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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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재(胡才, ? ~ ?)는 중국 후한 말의 장군이다. 본래 백파적이었는데 어려움에 처한 황제 호위에 공을 세워 관직을 받았다.(헌제 탈출전) 중앙으로 진출하지 않고 하동군에 그대로 남았다.

생애[편집]

백파적(白波賊)이었다. 195년(흥평 2년) 11월(음력, 이하 모두 음력), 장안을 나와 동쪽으로 향하던 헌제 일행은 여러 사건으로 인해 이각, 곽사, 장제의 습격을 받았다. 이를 호위하던 흥의장군(興義將軍) 양봉과 안집장군(安集將軍) 동승은 큰 피해 끝에 간신히 조양간(曹陽澗)에 닿아서는 하동군에 있던 옛 백파적 이락, 한섬, 호재, 그리고 남흉노의 거비(去卑)[1]에게 구원을 청했다. 이에 힘을 합쳐 이각 등을 물리치고 수천 명을 참수하였다.

섣달, 다시 추격해온 이각 등에게 대패해 많은 이가 죽고 홍농군 섬현(陝縣)까지 내몰렸다. 호분(虎賁)과 우림(羽林)은 채 백 명도 남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십여 장(丈) 높이절벽을 내려가더라도 야음을 틈타 황하를 건너기로 하였다. 혹자는 기어 내려오다가 혹자는 뛰어내리다가 죽거나 다쳤으며, 가까스로 내려온 자들은 저마다 에 오르려 발버둥 쳤다. 동승과 이락이 매달린 손가락들을 내리쳐서야 배가 겨우 나아갈 수 있었다. 잘린 손가락들이 나뒹굴고, 동사하거나 익사한 이들도 허다하여 그 참혹함은 이루 형언할 수가 없었다. 비록 수십 인밖에 남지 않았지만 마침내 하동군 대양현(大陽縣)을 거쳐 안읍현(安邑縣)에 당도하였다. 하내태수 장양을, 하동태수 왕읍(王邑)이 비단을 공급하였다. 한섬·호재·이락은 모두 장군직에 가절(假節)을 받았으며 삼공처럼 개부하였다.[2]

196년(건안 원년), 동승과 장양은 환도에 적극적이었던 반면 양봉과 이락은 미온적이었다. 2월, 동승은 한섬의 공격을 받고 야왕현(野王縣)의 장양에게로 피신했다. 호재와 양봉이 한섬을 치려다 헌제의 만류에 그만두었다. 5월, 양봉·이락·한섬도 환도에 동의해 낙양으로 길을 나섰다.[3] 호재와 이락은 하동군에 남았다. 이후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이에게 살해당했다.

삼국지연의[편집]

사서가 아닌 소설삼국지연의》에서는 제13회에만 짤막하게 등장해 헌제 탈출전에서 전사하는 것으로 처리되었다.

각주[편집]

  1. 《후한서》동탁전, 《삼국지》무제기, 원굉(袁宏)의 《후한기》에서는 우현왕. 《후한서》헌제기에서는 좌현왕
  2. 이때의 관직명은 사서마다 제각각이라 전모를 알 길이 없다. 《삼국지》 동탁전에서는 한섬이 정동장군(征東將軍), 호재가 정서장군(征西將軍), 이락이 정북장군(征北將軍)을, 《후한서》 동탁전에서는 호재만이 정동장군을, 《후한기》 28권에서는 호재가 정북장군, 이락이 정서장군, 한섬이 정동장군을 받았다고 하였다.
  3. 《후한기》29권

참고 문헌[편집]

  • 후한서》72권 열전 제62 동탁
  • 《후한서》9권 본기 제9 효헌제기