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을 왜 당신은 보고만 있냐고. / 눈물을 흘리면서 주께 물었네. / 세상엔 죄인들과 닫힌 감옥이 있어야만 하고, / 인간은 고통 속에서 번민해야 하느냐고. / 조용한 침묵 속에서 주님 말씀하셨지./ 사랑, 사랑, 사랑 오직 서로 사랑하라고. / 난 영원히 기도하리라. 세계평화 위해. / 난 사랑하리라. 내 모든 것 바쳐.

— 묵상

소속

학력

비학위 수료

같이 보기

수상 경력

저서

  •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출판사 - 생활성서사, 2009년):이태석 신부가 생활성서에 연재한 이야기를 묶은 이다.
  •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증보판》(출판사 - 생활성서사, 2010년)
  • 《당신의 이름은 사랑》(출판사 - 다른우리, 2011년): 2004년부터 2008년 사이에 남수단 룸벡교구 톤즈에서 이뤄진 강론이 담겨 있다.
  • 《내 친구 쫄리 신부님》(출판사 - 생활성서, 2011년 원작 이태석/글·그림 신명환): 만화로 만나는 이태석 신부
  • 《나눌 수 있어 행복한 사람 이태석》 (출판사 - 주니어중앙, 2011년 정희재 글/서영경 그림): 이태석 신부의 이야기를 동화로 엮었다.

노래

  • 작곡집 ‘쫄리신부님의 노래’
  • 음반 ‘슈쿠란 바바’

사후 기념

  • 2010년 9월, 이태석 신부의 헌신적 삶을 그린 영화 <울지마, 톤즈>가 개봉되었다. 2011년 1월 14일에는 선종 1주기를 맞아 그를 추모하는 추모제가 열렸다.
  • 2010년 12월 24일 오후 4시 KBS 1TV에서는 ‘성탄특집 이태석 신부 세상을 울리다 - 수단의 슈바이처 故 이태석 신부. 울지마, 톤즈’가 방송되었다.[4] 이 프로그램을 기획한 구수환 프로듀서는 제20회 한국가톨릭매스컴 대상을 받았으며, 대상 상금 전액을 아프리카 톤즈 병원에 기부했다.[8]
  • 2011년 6월 1일 고 이태석 신부를 기리기 위해 ‘이태석 신부 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다. [9] 12월 홍보대사로 배우 안재모가 위촉되었다.[10]
  • 2011년 외교통상부가 이태석 신부의 봉사정신을 기리기 위해 이태석상을 제정했다. 2011년 11월 23일에 첫 수상자로 2003년부터 아프리카의 섬나라 마다가스카르에서 의료봉사를 해온 외과 전문의 이재훈(44)씨를 선정했다.[11]

주석

  1. 노재현 기자. “다미안과 이태석”. 중앙일보. 2011년 1월 28일에 확인함.  다음 글자 무시됨: ‘article’ (도움말); 다음 글자 무시됨: ‘default’ (도움말);
  2. “이태석신부님소개”. (사)이태석신부참사상실천사업회. 2012년 6월 19일에 확인함. 
  3. 이지연 기자 (2010년 1월 21일). “‘한국의 슈바이처’ 살레시오회 이태석 신부의 생애”. 가톨릭뉴스. 2012년 6월 19일에 확인함. 
  4. 함태수 기자. “‘살아있는 예수’ 故 이태석 신부 삶, 영화 TV다큐로 감동릴레이”. 마이데일리. 2011년 1월 28일에 확인함. 
  5. 뉴스1살레시오회 "고(故) 이태석 신부의 톤즈 공동체, 상업적 이용 중단하라"
  6. 이태영 (2010년 6월 13일). “사제 이태석”. 가톨릭신문. 2012년 6월 19일에 확인함. 
  7. ““울지마 톤즈” 故 이태석 신부, KBS 감동대상 수상”. 한국경제. 2011년 1월 28일에 확인함. 
  8. 오혜민 기자 (2011년 1월 23일). “다시 시작하는 이태석 : 그 시간 이후”. 가톨릭신문. 2012년 6월 19일에 확인함. 
  9. '울지마 톤즈' 이태석 신부 기념사업회 창립”. 연합뉴스. 2011년 6월 24일에 확인함. 
  10. 이태석 기념사업회 안재모씨 홍보대사로
  11. 이지혜 기자 (2011년 12월 4일). “제2의 이태석 신부 찾아”. 평화신문. 2012년 6월 19일에 확인함. 

바깥 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