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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김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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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후'''(金麟厚, [[1510년]] ~ [[1560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김인후'''(金麟厚, [[1510년]] ~ [[1560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전라도]] [[장성군|장성]] 출신이며, 본관은 [[울산 김씨|울산]], 자는 후지, 호는 하서·담재, 시호는 문정이다. [[동방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전라도]] [[장성군|장성]] 출신으로, 본관은 [[울산 김씨|울산]](蔚山)이며,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담재(湛齋),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문묘]]에 배향된 [[동방 18현|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 이력 ==
== 이력 ==
김인후는 어린 시절부터 워낙 총명하였으며, 특히 시문에 뛰어난 자질을 보여 5~6세 무렵부터 이미 전라도 일대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기묘사화|기묘 사림]]의 '조원기', [[기준]] 등의 아낌을 받았고, [[김안국]], [[박상]], [[송순]]. [[최산두]] 등에게 도학과 문학을 배웠다.
김인후는 [[1510년]] (중종 5년) [[전라도]] [[장성군|장성현]] 대맥동에서 아버지 참봉 영(齡)과 어머니 [[옥천 조씨]](玉川 趙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청수하고 총명하였으며, 시문에 뛰어난 자질을 보여 이미 5~6세 무렵부터 전라도 일대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기묘사화|기묘 사림]]의 조원기, [[기준]] 등의 아낌을 받았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김안국]], [[박상]], [[송순]]. [[최산두]] 등에게 도학과 문학을 배웠다.


특히 [[1519년]](중종 14년) 10세 되던 해에 전라도 감사로 부임한 [[김안국]]에게 《소학》을 배웠는데, 그를 보고 「나의 소우이다.」, 하은주시대 「삼대 인물」이라 칭찬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519년]] (중종 14년) 특히 그의 나이 10세에 전라도 감사로 부임한 [[김안국]]에게 《소학》을 배웠는데, [[김안국]]이 그를 보고 「이는 나의 소우(少友)다」, 그리고 하은주 시대 「삼대(三代) 인물」이라 칭찬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531년]] (중종 26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이때 [[이황]]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학문을 닦았다. [[1540년]] (중종 35년) 별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 부정자에 등용되고,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 하였다. 이후 홍문관 박사에 올라 세자시강원 설서를 겸하였다. 뒤에 인종이 될 세자는 몸소 그린 「묵죽도한 폭과 『주자대전』을 하사할 정도로 그에 대한 배려가 남달랐다.
[[1531년]] (중종 26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고, [[1533년]] (중종 28년) 성균관에서 [[이황]]을 만나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학문을 닦았다. 후일 [[퇴계]] 「더불어 교유한 자는 오직 '하서(河西)' 사람뿐이었다.」 술회했을 정도다.


[[1540년]] (중종 35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 부정자(副正字)에 등용되었다가,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은전을 입게 되어 호당(湖當)에 들어갔는데, 함께 뽑힌 13명의 학자는 [[이황]]을 비롯한 명사들로, 그는 이들과 교유하면서 사상적 토론을 통해 성리학 이론을 확립하여 조선 성리학 형성에 큰 자취를 남겼다.
[[1543년]] (중종 38년) 홍문관 부수이 되어 경연에서 차자를 올려 [[기묘사화]]때 죽임을 당한 현사들의 신원 복원을 문신으로서 최초로 개진하였다. 그해 8월 노부모 봉양을 구실로 걸양을 청하여 12월에 옥과 현감으로 나갔다.


[[1543년]] (중종 38년) 4월 홍문관 박사(博士) 겸 설서(說書)가 되어 세자이던 [[조선 인종|인종]]을 가르쳤는데, 이때 세자와 깊은 사제의 연을 맺게 된다. 세자는 그의 학문과 도덕에 깊이 감복하여 입직해 있을 때는 직접 찾아가기도 하고, 몸소 그린 「묵죽도」 와 『주자대전』을 하사할 정도로 그에 대한 배려가 남달랐다.
[[1544년]] (중종 39년) 중종이 죽자 그는 제술관으로 서울에 올라왔으나, [[조선 인종|인종]]이 즉위 후 건강을 잃어 의약 의론에 동참하기를 요청하나 약원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당하자, 그 배경에는 중종 후반기 이래 대윤과 소윤 간의 정치적 갈등과 대립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고 향후 세상의 기미가 반 사림적으로 펼쳐질 것을 예상하고 친환을 들어 본래의 임소로 돌아왔다.


이후 홍문관 부수찬이 되어 [[기묘사화]]때 죽임을 당한 기묘 제현들의 신원 복원을 문신으로서 최초로 개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해 8월 부모 봉양을 구실로 귀근하고, 12월에 걸양을 청하여 [[옥과면|옥과]] 현감을 제수 받아 고향 근처로 돌아왔다.
이듬해 [[조선 인종|인종]]이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사진할 마음을 갖지 않은 체, 산림에 은둔하여 시와 술로 울분을 토로하며 세월을 보냈다. 또 매년 [[조선 인종|인종]]의 기일인 음력 7월 초하루가 되면 마을 앞 난산에 올라 통곡하기를 평생 한결 같았다.


[1545년]] (인종 원년) 중종이 승하하자 제술관으로 서울에 올랐다가, 인종이 즉위 후 불과 8개월 만에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 장성으로 돌아가 다시 사진할 마음을 갖지 않은 체, 산림에 은둔하여 시와 술로 울분을 토로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 후 매년 [[조선 인종|인종]]의 기일인 음력 7월 초하루가 되면 집 앞 난산(卵山)에 올라 종일토록 통곡하고 돌아오기를 평생을 한 결 같이 하였다.
그 뒤 [[1554년]] (명종 9년)까지 성균관 전적·공조 좌랑·홍문관 교리·성균관 직강 등의 벼슬에 제수 되지만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 성균관 전적·공조 좌랑·홍문관 교리·성균관 직강 등의 벼슬에 제수 되지만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545년]] [[을사사화]] 이후 은거한 그의 행적은 크게 둘로 나눠 볼 수 있다. 첫째는 [[시 (문학)|시 문학]] 활동이다. 담양 [[소쇄원]]의 주인 [[양산보]]와 도의 지교를 맺고, [[면앙정]]등의 누정을 중심으로 [[송순]]을 비롯한 호남의 많은 사림계 문사들과 교유하면서 호남 시단 형성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둘째는 [[성리학]] 연구이다. 은거 이후 몸을 추스린 그는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는데, 그의 [[성리학]] 이론은 16세기 조선 성리학계를 이끈 대표적 이론으로 자리 잡아 이와 기에 관한 논쟁의 중심에 있으며, 우리나라 유학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몸을 추스린 그는 [[1548년]] (명종 3년) 순창 점암촌에 초당을 세우고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몰두하였는데, 《주역관상도》와 《서명사천도》등을 저술하였다. 그의 [[성리학]] 이론은 16세기 조선 성리학계를 이끈 대표적 이론으로 자리 잡아 이와 기에 관한 논쟁의 중심에 있으며, 우리나라 유학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고봉 [[기대승]], 일재 [[이항]], 소재 [[노수신]] 등과 사단칠정, 태극도설, 인심도심 등의 문제에 대해 논변하며 학문 정진과 후학 교육에 전념 하다가, 명종 15년 [[1560년]]에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성경(誠敬)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삼고, 고봉 [[기대승]], 일재 [[이항]], 소재 [[노수신]] 등과 사단칠정, 태극도설, 인심도심 등의 문제에 대해 논변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기대승|고봉]]은 [[이황|퇴계]]와 「사단칠정논변」의 시비를 벌일 때 그와의 논변을 통해 정립된 이론을 바탕으로 하였는데, 이것이 세상에 전하는 '[[이황]]·[[기대승]]'의 「사칠왕복서」이다.


또한 담양 [[소쇄원]] 주인 [[양산보]]와 도의 지교를 맺고, [[면앙정]]의 누정을 중심으로 당대 유명한 [[송순]]을 비롯한 호남의 많은 사림계 문사들과 교유하면서, 호남 시단 형성 및 16세기 누정 문학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을 뿐 아니라,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에도 정통하였다. 태극에 관한 이론도 깊어 『천명도』를 완성하였으나, 도학에 관한 저술은 일실되어 많지 않다. 시문에 능해 10여 권의 시문집과 『하서집』·『주역관상편』·『서명사천도』·『백련초해』 등의 저서를 남겼다. 제자로는 변성온·기효간·조희문·[[정철]]·오건 등이 있다.

이와 같이 그는 [[성리학]] 연구 및 후학 교육에 전념하다가 [[1560년]](명종 15년)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떠나면서도 인종에 대한 절의를 지키고자 『[[을사년]] 이후의 관작일랑 쓰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마지막 그 순간에도 선비다운 고고한 기품을 드러냈다.

그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을 뿐 아니라,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시문에 능해 10여권의 시문집이 있으며, 저서로는 『하서집』 · 『주역관상편』 · 『서명사천도』 · 『백련초해』 등을 을 남겼다. 제자로는 변성온 · 기효간 · 조희문 · [[정철]] · 오건 등이 있다.

장성의 [[필암서원]], 옥과의 영귀서원 등에 제향 되고, [[1796년]] (정조20년) [[문묘]]에 배향 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고, [[불천위]]의 은전을 받았다.


== 생애 ==
== 생애 ==
=== 생애 초기 ===
=== 생애 초기 ===
==== 출생 ====
==== 출생 ====
[[1510년]](중종 5년) 7월 19일 [[전라도]] [[장성군|장성현]] [[황룡면|대맥동]]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릉참봉 영이며, 어머니는 [[옥천 조씨]] 안음훈도 조적의 딸이다. 1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형용이 단정하고 기우가 굉후하니 부친 참봉공이 기애하였다.
그는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그의 5대조 조선 개국원종공신 김온(金穩)이 [[조선 태종|태종]](太宗)의 왕권강화 일환으로 외척 세력을 제거할때 처가인 [[여흥 민씨]] [[민무구]] 형제 옥사에 연루되어 화(禍)를 입자, 정부인 [[여흥 민씨]]가 아들 3형제를 데리고 장성(長城)으로 낙담하여 자리를 잡게 되면서 자손들이 장성고을 사람이 되었다. [[1510년]](중종 5년) 7월 19일 [[전라도]] [[장성군|장성현]] [[황룡면|대맥동]]에서 아버지 의릉참봉 영과 어머니 [[옥천 조씨]] 사이에 1남 1녀 장남으로 태어났다. 형용이 단정하고 기개와 도량이 넓고 두터우니 부친 참봉공(參奉公)의 사랑이 더 하였다.


==== 수학 ====
==== 수학 ====
[[1514년]](중종 9년) 5살때 [[천자문]] 익혔으며, 어느날 생파를 손에 들고 겉껍질부터 차근차근 벗겨 그 속심에까지 이르고서야 그치니, 이를 본 부친 참봉공이 장난 삼아 일부러 하는 줄로 알고 나무라자, 「그 자라나는 이치를 살펴보려고 그렇게 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1514년]](중종 9년) 5살 때 부친 참봉공이 ≪[[천자문]]≫을 가르치는데, 눈여겨보기만 하고 화답을 하지 않자 참봉공이 화를 내며 「자식을 낳은 것이 이와 같으니 아마도 벙어리인 모양이다. 집안이 말이 아니겠구나.」 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 창벽에 글을 쓰는데 모두 ≪[[천자문]]≫에 있는 글자였다. 그래서 참봉공은 비로소 기특히 여기었다. 또 일찍이 아는 사람과 연구를 짓는데 「넓고 아득한 우주에 큰 사람이 산다.」라는 글귀가 있었다. 하루는 생파를 손에 들고 겉껍질에서부터 차근차근 벗겨 들어가속심까지 이르고서야 그치니, 이를 본 참봉공이 장난삼아 하는 줄로 알고 나무라자, 「그 자라나는 이치를 살펴보려고, 그렇게 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1515년]](중종 10년) 6살 때 정월 보름달을 보고 ‘상원석’(上元夕)의 시를 지었다. 또 어떤 손님이 와서 하늘을 가리키며 하늘천(天)자로 글제를 삼아 시를 지어 보라고 하니, 즉석에서 대답하기를 "형체는 둥글어라 하 크고 또 가물가물, 넓고 넓어 비고 비어 땅 가를 둘렀도다. 덮어주는 그 중간에 만물이 들었는데, 기 땅 사람들은 어찌하여 무너질까 걱정했지."라고 하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놀래며 특이하게 여기었다.

[[1517년]](중종 12년) 8살 때 [[조광조]]의 숙부 조원기가 전라 관찰사로 있을 때 그를 보고 기특히 여기어 더불어 연구(聯句)와 시(詩)·부(賦) 등을 지었는데, 그의 뛰어난 재주와 높은 수준의 글 솜씨를 보고 『장성신동(長城神童), 천하문장(天下文章)』이라 칭찬했다.

[[1518년]] (중종 13년) 복재 [[기준]]이 남녁 시골에 내려왔다가 그의 이름을 듣고서 데려다 보고 칭찬을 하며 「참으로 기특한 아이다. 마땅히 우리 세자(世子)의 신하가 되겠다.」고 했다. 그리고 '내사필(內賜筆)'한 자루를 선물로 주었다. 그는 그 뜻을 알고 항상 잘 간직하여 보관함에 넣고 보배로 삼았다.


[[1519년]](중종 14년) 10살 때 호남 관찰사로 와 있던 [[김안국]]을 찾아뵙고 『소학』을 배웠는데, [[김안국]]은 그를 기특히 여기며 이는 「나의 소우이다」고 하였으며, 그 뒤로도 하은주 시대 「삼대의 인물」이라 일컬었다. 이와 같이 그는 어린 시절부터 문명(文名)을 전역에 떨쳤다.
[[1515년]](중종 10년) 6살때 한시를 능숙하게 지었는데, 부친 참봉공이 하늘 천자로 글제를 하여 시를 지어보라고 하니 그는 운을 청하여 곧 대답하기를 "형체는 둥글어라 하 크고 또 가물가물, 넓어 넓어 비어 비어 땅 가를 둘렀도다. 덮어주는 그 중간에 만물이 들었는데, 기 땅 사람 어찌하여 무너질까 걱정했지." 라고 하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놀래어 특이하게 여기었다.


[[1522년]] (중종 17년) 시를 잘 짓던 그는 스스로 「시를 배우지 않으면 설 수가 없다(不學詩 無以立)」는 말을 성인의 교훈으로 생각하고, ≪시경≫을 탐독하였다.
[[1517년]](중종 12년) 8살때 전라관찰사 조원기가 신동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를 전주 감영으로 불러 함께 시구를 주고 받았는데, 그의 뛰어난 재주와 높은 수준의 글 솜씨를 보고 『천동』, 『천하문장』이라 칭찬 했다.


[[1526년]] (중종 21년) [[송순]]을 찾아가 뵙고 수업하였으며, 그 후로도 계속 왕래하며 문안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519년]](중종 14년) 10살때 호남 관찰사로 와 있는 [[김안국]]을 찾아가 뵙고 주자의 『소학』을 배웠는데 칭찬을 더하며 「이는 나의 소우이다」라고 말하면서, 그 뒤로도 늘 삼대의 인물이라 일컬었다. 이와 같이 어린 시절부터 문명을 떨쳤다.


[[1527년]](중종 22년) 18세때 [[기묘년]] 사화를 만나 화순 동복에 유배중이던 [[최산두]]를 찾아 수학 하였는데, 최 선생은 깊이 탄복하여 매양 추수 빙호라 일컬었다.
[[1527년]] (중종 22년) 18세 때 [[기묘사화]] 만나 화순 동복에 유배 중이던 신재 [[최산두]]를 찾아 수학 하였는데, 신재는 깊이 탄복하여 매양 추수 빙호(가을의 맑은 물과, 얼음을 담은 옥항아리 같다」라고 일컬었다. 또 나주 목사로 좌천되어 있다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 광주 서창에 돌아와 있던 [[박상]]을 찾아뵙고 학문의 폭을 넓혀 나갔다.


==== 학문 연구와 관료 생활 ====
==== 학문 연구와 관료 생활 ====
[[1528년]](중종 23년) 서울에 올라가 [[성균관]]에서 선비들에게 칠석날 칠석을 제로 하는 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이행 (조선)|이행]]이 문형으로 있었다. 시험에 장원이 되어서 그 시권 「칠석부」가 사람들 입에 회자하니, 용재는 남의 손을 빌려 지은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성균관과 문묘에 있게 하고 일곱 가지 글제를 내어 시험을 했는데 모두 그 자리에서 지어 권을 바쳤을 뿐더러, 사치가 모두 뛰어나니 이행이 크게 경탄해 마지않았다. 그 중의 「염부」, 「영허부」는 문집에 있다.
[[1528년]](중종 23년) 봄에 서울에 올라가 성균관에 입학하여 선비들에게 칠석날 기리는 시험을 보였는데, 그는 응시하여 장원이 되었다. 그의 시권 《칠석부(七夕賦)》가 사람들의 입에 회자하니, 문형 [[이행 (조선)|이행]]이 기특히 여기며 사람이나 글이 모두 옥이라고 하면서도, 다만 혹시 남의 손을 빌리지나 않았나 의심하여 그를 성균관에 있게 하고 일곱 가지 글제를 내어 시험을 했는데 모두 그 자리에서 지어 권을 바쳤을 뿐더러, 시문의 운치가 모두 뛰어나니 [[이행 (조선)|이행]]은 크게 경탄해 마지않았다. 그 중의 「염부」, 「영허부」는 문집에 있다.


[[1531년]](중종 26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ref>참찬 [[송순]]이 일찍이 현감 오겸(吳謙)과 더불어 말하기를 [[신묘년]]의 사마 방목에 미치자 대곡(大谷) [[성운 (1497년)|성운]](成運),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을 내리 세니, 오겸(吳謙)이 크게 놀래며 「한 방(榜) 안에 어진 자가 어찌 그리 많은가.」라고 하였다.</ref> [[1536년]](중종 31년) 스승 [[최산두]]의 부음을 듣고 스승을 위해 가마를 하였으며, 기일을 당하면 반드시 재계하고, 그 소상에 미쳐서는 글을 만들어 제사하였다.
[[1531년]](중종 26년) [[성균관]]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3년]](중종 28년) [[성균관]]에서 [[이황]]과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학문을 닦았다. [[기묘사화]]를 겪은지가 얼마되지 않아 도학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했는데, 이황과 한번 보고 서로 깊이 뜻이 맞아 끊임없이 토론 탁마해서 매우 이택의 소득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퇴계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자 선생은 정표로 시를 지어 주었다. ≪퇴계언행록≫에 이르기를 「기묘의 변을 겪은 뒤라서 사람들이 다 학문하는 것을 기휘로 여기고 날마다 희학으로 일 삼는데, 선생은 씻은 듯이 스스로 새롭게 하여 동정과 언행을 한결같이 법도에 따르니 보는 자들이 서로 손가락질하고 비웃었으며, 더불어 교유한 자는 오직 하서 한 사람일 따름이었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성균관에서 [[이황]]을 비롯한 많은 현능들을 만났다.


[[1533년]](중종 28년) [[성균관]]에서 [[이황]]과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학문을 닦았다. [[기묘사화]]를 겪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아 선비들이 학문을 소홀히 하며, 도학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는 풍조였는데, [[이황]]과 한번 보고 서로 깊이 뜻이 맞아 끊임없이 토론 탁마해서 매우 이택의 소득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퇴계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자 그는 정표로 ‘증별시’를 지어 주었다.<ref>≪퇴계언행록≫에 이르기를 퇴계(退溪)가 돌아 갈 때 ‘증별시(贈別詩)’를 써 주었는데, 「부자(夫子)는 영남의 수재로다. 문장은 이백(李白)·두보(杜甫)요. 글씨는 왕희지(王羲之)·조맹부(趙孟頫)로 구료」 하였다. 후일 퇴계(退溪)가 「기묘의 변을 겪은 뒤라서 사람들이 다 학문하는 것을 꺼리고 싫어하며 날마다 희학으로 일 삼는데,
[[1536년]](중종 31년) 스승 [[최산두]]의 부음을 듣고 스승을 위해 가마를 하였으며, 기일을 당하면 반드시 재계하고, 그 소상에 미쳐서는 글을 만들어 제사하였다.
선생은 씻은 듯이 스스로 새롭게 나가 동정과 언행을 하나같이 법도에 따르니 보는 자가 서로 손가락질하며 비웃었는데, 더불어 교유한 자는 오직 '김하서' 한 사람일 뿐이었다.」라고 하였다.</ref> 이와 같이 성균관에 있으면서 [[이황]]을 비롯한 많은 현능들을 만났다.


[[1536년]](중종 31년) 스승 [[최산두]]의 부음을 듣고 스승을 위해 가마를 하였으며, 기일을 당해서는 반드시 재계하고, 그 소상에 미쳐서는 글을 만들어 제사하였다.【우리나라에서 스승을 위해 가마한 것은 그가 처음으로 세상에 밝혀졌음】
[[1537년]](중종 32년) 아들 종호가 태어났다. 초서로 쓴 ≪천자문≫은 필력이 호방하고 건장하여 용사가 날아오르는 듯하다. [[황윤석]]은 선생의 필법에 대하여 「명나라 사람 장동해 여필의 체를 터득하였으나, 그 진수와 묘리는 동해의 미칠 바가 아니다」라 하였다.


[[1539년]] (중종 34년) 여름 4월 예조에서 아뢰기를 「중국 사신이 시를 잘 짓는다 하여 이미 제술관을 많이 뽑았사오나, 성균관 과시에서 큰 명성을 얻은 김인후등을 차출하여 용에 대비케 함이 어떠하옵니까?」하니 그렇게 하라 전교 하였다.
[[1540년]](중종 35년) 10월에 별시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 부정자에 등용되었고, 이후 홍문관 정자 겸 경연정경 춘추관 기사관에, [[1542년]](중종 37년) 가을 7월에 홍문관 저작이 되었다.


[[1540년]](중종 35년) 10월에 별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에 등용되었다. 이듬해 4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은전을 입게 되어 호당(湖當)에 들어갔다. 함께 뽑힌 열세 사람과 더불어 계(契)를 닦고 이름을 「호당수계록(湖堂修契錄)」이라 했다. <ref>함께 뽑힌 열세 사람은 『간재(艮齋) [[최연 (강릉)|최연]](崔演), 십성당(十省堂) [[엄흔 (1508년)|엄흔]](嚴昕), 추파(秋坡) [[송기수의 묘역|송기수]](宋麒壽), 송재(松齋) 나세찬(羅世纘), 국간(菊磵) 윤현(尹鉉), 죽계(竹溪) 임열(任說), 지산(芝山) [[이황]](李滉), 금호(金湖) 임형수(林亨秀), 우암(寓庵) 김수(金澍), 상덕재(尙德齋) [[정유길]](鄭惟吉), 급고재(汲古齋) 이홍남(李洪男), 호학재(好學齋) [[민기]](閔箕),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이다.</ref> 그는 이들과 교유하면서 사상적 토론을 통해 성리학 이론을 확립하여 이후 조선 성리학 형성에 큰 자취를 남겼다. 겨울 10월 홍문관 정자 겸 경연정경 춘추관 기사관에 제수되었다.
[[1543년]](중종 38년) 봄에 스승 [[김안국]]의 부음을 듣고 가마를 하였으며, 기일에도 역시 재계 하였다. 만사가 있어 문집에 나타났다. 여름 4월에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 설서로 승배되었으며, 이때에 [[조선 인종|인종]]이 춘궁에서 덕을 기르는데 [[조선 중종|중종]]이 보도의 책임을 전적으로 그에게 맡기니, 인종은 그의 학문·도덕의 훌륭함을 깊이 알고 정성스런 마음과 공경하는 예로써 소대가 자주 있었으며, 그 역시 잠룡의 덕이 천고에 뛰어나서 후일에 당우의 다스림을 기약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지성껏 계도해서 계우가 날로 두터웠다.


[[1542년]](중종 37년) 가을 7월에 홍문관 저작이 되어 [[대간|청요직]](淸要職)에 올랐다.
그가 입직해 있을 때는 [[조선 인종|인종]]이 간혹 몸소 나와서 조용히 문난을 하며 이슥해서야 파하였다. [[조선 인종|인종]]은 본래 예술에 능하였으나 일찍이 남에게 나타내 보인 적이 없었는데 유독 그에게는 손수 그린 묵죽 일본을 하사하여 뜻을 비치고 눌러 그에게 명하여 화축에다 시를 지어 쓰도록 하니 그는 시를 아래와 같이 하였다.


[[1543년]] (중종 38년) 1월 7일 동궁에 실화가 발생되어 안채가 잿더미가 되고, 방화범이 누구인지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다. 봄 2월에 스승 [[김안국]]의 부음을 듣고 가마를 하였으며, 기일에도 재계하였다. 만사(輓詞)가 문집에 전한다.
그 뒤에 ≪주자대전≫ 한 질을 하사받았다. 그해 6월 홍문관 부수찬 지제교 겸 경연검토관으로 승배되었다. 이때 동궁에 실화의 변이 있었다. 때는 [[기묘년]]으로부터 이십여 년이 지났지만, 당시의 일을 조야가 오히려 꺼리고 두려워하여 감히 꺼내지도 못하는 환경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홀로 개연히 차자를 올려 수신·자성의 도를 진술하였는데, 사연이 매우 간절하고 절실하였다.


여름 4월에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 설서로 승배되었으며, 이때에 [[조선 인종|인종]]이 춘궁에서 덕을 기르는데 세자 보도 책임을 전적으로 그에게 맡기니, 세자는 그의 학문·도덕의 훌륭함을 깊이 알고 정성스런 마음과 공경하는 예로써 자주 소대를 하였으며, 그 역시 세자의 덕이 천고에 뛰어나서 후일에 요․순 시대의 다스림을 기약할 수 있다 생각하고 지성껏 계도해서 서로 뜻이 맞음이 날로 두터웠다. 또 그가 입직해 있을 때는 세자가 간혹 몸소 나와 나라의 어려운 문제를 논의하다 이슥해서야 파하였다.
==== 기묘사화 피해자 신원 복원 ====
그해 가을 7월에 [[경연]]에서 시사를 논하는바, [[기묘사화]]의 잘못됨을 말하고, 이때 죽임을 당한 조광조 등의 기묘명현 신원 복원을 문신으로서 최초로 개진하여 그 본분을 다하였다. 이는 도통적 의리에서 나온 것으로,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기묘사화]]의 당사자인 [[조선 중종|중종]]이 기묘명현의 신원 복원에 대해서는 윤유하지 않고, 다만 폐기토록 지시한 ≪소학≫·≪향약≫ 에 대해서만 철회토록 윤유하였다. 이에 그는 이와 같은 상황을 더는 견딜수 없어 8월에 부모를 뵙는다는 청원을 하여 말미를 얻어 귀근하였다. 12월에는 연로하신 부모 봉양을 이유로 걸양을 청하여 고향과 가까운 [[옥과면|옥과]] 현감에 제수되고, 춘추관의 겸함은 그대로 띠었다.<ref>[이종범의 호남인물열전] [36] '묵죽도'에 새겨진 도덕문명정치의 꿈. 조선일보(2012. 08. 20)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8/19/2012081901268.html].</ref>


세자는 본래 예술에 능하였으나 일찍이 남에게 표현하고자 아니하였는데 유독 그에게 손수 그린 '묵죽도(墨竹圖)' 를 하사하여 뜻을 보였다. 이것은 임금 될 사람으로서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친절이었다. 이후에도 『주자대전(朱子大典)』 한 질을 하사할 정도로 그에 대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와 같은 [[조선 인종|인종]]의 그에 대한 신뢰와 배려는 충성심으로 굳고 깊게 자리 잡게 되었으며, 이 일화는 군신 관계의 모범으로서 후대에 이르기까지 인구에 널리 회자되었다.
[[1544년]](중종 39년) 11월 [[조선 중종|중종]]이 승하하고, [[조선 인종|인종]] 즉위하여 [[1545년]](인종 1년) 4월 조정에서는 제술관을 삼아 부름에 드디어 나아갔다. 당시 인종이 새로 즉위하여 내외가 모두 태평성대를 기대했으며, 그에게 [[조선 인종|인종]]의 경연 보도를 맡기고자 하였다. 그 사이 인종이 건강을 잃자 그는 의약에 함께 참여하기를 청한 바, 약원에서 직책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당하였다. 이에 그는 세상의 기미를 알아차리고 친환을 들어 본래의 임소로 돌아왔다.


==== 낙향과 절의 ====
==== 기묘 명현의 신원 복원 ====
[[1543년]] (중종 38년) 여름 6월에 홍문관 부수찬 지제교 겸 경연검토관으로 승배되었다. 그해는 동궁에 실화가 발생되는 등 전국이 뒤숭숭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홀로 개연히 차자를 올려 [[조선 중종|중종]]에게 수신·자성의 도를 진술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았다.
[[1545년]](인종 1년) 7월 [[조선 인종|인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목을 놓아 통곡하며 살고 싶지 않은 듯이 하여 자못 심질이 발작했다.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영달의 뜻을 접고,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 [[장성군]]으로 돌아와 인사를 폐하고 다시 사진할 마음을 갖지 않고 산림에 은둔한 채 시와 술로 울분을 토로하는 세월을 보냈다.<ref>[이종범의 호남인물열전] [39] 어두운 시대, 영화 거부하며 술과 공부…조선일보(2012. 09. 3)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9/02/2012090201409.html].</ref>


『'바른 선비들을 《소학》의 무리라 하여 배척하는 낡은 정치 풍토가 만연해 있는 조정의 기강과 풍속을 바로 잡을 것과.' '[[기묘년]]에 희생된 자들은 한때 잘못한 일은 있더라도 그 본심은 터럭만큼도 나라를 속이지 않은 자들인데도 불구하고 무거운 죄를 받아 이들에 대한 신원 복원이 현재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반역 무리로만 논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들에 의해 강조된 《소학》이나 《향약》 등은 성현의 글인데도 불구하고 지금의 선비들이 시속에 빠져 읽어서는 안 될 글이라 하며 버리니' 매우 온편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지적 하는데 그 사연이 매우 간절하고 절실하였다.
[[1546년]](명종 원년) 6월 『효경 간오』의 발문을 지었다. 옥과 현감으로 있을 때 [[유희춘]]이 한양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본읍에 들러 주자의 "효경 간오"라는 책을 보여 주자, 이를 매우 흐뭇해 하시면서 친히 베껴놨던 것인데, 이제 그 책 말미에 발문을 붙여 그 뜻을 넓혀서 배우려 오는 자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때는 [[기묘년]]으로부터 2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조야에서는 당시 일을 꺼리고 두려워하며 감히 꺼내지도 못하는 상황인데, 이를 언급한 것은 감히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홀로 할 수 없는 일로, 도통적 의리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f>[[1519년]] (중종 14년) 기묘 명현 : [[조광조]]·[[김식]]·[[김정]]·기준·윤자임·[[한충 (조선)|한충]]은은 귀양 같다가 사형 당하고, [[김구]]·[[박세희]]·[[박훈]]·[[홍언필]]·[[이자 (1480년)|이자]]·[[최산두]]·[[유인숙]]는 유배를 당하고, [[안당]]·[[이장곤]]·[[김안국]]·[[김정국]]·[[김세필]]·[[정광필]]·신명인 등은 사림을 두둔하다 파면을 당했다.</ref>
매년 인종의 기일인 음력 7월 초하루가 되면 제수를 장만하여 마을앞 남쪽 난산에 올라 북망통곡 하며 밤을 지새고 내려 오기를 평생 한 번도 거르는 일이 없이 한결 같았다. 또한 [[조선 인종|인종]]을 그리는 시를 짓기도 하며, 인종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


이를 계기로 사림의 입이 떨어지기 시작하였고, 이후 그가 가르치던 인종이 왕으로 등극 후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기묘 명현의 신원 복원을 이뤘으니 그와 인종과의 묵계는 알만하다 하겠다.
[[1547년]](명종 2년) 봄에 성균관 전적에, 가을에 공조정랑에 제수되어 부름을 받고 길에 올랐다가 병으로 사하고 돌아왔다. 또 전라도사를 제수했다가 이윽고 체직하였다.


하지만 [[조선 중종|중종]]은 기묘 명현의 신원 복원에 대해서는 윤허하지 않고, 다만 폐기토록 지시한 ≪소학≫·≪향약≫에 대해서만 철회토록 윤허하였다. 이에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 같은 상황을 더는 견딜 수 없어 하며 8월에 연로하신 부모 봉양을 이유로 말미를 청해 귀근하였다. 이후 12월에는 걸양을 청하여 고향과 가까운 [[옥과면|옥과]] 현감을 제수되고, 춘추관의 겸함은 그대로 띠었다.<ref>[이종범의 호남인물열전] [36] '묵죽도'에 새겨진 도덕문명정치의 꿈. 조선일보(2012. 08. 20)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8/19/2012081901268.html].</ref>
[[1548년]](명종 3년)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점암촌에 우거하며 초당을 세우고 [[훈몽재 유지]]으로 편액을 걸고 여러 학생들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하며 노닐고 쉬곤하여 유유히 속세를 벗어난 생각이 있었다. 점암은 수석이 절승하며, 강 언덕에 반반한 바위가 있어 능히 수십 인이 앉을만 하였는데, 그는 문인 [[정철]]등과 더불어 바위 위에서 ≪대학≫을 강하였다. 세상이 이를 대학암이라 일컫으며, 또 상류에 [[낙덕정]]이 있다. 이와 같이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체념한 체 산림에 은둔하여 시와 술을 벗 삼아 세월을 보냈는데, 오히려 마음이 태평스러웠다.


[[1544년]](중종 39년) 전라 관찰사 [[송인수]]와 더불어 학문을 닦고, 글을 주고받으며 정으로 사귐이 매우 두터웠다. 11월 [[조선 중종|중종]]이 승하하고, [[조선 인종|인종]] 즉위하여 [[1545년]](인종 1년) 여름 5월에 조정에서 제술관으로 부름에 드디어 나아갔다. 당시 인종이 새로 즉위하여 내외가 모두 태평성대를 기대했으며, 그에게 [[조선 인종|인종]]의 경연 보도를 맡기고자 하였다. 그 사이 인종이 건강을 잃자 그는 의약에 함께 참여하기를 청한 바, 약원에서 직책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당하였다. 이에 그는 그 배경에 중종 후반기 이래 대윤과 소윤 간의 정치적 갈등과 대립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고, 이후 세상의 기미가 반 사림적으로 펼쳐질 것을 예상하고 부모 병환을 들어 본래의 임소로 돌아왔다.
[[1549년]](명종 4년) 봄 2월에 ≪주자대전≫ 중에서 ≪대학강의≫를 얻어 보고 발문을 지었다. 그 무렵 성리학자들의 관심이 천명도에 집중되었는데, 추만 [[정지운]]이 《사단은 이에서 생기고, 칠정은 기에서 생긴다》로 표현해 이를 도식화하고 해설을 붙여 천명도를 완성하였는데, 이를 받아 본 그는 대폭 수정 보완해 인성의 본질을 파헤치는 탁견을 제시하여 주었다. 뒷날 [[이황]]과 [[기대승]] 간의 사칠논변이 일어나게 된 사상적 배경이 됐다. 여름·가을에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 학맥과 사상 ====
[[1550년]](명조 5년) 작년 가을에 부친상을, [[1551년]](명종 6년) 6월에 모친상을 당했다.
이와 같이 그는 조원기·[[기준]]·[[송순]]·[[박상]]등과 사우 관계를 맺고, [[김안국]]·[[최산두]]에게 수학하였다. [[기준]]·[[김안국]]·[[최산두]]는 모두 [[기묘년]] 때 화를 당한 인물들로 그가 결코 [[기묘사화]]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스승 [[김안국]]은 [[조광조]]와 함께 [[김굉필]]에게서 학문을 배웠는바, [[김굉필]]은 바로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 순의 조선 성리학의 도통을 이어받은 인물이므로, 그는 도통의 직계이다. 그리고 스승의 형제나 다름없는 [[조광조]]와는 사숙질(師叔姪)이 된다.


때문에 그는 [[조광조]]등 기묘 사림들이 화를 당하였어도 그들의 자치주의 노선을 밟을 수밖에 없었고, 또 정면으로 뛰어들어 그 어려운 유업을 짊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광조]]등을 죽인 [[조선 중종|중종]]에게 [[기묘사화]]의 잘못됨을 말하고, 희생된 자들의 신원 복원을 주청하였던 것이다. 이는 도통적 의리에서 나온 것으로, 감히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1552년]](명종 7년) 소쇄원 [[양산보]]가 효부의 장편을 지어서, 그가 일찍이 그 운에 차했는데, 신평(新平) 송순(宋純)이 손수 두 부를 쓰고 원부의 뒤에 제하기를 「효리를 깊이 알아 몸소 행하고 독실히 실천하는 자가 아니면 어떻게 이에 미칠 수 있으랴 읽으매 문득 사람으로 하여금 깨우쳐 흥기하게 하니 자식된 자의 집안에는 이부가 없으면 안될 것이다」고 하였다.


==== 사직과 은거 ====
[[1553년]](명종 8년) 7월에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으로부터 정치를 물려 받은 [[조선 명종|명종]]이 성균관 전적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9월에 홍문관 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 기주관에 제수되어, 부름에 응하여 길에 올랐다가 전을 올려 병으로 사하고 돌아왔다. 이에 대해 명종은 「김인후의 전사를 살펴보니 지극히 간절하다. 그러나 누구인들 숙병이 없으랴. 임금 섬기는 대의도 역시 괄시해서는 안될 것이니 조리하여 올라오라는 일로 서찰을 내리는 것이 가하니라」 하였다. 겨울 11월에 성균관 직강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45년]] (인종 원년) 가을 7월에 [[조선 인종|인종]]이 갑자기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목을 놓아 통곡하며, 더는 살고 싶지 않은 듯이 하여 자못 심질이 발작했다. 그리고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이내 소생하였다.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와 인사를 폐하고 다시 사진할 마음을 끊고 산림에 은둔한 채 시와 술로 울분을 토로하는 세월을 보냈다. <ref>[이종범의 호남인물열전] [39] 어두운 시대, 영화 거부하며 술과 공부…조선일보(2012. 09. 3)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9/02/2012090201409.html].</ref>


[[1546년]](명종 원년) 고향에 묻혀 절의를 고수하던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학문의 연구와 교육뿐이었다. 4월에 ≪효경간오발(孝經刊誤跋)≫을 지었는데, 이는 옥과 현감으로 봉직할 당시 [[유희춘]]이 한양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본 읍에 들러 [[주희|주자]]의 「효경간오」라는 책을 보여 주자, 이를 매우 흐뭇해하면서 친히 베껴놨던 것인데, 이제 그 책 말미에 발문을 붙여 그 뜻을 넓혀서 배우러 오는 자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1554년]](명종 9년) 늦가을 9월 성균관 직강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셨다. 이에 명종은 「지금 김인후의 사전을 본 바 병세가 지리하다고 하니 내 뜻이 몹시 서운하다. 안심하고 조리하여 올라오라는 뜻으로 유시를 내리라.」 하였다. 겨울 10월에 [[조선 명종|명종]]은 특별히 감사에게 명하여 식물을 제급케 하고 눌러 명하기를 「병이 낫거던 역마를 타고 올라오라」 하였는데, 그는 전을 올려 사양했다.


==== 인종에 대한 절의 ====
[[1555년]](명종 10년) 12월 참찬관 박민헌이 말하기를 「경연관으로서 신 같은 무리는 서의를 잘 모르는 처지라 진강할 때에 비록 성심은 같을지라도 비익되는 바 없을 것이니, 모름지기 유자 [[이황]]과 김인후 같은 사람을 구하여 조석으로 더불어 강론한다면 도리를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후 그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절의(節義)’를 고수하는 생활로 일관했다. [[을사년]](乙巳年) 이후 매년 여름에서 가을로 바뀔 무렵이면 글을 폐하고 객(客)도 만나 보지 않으며, 우울한 기분으로 날을 보내며 문밖을 걸어 나간 적이 없었다. 또 [[조선 인종|인종]]의 기일인 음력 7월 초하루가 되면 술을 가지고 집 남쪽의 난산 속에 들어가서 한잔 마시고 한번 곡하고 슬피 부르짖으며 밤을 지세고 내려오기를 평생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한결 같았다. 또 인종을 그리고 애도하는 처절한 심정으로 「유소사(有所思)」와 「조신생사(弔申生辭)」의 시(詩)를 지었다.

[[1547년]] (명종 2년) 봄에 성균관 전적에, 가을에 공조 정랑에 제수되어 부름에 올랐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또 전라 도사를 제수했다가 바로 체직하였다. 그해 가을 9월에 「양재역 벽서사 건」이 일어나 사림계 인사들이 사사되고 유배되었는데, 이들은 그의 사상적 동지요 절친한 벗들이었다.<ref>정미사화(丁未士禍)라고도 한다. 이때 [[송인수]] · 임형수 등은 사사되고, [[이언적]], [[노수신]] · [[유희춘]] · [[백인걸]] 등 20여 명이 유배되었다. 특히 임형수와는 [[사가독서]] 계원으로 둘도 없는 친구였다. <도임사수 원사 작단가(悼林士遂 寃死 作短歌)>란 시조를 지어 그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했다.</ref>

[[1548년]] (명종 3년)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점암촌에 우거하며 초당을 세우고 편액을 [[훈몽재 유지|훈몽]]이라 걸고, 여러 학생들을 훈회하였는데, 반드시 먼저 ≪소학≫을 읽고, 다음에 ≪대학≫을 읽게 하였다. 순창 점암은 수석이 절승하며, 강 언덕에 반반한 바위가 있어 능히 수십 인이 앉을 만 하였는데, 고암 양자징을 비롯한 제자들과 더불어 바위에서 ≪대학≫을 강의 하였다. 세상이 이를 대학암이라 일컬으며, 또 상류에 [[낙덕정|낙덕암]]도 있다. 이와 같이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체념한 체 산림에 은둔하여 후학 양성과 시와 술을 벗 삼아 세월을 보냈는데, 오히려 마음이 태평스러웠다.

[[1549년]](명종 4년) 봄 2월에 ≪주자대전≫ 중에서 ≪대학 강의(大學 講義)≫를 얻어 보고, ≪대학 강의발(大學講義跋)≫을 지었다. 여름·가을에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0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12월에 장성 맥동 본가 서쪽 원당산에 반장하였다. 묘갈명은 [[송순]]이 썼다.

그 무렵 성리학자들의 관심이 천명도에 집중되었는데, 추만 [[정지운]]이 「사단은 이에서 생기고, 칠정은 기에서 생긴다.」로 표현해 이를 도식화하고 해설을 붙여 천명도를 완성하였다. 이를 받아 본 그는 대폭 수정 보완해 인성의 본질을 파헤치는 탁견을 제시하여 주었는데, 이는 뒷날 [[이황]]과 [[기대승]] 간의 사칠 논변이 일어나게 된 사상적 배경이 됐으며, 일찍이 [[이황]]도 역시 그의 도학 문자를 보고 식해(識解)의 정밀함에 깊이 공경하였다.

[[1550년]](명조 5년) 가을에 장성 본가로 돌아왔다. 묘사 거실의 편액을 ‘담재(湛齋)’라 하고, 이를 자호로 하였다. [[1551년]](명종 6년) 6월에 모친상을 당하여 참봉공 묘 왼편에 부장(祔葬)하였다.

[[1552년]](명종 7년) [[양산보]]가 효부(孝賦)의 장편을 지어서, 그가 일찍이 운에 차했는데, [[송순]]이 손수 두 부(賦)를 쓰고 원부(原賦)의 뒤에 제하였다. 문집에 실려 있다.

[[1553년]](명종 8년) 7월에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9월에는 홍문관 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 기주관에 제수되어, 부름에 응하여 길에 올랐다가 전을 올려 병으로 사하고 돌아왔다. 겨울 11월에 성균관 직강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54년]](명종 9년) 늦가을 9월 성균관 직강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셨다. 10월에 [[조선 명종|명종]]은 특별히 감사에게 명하여 「식물을 제급케 하고, 눌러 명하기를 병이 낫거든 역마를 타고 올라오라」 하였는데, 그는 전을 올려 사양했다.

[[1555년]](명종 10년) 12월 참찬관 박민헌이 말하기를 「경연관으로서 신 같은 무리는 서의(書義)를 잘 모르는 처지이니, 모름지기 유자 [[이황]]과 김인후를 구하여 조석으로 더불어 강론한다면 도리를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 생애 후반 ===
=== 생애 후반 ===
그의 생애 후반은 [[을사사화]] 이후 은거한 그의 행적은 크게 둘로 나눠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성리학]] 연구이고, 둘째는 [[시 (문학)|시문학]] 활동이고 이다.
==== 학문 연구와 사상 ====
==== 성리학 연구 ====
이와 같이 그의 학문은 의리를 실천하는 데에 있었다. 이는 조선조 도학자들의 학문적 특징이며, 또한 [[성리학]]을 공부하는 목적이기도 하였다. 이후 몸을 추스린 그는 [[성리학]] 연구에 종신할 것을 마음에 두고 이에 몰두하는바, 그의 성리학 이론은 [[이황]]과 더불어 16세기 조선 성리학계를 이끈 대표적 이론으로 자리잡아 이와 기에 관한 논쟁의 중심에 있으며, 우리나라 유학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을사사화]] 이후 은거(隱居)한 그는 몸을 추스린 후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는데, 그의 학문 기조는 의리를 실천하는 데에 있었다. 이는 조선조 도학자들의 학문적 특징이며, 또한 [[성리학]]을 공부하는 목적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성리학]] 이론은 16세기 조선 성리학계를 이끈 대표적 이론으로 자리 잡아 이와 기에 관한 논쟁의 중심에 있으며, 우리나라 유학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556년]](명종 11년) [[서경덕]]은 '심학'으로써 당시의 종앙하는 바가 되었으며, 그는 일찍이 「독주역시」를 지은 바 있는데, 그는 이 시를 보고서 「성인의 말씀은 곧 천지의 도이니 영이라고 할 수 없다.」고 차운하였다. 이는 서화담이 공부하는 사람들을 계도하는 방식이 하학 공부를 소홀히 하고 돈오의 지름길로 이끌 우려가 있기 때문에 그가 이를 깊이 걱정하여 마침내 보운을 해서 바로잡은 것이다.
[[1556년]] (명종 11년) [[서경덕]]은 '심학(心學)'으로써 당시의 종앙하는 바가 되었는데, 그는 일찍이 「독주역시」를 지은 바 있다. 그는 이 시를 보고서 「성인의 말씀은 곧 천지의 도이니 영이라고 할 수 없다.」고 차운하였다. 이는 서화담이 공부하는 사람들을 계도하는 방식이 하학 공부를 소홀히 하고 돈오(頓悟)의 지름길로 이끌 우려가 있기 때문에 그가 이를 깊이 걱정하여 마침내 보운(步韻)을 해서 바로잡은 것이다.


그해 여름 5월에 무장고을 유생 안서순이 상소하여 을사년에 무함을 입은 명현의 원통한 상황을 진주하였는데, 윤원형 등은 안서순을 역적을 두둔한 죄로 처 죽이고 가산을 몰수했으며, 나주출신 정륜도 함께 모의한 죄로 참형하여 가산을 몰수하였으며, 진사 김응정에게는 소장을 썼다하여 멀리 귀양을 보냈다. 또 [[윤원형]]이 기필코 '김인후'에게 연루시켜서 사림에 화를 씌우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를 않았다.
여름 5월에 무장고을 유생 안서순이 상소하여 [[을사년]]에 무함을 입은 명현의 원통한 상황을 진술하여 아뢰는데, 윤원형 등이 안서순을 역적을 두둔한 죄로 처 죽이고 가산을 몰수했으며, 나주출신 정륜도 함께 모의한 죄로 참형하여 가산을 몰수하였으며, 진사 김응정에게는 소장을 썼다하여 멀리 귀양을 보냈다. 또 [[윤원형]]이 기필코 '김인후'에게 연루시켜서 사림에 화를 씌우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를 않았다.


[[1557년]](명종 12년) ≪태극도설≫ ≪서명≫ 등의 글이 지닌 깊은 뜻을 생각하고 찾아 쌓고 쌓아 읽은 횟수가 천번에 달했다. 이에 이르러 ≪주역 관상도≫와 ≪서명사천도≫를 서술하고, 또 배우는 자들에게 글로 써서 보이기를 「염계의 도설은 도리가 정미하여 글월은 간략하되 뜻은 만족하고 장자의 명은 규모가 광활하여 뜨지도 않고 새지도 않으니 만약 천자가 고명하면 먼저 태극에서부터 공력을 써야 할 것이나 그렇지 못하면 서명을 이해하고서 태극에 미처가야 한다. 태극은 덕성의 근본이요 서명은 학문의 강기이니 요컨대 어느 한쪽도 폐해서는 아니된다」라 하였다. ≪서명사천도≫와 ≪태극도설≫ 은 유실되어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
[[1557년]](명종 12년) ≪태극도설≫ ≪서명≫ 등의 글이 지닌 깊은 뜻을 생각하고 찾아 쌓고 쌓아 읽은 횟수가 천 번에 달했다. 이에 이르러 ≪주역 관상도≫와 ≪서명사천도≫를 서술하고, 또 배우는 자들에게 글로 써서 보이기를 「염계의 도설은 도리가 정미하여 글월은 간략하되 뜻은 만족하고 장자의 명은 규모가 광활하여 뜨지도 않고 새지도 않으니 만약 천자가 고명하면 먼저 태극에서부터 공력을 써야 할 것이나 그렇지 못하면 ≪서명≫을 이해하고서 태극에 미처 가야 한다. 태극은 덕성의 근본이요 ≪서명≫은 학문의 강기이니 요컨대 어느 한쪽도 폐해서는 아니 된다.」라 하였다. ≪서명사천도≫와 ≪태극도설≫ 은 일실되어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


[[1558년]](명종 13년) 당시 [[기대승]]이 [[이항 (1499년)|이항]]에게 들러 ≪태극도설≫을 강론하는데, [[이항 (1499년)|이항]]이 「태극과 음양을 일물로 삼으므로」 [[기대승]]은 그르게 여기어 종일토록 논란하였으나 능히 귀일되지 못하였다. 이에 [[기대승]]은 그를 찾아 뵙고 변란의 득실을 들어 질문하니 그는 고봉더러 옳다 하여 하루 내 강론하고 파하였다.
[[1558년]](명종 13년) 당시 [[기대승]]이 [[이항 (1499년)|이항]]에게 들러 ≪태극도설≫을 강론하는데, [[이항 (1499년)|이항]]이 「태극과 음양을 일물로 삼으므로」 [[기대승]]은 그르게 여기어 종일토록 토론하였으나 결과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에 [[기대승]]은 그를 찾아뵙고 분별하기 어려움 들어 질문하니, 그는 『이와 기는 혼합되어 있으므로 태극이 음양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도와 기의 구분은 분명하므로 태극과 음양은 일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고 하며 [[기대승|고봉]]더러 옳다 하고 하루 내 강론하다 파하였다.


또 [[노수신]]이 ≪숙흥야매잠≫의 주해를 저술하여 [[이황]] 및 그에게 강론 질문하면서 왕복한 것이 누수백언이었는데 [[이황]]은 누차 자기 의견을 버리고 그의 설을 많이 따랐다.
또 [[노수신]]이 ≪숙흥야매잠≫의 주해를 저술하여 [[이황]] 및 그에게 강론 질문하면서 왕복한 것이 누수 백언 이었는데 [[이황]]은 누차 자기 의견을 버리고 그의 설을 많이 따랐다.


여기서 [[노수신]]은 『마음이 몸을 주재한다.』고 하였는데, 그는 이에 대해 비판하며, 『마음이 몸을 주재하지만 기가 섞여서 마음을 밖으로 잃게 되면 주재자를 잃게 되므로, 경으로써 이를 바르게 해야 다시금 마음이 몸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는 「주경설(主敬說)」을 주장하였다.
채침의 ≪홍범설시도설≫은 밝고 또 구비한데도 뒷사람이 오히려 자세히 알지 못하는데, 그는 채구봉의 설로 근본을 삼고, 자기의 설을 부진하여 매우 정성스럽게 곡진하게 발명해서 이름을 ≪홍범설시작괘도≫라 하고, 제자 양자징에게 전수하니 이에 '주·채'가 전수한 깊은 뜻이 비로소 밝혀졌다.


채침의 ≪홍범설시도설≫은 밝고 또 구비한데도 뒷사람이 오히려 자세히 알지 못하는데, 그는 채구봉의 설로 근본을 삼고, 자기의 설을 부진하여 매우 정성스럽게 곡진하게 발명해서 이름을 ≪홍범설시작괘도≫라 하고, 제자 양자징에게 전수하니 이에 '주·채(주자와 채침)'가 전수한 깊은 뜻이 비로소 밝혀졌다.
[[1559년]](명종 14년) [[이항 (1499년)|이항]]이 그에게 '태극과 음양이 한 물건이라'는 뜻을 극론하여 [[기대승]]을 통해 보내자, 그는 그 글을 보고 [[이항 (1499년)|이항]]에게 작은 간찰을 보냈는데 그 대략에 다음과 같다. 기군에게 보낸 간찰에 대해 감히 이렇다 저렇다 할 일은 아니나, 대개 「이와 기는 혼합하여, 천지의 사이에 가득 찬 것이 다 그 속으로부터 나와서 각기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니 태극이 음양을 떠났다고 일러서는 아니 되겠지만, 그러나 도기의 나눠짐이 한계가 없지 못할진대 태극과 음양은 아무래도 일물이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주자는 말하되 「태극이 음양을 탄 것이 사람이 말을 탄 것과 같은즉 결코 사람을 말이라 할 수는 없다…」라 하였다.


[[1559년]](명종 14년) [[이항 (1499년)|일재]]가 [[기대승|고봉]]을 통해 "태극과 음양이 일물이라"는 뜻을 극론하여 서간을 보내자, 그는 [[이항 (1499년)|일재]]에게 작은 간찰을 보내, "기군에게 보낸 간찰에 대해 감히 이렇다 저렇다 할 일은 아니나, 대개 이와 기는 혼합하여, 천지의 사이에 가득 찬 것이 다 그 속으로부터 나와서 각기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니 태극이 음양을 떠났다고 일러서는 아니 되겠지만, 그러나 도기의 나눠짐이 한계가 없지 못할진대 태극과 음양은 아무래도 일물이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라며, 주자는 말하되 『태극이 음양을 탄 것이 사람이 말을 탄 것과 같은즉 결코 사람을 말이라 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기대승]]이 벼슬길에서 물러나 고향에 있으면서 매양 그에게 나아가 의리를 토론하였다. [[기대승]]은 [[이황]]의 사단칠정 이기호발의 설에 대해서 깊이 의심하여 그에게 질문하니 그는 부석하고 논변하기를 극히 투철하고 정밀하게 해주었다. [[기대승]]이 그에게 얻은 것이 이와 같기 때문에 「사칠설」 및 「장서」를 저술하여 [[이황]]에게 봉질 하였던 것이며, 그가 세상을 떠난후 [[기대승]]은 [[이황]]과 더불어 사칠 호발의 비를 강론하면서 많이 그의 뜻을 받아서 분변한 것이 자못 수 만언이었는데, 그 후 [[1566년]] [[병인년]]에 그 동안의 설을 다 버리고, 도리어 [[이황]]의 설을 따랐다. 이것이 세상에 전하는 '[[이황]]·[[기대승]]'의 「사칠왕복서」이다.


[[기대승|고봉]]이 [[이황|퇴계]]에게 질문하자 [[이황|퇴계]]는 『담옹(하서의 별호)이 비록 적요한 두어 마디 말을 했으나, 역시 이미 그 대지를 보았다 하겠다.』고 하였다.
또 명나라 유학자 정암 나흠순은 ≪곤지기≫를 저술하여 이르기를 「도심은 성이요 인심은 정이다. 그 체는 지극히 고요하여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미라 이르고 그 용은 지극히 변하여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에 위(危)라 이른 것이다」하였는데, [[노수신]]이 그 설을 강력 주장하며 말하기를 「도심은 고요하여 움직이지 아니하고 인심은 느껴서 드디어 통한다……」라 하였다. 이에 그은 심히 그르게 여기어 말하기를 「성인의 인심 도심은 대개 모두 동처를 지적하여 말한 것이라...」라고 하였다. 사후 [[이황]]과 [[기대승]]은 그의 설을 존중하고, [[노수신]]의 설을 극력 공격하였는데, 그의 전론은 유실되어 전하지 못한다.


그해 겨울 벼슬길에서 물러나 고향에 있던 [[기대승|고봉]이 매양 그에게 나아가 의리를 토론하였다. [[기대승|고봉]]은 [[이황|퇴계]]의 『사단칠정 이기호발설』 에 대해 깊이 의심하여 그에게 질문하니, 그는 세밀한 분석과 변론을 극히 투철하고 정밀하게 해주었다.
[[1560년]](명종 15년) 정월 14일 그는 기운이 평화롭지 못하여 약물을 들면서 집안 사람에게 이르기를 『내일은 보름이니 정성들여 생주를 갖추어, 자녀들로 하여금 사당에 행전케 하라』 하였다. 15일에 그는 부병하고 일찍 일어나 의관을 단정히 하며 꿇고 앉아 제사의 시각을 기다렸다. 그리고 명하기를 『내가 죽으면 을사년 이후의 관작일랑 쓰지 말라』고 하였다. 정월 경오 16일에 병이 위급하여 자리를 바로하고 유연히 세상을 떠났다. 부음을 아뢰자 명종은 매우 슬퍼 하며 부의를 보내도록 특명하였다. 그해 3월에 그의 뜻에 따라 장성 대맥동 원당산 부모산소 아래 자좌 오향의 벌안에 장사하였다.


이에 [[기대승|고봉]]은 그에게 이와 같은 것을 얻었기 때문에 「사칠설」 및 「장서」를 저술하여 [[이황|퇴계]]에게 봉질 하였던 것이며,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기대승|고봉]]은 [[이황|퇴계]]와 더불어 사칠 호발의 시비에 대해 왕복 변론한 것이 자못 수 만언이었다. 이는 다 그의 가르침을 받아서 분변한 것인데, 이후 [[기대승|고봉]]은 그 동안의 설을 다 버리고 [[1566년]] [[병인년]]에 도리어 [[이황|퇴계]]의 설을 따랐다. 이것이 세상에 전하는 '[[이황|퇴계]]·[[기대승|고봉]]'의 「사칠왕복서」이다.
천문·지리·의약·복서·울려·도수에도 정통하였으며, 시문에 능해 10여 권의 시문집을 남겼으며, 저서로는 《하서집》, 《주역관상편》 《서명사천도》 《백련초해》 등이 있다.


또 명나라 유학자 나흠순은 ≪곤지기≫를 저술하여 이르기를 『도심은 성이요 인심은 정이다. 그 체는 지극히 고요하여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미라 이르고 그 용은 지극히 변하여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에 위라 이른 것이다.』라 하였는데, [[노수신]]이 그 설을 강력 주장하며 말하기를 『도심은 고요하여 움직이지 아니하고, 인심은 느껴서 드디어 통한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그는 심히 그르게 여기며 말하기를 『성인의 인심 도심은 대개 모두 동처를 지적하여 말한 것이라』라 하였다. 사후 [[이황|퇴계]]와 [[기대승|고봉]]은 그의 설을 존중하고, [[노수신|노소재]]의 설을 극력 공격하였는데, 그의 전론은 일실되어 전하지 못한다.
==== 후학 양성 ====
제자로는 변성온·기효간·조희문·[[정철]]·오건·양자징·남언기·노적·윤기·신각·서태수·김종호·안증·김제안·양산해·박원순 등이 있다.


이와 같이 그의 성리학 연구는 『이기 이원론』으로 '주리론'적 입장이었으며, 수행론 방면으로는 ‘경(敬)’을 강조하였다.
== 평가 ==
* 그의 평생에 걸쳐 [[조선 인종|인종]]에 대한 절의와 출처의 올바름은 후대 사림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 조선 중기 탁월한 도학자로 「호남 남쪽에는 김인후, 북쪽에는 [[이항 (1499년)|이항]], 영남에는 [[이황]], 충청에는 [[조식]], 서울에는 [[이이]]가 버티고 있었다.」는 역사적 평가에서 보여주듯 김인후의 학덕은 크고 넓었다.
* [[이이]]는 김인후를 『청수부용, 광풍제월』 (맑은 물에 뜬 연꽃이요, 비 갠 뒤의 맑은 바람과 달)이라 칭송하였다.
* [[송시열]]은 『우리 나라 인물 중에서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겸하여 탁월한 이를 그다지 찾아볼 수 없으며 이 세가지 중 한 두 가지에 뛰어나는데,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도와 선생을 종생하여 이 세 가지를 다 갖추게 되었다.』고 칭송하였다.<ref> 《우암 송시열 찬》 『하서 김인후 신도비명』</ref>
* 학문의 조예가 초절하고 기상이 호매하였으며, 《대학》과 《서명》의 은미하고도 깊은 뜻을 처음으로 밝혀내었고, 경을 생활화함으로써 마음을 바르게 하는 공부와 도학 연원의 정통을 이어받아 실로 유학의 종장이라 할 수 있다.(정조 실록)
* 학자 군주인 [[정조]]는 [[문묘]] 배향 교서에서 『조선 개국 이래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모두 갖춘 이는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라며, 『하서는 우리 해동의 [[주돈이|염계]]요, 호남의 수사(공자의 별칭)다.』고 극찬하였다.


== 사후 ==
==== 시문학 활동 ====
그는 [[화순군|화순]] 동복의 [[최산두]] 문하를 출입하면서부터 [[시 (문학)|시문학]] 방면에도 이름을 얻었는데, 이후 서울에서 문명(文名)을 떨치던 그가 낙향하여 당시 전라도 일대에 많이 활동 하고 있던 사림계 인사들과 교유 하였는데, 특히 담양 [[소쇄원]] 주인 [[양산보]]와는 도의 지교를 맺고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 [[1561년]](명종 16년) 문인 양자징이 가장을 지었다. [[1564년]](명종 19년) 옥과 선비들이 영귀사를 건립하여 제향하였으며, [[1570년]](선조 3년) 순창고을 선비들이 화산사를 건립하여 제향하고, 뒤에 어암사도 건립하여 제향하였다.

* [[1590년]](선조 23년) 호남 선비들이 그의 고향 인근 장성 기산리에 [[필암서원]]을 건립하고 제향하였다.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어, [[1624년]](인조 2년) 기산리마을 서쪽 증산동으로 이건 하였다. [[1659년]](효종 10년) 3월 액호를 '필암'이라 하여 사액을 내려졌다. [[1662년]](현종 3년) [[장성 필암서원]]이라 선액하고 예관을 보내어 사제하였다.
당대 유명한 [[송순]]·[[임억령]]·[[환벽당|김윤재]]·김성원·[[기대승]]·[[정철]] 등의 문사들과 담양의 [[소쇄원]]·[[면앙정]]·[[담양 식영정|식영정]]과 광주의 [[환벽당]] 등 누정을 중심으로 호남 시단을 형성하여 16세기 누정 문학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당시 그가 쓴 〈소쇄원 48영〉과 〈면앙정 30영〉 및 그 밖의 여러 율시 등은 누정 문학의 최고봉으로 널리 칭송 받았으며,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 [[1668년]](현종 9년) 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669년]](현종 10년) 가을에 문정이라 시호가 내려졌다.

* [[1672년]](현종 13년) 서원 입지 조건이 수해를 입을 우려가 있어 추담 김우급 등이 지금의 자리인 해타리로 옮겼으며, 마을 이름도 필암리로 바뀌었다.
=== 저서와 작품 ===
* [[1672년]](현종 13년) [[박세채]]가 행장을 짓고, [[1675년]](숙종 원년) [[김수항]]이 묘표를 지었으며, [[1682년]](숙종 8년) [[송시열]]이 신도비명을 지었다. [[1777년]](정조 원년) [[김종후]]가 묘지명을 지었다.
그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을 뿐 아니라, 천문·지리·의약·복서·율려·도수에도 정통하였다. 태극에 관한 이론도 깊어 『천명도(天命圖)』를 완성하였으나, 도학에 관한 저술은 일실되어 많지 않다. 16세기 누정 문학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시인이기도 하며, 시문에 능해 10여 권의 시문집을 남겼다. 저서로는 아래와 같다.
* [[1796년]](정조 20년) 9월 조선 유학의 최고 영예 자리인 [[문묘]]에 배향되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겸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에 [[추증]]되고 [[불천위]]에 선정되었다. 시호가 문정에서 '문정'으로 개시되었다.

* 《하서집(河西集)》
*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
* 《서명사천도(西銘四天圖)》
* 《홍범설시작괘도(洪範揲蓍作卦圖)》
* 《가례고오(家禮攷誤)》
* 《천명도(天命圖)》
* 《백련초해(百聯抄解)》

=== 후학 양성 ===
제자로는 당대 내로라하는 석학들인 변성온·기효간·조희문·[[정철]]·오건·양자징·남언기·노적·윤기·신각·서태수·김종호·안증·김제안·양산해·박원순 등이 있다.

== 최후 ==
고향 장성으로 은거한 지 15년여 만인 [[1560년]] (명종 15년) 정월 16일 병이 위급하여 자리를 바로 하더니 51세의 나이로 유연히 세상을 떠났다. 사흘 전 14일에 기운이 평화롭지 못하여 약물을 들면서 집안사람에게 이르기를 『내일은 보름이니 정성들여 생주를 갖추어, 자녀들로 하여금 사당에 행전케 하라』 하였다. 15일에는 병을 무릅쓰고 일찍 일어나 의관을 단정히 하며 꿇고 앉아 제사의 시각을 기다렸다. 그리고 명하기를 『내가 죽으면 [[을사년]] 이후의 관작일랑 쓰지 말라』고 하였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선비다운 고고한 기품을 드러냈음을 알 수 있다.

조정에 부음을 아뢰자 [[조선 명종|명종]]은 부의 보내도록 특명하였다. 그해 3월 그의 뜻에 따라 장성 대맥동 원당산 부모 산소 아래 자좌 오향 벌 안에 장사하였다. 자손들에게 훈계하기를 『須識根枝一氣通, 幾曾勤苦樹家風. 進學修身爲家繼, 百工猶自世箕弓(뿌리와 가지는 한 기운으로 통하는 것, 얼마나 많은 근고로 가풍을 세웠던고. 진학하고 수신하여 이어가야 하는 거니, 백공들도 기구를 세업으로 삼느니라)』 하였다.

== 시대적 상황 ==
그는 [[조선 중종|중종]] 5년에 태어나 [[조선 명종|명종]] 15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 시기는 [[조선 연산군|연산군]]의 혼란된 조정을, [[중종반정]]으로 바로 잡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회복하고자, 중종 초기 문치의 기운을 열고 국가의 기강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중종의 등극과 함께 '신비'를 폐출하면서부터 내부적으로는 외척 세력 간 다툼이 치열하고 왕권을 둘러싼 갈등이 노골화되었던 시대였다. 이 때에 일어난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는 이러한 시대적 성격을 잘 대변하여주고 있다 하겠다.

[[기묘사화]]는 반정 후 새로운 기풍을 일으키고자한 [[사림파|사림]]의 이상과 [[훈구파|훈구]] 대신들의 현실적 욕구가 서로 부딪치게 되어 사림이 화를 입게 된 사건이고, [[을사사화]]는 [[윤원형]]을 비롯한 명종의 외척 세력이 자신들의 세력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인종의 근신들을 해친 사건이었다.

그는 정신적으로는 사림 사상을 계승한 도학자로서, [[기준|복재]]의 사랑을 받고, [[김안국|모재]]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최산두|신재]]에게 학문을 배웠다. 그는 [[조선 인종|인종]](仁宗)의 신하였기에, [[윤임]](尹任)이나 [[윤원형]] 어느 편에도 가까이하지 않았고, 그러한 집권 세력들과 같은 조정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자신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니 이는 그들과 연속된 싸움이었다.

그러나 [[조선 인조|인종]]과는 남다른 깊은 정을 나누며, 서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같아서, 세자와 신하로서 뿐 아니라 세자의 보호자로서 유일한 벗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종(仁宗)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그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의 입지를 펼칠 수 있는 상황을 허락해주지 않았던 것이니, 그로서는 불우한 시대를 만나 그 높고 깊은 경륜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높은 인격과 학문적 경륜과 치세의 뜻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그 이상을 펼쳐보지 못한 채 시와 술을 벗 삼고 세월을 한탄할 수밖에 없는 불우한 일생을 살았던 것이다.


== 업적 ==
== 업적 ==
=== 도학 ===
=== 도학 ===
하서의 학문은 [[의리]]를 실천하는 데에 있다. 이는 조선조 도학자들의 학문적 특징이며 또한 [[성리학]]을 공부하는 목적이기도 하다. [[도학]]이란 성리학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지만, 이는 [[조선 중종|중종]]의 등장과 함께 조정에 참여하게 된 신진 사림들이 내세웠던 학풍이었다. 그 정신은 요·순 임금이 행하였던 정치를 실현하고자 한 것인데, 이와 같은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은 유학의 근본정신을 배우자는 데에 있었다.
하서의 학문은 [[의리]]를 실천하는 데에 있다. 이는 조선조 도학자들의 학문적 특징이며 또한 [[성리학]]을 공부하는 목적이기도 하다. [[도학]]이란 성리학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지만, 이는 [[조선 중종|중종]]의 등장과 함께 조정에 참여하게 된 신진 사림들이 내세웠던 학풍이었다. 그 정신은 요·순 임금이 행하였던 정치를 실현하고자 한 것인데, 이와 같은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은 유학의 근본 정신을 배우자는 데에 있었다.


이와 같은 도학이 성리학으로 전회하게 된 계기는 [[기묘사화]]인데, 호남에 있어서도 기묘사화는 사상과 의식을 발전시키는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그것은 [[조광조]]가 전라도 화순 능주로 귀양 오게 됨으로써 그 정신적 정통성이 호남으로 수용되었으며, 또한 기묘 사림들이 호남과 인연을 맺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도학이 성리학으로 전회하게 된 계기는 [[기묘사화]]인데, 호남에 있어서도 기묘사화는 사상과 의식을 발전시키는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그것은 [[조광조]]가 전라도 화순 능주로 귀양 오게 됨으로써 그 정신적 정통성이 호남으로 수용되었으며, 또한 기묘 사림들이 호남과 인연을 맺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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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는 기묘 사림의 문하에서 성장하고 그 정신을 계승함으로써 호남 유학의 발전적 토대를 쌓게 되었다. 하서를 가리켜 도학·문장·절의가 남다르다고 하는 것은 하서 자신의 학문이나 정신이 그와 같았다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하서 이후의 사상적 계승과 발전적 특징이 그와 같은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인품이 그대로 계승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할 것이다.
하서는 기묘 사림의 문하에서 성장하고 그 정신을 계승함으로써 호남 유학의 발전적 토대를 쌓게 되었다. 하서를 가리켜 도학·문장·절의가 남다르다고 하는 것은 하서 자신의 학문이나 정신이 그와 같았다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하서 이후의 사상적 계승과 발전적 특징이 그와 같은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인품이 그대로 계승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할 것이다.


그리하여 하서의 사상에 대해 살펴보면 [[도학]] 사상은 기묘 사림 의식에서 온 것이지만, 그의 학문적 특징은 이를 사상적으로 정립하고, 이론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는데 있다. 그와 같은 사상적 정립을 이루도록 한 것이 바로 그가 만든 「천명도」였다.
그리하여 하서의 사상에 대해 살펴보면 [[도학]] 사상은 기묘 사림 의식에서 온 것이지만, 그의 학문적 특징은 이를 사상적으로 정립하고, 이론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는데 있다. 그와 같은 사상적 정립을 이루도록 한 것이 바로 그가 만든 「천명도」였다.<ref>2007년도 제3회 선비문화 장성포럼 발표자료(오종일 전북대 교수) "하서 김인후의 삶과 그 학문" 성균관청년유도회 전라남도본부(2007. 9. 27) [[http://cafe.daum.net/jrconfucjn/GiyF/8]].</ref>


=== 절의 ===
=== 절의 ===
김인후의 [[의리|절의]] 정신은 절개와 의리를 말하는데 의리란 올바름을 실천하는 것으로서 이는 본성이 발현된 것으로 인의 구체적 실체이다. 그의 의리는 어진 본성에서 나왔기에 국가가 위난을 당하였을 의를 실천 할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이 자신의 올바름을 지키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의 절의 정신은 호남의 의병운동으로 이어진다.
그의 [[의리|절의]] 정신은 절개와 의리를 말하는데 의리란 올바름을 실천하는 것으로서 이는 본성이 발현된 것으로 인의 구체적 실체이다. 그의 의리는 자신의 올바름을 지키려는 어진 본성에서 나왔기에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에는 의를 실천 할 수 있는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불의에 맞선 절의 정신은 실천적 도학으로 계승되어 호남 사림들로 하여금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분연히 떨쳐 일어나 구국의 대열에 앞장서게 하여 [[임진왜란|임란 의병]]·[[대한제국|구한말 의병]]·[[광주 학생 항일 운동|광주학생독립운동]]·[[5·18 광주 민주화 운동]]등으로 나타났다.<ref>2007년도 제3회 선비문화 장성포럼 발표자료(오종일 전북대 교수) "하서 김인후의 삶과 그 학문" 성균관청년유도회 전라남도본부(2007. 9. 27) [[http://cafe.daum.net/jrconfucjn/GiyF/8]].</ref>


== 저서 ==
=== 문장 ===
그의 [[문장]]은 도를 싣는다. 도는 하늘의 마땅히 그러한 바를 따르는 것으로, 문은 그와 같은 도를 실현하는 실체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따라서 그의 문장이 깊은 의미를 갖는 것은, 그의 도가 그만큼 깊었음을 말한다. 그의 문장은 이와 같이 도가 나타난 것이었기에 도를 높이려는 선비들은 자연히 그의 문장을 따르게 되었다.<ref>2007년도 제3회 선비문화 장성포럼 발표자료(오종일 전북대 교수) "하서 김인후의 삶과 그 학문" 성균관청년유도회 전라남도본부(2007. 9. 27) [[http://cafe.daum.net/jrconfucjn/GiyF/8]].</ref>
* 《하서집》

* 《주역관상편》
== 사후 ==
* 《서명사천도》
* [[1561년]] (명종 16년) 문인 양자징이 가장(家狀)을 지었다.
* 《백련초해》
* [[1564년]] (명종 19년) 옥과 선비들이 「영귀사」를 건립 하였다.
* 《천명도》
* [[1570년]] (선조 3년) 순창고을 선비들이 「화산사」를 건립하고, 뒤에 「어암사」도 건립 하였다.
* 《가례고오》
* [[1590년]] (선조 23년) 호남 선비들이 그의 고향 인근 장성 기산리에 [[필암서원]]을 건립 하였다. [[1597년]] (선조 30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어, [[1624년]] (인조 2년) 기산리 마을 서쪽 증산동으로 이건 하였다.
* [[1659년]] (효종 10년) 3월 「필암(筆巖)」이라 사액이 내려졌다.
* [[1662년]] (현종 3년) [[필암서원]](筆巖書院)으로 선액(宣額)하고 예관을 보내어 사제하였다.
* [[1668년]] (현종 9년) 여름 4월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669년]] (현종 10년) 가을 8월에 문정(文靖)이라 시호가 내려졌다. "도덕박문(道德博聞)을 일러 문(文)이요, 관락영종(寬樂令種)을 일러 정(靖)이라 한 것이다."
* [[1672년]] (현종 13년) 서원 입지가 수해를 입을 우려가 있어 추담 김우급 등이 지금의 자리인 해타리로 옮겼으며, 마을 이름도 필암리로 바뀌었다.
* [[1672년]] (현종 13년) [[박세채]]가 행장(行狀)을 지었다.
* [[1675년]] (숙종 원년) [[김수항]]이 묘표(墓表)를 지었다.
* [[1682년]] (숙종 8년) [[송시열]]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다.
* [[1771년]] (영조 47년)에 전라도 유생 양학연(梁學淵) 등이 상소하여 그를 [[문묘]]에 종향할 것을 청하였으나 통하지 못하였다.
* [[1777년]] (정조 원년) [[김종후]]가 묘지명(墓誌銘)을 지었다.
* [[1786년]] (정조 10년) 2월 제자이자 사위인 고암 양자징을 [[장성 필암서원|필암서원]]에 추배 하였다.
* [[1786년]] (정조 10년) 가을 8월 팔도 유생 박영원(朴盈源) 등이 소를 올려 문묘에 종향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를 입지 못하였다.
* [[1796년]] (정조 20년) 9월 17일 관학 유생 홍준원(洪準源) 등이 상소하여 문묘에 종사할 것을 거듭 청하니, [[조선 정조|정조]]는 마침내 윤허하면서 「선정 문정공 김인후는 곧 우리 동방의 [[주돈이|주자]](周子)이다.」하였다. 조선 유학의 최고 영예 자리인 [[문묘]]에 종사되고, [[동방 18현]]의 한 사람이 되었다.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에 가증되고, [[불천위]]의 은전을 받았다.
* 그해 10월 시호를 '문정(文靖)'에서 '문정(文正)'으로 개시하였는데 '도덕박문(道德博聞)을 문(文)이라 하고, 이정복인(以正服人)을 정(正)이라' 하였다.
* [[필암서원]]은 [[1871년]] (고종 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 미 훼철된 전국의 47개 서원중 하나이며, [[일제강점기]]나, [[6·25 전쟁일|6.25 사변]]때에도 피해를 면한 서원으로, [[1975년]] 4월 23일 [[대한민국의 사적|사적]] 제242호로 지정되었다.

== 평가 ==
* 그의 평생에 걸쳐 [[조선 인종|인종]]에 대한 절의와 출처의 올바름은 후대 사림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 조선 중기 도학자로 「호남 남쪽에는 김인후, 북쪽에는 [[이항 (1499년)|이항]], 영남에는 [[이황]], 충청에는 [[조식]], 서울에는 [[이이]]가 버티고 있었다.」는 역사적 평가에서 보여주듯 그의 학덕은 크고 넓었다.
* [[이이]]는 그 출처의 올바름은 해동에서 더불어 비교할 이가 없다 일컬으며, 『청수부용(淸水芙蓉) 광풍제월(光風霽月)』 (맑은 물에 뜬 연꽃이요, 비 갠 뒤의 맑은 바람과 달)이라 칭송하였다.
* 송천 양응정은 「후지( 김인후 字)는 오늘날의 안자(공자의 제자)이다.」라고 하였다.
* [[송시열]]은 『우리 나라 인물 중에서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겸하여 탁월한 이를 그다지 찾아볼 수 없으며 이 세가지 중 한 두 가지에 뛰어나는데,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도와 선생을 종생하여 이 세 가지를 다 갖추게 되었다.』고 칭송하였다.<ref> 《우암 송시열 찬》 『하서 김인후 신도비명』</ref>
* 학자 군주인 [[조선 정조|정조]](正祖)는 「학문의 조예가 초절하고 기상이 호매하였으며, 《대학》과 《서명》의 은미하고도 깊은 뜻을 처음으로 밝혀내었고, 경을 생활화함으로써 마음을 바르게 하는 공부와 도학 연원의 정통을 이어받아 실로 유학의 종장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 [[정조]]는 [[문묘]] 배향 교서에서 『조선 개국 이래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모두 갖춘 이는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라며, 『하서는 해동의 [[주돈이|염계]](濂溪)요, 호남(湖南)의 [[공자]](孔子)이다.』고 극찬하였다.
* 조선 중기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본격화 되어 사림 정치가 뿌리 내려가던 시기에 조선 사회 발전의 사상적 초석을 마련한 도학자로, 실천적 지성의 대표 인물로 후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 일화 (전설) ==
* 어릴 적에 [[박상]]이 그를 보고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자고로 지혜와 재주가 뛰어난 아이는 좋게 마치는 자가 없는데, 오직 이 아이는 당연히 영종할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그 말이 증험되었다.
* 8살 때 전라 관찰사 조원기가 그가 신동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를 전주 감영으로 불러 함께 시구(詩句)를 주고받으며 연구를 지었는데, 그의 뛰어난 재주와 높은 수준의 글 솜씨를 보고 『장성 신동, 천하문장』이라 칭찬했다.
* 9살 때 [[기준]]이 그의 인물됨을 칭찬하며 『참으로 기특한 아이다. 마땅히 우리 세자의 신하가 되겠다.』고 하면서, '내사필(內賜筆)' 한 자루를 선물로 주었다. 그는 그 뜻을 알고 항상 잘 간직하여 보배로 삼았다. 이때 복재가 말한 세자는 [[인종]]으로 훗날 그는 인종의 스승과 신하가 되었다.
* 10살 때 전라감사 [[김안국]]을 찾아가 『소학』을 배웠는데, [[김안국]]은 그를 보고서 『자신의 소우다.』라 하며, 그 뒤로도 늘 중국 고대 하은주 시대의 『삼대 인물』이라 극찬하였다.<ref>문화 일보(2016년 7월 16일) 『6세 때 즉석 詩 짓던 神童… 각별했던 인종 죽자 벼슬도 거부』[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6071301032412000001]</ref>
* [[신흠]]의 문집 『상촌집』에 『공이 죽은 후 몇 년 지나서 이웃에 사는 '김세억'이라는 사람이 병으로 죽었는데, 어느 날 다시 살아나 그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어서 천제가 있는 자미궁이란 곳에 갔더니, 그곳의 자미선으로 있는 그가 명부를 보며, “올해는 네 수명이 다하지 않았는데 네가 잘못 왔구나. 나는 네 이웃에 살던 김 아무개다”.」라고 말하고는 종이에다가 글을 써 주었는데 그 글은 이랬다. “이름은 세억이요, 자는 대년인데, 구름 헤치고 천상에 와 자미선을 찾았네. 훗날 77세 되면 또다시 만나리니, 세상에 돌아가 이 말 함부로 전하지 말라.”고 하였다.』 세억이라는 사람은 한자를 몰랐지만, 능히 이 글을 세상에 전했다.<ref>윤홍식·오병문, 2006, 조선선비들에게 배우는 마음 챙김의 지혜, 봉황동래.</ref>
* 붓바위(필암) 전설<ref> 장성군 『전설과 설화』[[http://tour.jangseong.go.kr/home/tour/spectacle/cultural_heritage/show/478]]</ref>


== 가족 관계 ==
== 가족 관계 ==
* 조부 : 김환
* 조부 : 금구훈도 김환
* 조모 : 직산 김씨
* 조모 : 직산 김씨
** 부 : 김령
** 부 : 의릉참봉 김령
** 모 : [[옥천 조씨]]
** 모 : [[옥천 조씨]]
*** 부인 : 증정경부인 여흥 윤씨
*** 부인 : 증정경부인 여흥 윤씨
**** 장자 : 김종룡
**** 장자 : 김종룡
**** 계자 : 김종호
**** 계자 : 자여찰방 김종호


=== 후손 ===
=== 후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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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몽재 유지]]<ref> 문화재청[[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31,01890000,35]]</ref>
* [[훈몽재 유지]]<ref> 문화재청[[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31,01890000,35]]</ref>


== 관련 사항 ==
== 관련 시설 ==
* [[광주광역시]]에 '하서로'<ref>광주 북구 운암동328-16 문화예술회관 사거리 ↔ 북구 태령동1 (11km)</ref> [[전라남도]]에 '하서대로'<ref>장성군 남면 삼태리 442-22 (광주광산 경계) ↔ 장성군 북이면 원덕리 산1-2 (37km)</ref>가 있다.
* [[광주광역시]]에 '하서로'<ref>광주 북구 운암동328-16 문화예술회관 사거리 ↔ 북구 태령동1 (11km)</ref>
* [[전라남도]]에 '하서대로'<ref>장성군 남면 삼태리 442-22 (광주광산 경계) ↔ 장성군 북이면 원덕리 산1-2 (37km)</ref>
* [[광주광역시]] [[북구 (광주광역시)|북구]] 운암동 [[어린이대공원 (광주)]]내에 하서 김인후의 동상과 인종이 그린 그림에 시를 지어 넣은 "묵죽도" 및 도학 사상을 집약 도해한 "천명도", 한시 "자연가"를 비롯한 작품 9점이 새겨져 있다.
* [[광주광역시]] [[북구 (광주광역시)|북구]] 운암동 [[어린이대공원 (광주)]]내에 하서 김인후의 동상과 인종이 그린 그림에 시를 지어 넣은 "묵죽도" 및 도학 사상을 집약 도해한 "천명도", 한시 "자연가"를 비롯한 작품 9점이 새겨져 있다.
* [[국립광주박물관]]에서 하서 김인후와 관련하여 현재 2번의 기획전시와 유교전시를 한 적이 있다.
* [[국립광주박물관]]에서 하서 김인후와 관련하여 현재 2번의 기획전시와 유교전시를 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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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보기 ==
== 같이 보기 ==
* [[김안국]]
* [[김안국]]
* [[인종]]
* [[박상]]
* [[송순]]
* [[최산두]]
* [[기준]]
* [[이황]]
* [[이황]]
* [[정조]]
* [[양산보]]
* [[조광조]]
* 기묘제현 신원복원
* [[인종]]
* [[을사사화]]
* [[태극도설]]
* [[기대승]]
* [[정철]]
* 하서집
* [[필암서원]]
* [[필암서원]]
* [[이이]]
* [[박세채]]
* [[김수항]]
* [[송시열]]
* [[김종후]]
* [[정조]]
* [[문묘]]
* [[동방 18현]]
* [[김성수 (1891년)|김성수]]
* [[김성수 (1891년)|김성수]]
* [[김병로]]
* [[김병로]]
* [[김상협]]
* [[김상협]]
* 하서로


== 미디어에서 ==
== 미디어에서 ==

2017년 7월 29일 (토) 23:49 판

김인후
金麟厚
파일:김인후 진상(眞像).jpg
출생1510년 음력 7월 19일
양력 1510년 8월 23일
조선 전라도 장성군 황룡면 대맥동
사망1560년 음력 1월 16일
양력 1560년 2월 11일 (51세)
조선 전라도 장성군 황룡면 대맥동 자택
성별남성
국적조선
본관울산
학력1540년(중종 35년) 별시 문과 병과 급제
직업문관, 성리학자, 도학자, 사상가, 시인, 정치가, 저술가
종교유교(성리학)
부모아버지 김령
어머니 옥천 조씨 부인
배우자여흥 윤씨
자녀김종룡(장남), 김종호(차남), 딸 4명(壻 : 조희문 · 양자징 · 유경렴 · 막내 요사)
친척사돈 이항, 진벽, 조임, 양산보, 유희춘

김인후(金麟厚, 1510년 ~ 1560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전라도 장성 출신으로, 본관은 울산(蔚山)이며,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담재(湛齋),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문묘에 배향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이력

김인후는 1510년 (중종 5년)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에서 아버지 참봉 영(齡)과 어머니 옥천 조씨(玉川 趙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청수하고 총명하였으며, 시문에 뛰어난 자질을 보여 이미 5~6세 무렵부터 전라도 일대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기묘 사림의 조원기, 기준 등의 아낌을 받았으며,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김안국, 박상, 송순. 최산두 등에게 도학과 문학을 배웠다.

1519년 (중종 14년) 특히 그의 나이 10세에 전라도 감사로 부임한 김안국에게 《소학》을 배웠는데, 김안국이 그를 보고 「이는 나의 소우(少友)다」, 그리고 하은주 시대 「삼대(三代) 인물」이라 칭찬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531년 (중종 26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고, 1533년 (중종 28년) 성균관에서 이황을 만나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학문을 닦았다. 후일 퇴계는 「더불어 교유한 자는 오직 '하서(河西)' 한 사람뿐이었다.」고 술회했을 정도다.

1540년 (중종 35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 부정자(副正字)에 등용되었다가, 이듬해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은전을 입게 되어 호당(湖當)에 들어갔는데, 함께 뽑힌 13명의 학자는 이황을 비롯한 명사들로, 그는 이들과 교유하면서 사상적 토론을 통해 성리학 이론을 확립하여 조선 성리학 형성에 큰 자취를 남겼다.

1543년 (중종 38년) 4월 홍문관 박사(博士) 겸 설서(說書)가 되어 세자이던 인종을 가르쳤는데, 이때 세자와 깊은 사제의 연을 맺게 된다. 세자는 그의 학문과 도덕에 깊이 감복하여 입직해 있을 때는 직접 찾아가기도 하고, 몸소 그린 「묵죽도」 와 『주자대전』을 하사할 정도로 그에 대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후 홍문관 부수찬이 되어 기묘사화때 죽임을 당한 기묘 제현들의 신원 복원을 문신으로서 최초로 개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해 8월 부모 봉양을 구실로 귀근하고, 12월에 걸양을 청하여 옥과 현감을 제수 받아 고향 근처로 돌아왔다.

[1545년]] (인종 원년) 중종이 승하하자 제술관으로 서울에 올랐다가, 인종이 즉위 후 불과 8개월 만에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 장성으로 돌아가 다시 사진할 마음을 갖지 않은 체, 산림에 은둔하여 시와 술로 울분을 토로하며 세월을 보냈다. 그 후 매년 인종의 기일인 음력 7월 초하루가 되면 집 앞 난산(卵山)에 올라 종일토록 통곡하고 돌아오기를 평생을 한 결 같이 하였다.

이후 성균관 전적·공조 좌랑·홍문관 교리·성균관 직강 등의 벼슬에 제수 되지만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몸을 추스린 그는 1548년 (명종 3년) 순창 점암촌에 초당을 세우고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몰두하였는데, 《주역관상도》와 《서명사천도》등을 저술하였다. 그의 성리학 이론은 16세기 조선 성리학계를 이끈 대표적 이론으로 자리 잡아 이와 기에 관한 논쟁의 중심에 있으며, 우리나라 유학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성경(誠敬)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삼고, 고봉 기대승, 일재 이항, 소재 노수신 등과 사단칠정, 태극도설, 인심도심 등의 문제에 대해 논변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고봉퇴계와 「사단칠정논변」의 시비를 벌일 때 그와의 논변을 통해 정립된 이론을 바탕으로 하였는데, 이것이 세상에 전하는 '이황·기대승'의 「사칠왕복서」이다.

또한 담양 소쇄원 주인 양산보와 도의 지교를 맺고, 면앙정의 누정을 중심으로 당대 유명한 송순을 비롯한 호남의 많은 사림계 문사들과 교유하면서, 호남 시단 형성 및 16세기 누정 문학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성리학 연구 및 후학 교육에 전념하다가 1560년(명종 15년)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떠나면서도 인종에 대한 절의를 지키고자 『을사년 이후의 관작일랑 쓰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마지막 그 순간에도 선비다운 고고한 기품을 드러냈다.

그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을 뿐 아니라,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시문에 능해 10여권의 시문집이 있으며, 저서로는 『하서집』 · 『주역관상편』 · 『서명사천도』 · 『백련초해』 등을 을 남겼다. 제자로는 변성온 · 기효간 · 조희문 · 정철 · 오건 등이 있다.

장성의 필암서원, 옥과의 영귀서원 등에 제향 되고, 1796년 (정조20년) 문묘에 배향 되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고, 불천위의 은전을 받았다.

생애

생애 초기

출생

그는 신라 경순왕의 후손으로 그의 5대조 조선 개국원종공신 김온(金穩)이 태종(太宗)의 왕권강화 일환으로 외척 세력을 제거할때 처가인 여흥 민씨 민무구 형제 옥사에 연루되어 화(禍)를 입자, 정부인 여흥 민씨가 아들 3형제를 데리고 장성(長城)으로 낙담하여 자리를 잡게 되면서 자손들이 장성고을 사람이 되었다. 1510년(중종 5년) 7월 19일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에서 아버지 의릉참봉 영과 어머니 옥천 조씨 사이에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형용이 단정하고 기개와 도량이 넓고 두터우니 부친 참봉공(參奉公)의 사랑이 더 하였다.

수학

1514년(중종 9년) 5살 때 부친 참봉공이 ≪천자문≫을 가르치는데, 눈여겨보기만 하고 화답을 하지 않자 참봉공이 화를 내며 「자식을 낳은 것이 이와 같으니 아마도 벙어리인 모양이다. 집안이 말이 아니겠구나.」 하였다. 그러고 나서 그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 창벽에 글을 쓰는데 모두 ≪천자문≫에 있는 글자였다. 그래서 참봉공은 비로소 기특히 여기었다. 또 일찍이 아는 사람과 연구를 짓는데 「넓고 아득한 우주에 큰 사람이 산다.」라는 글귀가 있었다. 하루는 생파를 손에 들고 겉껍질에서부터 차근차근 벗겨 들어가 그 속심까지 이르고서야 그치니, 이를 본 참봉공이 장난삼아 하는 줄로 알고 나무라자, 「그 자라나는 이치를 살펴보려고, 그렇게 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1515년(중종 10년) 6살 때 정월 보름달을 보고 ‘상원석’(上元夕)의 시를 지었다. 또 어떤 손님이 와서 하늘을 가리키며 하늘천(天)자로 글제를 삼아 시를 지어 보라고 하니, 즉석에서 대답하기를 "형체는 둥글어라 하 크고 또 가물가물, 넓고 넓어 비고 비어 땅 가를 둘렀도다. 덮어주는 그 중간에 만물이 들었는데, 기 땅 사람들은 어찌하여 무너질까 걱정했지."라고 하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놀래며 특이하게 여기었다.

1517년(중종 12년) 8살 때 조광조의 숙부 조원기가 전라 관찰사로 있을 때 그를 보고 기특히 여기어 더불어 연구(聯句)와 시(詩)·부(賦) 등을 지었는데, 그의 뛰어난 재주와 높은 수준의 글 솜씨를 보고 『장성신동(長城神童), 천하문장(天下文章)』이라 칭찬했다.

1518년 (중종 13년) 복재 기준이 남녁 시골에 내려왔다가 그의 이름을 듣고서 데려다 보고 칭찬을 하며 「참으로 기특한 아이다. 마땅히 우리 세자(世子)의 신하가 되겠다.」고 했다. 그리고 '내사필(內賜筆)'한 자루를 선물로 주었다. 그는 그 뜻을 알고 항상 잘 간직하여 보관함에 넣고 보배로 삼았다.

1519년(중종 14년) 10살 때 호남 관찰사로 와 있던 김안국을 찾아뵙고 『소학』을 배웠는데, 김안국은 그를 기특히 여기며 이는 「나의 소우이다」고 하였으며, 그 뒤로도 하은주 시대 「삼대의 인물」이라 일컬었다. 이와 같이 그는 어린 시절부터 문명(文名)을 전역에 떨쳤다.

1522년 (중종 17년) 시를 잘 짓던 그는 스스로 「시를 배우지 않으면 설 수가 없다(不學詩 無以立)」는 말을 성인의 교훈으로 생각하고, ≪시경≫을 탐독하였다.

1526년 (중종 21년) 송순을 찾아가 뵙고 수업하였으며, 그 후로도 계속 왕래하며 문안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527년 (중종 22년) 18세 때 기묘사화를 만나 화순 동복에 유배 중이던 신재 최산두를 찾아 수학 하였는데, 신재는 깊이 탄복하여 매양 「추수 빙호(가을의 맑은 물과, 얼음을 담은 옥항아리 같다」라고 일컬었다. 또 나주 목사로 좌천되어 있다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 광주 서창에 돌아와 있던 박상을 찾아뵙고 학문의 폭을 넓혀 나갔다.

학문 연구와 관료 생활

1528년(중종 23년) 봄에 서울에 올라가 성균관에 입학하여 선비들에게 칠석날 기리는 시험을 보였는데, 그는 응시하여 장원이 되었다. 그의 시권 《칠석부(七夕賦)》가 사람들의 입에 회자하니, 문형 이행이 기특히 여기며 사람이나 글이 모두 옥이라고 하면서도, 다만 혹시 남의 손을 빌리지나 않았나 의심하여 그를 성균관에 있게 하고 일곱 가지 글제를 내어 시험을 했는데 모두 그 자리에서 지어 권을 바쳤을 뿐더러, 시문의 운치가 모두 뛰어나니 이행은 크게 경탄해 마지않았다. 그 중의 「염부」, 「영허부」는 문집에 있다.

1531년(중종 26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1] 1536년(중종 31년) 스승 최산두의 부음을 듣고 스승을 위해 가마를 하였으며, 기일을 당하면 반드시 재계하고, 그 소상에 미쳐서는 글을 만들어 제사하였다.

1533년(중종 28년) 성균관에서 이황과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학문을 닦았다. 기묘사화를 겪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아 선비들이 학문을 소홀히 하며, 도학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는 풍조였는데, 이황과 한번 보고 서로 깊이 뜻이 맞아 끊임없이 토론 탁마해서 매우 이택의 소득이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퇴계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자 그는 정표로 ‘증별시’를 지어 주었다.[2] 이와 같이 성균관에 있으면서 이황을 비롯한 많은 현능들을 만났다.

1536년(중종 31년) 스승 최산두의 부음을 듣고 스승을 위해 가마를 하였으며, 기일을 당해서는 반드시 재계하고, 그 소상에 미쳐서는 글을 만들어 제사하였다.【우리나라에서 스승을 위해 가마한 것은 그가 처음으로 세상에 밝혀졌음】

1539년 (중종 34년) 여름 4월 예조에서 아뢰기를 「중국 사신이 시를 잘 짓는다 하여 이미 제술관을 많이 뽑았사오나, 성균관 과시에서 큰 명성을 얻은 김인후등을 차출하여 용에 대비케 함이 어떠하옵니까?」하니 그렇게 하라 전교 하였다.

1540년(중종 35년) 10월에 별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에 등용되었다. 이듬해 4월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은전을 입게 되어 호당(湖當)에 들어갔다. 함께 뽑힌 열세 사람과 더불어 계(契)를 닦고 이름을 「호당수계록(湖堂修契錄)」이라 했다. [3] 그는 이들과 교유하면서 사상적 토론을 통해 성리학 이론을 확립하여 이후 조선 성리학 형성에 큰 자취를 남겼다. 겨울 10월 홍문관 정자 겸 경연정경 춘추관 기사관에 제수되었다.

1542년(중종 37년) 가을 7월에 홍문관 저작이 되어 청요직(淸要職)에 올랐다.

1543년 (중종 38년) 1월 7일 동궁에 실화가 발생되어 안채가 잿더미가 되고, 방화범이 누구인지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다. 봄 2월에 스승 김안국의 부음을 듣고 가마를 하였으며, 기일에도 재계하였다. 만사(輓詞)가 문집에 전한다.

여름 4월에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 설서로 승배되었으며, 이때에 인종이 춘궁에서 덕을 기르는데 세자 보도 책임을 전적으로 그에게 맡기니, 세자는 그의 학문·도덕의 훌륭함을 깊이 알고 정성스런 마음과 공경하는 예로써 자주 소대를 하였으며, 그 역시 세자의 덕이 천고에 뛰어나서 후일에 요․순 시대의 다스림을 기약할 수 있다 생각하고 지성껏 계도해서 서로 뜻이 맞음이 날로 두터웠다. 또 그가 입직해 있을 때는 세자가 간혹 몸소 나와 나라의 어려운 문제를 논의하다 이슥해서야 파하였다.

세자는 본래 예술에 능하였으나 일찍이 남에게 표현하고자 아니하였는데 유독 그에게 손수 그린 '묵죽도(墨竹圖)' 를 하사하여 뜻을 보였다. 이것은 임금 될 사람으로서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친절이었다. 이후에도 『주자대전(朱子大典)』 한 질을 하사할 정도로 그에 대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와 같은 인종의 그에 대한 신뢰와 배려는 충성심으로 굳고 깊게 자리 잡게 되었으며, 이 일화는 군신 관계의 모범으로서 후대에 이르기까지 인구에 널리 회자되었다.

기묘 명현의 신원 복원

1543년 (중종 38년) 여름 6월에 홍문관 부수찬 지제교 겸 경연검토관으로 승배되었다. 그해는 동궁에 실화가 발생되는 등 전국이 뒤숭숭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홀로 개연히 차자를 올려 중종에게 수신·자성의 도를 진술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았다.

『'바른 선비들을 《소학》의 무리라 하여 배척하는 낡은 정치 풍토가 만연해 있는 조정의 기강과 풍속을 바로 잡을 것과.' '기묘년에 희생된 자들은 한때 잘못한 일은 있더라도 그 본심은 터럭만큼도 나라를 속이지 않은 자들인데도 불구하고 무거운 죄를 받아 이들에 대한 신원 복원이 현재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반역 무리로만 논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들에 의해 강조된 《소학》이나 《향약》 등은 성현의 글인데도 불구하고 지금의 선비들이 시속에 빠져 읽어서는 안 될 글이라 하며 버리니' 매우 온편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지적 하는데 그 사연이 매우 간절하고 절실하였다.

때는 기묘년으로부터 2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조야에서는 당시 일을 꺼리고 두려워하며 감히 꺼내지도 못하는 상황인데, 이를 언급한 것은 감히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홀로 할 수 없는 일로, 도통적 의리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4]

이를 계기로 사림의 입이 떨어지기 시작하였고, 이후 그가 가르치던 인종이 왕으로 등극 후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기묘 명현의 신원 복원을 이뤘으니 그와 인종과의 묵계는 알만하다 하겠다.

하지만 중종은 기묘 명현의 신원 복원에 대해서는 윤허하지 않고, 다만 폐기토록 지시한 ≪소학≫·≪향약≫에 대해서만 철회토록 윤허하였다. 이에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 같은 상황을 더는 견딜 수 없어 하며 8월에 연로하신 부모 봉양을 이유로 말미를 청해 귀근하였다. 이후 12월에는 걸양을 청하여 고향과 가까운 옥과 현감을 제수되고, 춘추관의 겸함은 그대로 띠었다.[5]

1544년(중종 39년) 전라 관찰사 송인수와 더불어 학문을 닦고, 글을 주고받으며 정으로 사귐이 매우 두터웠다. 11월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 즉위하여 1545년(인종 1년) 여름 5월에 조정에서 제술관으로 부름에 드디어 나아갔다. 당시 인종이 새로 즉위하여 내외가 모두 태평성대를 기대했으며, 그에게 인종의 경연 보도를 맡기고자 하였다. 그 사이 인종이 건강을 잃자 그는 의약에 함께 참여하기를 청한 바, 약원에서 직책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당하였다. 이에 그는 그 배경에 중종 후반기 이래 대윤과 소윤 간의 정치적 갈등과 대립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고, 이후 세상의 기미가 반 사림적으로 펼쳐질 것을 예상하고 부모 병환을 들어 본래의 임소로 돌아왔다.

학맥과 사상

이와 같이 그는 조원기·기준·송순·박상등과 사우 관계를 맺고, 김안국·최산두에게 수학하였다. 기준·김안국·최산두는 모두 기묘년 때 화를 당한 인물들로 그가 결코 기묘사화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스승 김안국조광조와 함께 김굉필에게서 학문을 배웠는바, 김굉필은 바로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 순의 조선 성리학의 도통을 이어받은 인물이므로, 그는 도통의 직계이다. 그리고 스승의 형제나 다름없는 조광조와는 사숙질(師叔姪)이 된다.

때문에 그는 조광조등 기묘 사림들이 화를 당하였어도 그들의 자치주의 노선을 밟을 수밖에 없었고, 또 정면으로 뛰어들어 그 어려운 유업을 짊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광조등을 죽인 중종에게 기묘사화의 잘못됨을 말하고, 희생된 자들의 신원 복원을 주청하였던 것이다. 이는 도통적 의리에서 나온 것으로, 감히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직과 은거

[1545년]] (인종 원년) 가을 7월에 인종이 갑자기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목을 놓아 통곡하며, 더는 살고 싶지 않은 듯이 하여 자못 심질이 발작했다. 그리고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이내 소생하였다.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와 인사를 폐하고 다시 사진할 마음을 끊고 산림에 은둔한 채 시와 술로 울분을 토로하는 세월을 보냈다. [6]

1546년(명종 원년) 고향에 묻혀 절의를 고수하던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학문의 연구와 교육뿐이었다. 4월에 ≪효경간오발(孝經刊誤跋)≫을 지었는데, 이는 옥과 현감으로 봉직할 당시 유희춘이 한양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본 읍에 들러 주자의 「효경간오」라는 책을 보여 주자, 이를 매우 흐뭇해하면서 친히 베껴놨던 것인데, 이제 그 책 말미에 발문을 붙여 그 뜻을 넓혀서 배우러 오는 자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인종에 대한 절의

이후 그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절의(節義)’를 고수하는 생활로 일관했다. 을사년(乙巳年) 이후 매년 여름에서 가을로 바뀔 무렵이면 글을 폐하고 객(客)도 만나 보지 않으며, 우울한 기분으로 날을 보내며 문밖을 걸어 나간 적이 없었다. 또 인종의 기일인 음력 7월 초하루가 되면 술을 가지고 집 남쪽의 난산 속에 들어가서 한잔 마시고 한번 곡하고 슬피 부르짖으며 밤을 지세고 내려오기를 평생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한결 같았다. 또 인종을 그리고 애도하는 처절한 심정으로 「유소사(有所思)」와 「조신생사(弔申生辭)」의 시(詩)를 지었다.

1547년 (명종 2년) 봄에 성균관 전적에, 가을에 공조 정랑에 제수되어 부름에 올랐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또 전라 도사를 제수했다가 바로 체직하였다. 그해 가을 9월에 「양재역 벽서사 건」이 일어나 사림계 인사들이 사사되고 유배되었는데, 이들은 그의 사상적 동지요 절친한 벗들이었다.[7]

1548년 (명종 3년)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점암촌에 우거하며 초당을 세우고 편액을 훈몽이라 걸고, 여러 학생들을 훈회하였는데, 반드시 먼저 ≪소학≫을 읽고, 다음에 ≪대학≫을 읽게 하였다. 순창 점암은 수석이 절승하며, 강 언덕에 반반한 바위가 있어 능히 수십 인이 앉을 만 하였는데, 고암 양자징을 비롯한 제자들과 더불어 바위에서 ≪대학≫을 강의 하였다. 세상이 이를 대학암이라 일컬으며, 또 상류에 낙덕암도 있다. 이와 같이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체념한 체 산림에 은둔하여 후학 양성과 시와 술을 벗 삼아 세월을 보냈는데, 오히려 마음이 태평스러웠다.

1549년(명종 4년) 봄 2월에 ≪주자대전≫ 중에서 ≪대학 강의(大學 講義)≫를 얻어 보고, ≪대학 강의발(大學講義跋)≫을 지었다. 여름·가을에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0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12월에 장성 맥동 본가 서쪽 원당산에 반장하였다. 묘갈명은 송순이 썼다.

그 무렵 성리학자들의 관심이 천명도에 집중되었는데, 추만 정지운이 「사단은 이에서 생기고, 칠정은 기에서 생긴다.」로 표현해 이를 도식화하고 해설을 붙여 천명도를 완성하였다. 이를 받아 본 그는 대폭 수정 보완해 인성의 본질을 파헤치는 탁견을 제시하여 주었는데, 이는 뒷날 이황기대승 간의 사칠 논변이 일어나게 된 사상적 배경이 됐으며, 일찍이 이황도 역시 그의 도학 문자를 보고 식해(識解)의 정밀함에 깊이 공경하였다.

1550년(명조 5년) 가을에 장성 본가로 돌아왔다. 묘사 거실의 편액을 ‘담재(湛齋)’라 하고, 이를 자호로 하였다. 1551년(명종 6년) 6월에 모친상을 당하여 참봉공 묘 왼편에 부장(祔葬)하였다.

1552년(명종 7년) 양산보가 효부(孝賦)의 장편을 지어서, 그가 일찍이 운에 차했는데, 송순이 손수 두 부(賦)를 쓰고 원부(原賦)의 뒤에 제하였다. 문집에 실려 있다.

1553년(명종 8년) 7월에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9월에는 홍문관 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 기주관에 제수되어, 부름에 응하여 길에 올랐다가 전을 올려 병으로 사하고 돌아왔다. 겨울 11월에 성균관 직강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54년(명종 9년) 늦가을 9월 성균관 직강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셨다. 10월에 명종은 특별히 감사에게 명하여 「식물을 제급케 하고, 눌러 명하기를 병이 낫거든 역마를 타고 올라오라」 하였는데, 그는 전을 올려 사양했다.

1555년(명종 10년) 12월 참찬관 박민헌이 말하기를 「경연관으로서 신 같은 무리는 서의(書義)를 잘 모르는 처지이니, 모름지기 유자 이황과 김인후를 구하여 조석으로 더불어 강론한다면 도리를 알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생애 후반

그의 생애 후반은 을사사화 이후 은거한 그의 행적은 크게 둘로 나눠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성리학 연구이고, 둘째는 시문학 활동이고 이다.

성리학 연구

을사사화 이후 은거(隱居)한 그는 몸을 추스린 후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는데, 그의 학문 기조는 의리를 실천하는 데에 있었다. 이는 조선조 도학자들의 학문적 특징이며, 또한 성리학을 공부하는 목적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성리학 이론은 16세기 조선 성리학계를 이끈 대표적 이론으로 자리 잡아 이와 기에 관한 논쟁의 중심에 있으며, 우리나라 유학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556년 (명종 11년) 서경덕은 '심학(心學)'으로써 당시의 종앙하는 바가 되었는데, 그는 일찍이 「독주역시」를 지은 바 있다. 그는 이 시를 보고서 「성인의 말씀은 곧 천지의 도이니 영이라고 할 수 없다.」고 차운하였다. 이는 서화담이 공부하는 사람들을 계도하는 방식이 하학 공부를 소홀히 하고 돈오(頓悟)의 지름길로 이끌 우려가 있기 때문에 그가 이를 깊이 걱정하여 마침내 보운(步韻)을 해서 바로잡은 것이다.

여름 5월에 무장고을 유생 안서순이 상소하여 을사년에 무함을 입은 명현의 원통한 상황을 진술하여 아뢰는데, 윤원형 등이 안서순을 역적을 두둔한 죄로 처 죽이고 가산을 몰수했으며, 나주출신 정륜도 함께 모의한 죄로 참형하여 가산을 몰수하였으며, 진사 김응정에게는 소장을 썼다하여 멀리 귀양을 보냈다. 또 윤원형이 기필코 '김인후'에게 연루시켜서 사림에 화를 씌우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를 않았다.

1557년(명종 12년) ≪태극도설≫ ≪서명≫ 등의 글이 지닌 깊은 뜻을 생각하고 찾아 쌓고 쌓아 읽은 횟수가 천 번에 달했다. 이에 이르러 ≪주역 관상도≫와 ≪서명사천도≫를 서술하고, 또 배우는 자들에게 글로 써서 보이기를 「염계의 도설은 도리가 정미하여 글월은 간략하되 뜻은 만족하고 장자의 명은 규모가 광활하여 뜨지도 않고 새지도 않으니 만약 천자가 고명하면 먼저 태극에서부터 공력을 써야 할 것이나 그렇지 못하면 ≪서명≫을 이해하고서 태극에 미처 가야 한다. 태극은 덕성의 근본이요 ≪서명≫은 학문의 강기이니 요컨대 어느 한쪽도 폐해서는 아니 된다.」라 하였다. ≪서명사천도≫와 ≪태극도설≫ 은 일실되어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

1558년(명종 13년) 당시 기대승이항에게 들러 ≪태극도설≫을 강론하는데, 이항이 「태극과 음양을 일물로 삼으므로」 기대승은 그르게 여기어 종일토록 토론하였으나 결과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에 기대승은 그를 찾아뵙고 분별하기 어려움 들어 질문하니, 그는 『이와 기는 혼합되어 있으므로 태극이 음양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도와 기의 구분은 분명하므로 태극과 음양은 일물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고 하며 고봉더러 옳다 하고 하루 내 강론하다 파하였다.

노수신이 ≪숙흥야매잠≫의 주해를 저술하여 이황 및 그에게 강론 질문하면서 왕복한 것이 누수 백언 이었는데 이황은 누차 자기 의견을 버리고 그의 설을 많이 따랐다.

여기서 노수신은 『마음이 몸을 주재한다.』고 하였는데, 그는 이에 대해 비판하며, 『마음이 몸을 주재하지만 기가 섞여서 마음을 밖으로 잃게 되면 주재자를 잃게 되므로, 경으로써 이를 바르게 해야 다시금 마음이 몸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는 「주경설(主敬說)」을 주장하였다.

채침의 ≪홍범설시도설≫은 밝고 또 구비한데도 뒷사람이 오히려 자세히 알지 못하는데, 그는 채구봉의 설로 근본을 삼고, 자기의 설을 부진하여 매우 정성스럽게 곡진하게 발명해서 이름을 ≪홍범설시작괘도≫라 하고, 제자 양자징에게 전수하니 이에 '주·채(주자와 채침)'가 전수한 깊은 뜻이 비로소 밝혀졌다.

1559년(명종 14년) 일재고봉을 통해 "태극과 음양이 일물이라"는 뜻을 극론하여 서간을 보내자, 그는 일재에게 작은 간찰을 보내, "기군에게 보낸 간찰에 대해 감히 이렇다 저렇다 할 일은 아니나, 대개 이와 기는 혼합하여, 천지의 사이에 가득 찬 것이 다 그 속으로부터 나와서 각기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니 태극이 음양을 떠났다고 일러서는 아니 되겠지만, 그러나 도기의 나눠짐이 한계가 없지 못할진대 태극과 음양은 아무래도 일물이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라며, 주자는 말하되 『태극이 음양을 탄 것이 사람이 말을 탄 것과 같은즉 결코 사람을 말이라 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고봉퇴계에게 질문하자 퇴계는 『담옹(하서의 별호)이 비록 적요한 두어 마디 말을 했으나, 역시 이미 그 대지를 보았다 하겠다.』고 하였다.

그해 겨울 벼슬길에서 물러나 고향에 있던 [[기대승|고봉]이 매양 그에게 나아가 의리를 토론하였다. 고봉퇴계의 『사단칠정 이기호발설』 에 대해 깊이 의심하여 그에게 질문하니, 그는 세밀한 분석과 변론을 극히 투철하고 정밀하게 해주었다.

이에 고봉은 그에게 이와 같은 것을 얻었기 때문에 「사칠설」 및 「장서」를 저술하여 퇴계에게 봉질 하였던 것이며,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고봉퇴계와 더불어 사칠 호발의 시비에 대해 왕복 변론한 것이 자못 수 만언이었다. 이는 다 그의 가르침을 받아서 분변한 것인데, 이후 고봉은 그 동안의 설을 다 버리고 1566년 병인년에 도리어 퇴계의 설을 따랐다. 이것이 세상에 전하는 '퇴계·고봉'의 「사칠왕복서」이다.

또 명나라 유학자 나흠순은 ≪곤지기≫를 저술하여 이르기를 『도심은 성이요 인심은 정이다. 그 체는 지극히 고요하여 보이지 않기 때문에 미라 이르고 그 용은 지극히 변하여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에 위라 이른 것이다.』라 하였는데, 노수신이 그 설을 강력 주장하며 말하기를 『도심은 고요하여 움직이지 아니하고, 인심은 느껴서 드디어 통한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그는 심히 그르게 여기며 말하기를 『성인의 인심 도심은 대개 모두 동처를 지적하여 말한 것이라』라 하였다. 사후 퇴계고봉은 그의 설을 존중하고, 노소재의 설을 극력 공격하였는데, 그의 전론은 일실되어 전하지 못한다.

이와 같이 그의 성리학 연구는 『이기 이원론』으로 '주리론'적 입장이었으며, 수행론 방면으로는 ‘경(敬)’을 강조하였다.

시문학 활동

그는 화순 동복의 최산두 문하를 출입하면서부터 시문학 방면에도 이름을 얻었는데, 이후 서울에서 문명(文名)을 떨치던 그가 낙향하여 당시 전라도 일대에 많이 활동 하고 있던 사림계 인사들과 교유 하였는데, 특히 담양 소쇄원 주인 양산보와는 도의 지교를 맺고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당대 유명한 송순·임억령·김윤재·김성원·기대승·정철 등의 문사들과 담양의 소쇄원·면앙정·식영정과 광주의 환벽당 등 누정을 중심으로 호남 시단을 형성하여 16세기 누정 문학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당시 그가 쓴 〈소쇄원 48영〉과 〈면앙정 30영〉 및 그 밖의 여러 율시 등은 누정 문학의 최고봉으로 널리 칭송 받았으며,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저서와 작품

그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을 뿐 아니라, 천문·지리·의약·복서·율려·도수에도 정통하였다. 태극에 관한 이론도 깊어 『천명도(天命圖)』를 완성하였으나, 도학에 관한 저술은 일실되어 많지 않다. 16세기 누정 문학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시인이기도 하며, 시문에 능해 10여 권의 시문집을 남겼다. 저서로는 아래와 같다.

  • 《하서집(河西集)》
  •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
  • 《서명사천도(西銘四天圖)》
  • 《홍범설시작괘도(洪範揲蓍作卦圖)》
  • 《가례고오(家禮攷誤)》
  • 《천명도(天命圖)》
  • 《백련초해(百聯抄解)》

후학 양성

제자로는 당대 내로라하는 석학들인 변성온·기효간·조희문·정철·오건·양자징·남언기·노적·윤기·신각·서태수·김종호·안증·김제안·양산해·박원순 등이 있다.

최후

고향 장성으로 은거한 지 15년여 만인 1560년 (명종 15년) 정월 16일 병이 위급하여 자리를 바로 하더니 51세의 나이로 유연히 세상을 떠났다. 사흘 전 14일에 기운이 평화롭지 못하여 약물을 들면서 집안사람에게 이르기를 『내일은 보름이니 정성들여 생주를 갖추어, 자녀들로 하여금 사당에 행전케 하라』 하였다. 15일에는 병을 무릅쓰고 일찍 일어나 의관을 단정히 하며 꿇고 앉아 제사의 시각을 기다렸다. 그리고 명하기를 『내가 죽으면 을사년 이후의 관작일랑 쓰지 말라』고 하였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선비다운 고고한 기품을 드러냈음을 알 수 있다.

조정에 부음을 아뢰자 명종은 부의 보내도록 특명하였다. 그해 3월 그의 뜻에 따라 장성 대맥동 원당산 부모 산소 아래 자좌 오향 벌 안에 장사하였다. 자손들에게 훈계하기를 『須識根枝一氣通, 幾曾勤苦樹家風. 進學修身爲家繼, 百工猶自世箕弓(뿌리와 가지는 한 기운으로 통하는 것, 얼마나 많은 근고로 가풍을 세웠던고. 진학하고 수신하여 이어가야 하는 거니, 백공들도 기구를 세업으로 삼느니라)』 하였다.

시대적 상황

그는 중종 5년에 태어나 명종 15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 시기는 연산군의 혼란된 조정을, 중종반정으로 바로 잡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회복하고자, 중종 초기 문치의 기운을 열고 국가의 기강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중종의 등극과 함께 '신비'를 폐출하면서부터 내부적으로는 외척 세력 간 다툼이 치열하고 왕권을 둘러싼 갈등이 노골화되었던 시대였다. 이 때에 일어난 기묘사화을사사화는 이러한 시대적 성격을 잘 대변하여주고 있다 하겠다.

기묘사화는 반정 후 새로운 기풍을 일으키고자한 사림의 이상과 훈구 대신들의 현실적 욕구가 서로 부딪치게 되어 사림이 화를 입게 된 사건이고, 을사사화윤원형을 비롯한 명종의 외척 세력이 자신들의 세력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인종의 근신들을 해친 사건이었다.

그는 정신적으로는 사림 사상을 계승한 도학자로서, 복재의 사랑을 받고, 모재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신재에게 학문을 배웠다. 그는 인종(仁宗)의 신하였기에, 윤임(尹任)이나 윤원형 어느 편에도 가까이하지 않았고, 그러한 집권 세력들과 같은 조정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자신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니 이는 그들과 연속된 싸움이었다.

그러나 인종과는 남다른 깊은 정을 나누며, 서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같아서, 세자와 신하로서 뿐 아니라 세자의 보호자로서 유일한 벗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종(仁宗)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그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의 입지를 펼칠 수 있는 상황을 허락해주지 않았던 것이니, 그로서는 불우한 시대를 만나 그 높고 깊은 경륜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높은 인격과 학문적 경륜과 치세의 뜻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그 이상을 펼쳐보지 못한 채 시와 술을 벗 삼고 세월을 한탄할 수밖에 없는 불우한 일생을 살았던 것이다.

업적

도학

하서의 학문은 의리를 실천하는 데에 있다. 이는 조선조 도학자들의 학문적 특징이며 또한 성리학을 공부하는 목적이기도 하다. 도학이란 성리학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지만, 이는 중종의 등장과 함께 조정에 참여하게 된 신진 사림들이 내세웠던 학풍이었다. 그 정신은 요·순 임금이 행하였던 정치를 실현하고자 한 것인데, 이와 같은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은 유학의 근본 정신을 배우자는 데에 있었다.

이와 같은 도학이 성리학으로 전회하게 된 계기는 기묘사화인데, 호남에 있어서도 기묘사화는 사상과 의식을 발전시키는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그것은 조광조가 전라도 화순 능주로 귀양 오게 됨으로써 그 정신적 정통성이 호남으로 수용되었으며, 또한 기묘 사림들이 호남과 인연을 맺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서는 기묘 사림의 문하에서 성장하고 그 정신을 계승함으로써 호남 유학의 발전적 토대를 쌓게 되었다. 하서를 가리켜 도학·문장·절의가 남다르다고 하는 것은 하서 자신의 학문이나 정신이 그와 같았다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하서 이후의 사상적 계승과 발전적 특징이 그와 같은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인품이 그대로 계승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할 것이다.

그리하여 하서의 사상에 대해 살펴보면 도학 사상은 기묘 사림 의식에서 온 것이지만, 그의 학문적 특징은 이를 사상적으로 정립하고, 이론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는데 있다. 그와 같은 사상적 정립을 이루도록 한 것이 바로 그가 만든 「천명도」였다.[8]

절의

그의 절의 정신은 절개와 의리를 말하는데 의리란 올바름을 실천하는 것으로서 이는 본성이 발현된 것으로 인의 구체적 실체이다. 그의 의리는 자신의 올바름을 지키려는 어진 본성에서 나왔기에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에는 의를 실천 할 수 있는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불의에 맞선 절의 정신은 실천적 도학으로 계승되어 호남 사림들로 하여금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분연히 떨쳐 일어나 구국의 대열에 앞장서게 하여 임란 의병·구한말 의병·광주학생독립운동·5·18 광주 민주화 운동등으로 나타났다.[9]

문장

그의 문장은 도를 싣는다. 도는 하늘의 마땅히 그러한 바를 따르는 것으로, 문은 그와 같은 도를 실현하는 실체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따라서 그의 문장이 깊은 의미를 갖는 것은, 그의 도가 그만큼 깊었음을 말한다. 그의 문장은 이와 같이 도가 나타난 것이었기에 도를 높이려는 선비들은 자연히 그의 문장을 따르게 되었다.[10]

사후

  • 1561년 (명종 16년) 문인 양자징이 가장(家狀)을 지었다.
  • 1564년 (명종 19년) 옥과 선비들이 「영귀사」를 건립 하였다.
  • 1570년 (선조 3년) 순창고을 선비들이 「화산사」를 건립하고, 뒤에 「어암사」도 건립 하였다.
  • 1590년 (선조 23년) 호남 선비들이 그의 고향 인근 장성 기산리에 필암서원을 건립 하였다. 1597년 (선조 30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어, 1624년 (인조 2년) 기산리 마을 서쪽 증산동으로 이건 하였다.
  • 1659년 (효종 10년) 3월 「필암(筆巖)」이라 사액이 내려졌다.
  • 1662년 (현종 3년) 필암서원(筆巖書院)으로 선액(宣額)하고 예관을 보내어 사제하였다.
  • 1668년 (현종 9년) 여름 4월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669년 (현종 10년) 가을 8월에 문정(文靖)이라 시호가 내려졌다. "도덕박문(道德博聞)을 일러 문(文)이요, 관락영종(寬樂令種)을 일러 정(靖)이라 한 것이다."
  • 1672년 (현종 13년) 서원 입지가 수해를 입을 우려가 있어 추담 김우급 등이 지금의 자리인 해타리로 옮겼으며, 마을 이름도 필암리로 바뀌었다.
  • 1672년 (현종 13년) 박세채가 행장(行狀)을 지었다.
  • 1675년 (숙종 원년) 김수항이 묘표(墓表)를 지었다.
  • 1682년 (숙종 8년) 송시열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다.
  • 1771년 (영조 47년)에 전라도 유생 양학연(梁學淵) 등이 상소하여 그를 문묘에 종향할 것을 청하였으나 통하지 못하였다.
  • 1777년 (정조 원년) 김종후가 묘지명(墓誌銘)을 지었다.
  • 1786년 (정조 10년) 2월 제자이자 사위인 고암 양자징을 필암서원에 추배 하였다.
  • 1786년 (정조 10년) 가을 8월 팔도 유생 박영원(朴盈源) 등이 소를 올려 문묘에 종향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를 입지 못하였다.
  • 1796년 (정조 20년) 9월 17일 관학 유생 홍준원(洪準源) 등이 상소하여 문묘에 종사할 것을 거듭 청하니, 정조는 마침내 윤허하면서 「선정 문정공 김인후는 곧 우리 동방의 주자(周子)이다.」하였다. 조선 유학의 최고 영예 자리인 문묘에 종사되고, 동방 18현의 한 사람이 되었다.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에 가증되고, 불천위의 은전을 받았다.
  • 그해 10월 시호를 '문정(文靖)'에서 '문정(文正)'으로 개시하였는데 '도덕박문(道德博聞)을 문(文)이라 하고, 이정복인(以正服人)을 정(正)이라' 하였다.
  • 필암서원1871년 (고종 8년) 흥선대원군서원 철폐령 때 미 훼철된 전국의 47개 서원중 하나이며, 일제강점기나, 6.25 사변때에도 피해를 면한 서원으로, 1975년 4월 23일 사적 제242호로 지정되었다.

평가

  • 그의 평생에 걸쳐 인종에 대한 절의와 출처의 올바름은 후대 사림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 조선 중기 도학자로 「호남 남쪽에는 김인후, 북쪽에는 이항, 영남에는 이황, 충청에는 조식, 서울에는 이이가 버티고 있었다.」는 역사적 평가에서 보여주듯 그의 학덕은 크고 넓었다.
  • 이이는 그 출처의 올바름은 해동에서 더불어 비교할 이가 없다 일컬으며, 『청수부용(淸水芙蓉) 광풍제월(光風霽月)』 (맑은 물에 뜬 연꽃이요, 비 갠 뒤의 맑은 바람과 달)이라 칭송하였다.
  • 송천 양응정은 「후지( 김인후 字)는 오늘날의 안자(공자의 제자)이다.」라고 하였다.
  • 송시열은 『우리 나라 인물 중에서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겸하여 탁월한 이를 그다지 찾아볼 수 없으며 이 세가지 중 한 두 가지에 뛰어나는데,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도와 선생을 종생하여 이 세 가지를 다 갖추게 되었다.』고 칭송하였다.[11]
  • 학자 군주인 정조(正祖)는 「학문의 조예가 초절하고 기상이 호매하였으며, 《대학》과 《서명》의 은미하고도 깊은 뜻을 처음으로 밝혀내었고, 경을 생활화함으로써 마음을 바르게 하는 공부와 도학 연원의 정통을 이어받아 실로 유학의 종장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 정조문묘 배향 교서에서 『조선 개국 이래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모두 갖춘 이는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라며, 『하서는 해동의 염계(濂溪)요, 호남(湖南)의 공자(孔子)이다.』고 극찬하였다.
  • 조선 중기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본격화 되어 사림 정치가 뿌리 내려가던 시기에 조선 사회 발전의 사상적 초석을 마련한 도학자로, 실천적 지성의 대표 인물로 후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일화 (전설)

  • 어릴 적에 박상이 그를 보고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자고로 지혜와 재주가 뛰어난 아이는 좋게 마치는 자가 없는데, 오직 이 아이는 당연히 영종할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그 말이 증험되었다.
  • 8살 때 전라 관찰사 조원기가 그가 신동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를 전주 감영으로 불러 함께 시구(詩句)를 주고받으며 연구를 지었는데, 그의 뛰어난 재주와 높은 수준의 글 솜씨를 보고 『장성 신동, 천하문장』이라 칭찬했다.
  • 9살 때 기준이 그의 인물됨을 칭찬하며 『참으로 기특한 아이다. 마땅히 우리 세자의 신하가 되겠다.』고 하면서, '내사필(內賜筆)' 한 자루를 선물로 주었다. 그는 그 뜻을 알고 항상 잘 간직하여 보배로 삼았다. 이때 복재가 말한 세자는 인종으로 훗날 그는 인종의 스승과 신하가 되었다.
  • 10살 때 전라감사 김안국을 찾아가 『소학』을 배웠는데, 김안국은 그를 보고서 『자신의 소우다.』라 하며, 그 뒤로도 늘 중국 고대 하은주 시대의 『삼대 인물』이라 극찬하였다.[12]
  • 신흠의 문집 『상촌집』에 『공이 죽은 후 몇 년 지나서 이웃에 사는 '김세억'이라는 사람이 병으로 죽었는데, 어느 날 다시 살아나 그 아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어서 천제가 있는 자미궁이란 곳에 갔더니, 그곳의 자미선으로 있는 그가 명부를 보며, “올해는 네 수명이 다하지 않았는데 네가 잘못 왔구나. 나는 네 이웃에 살던 김 아무개다”.」라고 말하고는 종이에다가 글을 써 주었는데 그 글은 이랬다. “이름은 세억이요, 자는 대년인데, 구름 헤치고 천상에 와 자미선을 찾았네. 훗날 77세 되면 또다시 만나리니, 세상에 돌아가 이 말 함부로 전하지 말라.”고 하였다.』 세억이라는 사람은 한자를 몰랐지만, 능히 이 글을 세상에 전했다.[13]
  • 붓바위(필암) 전설[14]

가족 관계

  • 조부 : 금구훈도 김환
  • 조모 : 직산 김씨
    • 부 : 의릉참봉 김령
    • 모 : 옥천 조씨
      • 부인 : 증정경부인 여흥 윤씨
        • 장자 : 김종룡
        • 계자 : 자여찰방 김종호

후손

  • 근대사의 거목으로 고려대학교 설립하고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지낸 인촌 김성수와 영원한 법조인의 사표로 일제강점기 인권변호사와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삼양사를 설립한 기업인 수당 김연수, 한국 지성의 거목으로 고려대 총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남재 김상협등이 후손이다.

관련 문화재

관련 시설

같이 보기

미디어에서

각주

  1. 참찬 송순이 일찍이 현감 오겸(吳謙)과 더불어 말하기를 신묘년의 사마 방목에 미치자 대곡(大谷) 성운(成運),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을 내리 세니, 오겸(吳謙)이 크게 놀래며 「한 방(榜) 안에 어진 자가 어찌 그리 많은가.」라고 하였다.
  2. ≪퇴계언행록≫에 이르기를 퇴계(退溪)가 돌아 갈 때 ‘증별시(贈別詩)’를 써 주었는데, 「부자(夫子)는 영남의 수재로다. 문장은 이백(李白)·두보(杜甫)요. 글씨는 왕희지(王羲之)·조맹부(趙孟頫)로 구료」 하였다. 후일 퇴계(退溪)가 「기묘의 변을 겪은 뒤라서 사람들이 다 학문하는 것을 꺼리고 싫어하며 날마다 희학으로 일 삼는데, 선생은 씻은 듯이 스스로 새롭게 나가 동정과 언행을 하나같이 법도에 따르니 보는 자가 서로 손가락질하며 비웃었는데, 더불어 교유한 자는 오직 '김하서' 한 사람일 뿐이었다.」라고 하였다.
  3. 함께 뽑힌 열세 사람은 『간재(艮齋) 최연(崔演), 십성당(十省堂) 엄흔(嚴昕), 추파(秋坡) 송기수(宋麒壽), 송재(松齋) 나세찬(羅世纘), 국간(菊磵) 윤현(尹鉉), 죽계(竹溪) 임열(任說), 지산(芝山) 이황(李滉), 금호(金湖) 임형수(林亨秀), 우암(寓庵) 김수(金澍), 상덕재(尙德齋) 정유길(鄭惟吉), 급고재(汲古齋) 이홍남(李洪男), 호학재(好學齋) 민기(閔箕),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이다.
  4. 1519년 (중종 14년) 기묘 명현 : 조광조·김식·김정·기준·윤자임·한충은은 귀양 같다가 사형 당하고, 김구·박세희·박훈·홍언필·이자·최산두·유인숙는 유배를 당하고, 안당·이장곤·김안국·김정국·김세필·정광필·신명인 등은 사림을 두둔하다 파면을 당했다.
  5. [이종범의 호남인물열전] [36] '묵죽도'에 새겨진 도덕문명정치의 꿈. 조선일보(2012. 08. 20) [1].
  6. [이종범의 호남인물열전] [39] 어두운 시대, 영화 거부하며 술과 공부…조선일보(2012. 09. 3) [2].
  7. 정미사화(丁未士禍)라고도 한다. 이때 송인수 · 임형수 등은 사사되고, 이언적, 노수신 · 유희춘 · 백인걸 등 20여 명이 유배되었다. 특히 임형수와는 사가독서 계원으로 둘도 없는 친구였다. <도임사수 원사 작단가(悼林士遂 寃死 作短歌)>란 시조를 지어 그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했다.
  8. 2007년도 제3회 선비문화 장성포럼 발표자료(오종일 전북대 교수) "하서 김인후의 삶과 그 학문" 성균관청년유도회 전라남도본부(2007. 9. 27) [[3]].
  9. 2007년도 제3회 선비문화 장성포럼 발표자료(오종일 전북대 교수) "하서 김인후의 삶과 그 학문" 성균관청년유도회 전라남도본부(2007. 9. 27) [[4]].
  10. 2007년도 제3회 선비문화 장성포럼 발표자료(오종일 전북대 교수) "하서 김인후의 삶과 그 학문" 성균관청년유도회 전라남도본부(2007. 9. 27) [[5]].
  11. 《우암 송시열 찬》 『하서 김인후 신도비명』
  12. 문화 일보(2016년 7월 16일) 『6세 때 즉석 詩 짓던 神童… 각별했던 인종 죽자 벼슬도 거부』[6]
  13. 윤홍식·오병문, 2006, 조선선비들에게 배우는 마음 챙김의 지혜, 봉황동래.
  14. 장성군 『전설과 설화』[[7]]
  15. 한국관광공사[[8]]
  16. 문화재청[[9]]
  17. 문화재청[[10]]
  18. 한국관광공사[[11]]
  19. 문화재청[[12]]
  20. 문화재청[[13]]
  21. 광주 북구 운암동328-16 문화예술회관 사거리 ↔ 북구 태령동1 (11km)
  22. 장성군 남면 삼태리 442-22 (광주광산 경계) ↔ 장성군 북이면 원덕리 산1-2 (37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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